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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최근 신경과학, 뇌과학, 생태학 책들을 보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 있는가? 성선설, 성악설? 그렇게 인식을 가두는 순간 시야가 갇혀버리기도 한다. 유전자, 뇌과학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그렇게 판단하는 순간 과학이 아니라 종교가 된다. 좀더 넓고 자유로운 판단을 하고 싶다면 이렇게 환원의 욕구를 제어하는 것이 좋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팩트만....엮으려 하지 말고... ...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서로 공약수를 나누는 길이다. 자기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욕심이 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얇지만 얇지 않은 책들에 푹 빠져 있다. 요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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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모들은 부모의 입장을 떠나 사고할 수 있을까? 떨어질 수 있을까? 불안함이 뒤따라붙어 여전히 내 자식은 우리자식은 좀더 편하기를 바란다. 불안에 강요된 공모의 문화, 영재로 영재여야 하고 잘해야 한다. 아이때까지만 똑똑하다. 공부에 물리는 사회, 거들떠 보기도 싫은 사회는 아주 사소하게 조장되고 그 근거없음으로 시작해서 저 높은 빌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는 무엇을 해야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편안하고 안락함. 그래 그 뿐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 안락하고 편안함을 지키기가 너무 어렵다. 부모 자신에게도 묻고, 아이들에게도 서로 되물을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을까?  무엇이 되고 싶은가? 왜 되고 싶은가? 되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곧 책으로 나온다고 한다. 지난 기억의 한켠에 있던 소책자를 내밀어 본다. 우리사회가 스스로 얼마나 늙어버린 것인지? 자문자답해 볼 필요도 있겠지... ...

 

 


 

 

 

 

 

오늘 내가 이야기하기를 원하는 상대는 바로 바로 청년들이다. 나이든 사람물론 마음과 이성이 늙은 사람을 의미한다은 이 소책자로 그들의 눈을 피곤하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이 18세 혹은 20, 여러분이 여러분의 훈련이나 교육을 막 끝마쳤던가, 혹은 여러분이 이제 막 삶을 시작하려고 새로운 삶의 첫 단계에 들어섰다고 가정해 본다. 여러분은 누군가가 당신에게 강요한다고 해서 미신을 믿지는 않을 것이고, 여러분은 지옥을 두려워 하지도 않으며, 그리고 목사나 신부의 호언장담을 들으러 가지도 않는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더 나아가서 공원에서 그들의 바지나 원숭이 같은 얼굴을 과시하는, 쇠퇴하는 사회의 슬픈 산물인 맵시꾼들은 어떤 대가를 치루고라도 쾌락을 쫓으려 하지만, 반대로 여러분들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 때문에 나는 여러분 청년들에게 호소한다.

 

 

 

여러분에게 던질 첫 번째 질문은 여러분이 자신에게 종종 물었던 내가 무엇이 될 것인가?”하는 것이다. 사실 사람이 젊었을 때, 사회의 비용으로 무역 또는 어떤 학문을 공부한 것은 그가 획득한 학식을 약탈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지성, 능력과 지식을 활용하여 오늘날 비참과 무지의 나락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도울 날이 있을 것을 꿈꾸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 악덕으로 침식된 타락한 인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분은 그러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가? 좋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자.

 

 

 

나는 여러분이 어떠한 계층에서 태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 운명에 행운이 깃들어 여러분은 과학적 연구를 해 왔는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의사, 변호사, 문학가, 혹은 과학자가 되려는지도 모른다 : 여러분 앞에 폭넓은 분야가 펄쳐져 있다. 여러분은 광범위한 지식과 훈련된 지성으로 삶을 시작할 것이다. 혹은 아마도 여러분의 학문적 지식이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운 작은 것에 국한되는 정직한 노동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힘들게 수고하는 노동자들이 체험하여 얻는 삶의 직접적 지식의 장점을 가졌다.

 

 

 

나는 이제 첫 번째 가정을 접어두고 두 번째 가정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나는 당신이 학문적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가정한다. 당신이 의사가 되기를 원한다고 가정해보자.

 

 

 

내일 누더기 옷을 입은 여자가 당신을 아픈 여자에게 모셔가기 위해 올 것이다. 그가 당신을 통행자의 머리 위로 반대편 이웃이 악수라도 할 수 있을 만큼의 가난한 좁은 뒷골목으로 데려갈 것이다. 당신은 작은 등불이 깜박거리는 계단을 하나, , 셋 올라가고, 그리고 차갑고 어두운 방에 더러운 이불을 덮고 보료 위에 누워 있는 아픈 여자를 발견한다. 흙빛의 창백한 이이들이 엷은 옷을 입고 떨면서 큰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남편은 그의 평생동안 하루 12시간 혹은 13시간 일해 왔고, 이제 그는 3개월 동안 실직이 된 상태이다. 그의 직업에서 실직은 흔하다. 매년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전에는 그가 실직되었을 때, 그의 부인이 파출부일로 가계를 도왔다. 하루에 30 수우(프랑스 화폐단위)를 받고 당신의 셔츠를 빠는 것 등의 일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두 달간 아파 누워서 그 가족은 이제 참담한 곤경에 빠져 있다.

 

 

 

의사인 당신은 그 아픈 여자를 위해 어떻게 처방을 내릴 것인가? 한 눈에 그녀의 질병이 영양부족과 신선한 공기의 결핍으로 인한 빈혈증임을 알았을 때 당신은 어떤 처방을 할 수 있겠는가? 매일 좋은 식사를? 시골에서 약간의 운동을? 환기가 잘되는 침실을 당신이 처방할 것인가?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만약 그녀에게 그러한 것이 제공되었더라면, 당신의 충고를 기다리기 위해 그렇게 누워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친절한 마음, 훌륭한 언변, 정직한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 그 가족은 당신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줄 것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칸막이 저편의 여자가 가난에 찌든 냉소주의자라는 것, 계단을 좀 내려가면 모든 아이들이 열이 있다는 것, 1층 여자가 내년 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옆집에는 상황이 더욱 나쁘다는 이 모든 것들을 얘기해 줄 것이다.

 

 

 

이 모든 환자들에게 당신은 무지하다고 말할 것인가? 그들에게 훌륭한 식이요법, 기후(환경)의 변화, 과로를 피할 것 등을 추천할 것인가? 당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기는 하지만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슴 아픈 채로 나오며, 당신의 입술에 저주를 담을 것이다.

 

 

 

다음날 당신이 아직도 그 오두막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 당신의 부인이, 전하기를 어떤 하인이 당신으로 모시러 왔었다는 것과, 이번에는 마차를 갖고 모시러 올 것임을 알려 준다. 그는 훌륭한 집의 소유자이고, 그의 처는 그녀의 전 생애를 의상, 방문, 무도회, 어리석은 남편과의 말다툼으로 보내고 불면의 밤 때문에 병이 났다. 당신의 친구는 그녀를 위해 좀 덜 불합리한 생활습관, 저지방 다이어트, 신선한 공기, 적절한 노동, 침실에서 약간의 미용체조를 처방해 주었다.

 

 

 

한 사람은 그녀의 생애동안 충분한 음식과 충분한 휴식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으며, 다른 한 사람을 태어난 이래로 노동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수척해진다……

 

 

 

만약, 당신이 아무 것에나 지신을 적응시키는 가장 경멸할 만한 순간에도 부드러운 한숨과 맥주 한 잔으로 자신을 달래는 개성 없는 인간들 중의 하나라면, 그렇다면 당신은 점차 그러한 대조에 익숙해지게 될 것이다. 쾌락을 선호하는 동물을 본성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쾌락추구의 흐름의 대열에 참여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진실한 인간이라면, 만약 당신 안의 동물성이 아직 지성을 말살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서 자신에게 말할 것이다. “이것이 계속되어서는 안 돼.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우리는 그것을 예방해야만 해. 약간의 좋은 생활과 지적인 발달이 환자와 질병의 반을 감소시켜줄 것이다.” 약은 악마에게나 줘라! 신선한 공기, 좋은 음식, 과로하지 않을 것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어떻게 시작해야 할 것인가를 알려준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외의 모든 의사란 직업은 기만과 술수에 불과하리라.

