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 1. 과거- 동질 사회라는 환상: 한 사회의 동질화는 단순히 단일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이가 부차화된다는 데 가깝다. 더는 차이가 없다고 해서 사회가 동질화되는 것이 아니다. 차이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때, 공통된 것 앞에서 차이가 부차화될 때 사회는 동질화한다. 민족 유형이 제공하는 이 공통된 것은 유사성의 원칙에 기초한다. 공통된 형상 속에서 민족의 모든 구성원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상상된 공동체‘는 이러한 유사성의 사회다. 24

[ ] 극장, 학교, 법원, 교회, 정당, 박물관 등이 모두 같은 기초를 갖는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다른 모든 색깔을 왜곡하는 전체 조명이며, 아주 특별한 마취제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같은 박자일 뿐 아니라 같은 소리로 조율되었다. 같은 소리로 조율된 이러한 일치, 자기 집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면 환경이다. 환경이란 주위환경이다. 하나의 전체를,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환경. 민족의 경우 이 하나의 환경이 전국을 에워싼다. 26

2.

[ ] 2. 지금-다원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 변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일어난다. 첫째는 소속의 변화이다. 즉 우리가 사회에 속하는 방식이 변한다. 둘째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의 변화이다. 다원화는 타인과의 관계를 바꾸고 우리 자신과의 관계, 즉 우리가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도 변화시킨다. 37/ 당연함의 상실은 말하자면 ‘정상성‘의 상실이기도 하다. 이 말은 ‘정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이상 제시하거나 묘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정상성‘을 정의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사회 권력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정상성, 당연함은 단지 그 정상성의 형태가 통용되는 집단에 소속된 이들만을 위한 가치다. 다른 이들에게 정상성은 정상이 아니다. 정상성은 배제의 역학이자 제외의 역학이다. 우리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다양성은 기분 좋은 공존이 아니다. 42/가치논의는 언제나 기본 가치의 수용에 대한 논쟁으로 전환된다. 이민자들, 새로 온 자들은 우리의 기본 가치를 수용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완전히 잘못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기본 가치들로 허용의 범위를 정한다. 그러나 가치 논의에서는 새롭게 규정될 수 있는 가치 자체에 대해서는 토론하지 않는다. 기본 가치는 논의될 수 없고 질문할 수도 없는, 고정되고 확정된 데다가 본질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가치에 대한 호소는 민주주의적 과정이 전혀 아니며, 대신 가치에 대한 복종이 주제가 된다. 43/동질 사회가 우리의 완전한 소속을 약속했다면, 그러니까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고 우리에게 완전한 정체성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면 지금은 그 반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 이질 사회, 다원화 사회, 다양성의 사회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더는 온전하게, 직접, 당연히 소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질 사회는 또한 우리가 더 이상 같은 종류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전처럼 같은 종류의 우리로 구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온전하지 않다. 45/개인주의의 역사에서 1960년대는 전환점으로 부를 수 있는데 이 지점에서 2세대 개인주의가 시작된다. 2세대 개인주의는 기존 삶의 양식과 표현을 거부했으며, 자기만의 새로운 길을 택했다. 