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빨강과 노랑 

 


그의 작품에는 빨강과 노랑, 연붉음과 연노랑의 선명하게 때론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있다. 가족사진에서 처럼 선명하기도 하지만 그를 둘러싼 특유의 애절함과 강렬함이 배여있다. 홍군과 인민복이기도 하며 칼과 손에 남겨진 노랑은 단절과 명상이기도 하다. 붉은 아기의 탯줄에 이어져 있는 책과 화면과 천안문, 그리고 윗편 희미하게 박혀있는 악보의 숫자는 또 다른 이명으로 들리게도 하는 것 같다.  회한과 기억, 망각을 번갈아 표현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비치는 것 같다.

 

 

 

2. 책과  전등  그리고 전통

 

 

 


처음 소비에트 교과서와 같은 판본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졸업시험도 통과하지 못해 그림을 캔버스에도 그릴 수 없어 종이에 그렸다고 한다. 전시회 출품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두점 가운데 작은 작품만 출품하라고 해서 거절했다고 한다. 표현기법이 맞는 전시회를 찾아가거나 별도의 전시회를 마음이 맞는 친구와 기획했는데 이런 교류로 다른 기법이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한 전시회에서는 행위예술이나 파괴를 모방한 전시가 있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6.4 전시관 총기사건이후로 과연 그것이 작품일까라는 고민을 했다고 하며, 작품성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술사에 대한 공부는 대부분 책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한 계기로 과연 중국은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되물음으로 빨강과 노랑의 색조만 남겨두고 일년동안 아무런 작품 활동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계기가 되어 독일, 유럽의 여러 미술사조를 경험할 수 있었다하며 독일에서 장예모 감독의 영화를 보다 도저히 그것을 보고 독일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한다. 중국의 상업적인 것만 골라서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닌가하고 중국이란 나에게 무엇인가 재삼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3. 표현과 기법


혁명적? 리얼리즘과 같이 판에 박힌 미술수업은 아무것도 자신에게 가르쳐준 것이 없었다고 한다. 수업시간에 멀뚱멀뚱 자리를 지키고 있던 모습, 그리고 유럽의 표현주의 기법을 받아들이면서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밀레, 고흐, 달리, 피카소, 마그리트를 배우면서 습작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그룹을 남서부 예술이라 칭하는데 북부예술을 접하면서 많이 익히고, 독일 등의 경험을 통해 그동안 책으로 공부해두었던 예술사조에 대해 특별하게 배웠다고 한다.

 

 

 

 

 

 

2007년 서울 가을 그는 41년전 마오저뚱의 사상집을 곁에 두고 읽고 있다.  "바른 사랑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걸까? 아니다. 그럼 개인의 머릿속에서 가지고 있는 것? 아니다. 바른 사상이란, 사회 실천에서 오는 것이다. 사회에서 생산투쟁, 계급투쟁, 그리고 과학실험 이렇게 세 가지를 실천함에서 오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란, 그 사람의 사상으로 결정지어진다."를 되새기고 있다.

 

 

"우리의 도시는 더욱 화려해진다. 우리의 밤은 더욱 밝아진다.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은 더욱 단순해진다. 우리의 사고는 더욱 즉각적이 된다. 우리의 감정은 훨씬 복잡해진다. 우리의 의사소통은 더욱 획일화된다. 우리의 기술은 더욱 명료해진다. 우리의 상상은 더욱 합리적이 된다. 우리의 소망은 더욱 통합적이 된다. 우리의 지식은 더욱 우스꽝스러워 진다. 우리의 고통은 더욱 개인적이 된다. 우리의 기억은 더욱 짧아진다. 우리의 과거는 더욱 멀어진다. 우리의 얼굴은 더욱 젊어진다. 우리의 음악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우리의 감각은 더욱 심각해진다. 우리의 영화는 더욱 발전한다. 우리의 옷은 더욱 낡아진다. 우리의 작업실은 더욱 커진다. 우리의 전시는 더욱 빈번해진다. 우리의 저녁모임은 더욱 화려해진다. 우리는 더욱 모이기 어려워진다. 우리의 생각은 더욱 피상적이게 된다. 우리의 대화는 더욱 느긋해진다. 우리는 더욱 쉽게 운다. 우리의 잊고자 하는 욕구는 더욱 강렬해진다. 우리의 친분은 더욱 단순해진다. 우리의 가슴은 더욱 차가워진다. 우리의 의지는 더욱 확고해진다. 우리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진다. 우리의 판단은 더욱 모호해진다."

 

그림의 이력(콕)▼

 

 

 

 

 

 

 

 

 

 

 

 

 

 

펼친 부분 접기 ▲

 

 

볕뉘. 