 

 

 

그날에 당신은 사회주의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사회주의(아나키즘)를 좀더 철저하게 알기를 원하게 되고, 만약 당신이 자연주의적 사회주의자의 서막인 이 사회적인 문제들을 연구하게 된다면, 당신은 서서히 우리들(아나키즘)의 대열에 끼게 될 것이고, 그리고 사회적 혁명을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일하고 있는 그대로, 당신도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 실천적인 일은 악마에게나 맡겨라! 천문학자, 심리학자, 화학자로서 나는 나 자신의 학문에만 전념할 것이다. 순수과학이 만약 미래 세대만을 위한 것이라면, 항상 어떤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당신이 학문에 전념함으로서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이해하도록 우선 노력해보자. 그것은 다만 쾌락인가의심할 바 없이 상당한 쾌락이다우리들의 정신적 능력을 이용해서 자연의 신비를 연구함으로써 주어지는 상당한 쾌락인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인생을 유쾌하게 지내기 위해 과학을 추구하는 과학자가 포도주를 마심으로 만족을 얻는다면, 만족을 추구하는 술주정뱅이와 어떻게 다른지 나는 묻는다. 의심할 바 없이 과학자는 그의 즐거움을 좀더 현명하게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 훨씬 더 깊고 큰 지속적인 기쁨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이다! 술주정뱅이와 과학자는 둘 다 똑같은 이기적인 목적, 개인적 만족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당신은 이런 이기적인 삶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에 종사함으로써 당신은 인류를 위해 일하고 싶어하고, 이러한 생각이 당신의 탐색을 지도해 줄 것이다.

 

 

 

매력적인 인생! 우리가 처음으로 학문을 시작할 때 한 순간이라도 이러한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만약 당신이 참으로 인류를 염려한다면, 당신이 참으로 당신의 학문에서 인류의 번영을 꾀한다면, 굉장한 질문이 야기될 것이다. 당신의 비판적인 정신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과학은 소수의 삶을 더 기쁘게 만들 뿐이지 인류 전부에게는 미칠 수 없는 사치한 종목임을 당신은 단번에 관찰해야만 한다.

 

 

 

1세기 전에 과학은 우주의 기원에 관한 건전한 가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섭렵하였거나 혹은 비판적인 참된 과학적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가? 야만인 같은 편견과 미신을 소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몇 천명은 방향을 잃어버리고 종교적 사기꾼의 꼭두각시로서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혹은 과학이 신체적 도덕적 건강을 위한 이성적 기초를 세우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살펴보자. 과학은 우리에게 우리가 어떻게 신체의 건강을 유지할지를 말해 주고, 그리고 도덕적 지적 행복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들 책 속에 사장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왜 그런가? 왜냐하면 오늘날 과학이 몇몇 특권층 사람만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 임금 노동자와 자본주의 주인들의 두 계층으로 나누어진 사회가, 이성적 삶의 원칙의 모든 가르침을, 인류의 10분의 9를 위해 아픈 아이러니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더 많은 예를 들 수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단하게 끝내려고 한다. 다만 파우스트의 책장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먼지 가득한 창문이 그의 책으로 가득한 책장에 햇빛을 통과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둘러보라. 매순간마다 이러한 생각을 지지하는 신선한 증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더 이상 과학적 진실과 발견을 축적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무엇보다도 이미 얻은 진실을 퍼뜨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고, 또 그것들을 공동의 소유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인류가 그것을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과학은 더 이상 사치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기초가 될 것이다. 정의가 이것을 요구한다.

 

 

 

더욱이 고학의 바로 그 관심이 이것을 요구한다. 과학은 그 진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을 때 비로소 참된 진보를 하게 된다. 하른과 클라우슈스가 오늘날 공식화시킨 열역학 이론은 비록 19세기에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학 지식의 전파가 그것을 대중이 받아들이도록 할 때까지 80년 동안 학문적 기록에서 사장되어 있었다. 에라스무스 다윈의 종의 변이에 대한 이론이 그의 손자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리고 대중이론의 압박없이 학문적 과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기까지 3세대가 흘러가야만 했다. 과학자는 시인이나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항상 그가 활동하고 가르치는 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이러한 생각을 고취하게 되면 당신은 다른 대부분의 인간들이 과학자들의 5세기 혹은 10세기 이전의 상태확립된 진리를 완성할 수 없는 노예나 기계의 상태에 머무르는 반면에, 과학자들이 과학적 진실들에 가득 둘러싸여져 있다는 것을 비난하는 상태에서, 급진적인 변화가 주어져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이 폭이 넓고 깊은 인간적인, 그리고 심오하게 과학적인 생각을 고취하게 되는 날, 그날에 당신은 순수과학에 대한 당신의 취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변화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일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의 탐색에다 당신의 과학적 연구를 이끌어 준 객관성을 부여하면, 당신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의 대의명분을 채택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궤변론적인 추론을 그만 두게 될 것이고, 그리고 우리들에게 동참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 몫을 가진 소집단을 위해 일하는데 지쳐서, 당신은 당신의 정보와 헌신을 억압받는 자를 위해 곧바로 바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의무가 성취된다는 느낌과 당신의 감성과 행동간에 진정한 조화가 당신이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힘으로 드러날 것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언젠가교회들이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그것은 멀지 않은 장래에 올 것이다당신이 그것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그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과학은 그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 연대된 노동자들의 강력한 힘과 집단 및 과학적 노동으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어서 진보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진보는 오늘날의 느린 진보가 초보자의 기초연습이었던 것처럼 보이게끔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과학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기쁨은 우리 모두를 위한 기쁨이 될 것이다.

 

 

 

 

 

나머지 글!! 콕!! 

 

당신이 이제 법률 공부를 마치고 변호사가 되고자 한다면, 아마도 당신 역시 당신의 미래 활동에 대해 약간의 환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나는 당신이 이타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고귀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가정한다. 당신은 아마 생각할 것이다. 나의 삶을 부정에 대한 끊임없는 항거에 바치는 것이 어느 직업보다 더 숭고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과 당신이 선택한 직업에 자신을 갖고 인생의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좋다. 법의 보고서를 사심없이 한 번 살펴보고 실제 생활이 당신에게 뭘 말해 주는지 한번 고찰해 보자.

 

여기에 한 부유한 토지소유자가 있다고 하자. 그의 소작인이 세를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를 쫓아낼 것을 요구한다. 법적으로 이 사건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소작료 지불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전답을 빼앗겨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토지소유주는 그가 소작세 받은 것을 쾌락 추구에 탕진하였다. 소작인은 항상 일만 하였다. 토지소유주는 그의 토지를 비옥하게 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땅은 50년만에 3배로 값이 올랐다. 철도건설, 새 고속도로 건설, 택지의 배수시설, 황무지 건설과 공유지의 사유화 등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땅값 상승의 상당 부분에 헌신한 소작인은 파산을 하였다. 그는 관리인의 손에 넘어가고, 빚더미에 앉게 되어, 더 이상 땅주인에게 아무 것도 지불할 수가 없게 되었다. 법이 부자의 편에 있음은 명백하다. 땅주인이 옳다고 한다. 그러나 정의감이 법적인 허구에 의해 아직 질식되지 아니한 당신은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그 농부가 그 땅으로부터 쫓겨나야 하는 것에 만족할 것인가? 그것이 법이 주장하는 것이다혹은 당신은 그 땅주인이 농부에게 농부의 수고로 인해 땅값이 올라간 만큼 농부에게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이것이 평등이 요구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느 편을 들 것인가? 법의 편에서 정의를 거역할 것인가? 혹은 정의의 편에서 법을 거역할 것인가?

 

혹은 15일간 노동자들이 예고 없이 파업을 할 때, 그때 당신은 어느 편을 들 것인가? 위기의 순간에 가공할만한 이익을 취한 고용주를 편드는 법의 편에 설 것인가? 혹은 그들의 처자식이 여위어 가는 걸 보며 하루에 2.5프랑만을 지불받은 노동자의 편에 서서 법을 거역할 것인가? 당신은 계약의 자유란 허구 편에 설 것인가? 혹은 당신은 좋은 성찬을 먹는 사람과 그리고 먹기 위해 그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사람 사이 강자와 약자의 사이 의 계약이 아예 계약이 될 수 없다는 평등을 주장할 것인가?

