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랑이란 결국 자기 안에 머무는 감정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이 죽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할 때에도 그 사랑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음을 경험한다. 외로움 혹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랑을 좇는다 해도 사실 그것은, 철저히 자기 안에 머문다.....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 사랑하는 사람, 그는 사랑받는 사람이 자기 안의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일 뿐임을 아는 사람이다. 무수한 사랑과 이별 끝엗 자기 내면에 결코 사라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67

[ ] 우리는 어쩌면 태어나지 않은 사람, 또는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만난 적 없는 사람의 언어를 받아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감정을 느낄 때, 그것은 사실 내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그이에게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75

[ ] 연인은 일찍이 사회로부터 추방된 존재들이었다. 사랑에 들어선 순간, 공동으로 익명의 존재가 되기를 기꺼이 원하는 자들. 어둠 속에서, 길모퉁이를 돌 때 느닷없이 나타나는 비밀한 사람들. 그들은 우리가 거리에서 지나친다면 누구인지 기억도 못할 평범한 얼굴을 지닌 사람들이다. 101

[ ] 감수성이 교육을 통해 변화 가능하다는 손택의 주장은 인간이 배움을 통해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나는 사랑에도 이런 시각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거기에는 우리가 개인의 영역이라 여기는 사랑에 있어서조차 온전한 나만의 욕망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아무리 자유롭다 여기는 욕망이라 해도 이 세계 안에서 철저히 길들여진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이 전제된다.120

[ ] 철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반디불의 잔존]을 통해 말한다. 오늘날 반딧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어두운 곳에 있지 못한 거라고, 그러니 반딧불을 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당연히도 반딧불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이상한 말이었다. 어떤 것을 바라보기 위해 우리가 충분히 어두워져야만 한다는 것은. 145

[ ] 글썽이는 것들은 모두 그곳에 묻히지요. 이원, 서로의 무릎이 닿는다면.....이 시는 이미 다른 세상으로 간 사람을 향한 연서처럼 읽힌다. 우리가 결별한 사랑의 대상에 대해 마땅히 갖춰야 할 애도의 형식으로 읽힌다. 바라보기 위해 테이블을 놓아,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내야만 하고, 글썽이는 바다까지도 놓아야만 하는 사람.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별은 잊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재하는 사람과 마주않을 한 개의 테이블을 필요로 한다. 154

[ ] 사랑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한 점과 또다른 타인의 한 점이 만나는 이미지를 목격한다. 개별적인 삶을 살아왔던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사건(언제나 축적된 시간 속에서, 그를 통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곧 사건이다)은, 그러나 맞닿는 순간 서로의 과거를 포용한다. 포용한다는 것은 서로의 속내를 듣고 이해하거나 존중한다는 차원이 아니다. 두 개의 사건이 맞부딪친다는 것은 그런 차원을 넘어선다. 설령 물리적으로 과거가 공유되는 지점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186

[ ] 다 보여선 안 된다는 문학 선생의 말은 우리 삶의 비밀에 관한 거친 충고였다고, 이제는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인간인 내가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사랑이 있으며, 당신이 있으며, 운명이 있다. 그러므로 비밀을 남겨둬야 하는 것이 있다. 다 보여선 안 된다는 것은 비밀을 지킴으로써 당신이 내 안에 머물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213

[ ] 흔히 표현은 나로부터 먼 곳에서,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지점을 건드리는 데서 도래한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생각하며 표현에 다가가고자 했다. 내가 느낀 것을 쓰는 게 아니라 내가 본 것을 씀으로써 읽는 사람이 그 장면을 느낄 수 있으면 했다. 보는 것은 나이지만, 내 감정을 지우고 이미지를 남길 때 그 표현은 비로소 시에 가까워졌다. 그것을 나라고 적을 주어 자리에 타인이 머무를 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217

볕뉘.

컬트 포르토 탐정소설의 장르적 우울과 클리셰: 실종의 키메라의 뒷글 ‘혼자 행진하는 사람‘을 읽고 어쩌다가 저자의 이름이 남아 이렇게 이어진다. 십년의 기록을 농축하다...어쩌면 졸이고 졸여 이렇게 세상에 내어놓은 게다. 아껴 아껴 읽고, 후기를 남겨야지 미루다가 봄마루를 한참이나 지나 이렇게 남긴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서야 윤여일저자의 흔적이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여행이나 관광이라는 말은 애초의 서투름만 남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여행보다는 삶의 진한 자국을 남겨놓는 이들의 재주야 말로 여행을 또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일인 게다. 멋진 작가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싶다. 올해 봄이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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