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 상식이 잘못되었다는 얘기가 여기저기. 귀쫑긋 하던 참인데 마침 책이 나왔다. 살펴보기로 한다. 


린마굴리스의 책들을 이어보고 있던 참에 같은 제목이어서 마저 읽는다. 저자는 중간중간 가족사와 학력을 슬쩍 넣었다. 그가 만약 이 나라에서 생활했다면 그는 역으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부모의 손에서 컸고, 고졸에다가 효모 관련 실험실 잡일을 하다가 대학교에 특채되었다는 사실. 한 가지 연구에만 몰입하고 주변에서 매진하도록 배려하는 분위기는 사뭇 이곳 연구실의 분위기와 문화가 다르다. 논문 저자에 숟가락 얻는 것을 밥먹듯이 하는 관행과 다르게 많은 역할을 했음에도 사양하는 연구 습속은 차이가 많다 싶다. 이 나라에서 연구원이나 성별차이는 끊임없이 끌어내리는 힘으로 작용하지 연구에 더욱 매진하게 하는 배려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아니 확연한 차이다. 하고싶은 것은 하게 하는 암묵지가 없다 싶다.


글들을 쫓아가면 린마굴리스가 점점 집중하고 미세하게 들어가게 하는 데 반하여, 큰 그림들을 그려줘 통찰하기가 쉬워진다. 잘게 잘게 있었던 지식들을 이어준다는 느낌이 든다. 완독하면 기본적인 밑그림이 그려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다섯장을 말하고 6장은 유전자 편집이나 조작으로 대별되는 가능성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다소 불편했다. 과학 기술이 자본에 봉사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 여러군데에서 반대에 부딪치면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아픈 사람들을 위해 이 기술이 정말정말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꼭 개발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기술에 대한 우려보다는 아픈이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라고. 변명일까 아닐까. 과학이 기술이 언제 그렇게 경제를 생각하고 정치를 생각하고 인문이 몸에 배이는 활동을 해왔단 말인가? 평소의 모습과 너무 다른 사람이 흔히 하는 핑계는 아닐까 하는 그런 의문들이 생긴다. 그리고 마지막장은 생명이란 무엇인가 총괄편이다. 물론 책 제목은 아시다시피  슈렌딩거의 책 제목에서 나온 것이다. 6장에서 하고자 하는 말씀은 알겠지만 빼도 좋을 듯싶은 미련이 들었다.


볕뉘.


출근 길 라디오에서 특강을 해서 든다. 최열 이사장이 비닐 슈트를 입고 나왔다거나 대만이 페트 회수율이 95%인데 우리는 65%라거나, 비닐을 소각하는 방법에서 기후 이야기까지. 하지만 소빙하기도 있듯이 자신은 탄소배출이 식물들로 흡수가 가능하다. led로 24시간 식물팜을 하는데 어쩌구  사업가로서 급히 하지 않으면 안되어 쫓기는 느낌의 두서없는 강의에다가 기후위기 회의론을 슬며시 섞는다. 기후위기로 여기저기 다니지 않는 데가 없으며 하물며 그 일로 돈까지 벌면서, 관점은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채로... ...뭐하는 꼴이람.....그래 그게 내모습 같겠다. 그 꼴. 어정쩡한 그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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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2-11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요구르트 제조기를 사들인다.  500ml 우유를 조금 덜어내고 요구르트 하나를 넣고 골고루 섞은 뒤 자고 일어나는 시간 뒤에 일터에 가져와 냉장보관한 뒤 맛을 본다. 먹을 만 하다.


1. 면역 -  <<면역의 힘>>은 장내 미생물과 운동(근육/력)에 대한 부분을 봤다. 색다른 부분은 크게 없었지만 림프액의 양(15리터)과 역할이 세세하게 적혀있다. 운동에 대한 장도 과유불급이라는 지적도 살펴볼 만하다. 활력을 유지하는 일. 아니 생기가 도는 일상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싶다.


2. 비건 - <<물결>이라는 잡지 창간호의 서문을 본다. 격문을 본지 얼마던가. 비장미가 감돌기도 하는 글. 날선 글이 잘못하면 갇힐 수 있는 여백도 고스란히 남기고 있다. 다른 편의 글들은 좀더 마음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읽어 보려한다.  


3. 제3세계 - <<세여자>>가 우리의 백년이라면, 지금 읽고 있는 <<앨버트 o. 허스먼>>은 유럽과 서구의 백년이라는 관점에서 읽고 있다. 그런면에서 비동맹 독본은 이를 지탱하거나 빠져나간 역사들을 채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다보니 일년의 시작을 역사로 연다 싶다.



볕뉘. 


빈 플라스틱을 보면 애처롭기도 하고 스스로 한심해지기도 하는 것 같다. 빈봉지에 주워 담으며 매번 비슷한 자괴감에 든다. 또 줄인다는 핑계로 연신 택배로 오는 작은 상자나 비닐류 역시 다를 것이 없다. 그냥 동네 작은 시장에서 천원 이천원 장바구니에 담아오는 것이 괜찮겠다고 여겨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구 말이다.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를 보면 작금의 시대를 인류세나 자본세로 것이 아니라 닭뼈의 시대로 본다. 구석구석 그 잔뼈들은 어디서든지 발굴될 것이라구 지금을 상기시킨다. 