 

또 다른 경우를 살펴보자. 파리에서 한 남자가 식육점 가까이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는 비프스테이크를 훔쳐서 그것을 갖고 달아났다. 체포해서 심문한 결과 그는 실직 노동자임이 판명되었다. 그와 그의 가족이 4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였다. 식육점 주인은 그를 용서해 줄 것을 요청받지만 그러나 그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다! 그는 고소를 하고 그 실직 노동자는 6개월형을 받는다. 눈먼 정의의 여신이 그렇게 원한 것이다. 당신이 매일 이와 비슷한 판결을 들을 때 당신의 양심은 법과 사회에 대한 반항을 느끼지 않는가?

 

혹은 다시, 어린시절부터 학대받고 조롱받은 이 남자가 자라면서 한 마디 동정의 말도 듣지 못했고, 그리고 끝내는 일백수우를 훔치기 위해 그의 이웃을 살인함으로써 그의 생애를 마치게 된 이 사람에 대해 법의 집행을 요구할 것인가? 당신은 그가 범죄행위 이상으로 병들어 있음을 잘 알고, 또 이러한 경우에 우리 사회가 그의 범죄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당신이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야 한다는 것을 요구할 것인가? 혹은 그 대신에 20년간의 징역을 요구할 것인가?

 

당신은 분노의 순간에 제분소에 불을 지른 직공이 감옥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왕관을 쓴 암살자에게 총을 쏜 사람이 유죄라고 주장할 것인가? 바리케이트 뒤에 미래의 깃발을 꽂은 반정부 운동가들에게 총을 쏘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만약 당신이 배운 것을 되풀이 하지 않고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이 법을 분석하고 법의 기원을 가리는 허구의 연막을 벗긴다면, 이 법의 허구는 강자의 권리가 되고 또 피의 역사로 얼룩지게 만든 인류에게 전승된 모든 독재자들을 위해서 계승되어 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법에 대한 당신의 경멸을 심각할 것이다.

 

당신이 법률의 봉사자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당신은 매일 양심의 법에 반대하고 양심을 깍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불분명하게 계속될 수는 없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의 양심에 대해 침묵하고 악한이 되거나, 혹은 전통을 깨뜨리고 모든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부정을 폐지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사회주의자가 되고,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을 산업에 적용시킴으로서 노동자들의 운명을 개선하려는 꿈을 가진 젊은 엔지니어인 당신에게 얼마나 슬픈 환상이 기다리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젊은 에너지를 가파른 절벽을 깍아내리고 커다란 산에 터널을 만들어서 자연으로 나누어진 두 나라를 하나로 연결하는 철도계획에 바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일이 시작되었을 때 전노동자들 가운데 이 힘든 터널 작업에서 질병와 궁핍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또 몇몇 사람은 몇 푼의 돈과 결핵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당신은 그 작업의 곳곳에서 사악한 탐욕이 가져온 인간 시체의 흔적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철로가 완성되었을 때 그것이 침입자들의 포병대를 위한 물자수송로로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된다.

 

당신은 생산을 단순화시키기 위한 한 발명품을 만드는데 당신의 젊음을 바친다. 그리고 충분히 수면도 취하지 못한 수많은 노력 뒤에 마침내 이 가치 있는 발명을 성취하게 되었다고 하자. 당신은 그것을 작업장에서 실제로 사용한다. 그 결과가 당신의 희망을 깨트려 버린다. 왜냐하면 10, 20, 혹은 수천명이 실직하게 되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대부분은 어린아이이고 나머지 노동자들은 기계적인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3, 4, 10명의 자본주의자가 재산을 모으고는 샴페인을 가득 들이킨다. 그것이 당신의 꿈이었던가?

 

마지막으로 당신은 최근 산업의 진보를 연구한다. 그리고 재봉틀의 발견으로 재봉사가 아무 것도 벌지 못한다는 것, 절대적으로 아무 것도 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이아몬드 시추기에도 불구하고, 성 고타르(St. Gothard)의 노동자들은 관절이 마비되어 죽어간다. 지파르(Giffard) 승강기 앞에서 석공과 일일 노동자가 실직이 된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기술을 인도해준 독립정신을 갖고 사회적 문제를 토론한다면, 당신은 필연적으로 사유재산과 임금노동제 하에서는 모든 새로운 발명이 노동자들의 복지를 향상시키기는커녕, 그의 노예상태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그의 노동을 더욱 헐값으로 만들고, 약간이라도 여유있었던 노동을 더욱 숨가쁘게 만들고, 그의 불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자는 바로 다름 아닌 이미 그 자신을 위해 모든 쾌락을 가진 자본가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당신이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될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아마 그럴싸한 논쟁으로 당신의 양심을 침묵시킴으로써 묵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화창한 날에 당신은 당신의 젊은 시절의 정직한 꿈에 안녕을 고하고, 당신 혼자 힘으로 기쁨과 쾌락을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얻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당신은 개발자의 진영으로 들어갈 것이다. 혹은 당신이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당신 자신에게 말할 것이다 : “아니야, 지금은 발명을 위한 시간이 아니야, 우선 먼저 생산 체계를 바꾸도록 일해보자, 사유재산이 폐지되면, 모든 새로운 산업의 진보가 인류 모두에게 혜택을 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기계가 되어 버린 노동자 대중이 연구와 기술로 강화된 지성을 산업에 적용하는 생각(사고)하는 인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기계적 생산이 더욱 앞서가게 되고 50년 내에 우리가 오늘날 꿈꾸어보지도 못한 것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학교 교사에게는 내가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의 직업을 지루한 잡일로 여기지 아니하고, 유쾌한 어린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생기있는 시선과 행복한 웃음 가운데서 편안함을 느끼고 이들 작은 머리 속에 그 자신이 어렸을 때 품었던 인류에 대한 생각을 심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나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나는 종종 당신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또 나는 무엇이 당신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지를 안다. 오늘날 당신의 생도가 라틴어에 능숙하지 못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마음을 갖고 있고, 열정적으로 윌리엄 텔의 이야기를 낭송하기도 한다. 그의 눈은 반짝이고, 그는 그곳의 모든 독재자를 제거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러한 열정으로 쉴러의 정열적 싯귀를 읊조린다.

 

노예 앞에서, 그가 그의 쇠사슬을 부러뜨릴 때,

 

자유인 앞에서, 떨지 말라.

 

그러나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엄마, 아빠, 삼촌이 목사나 경찰에게 그가 존경을 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하게 꾸중을 한다. 그들은 그에게 전제, 권위에 대한 존경, 복종을 가르친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쉴러를 옆으로 비켜 놓고 세상을 사는 법을 읽게끔 만든다.

 

그리고 어제 다시 당신은 당신의 훌륭한 생도들이 모두 나쁘게 변했다는 것을 듣게 된다. 사람은 유니폼을 꿈꾸기만 한다 : 또 다른 사람은 그의 고용주와 연합해서, 노동자들에게서 빈약한 임금을 빼앗는다 : 그리고 이러한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품었던 당신은 이제 삶과 이상 사이의 슬픈 대조를 생각하게 된다.

 

당신은 아직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 2년이 지나, 실망과 실망을 거듭한 끝에, 당신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을 선반에 올려 두고, 텔은 분명히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결국 조금 정신이 나갔다고 말할 것이다 : 또 시가 특히 하루 종일 복리법에 관해 가르친 후에 난로가에서 읽기는 최상의 것이지만, 그러나 시인은 항상 구름 속에 있고, 또 그의 시는 삶이나 학교 검열관의 다음 방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혹은 한편 젊은 시절의 꿈이 성숙한 사람의 확고한 신념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은 학교 안에서 또는 바깥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폭넓은 인간적인 교육을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것이 불가능함을 보고, 당신은 부르조아 사회의 근본적인 토대를 공격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교육부에 의해 해고되고, 학교를 떠나 우리들에게로 와서 동참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보다 나이는 많지만 덜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지식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인류가 무엇을 해야 하고,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칠 것이다. 당신은 사회의 완전한 변화를 위해서 사회주의자와 함께 일하게 될 것이고, 평등, 진정한 형제애, 세계의 끊임없는 자유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젊은 예술가, 조각가, 화가, 시인, 음악가인 당신은, 당신의 선조에게 영감을 고취시켰던 신성한 불이 오늘날의 사람에게는 부재함을 관찰하지 못하는가? 예술이 일반적이고 평범한 영역임을 보지 못하는가?