찰스 테일러에 따르면 이 여정은 ˝자기 진실적인 생활 형태와 표현 형태˝의 추구이다. 그래서 테일러는 2세대 개인주의 시대를 ˝자기 진실성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마이클 월저의 표현처럼 삶은 ˝개인의 프로젝트˝가 되었다. 이는 새로이 구별되는 개인주의일 뿐 아니라 1세대 개인주의와 완전히 반대다. 2세대 개인주의는 거대 체제의 침식과 정치적, 종교적, 계급 규정적 생활 세계의 종말을 알렸기 때문이다. 월저는 이 상황에 대해 결합 대신 프로그램상의 자유, ˝독립된 존재들의 무리˝가 출현했다고 말했다. 48/ 2세대 개인주의의 정치 즉 정체성의 정치는 원래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민족의 형상 안에 여성을 등록시키는 일 또는 동성애자를 등록시키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다. 말하자면 다른 정체성을 온전한 정체성의 규범 안에 수용시키는 일이 중요했다. 이것은 정상성, 즉 무엇을 정상으로 여길지를 정하는 일에 관한 문제였다. 반면 다원화는 이와 크게 다르다. 다원화는 정치 운동이 아니라 목적없는 변화가 낳는 효과다. 다원화는 민족의 형상을 재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족 형상의 침식을 촉진한다. 55/누구도 국민을 체현할 수 없다. 누구도 체현된 형태로 국민을 대의할 수 없다. 클로드 르포르의 주장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에는 여전히 중심이 있지만(왜냐하면 권력의 장소라는 말이 다름 아닌 중심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중심은 텅비어 있다. 즉 민주주의의 중심은 비어 있는 자리다..오늘날 다원화와 함께 민주주의는 그 형상을 잃어버렸다. 이제 민주주의는 벌거벗었다. 56-57/ 3세대 개인주의(다원화 개인주의)는 개인의 분열, 우연성의 경험, 불확실의 경험, 원칙적인 개방성 등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3세대 개인주의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심장으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연성에 대항하는 데서 생명을 얻는 정체성의 심장에 바로 이 우연성이 들어왔다. 58/ 더 이상 타자에게 정상의 기준을 제시할 수 없다. 나아가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정상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고, 온전하며, 당연한 존재가 아님을 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가 완전히 다르게 살 수 있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경험은 지금까지는 소수자의 전형적인 경험이었다. 소수자는 온전하고 완전한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소수자는 어떻게 주류 사회에 대응하여 균형을 잡을 수 있을지를 언제나 자문해야 했다...심리 정치적으로 볼 때 오늘날은 주류 사회도 소수자 사회처럼 기능한다. 오늘날에는 우리 모두 다양성과 다원성 곁에 서야 한다. 다양성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 내면으로, 우리 자신의 전체 정체성에 진입했다...개인들에게 다원화가 미치는 의미를 번역한다면, 감소된 정체성이다! 오늘날 우리는 더 작은 자아다. 왜냐하면 우리는 작아졌고, 우리는 더 이상 당연한 우리가 아니며, 의문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은 자아이며, 오늘날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정체성은 언제나 우리와 완전히 다른 정체성에 연결된다. 60-61/지구도시...오늘날 시골 공간 자체가 도시화되었다. 도일적 생활 양식의 전형인 마을도 다원화되고 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어느 외진 마을에 가도 터키식 길거리 케밥집이 있다. 어느 고향 마을에서나 ‘이곳 출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까 시골의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도시는 거의 모든 시골을 장악했다. 다른 한편으로 도시로 들어온 시골 문화도 아무리 거대한 봉쇄막을 친들 변화와 변환을 피하지 못한다. 64-65