 

1. 일짬 잠깐 들러본다는 것이 사뭇 긴장하게 한다. 빨강과 노랑 그리고 그 흔적이 무엇일까? 돌아서 나오는 길 몇부의 복사본을 손에 쥔다. 출입구 위편에 장샤오강의 인터뷰가 끌려본다. 이력과 추구하는 것과 삶의 질곡이 읽힌다. 백년의 급진 원텐진의 논문이 겹친다. 자신의 대지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는 자각이 겹친다. 대지에 뿌리내리는 것은 고사하고 썪지 않는 거름을 퍼다가 나르는 것이 지금-여기의 현실은 아닐까 싶은 느낌이 스민다. 반시간의 공유에 들떠있고, 어쩌면 충격이 내내 가시지 않을 것 같다. 당분간은 ... ..

 

2. 싸가지 진보로 지식인?들이 시끄럽다.  그런데 의심스럽다. 완독을 해보기나 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물어뜯고 컹컹거리는 것이 분간이 가지 않는다.  지식인은 에티켓은 없는가? 뜬다 싶으면 취할 것을 가려내고 짚을 것은 짚지 않고  씹는 만큼 나의 이름도 영양가도 높아질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가? 만약 그렇다면 심각한 습속이 아닐 수 없다.  뭐가 어떻다고 하면 다들 몰려들어 썩은 살점하나씩 물고 거봐 그랬잖아를 외친다.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비판정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비난습속이 무섭다.  한점 틀린 점이 없는 신의 경지에 오른 지식인들의 문화적 굴레가 안타깝다.  아무도 진지하게 자신과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다른 지식인의 생각과 고민을 접목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한번이 아니라 질리도록 반복되는 퇴행이다 싶다.  잘못본 것이길 바란다. 지식인들이 너무나 확신에 가득차 있다. 자신의 오류를 돌보지 않는다.  이런 지식인의 문화에서는 아마 큰 인물이 나올 수 없는 듯싶다. 아마 죽은 뒤에나 알아주면 다행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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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뉘.  이른 아침 기운이 좋아 마실을 나선다. 먹구름이 가리긴 하지만 나팔꽃으로 지천인 강변이 조금 다른 맛이다.  나팔꽃밭을 담으려 하지만 느낌이 올라오지 않는다. 햇살도 가을내음도 맡으면서 기운차려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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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좋은 모임의 성원이길 부정하다

 

좋은 모임을 찾거나 기대(하)는 사람들 - 하지만 그렇게 느끼게 되는 소속감은 온전할까? 따듯한가? 그렇게 생긴 구심력과 응집력은 끼리끼리의 천동설론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인맥이라는 것, 지연이라는 것, 계파라는 것, 좋은 사람과 모임을 구하는 것이 맞는가?  관계를 만드는 것, 고민을 섞는 것, 꿈틀을 씨앗을 뿌리는 것,  할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이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그래도 더 낫게 만드는 것이 활동이라고 한다면 위의 되질문은 어떠한가? 당신은 좋은소비를 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좋은사람인가? 당신은 좋은 모임에 소속되어 있는가? 애정을 느끼는가? 그래서 좋은사람인가?


이런 되질문을 씹으면서 보면 모임과 조직의 성숙을 위해 긴장하고 반추할 수 있도록 자체 문화적인 근력을 유지하는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모임을 유지하기에 급급하고, 모임의 유지도 엇비슷한 단체를 의식하고 경쟁하는 제로섬을 통해서 살려나간다면 말이다. 너에게는 고민의 속살도 속내도 앞으로의 전략도 함께 나눌 수 없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않다  나-너가 힘을 합쳐도 한줌밖에 되지 않는다는 자각이 합당한가? 그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계와 연줄도 닿아있고 힘도 있어서 그렇지 정권만 바뀌면 큰일을 해낼 수 있다. 정말 그럴까? 지나친 낙관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대안세력인가? 대안인력이라도 있단 말인가? 실력을 보여줬다고 자부하는가?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 만약 너라는 걱정거리가 있다면 너로 조금은 설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긍정할 수가 없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는 자각이 있다면, 또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관에서 제도안에서 하는 일들의 맥락과 사람의 흐름을 최소한 읽고 있어야 하며, 여러 방향으로 시도하고 실험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제도안의 흐름을 읽고 분석, 비평해내는 동시에 제도밖의 교류와 소통의 문화, 근력을 키워가는 일들이 기획되고 시도되어야 한다. 어쩌면 유사한 비중으로, 색다른 갈래길을 갖고 서로 섞으며 분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좋은사람들 끼리 모여살면 좋겠다'는 관념은 로망도 아니고 현실에서도 가능하지 않은 유아적인 발상이다. 시간과 이념, 정해진 목표라는 것이 있다면 그 시간의 함수에 아니다*아니다*아니다의 결과가 점철되어  더 이상 만나지도 않는 관계들로 부식되어 있는 것이 현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보니 설득해내는 방법, 끌고 오는 과정, 새로운 시도나 실험도 공유될 필요도 없고 노력도 점선으로 끝이나고 만다. 유행하는 것에 따라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도 비슷하고 닮아있다. 사람들의 관계라는 것도 그저 좋은 사람, 왕년에 활동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고민이 있는지 생각이 있는지 서로 묻지 못한다. 좋은사람, 좋은모임에 기대서는 이런 악순환만 반복될 뿐은 아니었는가? 