 

그것이 다를 수 있겠는가? 르네상스의 걸작들을 위해 참조되었던 고대 세계를 재발견하는 기쁨, 자연의 원천에 의해 다시 불붙는 기쁨이 우리 시대의 예술을 위해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혁명적 이상이 지금까지 그것을 차갑게 버려 두었고, 이상이 부족하여 현실 속에서 그 기쁨을 찾는다. 식물 앞에서 이슬방울을 칼라로 사진 찍을 때, 소다리의 근육을 모방할 때, 혹은 하수구의 숨막히는 오물이나, 창녀의 침실 따위를 운문으로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 등에서 기쁨을 찾게 된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고 당신은 말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잇다. 만약 당신이 소유하고자 하는 신성한 불이 연기를 내는 심지보다 못한 것이라면 그러면 당신이 하고 있던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예술은 빠르게 가게장식인이나 삼류 오페레타의 연예소설 혹은 크리스마스 기념행사 이야기나 조달업자로 타락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당신들은 이미 그러한 단계까지 충분히 타락해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마음이 인류애의 사랑으로 고동친다면, 만약 진정한 시인처럼 당신이 삶에 대한 귀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의 둘레에 파도치는 이 고통의 바다 가운데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자들, 광산에서 쌓여진 시체들, 바리케이트 위에 더미로 놓여진 손발이 잘려진 시신들, 시베리아 벌판(눈판)이나 열대섬에 자신을 묻으려고 가는 망명의 행렬들 가운데서, 정복된 자의 고통과 승자의 향연의 외침, 이 커다란 전투 가운데서, 또 영웅이 될 것인가 겁쟁이가 될 것인가의 와중에서 불의에 앞서려는 고귀한 결단력 앞에서 당신은 중립인 채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신은 와서 억압받은 자의 편에 설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름다운 것, 숭고한 것삶 그 자체이 빛을 위해, 인류를 위해, 정의를 위해 싸우는 자들의 편에 서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은 마침내 나를 가로막는다.

도대체 무엇을!”

당신은 말한다.

그러나 만약 추상적 과학이 사치이고, 그리고 의술이 기만에 불과하다면, 만약 법이 부당하고 기계공의 발명이 착취의 수단에 불과하다면, ‘실천인 지혜를 거부하는 학교가 극복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혁명적 생각이 없는 예술이 타락된 것이기만 하다면, 내가 해야 할 일로 무엇이 남을까?”

나는 대답할 것이다 :

 

광대하고 흥미있는 일, 당신의 활동이 당신의 양심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작업,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열적인 자연을 일으키는 작업.

어떤 작업? 이제 나는 당신에게 그것을 말하고자 한다.

 

 

당신은 당신의 양심에게 뇌물을 주어(매수하여) “내가 나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또 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기쁨을 누리도록 내버려둘 만큼 어리석은 한에 있어 인류는 멸망해도 좋다라고 말하며 끝낼 수도 잇다. 혹은 당신이 사회주의자의 대열에 동참해서 사회의 완전한 개혁(변화)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들과 함께 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분석해본 결과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것이 또 그의 주위의 사물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그리고 중산층 교육에 의해 제시된 궤변과 그의 친구들의 관심있는 견해를 무시하는, 모든 지성인의 논리적인 결론이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면 문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노동자를 야만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 당신의 환경을 떨쳐 버리고, 사람들 가까이로 가라. 그러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특권층과 억압받는 자가 있는 곳에서 당신은 노동자 계층의 엄청난 개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개혁은 자본주의 봉건제도의 노예제도를 영원히 파괴하고 그리고 정의와 평등에 기초를 둔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들의 슬픔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멜로디의 노래 속에서 표현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18세기 농노들의 노래나 오늘날 여전히 노래하는 슬라브 농부들의 노래로도 충분하지 못하다.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인식하고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삶이 인류의 4분의 3에게 저주인 상태에서 벗어나 인류 모두에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그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다. 그는 사회의 가장 힘든 문제들을 공격하고, 그리고 그의 상식, 관찰, 그리고 그의 힘들었던 경험을 갖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불행한 그의 동료들과의 공통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그룹을 형성하거나 조직한다. 그는 조직을 형성하는데, 기부금이 빈약하여 난관에 부딪친다. 그는 국경을 넘어 이해 받기를 노력하고, 이 땅에서 국가간에 전쟁이 불가능한 날이 서둘어 올 수 있도록 모든 인도주의적인 수사학자보다 그 이상으로 최선을 다한다. 그의 형제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그들과 더 잘 친숙해지기 위해, 그의 사상을 완전하게 만들고 또 전파시키기 위해그는 그의 빈곤과 희생을 대가로 노동신문을 출판한다.

 

마침내 그날이 올 때 피로 붉게 물들어진 바리케이트의 보루 위를 그는 분연히 일어나서, 부자와 강자가 그들의 특권을 위해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바꿔놓은 자유를 정복하는데 투신한다.

 

얼마나 끊임없는 노력의 연속인가! 얼마나 끊임없는 투쟁인가! 얼마나 쉼없이 다시 시작되는 노동인가. 때로는지쳐서, 타락해서, 혹은 박해 때문에떠났다가 생겨난 갭을 메우기 위해, 때로는 조총사격대나 대포에 의해 감소된 대열을 재조직하기 위해, 때로는 대량학살로 중단된 연구를 회복하기 위해 노동은 끊임없이 새로 시작되었다.

 

그 신문들은 그들 자신에게서 음식과 수면을 빼앗아감으로써 사회로부터 지식 조각들을 낚아채야만 했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어려운 때는 빈곤한 사람들이 마른 빵을 먹고 모은 푼돈으로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주인이 그의 노동자가, 그의 노예가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노동자들은 그들 가족들의 궁핍을 끊임없이 염려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당신이 그 사람들 사이로 가게 되면 보게 될 것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끝없는 투쟁 가운데서 얼마나 자주 노동자는 난관에 부딪치고 또 헛되이 외쳐보는가. “우리들의 희생 위에 교육받은 젊은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공부할 동안에 우리가 옷을 입혀 주고 먹여준 젊은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거운 짐에 등이 굽고 고픈 배를 움켜쥐고 집을 지으며, 학교를 짓고, 박물관을 지었는가? 우리는 누구를 위해 우리가 읽을 수도 없는 이 멋있는 책을 창백한 얼굴로 인쇄하였는가? 인류의 학문을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교수들은 어디에 있는가? 또 누구를 위해 인류는 그 희귀한 착취자 만한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것인가? 자유를 설교하며, 매일 짓밟히는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 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눈에 눈물을 머금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우리들을 도우려 하지 않는 작자들, 시인들, 화가들 이 모든 위선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몇몇 사람은 수치스런 무관심 속에서 그들의 상황에 순응하며 즐긴다.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서민을 경멸하고 그리고 서민들이 그들의 특권을 건드리면 갑자기 공격할 준비도 되어 있다.