[ ] 우리는 어떻게 이런 다원화된 개인으로 함께 살 수 있을까? 왜냐하면 이 다원성에서 근본적인 새로움은 단지 우리 사회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다양해졌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새로움은 이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세계관이 없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통된 세계관도 없이, 공유하는 확신도 없이 다원화된 개인들인 우리가 함께 살 수 있을까? 70/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중립성‘뿐이다. 중립성은 구역, 공간, 공적 공간으로 구체화된다. 다양한 문화, 종교, 정체성이 한 사회를 ‘공유‘해야 하는 상황에서 서로 만나면 중립적인 공공 영역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사람들이 다양하고 다원화된 상태로 동등할 수 있는 영역, 중립적인 만남의 장소로서 공공 영역과 공적공간이 필요하다. 이 만남구역 bebegnungszone. 20킬로미터로 다닐 수 있으며 보행자의 안전을 우선하는 교통 구역. 이 만남의 장은 다름이 동등할 수 있는 다름의 공간이다..추상적인 영역에서만 실현된 다름이 동등하게 만날 수 있는, 추상적이지 않은 만남의 장이 필요하다. 70-71


3.

[ ] 3. 종교무대 - 다원화된 신앙인: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선택한다.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신앙을 개수와 상관없이 선택하는데, 핵심은 선택이다. 이 점이 과거 종교에 대한 이해와 완전히 다른 점이다. 선택은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세속 사회는 오늘날 종교 세계 옆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것은 종교의 심장으로도 진입했다. 전승 안에서 배치되는 대신 자기 전통 혹은 외부 전통을 스스로 습득한다. 어떤 자리에 배치되는 대신 자기 힘으로 어떤 자리를 차지한다. 스스로 선택된 전통은(이 무슨 모순인가!) 과거 종교성과는 반대되는 효과를 낳는다. 세대라는 사슬에 배치되어 탈주체화되는 대신, 선택한 자아가 강화된다. 87

4.

[ ] 4. 문화무대-근본주의의 저항: 제 3의 개인주의가 가지는 특징은 보기보다 덜 추상적이다. 축제, 식생활, 의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와 종교의 병존은 자기 확신이나 정체성, 신앙 등 모른 것을 여럿 중 하나로 경험하게 한다. 그러므로 다원화는 경험이 먼저다. 자신의 정체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경험이 다원화의 시작인 것이다. 이는 오늘날 자기 자신에게 결정이 필요하다는 경험이며, 자신의 삶과 세계 접근 방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경험이다. 이 경험은 각자 정체성의 심장에 우연성이, 다시 말하면 개방과 불확실성이 침입함을 뜻한다. 이 심대한 경험은 오늘날 누구도 피할 수 없으며 모두에게 도달한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의 당연함을 변화시킨다. 106/오늘날 우리 모두는 다원화된 개인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정체성을 제한받는 개인이다. 그리고 바로 이 경험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효력을 발휘한다. ‘다원화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작동한다. 106/다원화된 개인주의 시대에서 문화는 결코 훼손되지 않고 온전한 문화 재화들과 완전한 상징의 집합이 아니다. 문화는 오히려 불안정해진 상징과의 관계를 획득하려는 시도다. 다원화된 개인은 소수의 엘리트와는 달리, 전 지구 안에서 획득 가능한 완전한 상징들의 단순한 주인이 아니다. 다원화된 주체는 기껏해야 불완전한 상징과의 관계 속에서 불안정한 자율성과 권한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135/소수자의 집단뿐 아니라 주류 집단에서도 발견된다. 소수자 집단의 전략은 봉쇄이며, 누구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주류 사회에서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는 전략이 된다. 배제를 통해서만 생산될 수 있는 폐쇄된 정체성은 발전, 갈등, 문제에 언제나 같은 반응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도한 감정, 공격성, 그리고 자주 언급되는 공포가 반응의 지표들이다. 이런 반응들이 이성적인지 비이성적인지는 상관이 없다.139/정치 전선은 오늘날 포괄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과 배타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 놓여 있다. 이민으로 변화된 이민 이후 사회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이민 이후의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로지른다.144


5.