 

좋은사람, 좋은모임, 좋은조직은 애초에 없다.


어쩌면 지금을 아우르는 키워드를 삼는다면, 우리를 칭칭 동여매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환원주의와 지나친 낙관, 세상은 나, 내모임 위주로 돌아야한다는 천동설주의자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렇게 알아주길 바라고 보아주길 바라는 자중심성에 갇혀 우리는 실험적인 의제를 발굴하지 못하며, 발굴할 여력도 없는 것이 현수준이다.  그런 연유로 다른 시각과 비판을 품어내지 못하며, 늘 이론에 지친 지식만을 구하며, 그것도 멀리 서울로 우회해서 여기로 가져와 주입하게 되는 것이다.


제도안의 흐름도 이런 일색의 개조를 원하기에 다양한 흐름을 포착하지 못한다. 의제를 키워가지 못한다. 청춘과 청년을 다가서지 못하게 한다. 다가서는 방법도 모를 것이다. 제도안의 변화와 제도밖의 흐름을 만든다는 것, 그리고 지금-여기의 독특함과 세련됨이 깃든 공간과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일 역시 서울의 머리를 빌리고 해석과 비판을 서울의 입을 통해 들으려고만 하는지도 모른다. 활동의 포트폴리오 역시 없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섞어나가며 어떻게 끊임없이 제도안밖을 넘나들고 넘쳐나게 하는지도 관심은 없다. 나는 답이고 나의 흐름이 정답이기때문이다. 너를 걱정하지 않는다. 걱정되지 않는다. 남이기에 관심도 없고 잘되면 시기심이 이는 것이다. 너를 돌보지 못하는 것이다. 돌봐야 될 곳이 어딘지도 모른다. 아는 것이 없기때문이다. 관심있는 것이 없기때문이다.

 

 


 

나의 밖에 나-너가 있다.

 

-1. 중심성, 순수하다는 것은 여러 관계로 이루어진 일들을 순수에만 맞추고 연결시킨다. 합리화에 맞지 않는 일들 또한 이유를 달아놓고 관계에서 떼어놓는다. 잘못은 합리화되고 다른 관계들은 어긋나서 끊어져버리고 만다. 조금씩 붙어 있던 일들도 사라져버린다. 나는 혼자다. 순수를 향한 여정은 시작된다.

 

-2. 아이에 대한 교육, 세상의 문제를 똟고 살아가려는 열정은 쉽게 데인다. 그 화상도 심하고 실망도 그에 못지 않게 크다. 아이가 큰다는 것. 아프다거나 장애를 얻을 수 있다는 가정은 하지 않는다. 조손가정이나 불우한 가정의 아이와 내아이는 늘 다르고 걱정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에 대한 아픔이나 불우함, 장애로 인한 아무런 혜택조차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이 곁에 있어서야 건강한 바램이나 대리교육시키는 이전된 삶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최악과 절망을 가정하지 않는 삶에는 늘 희망이 없다. 한 줄기 희망을 지금여기가 아니라 저기로 손벌리게 되는 것이다. 떠나야하고, 보내야 하고, 어느 새 공유되는 삶과 일상은 없다.

 

-3. 잘못된 것은 없다. 솔직함에서야 다른 것을 느꼈을 뿐이다. 다른 것에는 우열이 없다. 좀더 다른 생각, 생각들을 인정하고 나눌 수 있다면, 그 와중에 욕망이 좀더 분산될 수 있다면 어떨까?