 

그 장면에 센세이션을 찾는 혹은 북소리와 바리케이트를 꿈꾸는 젊은이가 때때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리케이트로 가는 길이 멀고, 일은 힘들며, 그가 기대하는 면류관이 가시밭길임을 알고는 사람들은 대의명분을 저버린다. 대개 이러한 젊은이들은 야망에 가득찬 모험가들이다. 그들은 첫 번째 시도에 실패한 후에, 사람들의 표를 얻고자 한다. 그러나 나중에 사람들이 그들(지도자)의 선포한 원칙을 감히 적용하면 제일 먼저 그 원칙을 적용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것이다. 또 아마도 그들 지도자들이 명령을 내리기 전에 감히 움직이면 그 노동자 계층에게 포를 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에 덧붙여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만한 경멸과 비겁한 중상모략을 듣게 되고, 그리고 당신은 이제 중산층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강력한 사회적 전개 속에서 사람들에게 주는 그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러면 당신은 물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모든 젊은이가 그들이 시작한 그들의 광범위한 기업에서 사람들을 도와줄 그들의 젊은 혈기와 지성과 쓸 수 있는 많은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순수과학의 애호가인 당신이, 만약 사회주의의 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였다면, 모든 과학이 새로운 원칙과 조화를 이루며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당신이 여기에서 성취해야 할 과학적 혁명이 18세기의 과학적 혁명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임을 알지 못하겠는가? 당신은 역사가오늘날 위대한 왕,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국회의원들에게 동의받은 후쓰여진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역사 그 자체가 인간 발달에서 대중의 성취의 관점에서 쓰여져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경제학오늘날 자본주의 약탈의 ()성화인이 그것은 수많은 적용과 마찬가지로 그 근본적 원칙에 있어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인류학, 사회학, 윤리학이 완전히 개조되어야 하고 그리고 새로운 관점에서 보여진 자연과학 그 자체도, 자연현상의 개념과 표현 방법에 있어서, 크게 수정되어야 함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좋다. 그렇다면 하라! 당신의 능력을 좋은 대의명분의 처분에 맡기자. 특히 우리들이 편견과 싸우고 더 나은 조직의 기호를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당신의 분명한 논리로 우리를 도우라. 나아가서 우리에게 우리들 일상의 투쟁(논쟁)에서 진정한 과학적 연구의 두려움이 없음을 적용할 수 있도록 도우라. 그리고 예를 들어 설교를 함으로써, 우리에게 사람이 어떻게 진리의 승리를 위해 생명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라.

 

의사인 당신들은 쓰라린 경험에 의해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배웠다. 그러나 인간이 만약 이 상태로 계속한다면 인류가 서둘러 멸망할 것임을, 오늘, 내일, 매일 그리고 모든 기회에 지치지 말고 얘기하자. 인류의 99%가 과학의 충고에 정반대되는 상태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는한 당신의 처방()이 효과가 없을 것임을 얘기하라. 질병의 원인이 제거되어야 함을 얘기하라. 그리고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얘기하라.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이 사회에 메스를 가하라. 이성적 존재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얘기하라. 진정한 의사로서 회저병에 걸린(병든) 사지를 온몸이 전염되기 전에 잘라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라.

 

과학을 산업에 적용하기 위해 일한 당신은, 당신이 발견한 결과를 우리에게 와서 솔직하게 얘기하라. 미래를 향해서 용감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자에게 현재 우리의 지식이 어떠한 새로운 발명을 태동시킬 수 있으며, 더 좋은 조건하에서 산업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만약 인간이 항상 생산을 증가하고 싶을 때 인간이 무엇을 쉽게 생산할 수 있는가를 확신시켜 주라.

 

화가, 시인, 조각가, 음악가 당신들이 당신들의 진정한 임무가 무엇이고, 예술 그 자체의 관심이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면, 우리들에게로 오라. 당신의 펜, 연필, , 사상들을 혁명을 위한 봉사로 사용하라. 당신들의 우아한 문체와 인상적인 그림으로 압제자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거인적 항거에 대해 얘기하라. 당신들의 마음에 우리 조상들에게 영감을 고취시켰던 훌륭한 혁명적 열정으로 불을 붙이라. 아내들에게 사회적 해방의 위대한 대의명분에 생명을 바치는 남편들의 헌신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얘기해 주라. 사람들에게 실제 그들의 삶이 얼마나 추한가를 보여주고 왜 그것이 추한가를 설명해 주라(정확히 지적해 주라). 만약 모든 단계에서 현재 사회적 질서의 불합리가 없다면 삶이 어떠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얘기하라.

 

마지막으로, 지식과 재능을 가진 여러분 모두가, 만약 당신이 심장을 갖고 있다면, 당신과 당신의 모든 동료들이 와서 당신들의 능력을 가장 필요로 하는 자들을 위해서 봉사하라. 그러나 만약 당신이 온다면, 당신이 주인으로서 오는 게 아니라, 미래를 정복하기 위해 나아가는 새로운 삶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당신 혼자서 힘을 얻기 위해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가르치기보다 많은 자의 열망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그들을 신성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리고 서두르거나 쉬지 않고 젊음의 모든 열정으로 일하기 위해, 그리고 삶 속에 있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때에 그리고 그때에만이 당신은 완전한, 고귀한, 이성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길 위에서 당신의 모든 노력이 풍성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한 번 성취되기만 하면 당신의 양심의 명령과 행동간의 숭고한 조화가 당신에게 당신이 결코 꿈꾸어보지 못한 힘을 가져다 줄 것이다.

 

진리, 정의 그리고 사람간의 평등을 위한 투쟁 삶에서(인생에서)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당신을 찾을 수 있겠는가?

 

 

나는 앞의 세 장에서 인생이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딜레마의 관점에서, 부유층인 여러분이 용기있고 진지하다면, 와서 사회주의자와 함께 일하고 그들과 함께 사회적 혁명의 대의명분을 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얼마나 단순한 것인가! 그러나 부르조아 환경의 영향을 느낀 사람들에게 얘기를 해보면, 또 얼마나 많은 궤변론과 투쟁을 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 편견을 극복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 이해관계가 개입된 반대를 물리쳐야 하는가?

 

오늘 여러분, 젊은이들에게 간단하게 얘기하기는 쉽다. 여러분이 사고하고 행동할 만한 조그마한 용기라도 가지고 있다면, 사건의 긴박감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사회주의자가 되게끔 만들 것이다. 사실 현대 사회주의는 사람들의 깊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만약 부르조아계급(유산계층)에 의해 나타난 몇몇 사상가가 과학을 신성화시키고 철학을 지지한다면, 그들이 발표한 사상의 기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연합된 정신의 산물이다. 이성적 국제 사회주의는 직접적인 대중의 영향하에서 노동자 조직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이 사업에 동참한 문필가들은 이미 노동자들 사이에 일어난 열망을 단지 명료하게 공식화한데 불과하지 않은가?

 

사회주의의 승리에 헌신함이 아니고 노동자계층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그 사람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오해하는 것이고 그의 대의명분과 역사적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렸을 때, 어느 겨울날 어두운 안마당에 놀기 위해 내려갔을 때를 기억하는가? 냉기가 당신의 엷은 옷을 뚫고 들어와 어깨가 움츠려지고, 닳아빠진 신발 속으로는 진흙이 들어왔었다. 그때에 멀리서 화려하게 옷을 차려 입은 부유한 아이들이 경멸의 눈초리로 당신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것을 봤을 때 당신은 이들 예쁘게 차려 입은 원숭이들이 지성, 상식, 에너지에 있어서 당신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당신이 더러운 공장에서 아침 5시나 6시부터 12시간 동안 힘들게 일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훌륭한 학교, 학원, 대학에 교육을 받기 위해 편안히 다니고 있다. 또 당신보다 덜 지성적이지만 더 잘 교육을 받은 바로 이 아이들이 당신의 주인이 되고 모든 삶의 기쁨과 문명의 이익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당신에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좁은 평수에 5, 6명이 웅크리고 모여 사는 어둡고 습기찬 좁은 아파트로 당신은 돌아간다. 그곳에서 당신의 어머니는 세우러보다는 근심에 나이들고 삶에 지쳐서, 당신에게 당신의 유일한 식사인 마른 빵과 감자와 커피를 준다. 그리고 당신은 끊임없이 똑같은 질문을 갖고 당신의 생각을 괴롭힌다. 내일 빵값은 어떻게 지불하지, 그리고 다음날은 주인에게 집세를 어떻게 지불하지?