선언이라는 것은 늘 미리 가는 것이니 천천히 가보는 참을성을 놓치면 많은 것을 보지도 못하며 잃을 수 있는 것이 많다. 그래도 앞서거니 뒷서거니 일상의 나침반을 놓는다하고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다. 불우의 시절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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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나의

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시간이 똑똑 수돗물 새는 소리로

내 잠 속에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서 흘러가지 않았다.



앨튼 존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그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

송*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며 서**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 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올여름의 인생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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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생성

너 자신을 알라

의 포로가 된 것은 그곳으로부터다.

 

우리가 부르짖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인가우리가 외치는 진보는 '진보'일 수 있는가? ''로 향한 강박과 엘리트의 전유의식인 '보다낫다'는 ''에게 다가갈 수 없으며 '함께해볼 수 있는 것을 낳지 않는다이는 ''를 대상화하면서 ''만을 돋보이는 유아의식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를 너에게서 발라내고 그 토대로 철학의 성을 쌓은 것은 서양이 한 일이다. ''로 환원하고, ''에 근거한 철학과 학문의 발달은 ''는 없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끊어버린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로 갇힌 자유가 모두의 진보처럼 보이는 착시효과가 나타난다. ''만을 배경에 둔 평등을 주장한다이런 되먹임의 반복구조는 모든 구조와 삶을 사회적 유아기에 머물게 만든다.

 

나와 너

 

''는 ''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너로부터 자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몸이 아니라 애초에 한덩어리이자 하나다주관과 객관이 따로 있지 않는 것처럼 객관은 따로 서 있는 것이 아니다주체는 없다서사적인 나나의 곁에 이어진 너로 인해 사회는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흐름 속의 나나만은 없다.

 

하나만을 지향하는 학문은 성립할 수 없다하나의 관념만 쫓는 학문은 살아남을 수 없다동시에 쫓기고 쫓고 만드는 학문만 겨우 뿌리를 내릴 수 있다나는 없다나의 환상을 쫓는 이상 아무 것도 만들 수도 움직일 수 없다나에 머무는 이념과 가치를 쫓을수록 곁의 너의 비참을 목도할 수밖에 없다.

 

 

너를 자각하지 못하는 나의 울타리는 거울같은 방이다온통 나만 보이는 사회적 유아방이다나만 봐달라는 유치원이다자유와 평등과 자매애 외 숨쉬는 공기는 형평이라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다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시체처럼 해부해서나 얻을 수 있는 가치다. ''만의 절대가치를 추구하였기에 구현될 수 없는 이상향일 뿐이다. (결코 나만 실패를 해보았을 뿐-너가 움직인 실패와 실패의 상처로 생긴 흔적은 없다찬란한 ''로 치장할 뿐이자 늘 머물 수밖에 없는 ''에게 다가서지 못한다.)

 

나는 너로부터 자란다주어로부터 맺어진 것이 우리가 아니다동사나 형용사가 움직여야 ''가 드러난다나의 곁은 늘 ''였다너의 경중으로 인해 나의 가벼움과 무거움은 드러난다곁의 움직임으로 나의 움직임이 읽힌다.

 

,,우리,

 

너는 우연한 마주침이다만남은 마음의 겹침이다마음의 시공간을 따로 비워두는 일이다.

 

-너의 주춧돌이 세워진다면나의 곁에 너가 의식된다면 나-너 곁의 그물이 아주 희미하게 보일 수 있다아주 자그만하게 느낄 수 있다.

 

나만의 자유에 경도된 운신은 거울만 보고 달려드는 아이같은 짓이다나만의 평등에 경도된 운신은 어린아이같은 짓이다나만의 독선에 경도된 삶은 악몽이다.

 

 

결사

 

결사는 지독한 덧셈이다나만 바로 설 수 없기에 끊임없이 너를 탐하고 기댄다곁의 너로 인해 간신히 디딤발을 한 걸음반 걸음 디딜 수 있는 것이다-우리그리고 모임이란 결사지금여기 결사가 왜 이리도 허망한 것인가아무 것도 구제해내지 못하는 조직의 단위는 여전히 ''를 뿌리삼고 있기때문이다조직-단체-특정 ''로 이어지는 위계에는 대리자만 있다. ''의 대행으로서 ''만 있다너를 느끼지 못한다너를 느낄 필요가 없다너의 고민이 나로 스며들지 않는다나의 아픔이 너를 타고 '--'의 그릇에 고이지 않는다나의 삶이 섞이지 않는다살아지는 일상을 돌이키지 못한다배회하는 욕망에 결박되어 풀려나지 못한다. (---모임단체 가운데 마음이 번지는 속도는 다를 수 있다삶이 미치는 기울기도 다를 수 있다차이를 갖고 만나고 차이가 삶에 섞이고 부대끼면서 일상은 마음으로 버무려진다.)