[ ] 5. 정치무대 - 팬으로서의 참여: 미래를 향한 특정 요구들이 아니라 저항의 순간 자체가 중심이 된다. 사람들은 월가 점거 운동과 타르리르 광장에서 열리는 토론회, 위원회, 준비 모임, 총회, 청소, 응급 구호 등의 활동을 하면서 환호하고 웃었다. 정치적 에너지를 다른 배수구 없이 분출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적 순간, 실제 민주주의적 사건의 부활을 보기 때문에 환호한다. 정치적 에너지의 탁월한 원천인 분노는 규정된 길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저항을 구성하는 방법으로 어찌 되었든 이곳에서 새로운 길을 뚫었다. ...민주주의는 ˝만족의 기계˝가 아니라‘ ˝불만족과 관계 맺기˝다. 153/만약 성공한다면 새 경험은 개인에게 참여한다는 느낌만 주는 게 아니라 또한 전형적인 경험이 된다. 다른 사람들도 이 경험에서 자신을 재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느낌의 실재는 효력을 발휘한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권력에 반대하면서 오직 자신들의 감정, 분노, 불평, 실망만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로 이것이 풍부한 가치가 있고 민주주의 중심 원료다. 왜냐하면 감정은 3 세대 개인주의에서 특별한 기능을 하고, 대단히 중요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점점 더 기존의 배출구로부터 풀려나서 다원화된 주체들의 매개체가 되었다. 감정 안에서 사람들은 실제로 개별적인 개인이 된다. 157/원래 쾌락주의는 욕망에 적대적인 도덕을 향한 저항의 징표이자 해방의 울림으로 여겼다. 하지만 오래전의 쾌락주의는 그 반대편에 자리 잡았다. 실현과 성공을 통해 쾌락주의는 저향의 정신에서 빠져나와 참여와 소비의 도구이자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가 되었다. 자본주이는 기능하는 노동력뿐아니라 즐기는 소비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본 축적에 대한 저항으로 생각되었던, 1967년에 나온 조르주 바타유의 개념인 ‘소비의 경제‘는 시장의 거대한 파티로 변환되었다. 168/민족은 언제나 현재를 과거와 연결 짓는 ˝기억의 공장˝이었다. 민족에서 이런 기능을 수행했던 거대 국민정당들은 그 이름에 이미 충동과 행복 지연을 내세우고는, 미래의 본질적인 지표를 세워 두었다. 그러나 정치적 쾌락주의는 완전히 현재에 정주했고, 지금 여기에서 성취하려고 한다. 이런 쾌락주의 정치는 현재 사회 질서가 변화 불가능하며 대안은 없다는 생각에서 생겨날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정치적 교체를 이루려는 생각에서 나올 수도 있다. 정치적 대안 또한 더 이상 미래의 좌표가 될 수 없다. 요약하면 정치적 쾌락주의는 변화없이, 수직적인 계층 없이, 충동의 지연됨 없이 개인으로서 완전히 참여할 때 실현된다. 171/옛 계급 사회는 안정되고 분리된 구획을 갖고 있던 개인들에게 포괄적인 표현의 다양한 장을 제공했다. 조직, 적절한 정치적 대리, 언어, 심지어 노래까지 제공했다. 그것은 그 사회에 결합되기 위한 전체 의미 체계였다. 그러나 ˝온전한 개인 실존˝을 향해 노력하는 다원화된 개인의 시대에는 과거와는 달리 이런 통합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3세대 개인주의 시대에는 근본적으로 개인을 적절하게 대의하는 수단이 없다. 집단을 통한 대의는 오늘날 시민들의 정치적 욕구와 맞지 않는다. 사회 문제가 더 이상 없어서가 아니라, 그보다는 오늘날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건드리며 자극하는 것은 다른 무언가, 즉 완전 참여를 향한 열망이기 때문이다. 175-176/마크롱 - 이 형식과 모형이 바로 오늘날 시민들의 정치 욕구 및 욕망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즉 참여에 대한 욕망이며, 인정을 향한 기대다.....단지 감소된 자아의 욕구에 접근하는 일이며, 이를 채우는 일이다. 이것은 옛날의 해방을 의미하지 않으며, 대신 새로운 의미의 인정을 뜻한다. 그리고 인정 이후 따라 나올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ㅣ 않는다. 그러나 이 소망, 개인으로서 인정받고 자신의 특별함 안에서 개인으로서 인지도고 싶은 이 소망은 오늘날 삶의 형식과도 잘 맞는다. 우리 모두는 오늘날 개인으로서의 삶에 능통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정치적인 것에서도 개인으로서 인정받기를 원환다. 177/ 여기에서 개인은 옛 자유주의의 개인, 즉 사인으로서의 개인이 아니다. 또한 옛 공화주의의 개인, 즉 동등한 존재로서의 시민도 아니다. 오히려 이 주체는 새로운 공적 존재로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개인이다. ‘공적인 것‘으로서 개인의 등장이다. 이것이 다원화된 사회를 위한 정치 공식이다. 개인주의는 여기에서 공동을 위한 새로운 기초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다 함께, 조화를 이루며, 이 다양한 개인들은 계속 앙 마르슈(마크롱이 창당한 이름으로 전진이란 의미다) 중이다. 179

볕뉘.