 

당신의 부모가 30 - 40년 동안 힘들게 살아온 똑같은 삶을 당신이 또 그렇게 살아야 하다니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빵 한 조각을 위해 영원히 걱정해야 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 번영, 지식, 예술의 기쁨을 마련해 주기 위해 당신의 평생을 수고함이 옳은가? 극소수의 상전에게 모든 사치를 마련해 주기 위해 당신 자신을 헌신하고,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모든 것을 영원히 포기함이 옳은가? 곤경의 때가 올 때에 노동에 지쳐서 고통과 비참으로 끝날 것인가? 이것이 당신이 인생에서 갈망하는 것인가? 아마 당신은 포기할 것이다 : “몇 세기 동안 사람들이 똑같은 운명을 살아왔다. 그러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도 역시 또한 복종해야만 한다. 열심히 일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잘살려고 노력해보자!”라고.

 

아주 좋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 삶 그 자체가 당신을 계몽시키는데 수고를 하게 될 것이다.

 

어느날 불경기의 날이 올 것이다. 예전처럼 일시적인 불경기가 아니라 전 산업을 파괴하고, 노동자를 비참 속에 빠트리고 그 가족들을 빈곤 속으로 몰고 가는 불경기의 날이 올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지금 그러한 재난을 이겨내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눈 앞에서 당신의 아내, 아이들, 친구들이 어떻게 서서히 궁핍에 찌들려서, 또 여위어 가는지를 보게 된다. 음식이 부족하고, 보살핌과 의료시설이 부족하여, 그들은 비참한 고통 속에서 운명을 다한다. 그러나 굶주리며 죽어가는 사람들과(당신들과) 상관없이 대도시의 햇빛 가득한 거리에는 유쾌한 삶들이 즐겁게 영위된다. 그때에 당신은 이 사회가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당신은 이 불경기의 원인을 생각하게 되고 또 극소수 상전들의 탐욕에 수백만 인간이 희생되는 이 혐오의 깊이를 세밀하게 조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사회학자들이 우리의 현사회가 밑바닥부터 꼭대기 끝까지(하층에서부터 상층까지) 재조직되어야 하고, 또 재조직될 수 있다고 이야기할 때 그들일 옳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 한번은 당신의 고용주가 자신의 재산을 더욱 늘리기 위해 그리고 당신에게서 몇푼이라도 더 착취해 내기 위해 임금 감소를 시도할 때, 당신은 항거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만하게 대답할 것이다 : “만약 내가 제안하는 임금으로 일하지 않으려면, 가서 풀을 먹고 살라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주인이 양의 털을 깍듯이 당신을 착취하고, 또 당신을 마치 열등한 종류의 동물인 것처럼 대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만족하지 않고, 그는 모든 면에서 당신을 노예로 만들려 한다. 당신은 그의 앞에 엎드려 인간의 고귀함을 다 포기하고 모든 굴욕의 고통을 감내하거나, 혹은 피가 솟구쳐 당신을 쓰러뜨리는 그 노동에 몸을 떨고, 거리에 나와 사회개혁자들이 반역하라! 경제노예제도에 항거해서 반역하라.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노예제도의 원인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때 그들이 얼마나 옳은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에 당신은 와서 사회주의자들의 대열에 자리를 잡고, 경제적정치적사회적 모든 노예제도의 완전한 파괴를 위해 그들과 함께 일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또 언젠가 당신이 그렇게 좋아했던 한 젊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그녀는 경쾌한 걸음걸이에, 솔직한 태도와 유쾌한 대화를 소유한 자였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세상 모든 고통과 싸운 뒤에, 그녀는 마을을 떠나 대도시로 간다. 그녀는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걸 알지만, 그러나 벌어서 최소한도로 정직하게 살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이 어떠했는지 아는가? 어떤 자본주의자의 아들에게 구애를 받고 그의 꾀임에 넘어가 자신을 내맡겨 버린다. 젊음의 열정으로 자신을 내던지지만 1년 뒤 아이를 가진 채 버림을 받고 만다. 그녀는 더욱 용감하게 투쟁하지만, 추위와 굶주림의 이 부당한 싸움에서 패배하고,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된다. 그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어리석은 말로 이 불쾌한 기억을 쫓아낼지도 모른다. “1등도 아니자만 꼴찌도 아니야.”라고 당신은 말하고 그리고 어느날 저녁 한 카페에서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는 가운데서 그 젊은 여자가 모욕 받는 것을 듣게 된다. 한편 이 기억이 당신의 심장을 사로잡고, 당신은 그 저주받을 유혹한 남자를 찾아내어, 그녀의 복수를 하고자 한다. 그리고 당신은 이와 같은 매일의 사건들의 원인들을 통해 깊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한편에는 비참한 자들이, 또 다른 한편에는 그럴싸한 사탕발림의 말과 짐승같은 욕구를 가진 플레이 이들이 있는 한 즉 사회가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는 한 그러한 불행은 계속 되풀이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당신은 이제 이 나뉘어져 있는 불평등을 종식시켜야 할 시간임을 깨닫고, 서둘러서 사회개혁자들에게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 여자들은 냉정하게 방관만 할 수 있는가? 당신 옆에서 놀고 있는 아이의 예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만약 사회 조건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운명이 그 아이를 기다리고 있을지 당신은 생각해 보지 않는가? 당신의 막내 동생이나 당신의 자식들의 미래가 어떠할지 생각해 보지 않는가? 당신 아들도, 당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하루하루 빵 얻는 것 외에는 다른 걱정없이, 술집 외에는 다른 기쁨없이 그렇게 살아가기를 당신은 원하는가? 당신은 당신의 아들과 남편이 재산을 물려받은 유산자의 처분에 맡겨지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당신의 아들과 남편이 재산을 물려받은 유산자의 처분에 맡겨지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그들이 주인을 위한 노예, 단순한 전투에서 대포에 희생되는 병사, 부자의 목초지를 비옥하게 하는 비료가 될 것을 원하는가?

 

아니다.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하다! 당신의 남편이 결단력을 갖고 열정적으로 파업을 하다 손에 수갑을 차고 따라서 그의 삶은 끝장이 나며, 그 오만한 자본가가 몇 년 형일 지를 결정한다는 것을 당신이 들을 때 당신의 피가 끓을 것임을 안다. 당신은 스페인 민중봉기 때 군인의 총칼에 자신을 내맡긴 스페인 여자를 존경할 것임을 나는 안다. 또 감히 사회주의자 죄수를 분노케 한 간수의 가슴에 총알을 박은 한 여자의 이름을 경탄하며 언급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파리의 여자들이 억수처럼 쏟아지는 총알들 속에서 그들의 남편들을 어떻게 격려했는가를 읽을 때 당신의 가슴이 뛸 것임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도 결국은 미래를 정복하기 위해 일하는 자들과 동참하기 위해 우리의 운동에 합류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진지한 젊은이, 남녀, 농부, 노동자와 군인,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권리를 생각하고 우리에게로 올 것이다 : 당신은 당신의 형제와 함께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에게 올 것이고, 그 혁명은 모든 노예제도를 폐지하며, 모든 구속을 끊어버리고, 옛 전통을 깨뜨리며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의 지평선을 열어줄 것이다. 그리하여 그 혁명은 마침내 인류사회에서 진정한 평등과 진정한 자유를 마침내 성취하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라. 그들 노동의 열매를 마음껏 즐기기 위해, 그들 능력의 완전한 발전을 위해, 또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행복한 삶을 위해 일하라.

 

우리가 목표로 하는 유익한 것을 성취하기에는 우리 집단이 너무 연약하다고 말하게 하지 말라.

 

부정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라.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농부들, 그들 자신은 왕겨를 먹고 주인을 위하여 곡식을 남기는 농부들 우리 자신이 바로 이 수많은 대중인 것이다. 우리는 넝마를 입고 비단과 벨벳을 짜는 노동자들 우리도 또한 대중인 것이다. 공장이 고동을 울릴 때 우리는 거리로 나가 성난 바다처럼 달려들 수 있다. 우리들의 장교가 십자훈장이나 리본을 받을 수 있도록 총알받이가 되는, 엄한 훈련을 받는 우리 군인들은, 어리석게 우리 형제를 쏘기도 하는 우리 어리석은 군인들은 우리는 다만 방향을 바꾸어(전향하여) 우리에게 명령하고 이 리본을 멘 장교가 창백하게 되도록 만들기만 하면 된다. 고통받으며 분노하는 우리 모두가 대중인 것이다. 우리가 바로 모든 것을 삼킬 수 있는 바다(대양)인 것이다. 우리가 뜻만 가진다면, 정의의 순간이 오고야 말 것이다.