 

-4. 엔엘인가 피디인가 꼬리표는 지문처럼 몸에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없다라고 하는 것 역시 부질없다. 지문을 없앨 수 있을까? 밥을 먹고 고민을 나누고 노선을 구걸하지 않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까? 겪어보지 못해 그렇지 이렇게 움직이고 용인하는 것이 바로 낭만주의라고 되받을 것이다. 비민주주의의 관행이 하루이틀이 아니라 몸에 베인 습속이라 행태가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어쩌면 전쟁의 상흔과 과피해의식이 넘쳐나 같이-함께해본 경험도, 그 경험을 살리고 축적하는 방법도 잊고, 의도대로 되지 않으면 떠나겠다는 극단적인 행위가 양면처럼 맞닿아있는 것 같다. 독립군이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이다. 나 곁에 너가 없다는 것이 식민과 전쟁의 뼈아픈 체험이기에 이렇게 돌출된다고 여기도 싶다.

 

볕뉘. 

 

1. 중언부언한 이야기를 다시 옮겨놓는다. 주말 서로 이곳에 와서 지낸 이력을 나누다보니 상처처럼 다시 올라와 남긴다. 좀더 장황하고 따로따로 분리해서 써야되는데 경황이 없다. 다시금 고민을 나눌 이들이 있다면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2. 지금-여기 활동하는 분들이 밀려서 하는 일이 아니라 꿈틀거리는 일과 그림도 같이 그리고, 섞고 색다른 목소리로 제도안밖을 다른 색으로 점점 흩뿌려 바꾸어냈으면 한다. 어떤 일들도 나가 아니라 꿈틀을 함께 공유하는 일로 바꿔내는 재주를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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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금 여기를 걱정해보면서... ...
    from 木筆 2014-09-15 13:33 
    1 저기가 아니라 여기가 더 가깝다면 여기의 실패에 천착해봐야 한다. 서울이 아니라 지방이 더 가능성이 있다하자. 그렇다면 내려오는 글이나 사람이 아니라 여기에서 내려는 목소리나 몸짓을 살펴야 한다. DJ이 아니라 YS이 더 흔적이 있다하자. 그렇다면 아쉽거나 안타깝거나 하려고 했던 것들을 손꼽아봐야 한다. 실패를 보듬어보려 한다면 아직 식지 않았다는 증거다. 징글징글한 기억을 되살리고 싶을까? 세상이 나로 도는 것이 아니라 알아서 돌아가고 있다고 느낄
 
 
 

대전역 파출소 시장골목을 따라가다보면 천원 이천원하는 선지국밥집이 있다.

 

허전함을 채운다.

 

시끌하게 들어오는 육십대의 아주머니 두분은 목이 탄다면 주인을 호명한다. 선짓국에 물김치! 이천원을 서로 계산한다고 한참 얘기한다. 만원짜리 청바지를 구하는 얘길하고 리어카를 몰다 한의원에 침맞는 얘길 건넨다. 낮술을 마신다지만 할일에 물만 마시는 아주머니를 위해 막걸리 마신 아주머니가 걷기 힘든 걸음으로 컵물을 건넨다. 그러자 팔십이 넘은 어르신이 불편한 걸음으로 찬막걸리를 시키신다. 오천원 간천엽 안주는 미리 나와있고 허겁지겁 고팠던 술과 안주를 손으로 양파와 같이 드신다.

 

허전함을 채운다. 낮은 오늘도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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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처마끝에 달빛이 대롱대롱 걸려있다.

 

오늘의 아침이 오고 어제의 달빚이 오고 어스름이 오고 님이 오고 그제가 오고 또 님이 오고 여름도 오고 달빛도 스치고 오월도 다시 오고 사월도 반은 오고 사월은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로 부산을 떨고 봄은 꽃빛으로 맺히고 ᆞᆞᆞ여물지 못하는 시간들. 새어나간 눈빛들. 껴안지 못한 아픔도 슬픔들도 토닥거려볼텐데.

 

슬픔도 아픔도 꽃빛도 달빛도 처참을 너머 온 달력이 황망하여

 

오는 달력에 새겨넣는다. 꼭꼭 손등의 상처처럼 아련하게 둔다. 달빛도 이슬도 하늘도 님도 덜 서럽도록 어룬다.

 

초승달은 밤을 찌른 낫이다. 팔월이 죽다. 피하나 흘리지 않으면서 ᆞᆞ구월을 낳다.

 

 

볕뉘. 팔월 마지막밤 걸린 달을 마주하며 옮긴다. 바람이 하루를 식혀준다. 지난 만남들을 되새겨본다. 앞으로 만날 만남을 꼽아본다. 얼마나 흔들 수 있을지, 얼마나 변할 수 있는지는 관심밖에 두어야겠다. 지난 주말 선약을 잡고 속내를 들어보고 속내를 건네본다. 그러다 보니 마음도 취하고 몸도 취한다. 없던 일보다는 걸리는 생각들이 많아진다. 그래 구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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