무척 충격적이면서도 질서 정연한 책이다. 다 읽은 뒤 생각해보니 라디오 방송을 했고, 인터뷰와 긴 과정을 거쳐내고 난 뒤 만들어서 일 것이다. 다 옮겨적고 싶었는데 무리인 듯싶다. 다음에 다시 한번 남겨야겠다. 철학도서상, 미래의 책 10선에도 꼽혔다고 책갈피에 나와있다. 손색이 없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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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이란 결국 자기 안에 머무는 감정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이 죽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할 때에도 그 사랑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음을 경험한다. 외로움 혹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랑을 좇는다 해도 사실 그것은, 철저히 자기 안에 머문다.....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 사랑하는 사람, 그는 사랑받는 사람이 자기 안의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일 뿐임을 아는 사람이다. 무수한 사랑과 이별 끝엗 자기 내면에 결코 사라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67

[ ] 우리는 어쩌면 태어나지 않은 사람, 또는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만난 적 없는 사람의 언어를 받아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감정을 느낄 때, 그것은 사실 내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그이에게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75

[ ] 연인은 일찍이 사회로부터 추방된 존재들이었다. 사랑에 들어선 순간, 공동으로 익명의 존재가 되기를 기꺼이 원하는 자들. 어둠 속에서, 길모퉁이를 돌 때 느닷없이 나타나는 비밀한 사람들. 그들은 우리가 거리에서 지나친다면 누구인지 기억도 못할 평범한 얼굴을 지닌 사람들이다. 101

[ ] 감수성이 교육을 통해 변화 가능하다는 손택의 주장은 인간이 배움을 통해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나는 사랑에도 이런 시각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거기에는 우리가 개인의 영역이라 여기는 사랑에 있어서조차 온전한 나만의 욕망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아무리 자유롭다 여기는 욕망이라 해도 이 세계 안에서 철저히 길들여진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이 전제된다.120

[ ] 철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반디불의 잔존]을 통해 말한다. 오늘날 반딧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어두운 곳에 있지 못한 거라고, 그러니 반딧불을 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당연히도 반딧불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이상한 말이었다. 어떤 것을 바라보기 위해 우리가 충분히 어두워져야만 한다는 것은. 145

[ ] 글썽이는 것들은 모두 그곳에 묻히지요. 이원, 서로의 무릎이 닿는다면.....이 시는 이미 다른 세상으로 간 사람을 향한 연서처럼 읽힌다. 우리가 결별한 사랑의 대상에 대해 마땅히 갖춰야 할 애도의 형식으로 읽힌다. 바라보기 위해 테이블을 놓아,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내야만 하고, 글썽이는 바다까지도 놓아야만 하는 사람.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별은 잊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재하는 사람과 마주않을 한 개의 테이블을 필요로 한다. 154

[ ] 사랑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한 점과 또다른 타인의 한 점이 만나는 이미지를 목격한다. 개별적인 삶을 살아왔던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사건(언제나 축적된 시간 속에서, 그를 통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곧 사건이다)은, 그러나 맞닿는 순간 서로의 과거를 포용한다. 포용한다는 것은 서로의 속내를 듣고 이해하거나 존중한다는 차원이 아니다. 두 개의 사건이 맞부딪친다는 것은 그런 차원을 넘어선다. 설령 물리적으로 과거가 공유되는 지점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186

[ ] 다 보여선 안 된다는 문학 선생의 말은 우리 삶의 비밀에 관한 거친 충고였다고, 이제는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인간인 내가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사랑이 있으며, 당신이 있으며, 운명이 있다. 그러므로 비밀을 남겨둬야 하는 것이 있다. 다 보여선 안 된다는 것은 비밀을 지킴으로써 당신이 내 안에 머물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213

[ ] 흔히 표현은 나로부터 먼 곳에서,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지점을 건드리는 데서 도래한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생각하며 표현에 다가가고자 했다. 내가 느낀 것을 쓰는 게 아니라 내가 본 것을 씀으로써 읽는 사람이 그 장면을 느낄 수 있으면 했다. 보는 것은 나이지만, 내 감정을 지우고 이미지를 남길 때 그 표현은 비로소 시에 가까워졌다. 그것을 나라고 적을 주어 자리에 타인이 머무를 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217

볕뉘.