[출처] 크로포트킨, [청년에게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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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극기 위의 저 달이 걸린다
    from 木筆 2014-05-19 08:15 
    태극기 위에 달이 걸린다. 바람은 포근하고 애닯다. 304개의 넋대가 흔들린다. 벗들과 밤을 새다시피 나눈다. 세상은 아마 '국가가 책임 못지니 내가 다 감당해내야지' 라는 비관과 '돈과 집과 자식 교육에 팔할'을 부었던 대화주제에 '사회'를 넣는다란 낙관 사이를 갈지자 처럼 걷겠지. 물에 빠진 아이를 보고 발을 동동구르는 '동정'과 구하려다 같이 빠져죽는 '동감'과 구해내는 '공감'이라는 어감의 차이를 새겨듣고 참 아프다. 이 사회를 동정하고 있는지
  2. 드디어 책으로 나왔군요^^
    from 木筆 2014-06-27 08:47 
    반가운 소식이네요. 권하고 싶은 청춘들이 많았는데..한번 같이 돌이켜보면...좋을 듯.
 
 
 

* 고정관념에 대한 반론 - 인간의 본성, 기준점에 대해 성선설, 선악설로 규정짓는 것은 세세하게 살피는데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동한 생각하거나 나누었던 고정관념들을 살펴보고, 다소 유연한 경계를 살펴보는 것이 오히려 논의를 확장해나가는데 유용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피터싱어의 행동경제학의 게임이론 등을 통해 살펴보는 협력적 진화를 차용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경직되게 생각하여 찬반으로 정황을 설명하는 것은 이렇게 다소 유연하게 살펴보는 것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인간본성이라는 것의 경직된 해석과 선입견에 가득한 생각을 보수든 진보든 열어둘 필요가 있다. 이렇게 유보적인 입장에 두게 되면 제도와 변화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사물과 정황을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서로 좋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책에서 피터싱어가 말미 마무리하면서 생각을 모아둔 것이다.

 


- 인간의 본성을 부정해서도, 인간의 본성이 원래 선한 것이라고 주장해서도,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무한히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 정치적 혁명에 의해서든 사회적 변화에 의해서든 혹은 보다 나은 교육에 의해서든, 인간들 사이의 모든 갈등과 분쟁이 언젠가는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 모든 불평등이 차별, 편견, 억압 혹은 사회적 조건들로부터만 기인한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불평등의 일부는 이들로부터 유래했겠지만 모든 경우에 그럴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정책을 제시할 때에는 그 정책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제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어떤 것이 '자연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는 식의 추론을 거부해야 한다.
-어떤 사회적 경제적 시스템 아래에서 살든지,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상승시키고, 권력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과 그들의 친족들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경쟁보다는 협조를 촉진하는 사회구조를 만들고, 경쟁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목표를 향해 작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인간이 아닌 동물들을 착취해도 된다는 생각은 사람과 동물 간의 간극을 과장하는 다윈주의 이전의 유산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동물들의 도덕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 약자, 빈자, 그리고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섬으로써 좌파가 가졌던 전통적 가치를 옹호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사회적 경제적 변화가 이들에게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곰곰이 연구해야 한다. 105-106

 

다윈주의 좌파들은 상호 협조가 가져다줄 이득뿐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는 필수적인 전제들을 이해함으로써, 사회의 낙오자들을 낳게 되는 경제적 조건들을 가능한 한 없애나가려고 노력한다. 일부 좌파들은 협소한 경제적 관점에 입각해서 사회정책을 평가하곤 한다. 하지만 인간 심리에 대한 진화이론으로부터 출발하면, 순전히 경제적으로만 이해했을 때 고용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노동자들을 실제로 고용에서 배제했을 때 발생하게 될 잠재적 사회적 비용이 얼마인가를 계산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모든 것이 자유로운 경쟁시장의 원리에 의해 지배됨으로써 사회적으로 낙오된 자들이 증가하여 밤길 다니는 일이 위험해질 정도가 되느니, 정부는 고용을 증대시킬 수 있도록 경쟁시장에 간섭을 하는 것이 낫다.  89

 


생디칼리슴과 집산주의와 아나키즘의 목표는 모두 현재의 경제적 위계 및 사적 소유 전반을 철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집산주의는 모든 이의 소유를 지향하고 아나키즘은 무소유를 지향하는 반면, 생디칼리슴은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소유를 지향한다. 따라서 생디칼리슴은 사회주의가 설파한 경제이론 및 계급투쟁론을 순전히 노동조합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입장이다. 생디칼리슴은 집산주의가 의존하는 대의제 정치 활동을 완강히 거부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디칼리슴은 아나키즘과 훨씬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아나키즘과 다른 점은 사실상 행동의 범위에 국한되어 있다. 109-110


길드 사회주의


길드 사회주의자가 보기에 국가는 소비자 자격을 지닌 공동체의 연합인 반면, 전국 길드는 생산자 자격으로 그들을 대표하는 기구이다. 따라서 의회와 길드 평의회는 저마다 소비자와 생산자를 대표하는 양대 권력으로서 동등하다...길드 사회주의자가 보기에 국가 사회주의는 사람을 소비자로만 파악하는 반면 생디칼리슴은 오로지 생산자로만 파악한다. 그래서 길드 사회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그 두 관점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전국 길드를 지지하는 이들의 목표이다. 생디칼리스트는 모든 것을 생산자들의 노동 조직에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집산주의자는 소비자들의 지역 조직 또는 정치 조직에 모든 것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 모두 똑같이 비판받아야 한다. 단지 한쪽으 관점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두 관점을 일치시킬 수 없다고 말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을 순전히 상업적인 활동으로, 생기도 기쁨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소수를 배불리는 활동 대신 전국 길드와 함께 일하자. 노동을 돈으로 사고파는 대신 책임감을 갖고 일하자. 오늘날 끔찍할 만큼 비대해진 국가와 주식회사의 관료주의 대신 자치 정부와 권력 분산을 추구하자.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노동의 기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의 양만 아니라 질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중세 시대를 연상케 하는 케케묵은 표어도 있고 '노동의 기쁨'같은 표어도 있지만, 어쩌면 그런 표어를 믿고 따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와 집산주의의 철학, 즉 노동은 결코 즐거워질 수 없는 필요악이라고, 노동자의 유일한 희망은 소소한 오락거리를 한가득 안고서 더 길게, 더 풍요롭게 누리는 여가 시간뿐이라고 단언하는 그따위 철학에 영원토록 굴복하는 것보다는 말이다.