 

모임

 

모임은 그릇이다생생한 현장이다차이의 마법사이다파격을 어루만지는 곳이다삶의 예비기지다주고 받고 나누고 격론과 쟁점이 충만한 곳이어야 한다사발통문같은 그릇에 ''는 오목하여 ''를 받아 안을 수 있다고민은 자라고 숙성된다생각은 너로 번지고 깨달음의 길목과 노력시련의 흔적을 가져갈 수 있다삶의 충전소다. ''만의 삶이 아니라 ''의 삶 곁으로 가는 길이다. ''만의 삶이 아니라 '-'의 삶으로 가는 징검다리다.

 

모임은 마음을 닮아있다마음의 끈으로 움직이는 모임들은 살아있다살아있는 것은 긴장을 유지한다긴장하는 것은 빈공간과 만일을 예비해둔다의식적이되 무의식으로 뿌리내려야 한다. ''만을 '우리'만을 위한 모임이지 않기때문에 열려있어야 한다.

 

도시와 삶

 

구획된 도시는 삶을 섞을 수 없다보이는 삶만 존재한다비참을 목도할 수도삶의 실패도 일상에 섞이지 않는다거대 도시 속의 삶에서 사람들은 실패를 맛볼 기회를 잃는다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다삶을 마칠 때가 되어서야 세상은 그렇게 움직일 수 없다고 한다직선과 같은 삶 속에 세상은 자신에 도취된 ''만을 뱉어낸다너로 향한 발성은 나로 옮겨올 수 없다너로 향한 외침은 나에게로 메아리친다나도 없고 너도 없고 삶이란 나와 관계조차없는 시간의 뭉텅일뿐이다--삶에 깃든 웅성거림이나 옹알이조차 들을 길이 없다들리지 않는다나의 생존만이 눈앞에 보이는 경주견의 고깃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사회

 

사회적 옹알이가 필요하다. ''만을 지지대로 쌓아올린 학문의 상아탑은 '학문의 격벽'을 만들었으며 학문과 학문은 삶의 저수조에 흐르지 않고 손내밀지 않는다사상의 누각을 버티고 있는 ''는 더 이상 쓸모도 필요도 없다사회도 삶도 처음부터 간극도 벽도 없었다하늘아래 남도 없어 사람의 호흡으로 지내야한다.

 

 

지역

 

지역은 늘 나만 있어 너를 의식하지 못한다너를 눈치조차 챌 수 없으므로 ''가 한 일들의 여파를 알지 못한다. ''의 목적과 가치만이 계몽의 너를 거느리고 다녀야하기에 나에게 보이는 건 가치와 목적이다. ''도 아닌 것이다그래서 ''는 없는 이상에 끌려다니는 것이다앞만보고 달리는 경주견이다나도 너도 없다시간을 담지 않는다지나온 시간을 담고 나누지 못한다다가올 시간도 품지 못한다.

 

 

그리고 삶

 

삶은 계속된다아주 작은 물빛햇빛에 비치는 웅덩이 속의 잉크 한방울 그렇게 번지는 것이 나-너이다그렇게 출렁이는 그물코에 바뀌는 색은 너로부터 온다나는 너의 여기저기에 있다너는 나의 저기여기에 있다.

 

 

볕뉘.

 

모임과 민주주의의 변주 결사

 

(0) 서사적인 나서로주체나와너

(1) 왜 다른가

(2) 결사학은 왜 없는가

(3) 악마의 변호인묵자의 동이덧셈

(4) 결사는 왜 독특해야 하는가



덧붙임. 6년전 오늘이었구나. 이렇게 생각에 코를 꿰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그 밖을 바라본다. 숭숭 빠져나간 것들 말이다. 그것들을 다시 건져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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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없다고 하자.
이만큼만 있다 하자.

저만큼은 없는거야.
이만큼에서만 구하는거야. 알겠니.





‘진리‘

없다고 하자.
이만큼에서만 있다하자.

저어기에는 없는거야.
여기에서만 구하는거야. 알겠 어.

그러니
저기의 무게를 덜어내는거야.
그만큼 가벼워 지는 거야. 알겠니.

가벼워졌어.
가벼워졌지.
아니라구. 네 짐을 덜어냈다고 하잖아.

여기로만 움직이고 여기로만 상상하구
여기로만 날개짓하구 여기로 말해
저기가 아니라 여기로 날아.
여기로 다녀.

여기로만 날아다녀. 날자꾸나. 다니자꾸나. 알겠지.





‘부활‘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볕뉘. 20세기를 읽고 있다. 벽돌책의 무게가 과분하기도 하지만 곧 읽어낼 듯싶다.  감미로움이 곳곳에 배여있다 싶다. 따라 오셔도 좋을 듯하다. 오딧세이라는 제목이 걸맞다. 제목은 거울에 비춰 봐. 그래. 잘 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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