컬트 포르토 탐정소설의 장르적 우울과 클리셰: 실종의 키메라의 뒷글 ‘혼자 행진하는 사람‘을 읽고 어쩌다가 저자의 이름이 남아 이렇게 이어진다. 십년의 기록을 농축하다...어쩌면 졸이고 졸여 이렇게 세상에 내어놓은 게다. 아껴 아껴 읽고, 후기를 남겨야지 미루다가 봄마루를 한참이나 지나 이렇게 남긴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서야 윤여일저자의 흔적이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여행이나 관광이라는 말은 애초의 서투름만 남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여행보다는 삶의 진한 자국을 남겨놓는 이들의 재주야 말로 여행을 또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일인 게다. 멋진 작가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싶다. 올해 봄이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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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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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생트

[ ] 알지 못할 또는 친숙한 온갖 것들이, 우리들 등 뒤로 조심히 옮겨 다니면서 그러나 소리마저 감추지는 않는 채, 탄식과 호소와 한숨을 교환하는 것이다. 29

[ ] 나는 새벽이 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이미 와 있었다. 그것은 내 안에서 부드럽게 피어나 있었다. 내 안의 동녘이 희미한 빛을 예고하고 있었으니, 빛은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동이 터오고 내 최초의 기억들이 물들어가면서, 나는 내가 조용히 내 인간적인 형태의 옆에, 어딘가, 이미 아침의 꿈들이 도달한 곳에 놓이는 것을 느꼈다. 62

[ ] 그것은 대상 없는 염려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일으키는 동요는 내 이성 뒤편의 잘 알려지지 않은 그리고 깨어날까 두려운 감각들에 은밀히 작용했다. 나는 내 안에 그러한 감각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본질은 모른다. 그 감각들의 망은 소리와 빛의 파장들 너머, 내가 알지 못하는 데로 펼쳐져 있다. 그 신비한 틀 안에서, 그것들은 보이지 않는 삶의 기미들을 포착한다. 87

[ ] 가을은 피의 힘을 자극했고, 그 끓어오름은 나에게 극히 혼란스런 황홀경을 제공했었다. 이제 겨울은 나에게 대지로부터 떨어져 나온 순수한 정신적 풍경을 펼쳐 보였다. 거기에서는 한 가닥 나뭇가지도 가냘프고 뚜렷이 부각되었다. 나는 영혼의 모습들을 그릴 순수의 지평을 가지고 있었다. 거의 비현실적인 그 표면 위에서 나는 내 나름의 감성적 기하를 상상했으며, 거기서는 추억과 회환과 희망의 곡선들이 다정한 지성에 의해 그려지는 듯했다. 102

[ ] 내게 고향이라곤 서너 사람의 영혼뿐이야..... 168

[ ] 내게 일시적이나마 인격을 부여한 것은 그 꿈이었다. ...나는 정신이 채 들지 않았고, 저 섬세한 깨어남들과 미약한 잠 사이에서, 희미한 경계밖에 건너지 못한 채 그 위를 떠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의식을 잃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삶의 첫 선물들 즉 세계로부터 오는 모든 감각들에서, 그리고 때로는 내적 질료에서 자양을 취하고 있었다. 드물고 희박한 질료였지만, 새로운 감각들에는 전혀 빚지지 않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 진짜 기억들은 전부 파괴된 반면, 모든 것이 내 상상적 기억의 특별한 신선함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

[ ] 나는 모든 재능을 받았소. 나는 모든 재보들을 만들었소. 나는 사랑했고, 주었소. 그런데 당신은 이렇게 가난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거절했소....주문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건 나도 안다오. 그것들은 육신에밖에 작용하지 않아. 나는 영혼에는 힘을 미칠 수가 없었소. 정원에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겠소.306

[ ] 나를 벗어나는 존재, 존재 그 자체가 있소. 그를 끌어당길 수 없소. 그가 오고 있소. 나는 그를 내 나름대로, 대지의 방식대로 존중했다오. 하지만, 이렇게 늙고 죽음에 임박해서도, 나는 아직 그를 맞아들일 만큼 가난하질 못하구려. 308