 

과로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짓이다. 그것을 일이 아니다. 과로는 소수에게 사치재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의 복리를 위한 일이 아니다. 일은, 노동은, 생리적으로 필요한 것, 몸에 축적된 힘을 소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 그 자체가 건강이자 삶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부문의 유익한 일들이 마지못해 이루어진다면 이는 단지 그 일이 과로이기 때문이거나 부적절하게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145

 

범죄를 바라보는 견해


예방 과정에 따르는 고통은 외과수술에 뛰따르는 통증처럼 안타까워 할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 폭력 충동에 이끌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에게는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삶이 아니라 이익을 주는 삶을 통해 이기심을 더 많이 충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시급한 조치는 범죄자의 시야 및 욕망의 범위를 넓혀 주는 것이다....부자가 부를 쌓으려고 저지르는 악행은 대개의 경우 빈민이 저지르는 한찮은 범죄보다 사회에 더욱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데도 불구하고 기존 질서를 해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고 넘어간다.... 172

 

대의제 민주주의의 보완


지역이든 산업이든 아니면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든 간에, 오로지 작은 부문에만 관련된 문제를 전 국민이 결정하도록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 같은 해악을 없애는 최선의 방법은 현재로서는 국가 내의 모든 주요 집단에 자치를 허락하는 것, 그럼으로써 다른 집단보다 해당 집단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을 모조리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다...길드사회주의자들이 생디칼리슴의 가장 독창적인 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개념이 바로 개별 산업을 자치 단위로 조직하여 내부 문제에 관한 한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나는 명백히 별개의 이해관계를 지닌 다른 부문까지 이러한 조치를 넓혀 가면 오늘날 대의제 민주주의가 스스로 드러낸 해악들을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180


산업별 길드의 자치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나 국가 권력을 제한하고 개인의 자유를 지키고자 한다. 그들의 제안은 오늘날 지역을 기반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 해당 공동체를 소비자의 처지에서 대표하는 의회와 더불어 '길드 의회'를 만들자는 것이다...공장법이나 탄광 규제법 같은 법안들을 지금은 국가가 제정하지만 미래에는 길드 의회가 제정할 것이며, 그러한 법률을 집행하는 길드 의회의 권력은 오늘날의 국가 권력과 똑같을 것이다. 181

 

예속관계


자본주의 공동체라면 어디에나 명령을 내리는 이들과 대개는 고분고분히 복종하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여론은 흑과 백의 양 극단 사이에서 조금씩 짙어지는 회색 띠처럼 분포하지만, 이 두 계급의 가치관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자기 의지를 관철하는 데 익숙한 사람은 반대에 부딪힐 경우 분개하기 마련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 반대를 사악한 것으로, 따라서 반드시 분쇄해야 할 것으로 확신한다.

 

경쟁심의 진실은 권력욕에서도 진실로 드러난다. 오늘날 사람들이 추구하는 형태의 권력은 명령을 내리는 권력이자 공개적으로든 비밀리에든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권력이다. 이러한 형태의 권력은 타인이 바라지 않는 일을 강제로 시킬 때에만 드러나므로 본질 자체가 타인에 대한 방해이다. 210


 경쟁심이 전적으로 해로운 것은 결코 아니다. 공공에 대한 봉사나 발견, 예술 작품 창작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쟁심은 매우 유용한 자극이 되어 사람으로부터 한층 더 유익한 노력을 이끌어 낸다. 그것이 해로운 경우는 수량이 제한된 재화를 얻고자 할 때, 따라서 한 사람의 소유가 다른 사람의 궁핍을 초래할 때이다. 이러한 형태를 띤 경쟁심은 공포를 수반하게 마련이며 공포는 필연적으로 잔인성을 낳는다. 210

 

편견의 폐해


인종이나 지역의 반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경쟁의 해악으로 눈을 돌릴 뿐, 협력의 미덕에는 눈을 감는다. 그런 사람은 동료들의 결점에는 너그러우면서 익숙지 않은 이방인의 결점에는 혐오감을 느낀다. 201

 

경쟁교육의 폐해


경쟁을 유발하는 장학금 제도는 아예 없느니보다는 낫지만 여러 관점에서 비판할 만하다. 그러한 제도는 한참 어린 아이들의 학업에 경쟁심을 불어넣는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지식을 그 자체에 내재한 흥미나 중요성보다 시험에 쓸모 있는 것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 이러한 제도에서는 어려운 문제를 느긋이 생각하느라 둔해 보이는 인재보다 일찌감치 판에 박힌 질문에 술술 대답하는 인재가 더 높이 평가받는다. 가장 해로운 단점은 아마도 어린 나이에 과로한 나머지 장성했을 때 활력과 흥미를 잃는 경향일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영재들이 이러한 이유 탓에 촉이 무뎌지고 감이 떨어지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진실이다. 222

 

예술이 과학보다 덜 융성한 한가지 이유


오늘날 창조적 업적의 상당 부분은 다른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과학 및 연구 부문의 업적은 대개 교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남는 시간에 성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과학자들은 교직 활동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 한 이러한 관행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그나마 과학과 교직은 결합하기가 쉽기 때문에 오늘날 과학 분야는 활기를 띠고 있다. 음악 분야에서는 연주를 병행하는 작곡가가 비슷한 이점을 누리지만, 연주자가 아닌 음악가는 부자이거나 대중의 취향에 냉큼 영합하지 않는 한 곤궁할 수밖에 없다. 요즘 세상에는 순수 예술 분야에서 순전히 훌륭한 작품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창작 시간을 넉넉히 보장하는 부업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는 유일한 이유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오늘날 예술이 과학보다 덜 융성한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225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소유보다 창조를 추구하는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삶에는 근원적인 행복이 존재한다. 이러한 행복은 적대적인 환경이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서가 권하는 삶의 방식이자 세상의 모든 위대한 스승들이 권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일찍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찾은 이들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삶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외부의 권력에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장애와 압제에 굴하지 않고 용기와 희망을 끌어모아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정치 및 경제를 개혁하여 세상을 재창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개개인이 도덕적으로 다시 태어나면 개혁에 필요한 모든 것은 아무런 저항 없이 저절로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 낼 기쁨보다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남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사로잡혀 있다. 239

 

절대 다수는 돈을 벌어야만 하는 운명의 노예이다. 그들 대부분은 열심히 일하도록 압박당하기 때문에 사실상 본업 밖에서 즐거움이나 여가를 얻기 힘들다. 중년의 막바지에 은퇴할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권태에 시달리는데 이는 그들이 막상 자유를 얻었을 때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며, 한때 일 이외의 활동에 지녔던 흥미가 이미 고갈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은 예외적으로 운이 좋은 경우이다. 대다수는 눈앞에 도사린 빈곤의 공포에 시달리며 노년까지 일을 해야 한다......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자기 일의 방향성에 대해 의견을 내지 못한다. 일하는 동기는....일이 예술가의 창작 활동처럼 즐거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비웃음을 사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같은 해악들 가운데 태반은 전혀 불필요한 것이다. 만약 인류 가운데 문명화된 일부로 하여금 남의 고통보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더 탐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면, 또한 다른 계급이나 국가가 몰래 앞서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파괴 행위 대신 건설적인 개선 작업에 전념하여 그 성과를 전 세계와 함께 나누도록 유도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한 세대가 끝나기 전에 세상사의 기준이 되는 체제 전체를 뿌리부터 가지까지 송두리째 개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45-246


우리가 애타게 보고 싶어 하는 세상에는 오늘날 일상에서 반복되는 비극적인 단조로움보다 삶의 기쁨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유년기를 벗어나면 으레 앞날의 걱정에 고개를 수그리고 더는 마음 편히 즐거워하지 못하며, 다만 때맞춰 울리는 시계 소리를 듣고 일종의 진지한 의식 같은 환락에 탐닉할 뿐이다. '어린아이처럼 살아라'는 많은 사람에게 여러 모로 유용한 충고인데, 그 속에는 '내일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마라'는 교훈 또한 담겨 있다. 경쟁을 부추기는 세상에서 이런 교훈을 따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느지막한 나이에도 아이 같은 단순함을 간직한 사람이 적지 않다.... 261-262


우리가 반드시 찾아야 할 세상은 창조적 정신이 살아있는 세상, 삶이 곧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한 모험인 세상이다. 그 세상의 토대는 우리가 소유한 것을 지키려는 욕구나 타인이 소유한 것을 갖고자 하는 욕구가 아니라 창조적 충동이어야 한다. 그 세상에서 애정은 대가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연애는 지배 본능을 벗어던질 것이며, 잔인성과 시기는 행복한 삶을 일구고 그 삶을 정신적 환희로 채우기 위하여 자유롭게 진보하는 모든 본능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그러한 세상은 실현될 수 있다. 지금은 다만 사람들이 마음먹고 만들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뱀발. 책갈피를 펼쳐둔다. 할 말은 많지만 남겨두자. 진리는 우회하지 않는다. 단순하고 통쾌하기도 하다.  지금은 다만 사람들이 마음먹고 만들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만드는 즐거움보다는 그 말이 맞는니, 보잘 것 없느니 따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세상은 뒷걸음치든 말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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