[ ] 흔히 소설 짓는 이들은 소설을 구상함에 있어 사건의 전개, 인물, 묘사 등을 포함하는 계획을 가지고서 모종의 관념을 구현하려 한다. 그렇게 미리 정한 바대로 지은 소설은 알레고리나 논증 내지는 논문이나 마찬가지라, 관념만 무성할 뿐 삶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소설은 써나가는 동안 미리 예견하지 못했던 질문들에 대해 살아 있는 답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예견하지 못했던 질문들일수록, 그 답은 한층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316

[ ] 마침내 나는 내 뺨 위에 여린 숨결을 느꼈다. 따스한, 인간적인 숨결이었다...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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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 ] 사과나무 아래 펼쳐놓은 보자기에는 사과만 떨어지듯, 별 아래 펼쳐놓은 보자기에는 오로지 별의 가루만이 떨어질 뿐이다. 205

[ ] 첫 장을 읽는 동안 아무런 매력을 발견할 수 없어 책장에 꽂아둔 채로 오래 묵은 책들, 흥미진진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두번 세번 읽고 싶은 문장이 없는 책들, 저자의 말투가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인문사회학서들, 그런 책들은 이 방 바깥으로 밀려나가 현관에 놓였다가 사라진다.....어떤 책을 남기고, 어떤 책을 버릴 것인가. 기준은 한가지다. 두번 읽고 싶은가? 207

[ ] 어른은 부끄러움 뒤에 온다. 232

[ ] 1962년생 고객, 그는 김소리에게 부끄러움을 가지라고 말했지만 당시에 김소리가 가진 것은 수치심이었고 경멸감이었지. 그는 김소리에게 어른을 요구했지만 그 자신도 김소리에게는 어른이었으면서, 그는 김소리의 아무것에도, 김소리의 어른 됨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비난만 하고 갔어. 그의 어른 됨은 김소리를 관찰하고 김소리를 판단하고 사후에 다가와 비난할 때에만 유용하게 작동했는데, 어른 됨이 그런 것이라면 너무 편리하고 야비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느라고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고 결국엔...240

[ ] 우리가 무슨 관계인가.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를 마중 가는 사람. 20년째 서로의 귀가를 열렬히 반기는 사람, 나머지 한 사람이 더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순간을 매일 상상하는 사람, 서로의 죽음을 가장 근거리에서 감당하기로 약속한 사람. ...질문을 받을 때마다 ‘친구‘나 ‘친척‘이라고 대답한다. 그 대답이 가장 간단하고 간편하기 때문은 아니고 그것이 우리 이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260

[ ] 토요일 오전 열한시라는 묵자의 세계를 사는 사람은 묵자를 읽지 못하는 누군가가 용산역 1번 플랫폼에도 있을 수 있으며 그가 동행인 없이 홀로 서서 열차를 기다릴 수도 있는 상황을 가정하지 않는다. 보는 이는 보지 못하는 이를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는 이가 왜 거기 있는가? 그는 고려되지 않는다 275

[ ] 그것이 기본값이라는 것을 알게 된 칸나미 유이찌의 전생은 공허에 시달리다 자살하지만 칸나미 유이찌라는 현생은 티처를 죽이러 돌아간다.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티처에게 응전하는 것은 탈출할 수 없었기 때문 아니겠느냑 서수경은 말했다. 탈출이 불가능한 세계의 파일럿은 파더/티처/기본값을 죽이러 돌아갈 수밖에 없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여기서 날 수밖에, 여기서 마찰하는 수밖에 없어. 292

[ ] 혁명이란 무엇인가. 황정은은 그것이 번개처럼 크고 단절적인 절대적 힘이 아니라, 작고 사소한 진공관 속의 빛과 소음을 발견하는 일이라 말한다. 어떤 사소한 사물조차 ˝세상에 그거 한대뿐˝이라는 유일성을 담고 있음을 인지한 자라면, 그 안에는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325, 326

볕뉘.

까뮈, 시지프스가 읽힌다. 무리하지 않고 층층히 켜로 있는 이야기의 심지를 제대로 밝혀낸 듯하다. 책 속의 책들도 마음길이 많이 간다 싶다. 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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