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으로 가다가 돌아선다. 한밤 중에도 꽃들은 지천이고 흐드러진다. 오르는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는다. 나눈 이야기들의 단맛이 입안에 남아있고 환한 맛도 섞인다 싶다. 오랜만에 들른 선술집의 고정석에 앉아 나눈 얘기들. 팝스 사장님은 클로즈 문패를 걸어두고 열심히 노래 연습중이다. 일찍 문을 연 라이브 카페의 깔끔한 곳에서 한잔과 한보따리 얘길 나눈다.
살다보면 우리를 막다른 골목을 만나는 느낌을 갖기 마련이다. 어쩌지도 못하는 아이러니나 수수께기 같은 상황들 말이다. 하지만 정작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일상이고 대부분이다. 식사 메뉴하나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만든 상황일까 만들어진 상황일까? 그래, 섞여있다. 그래 우리는 엉킨 실타래를 풀고 있다. 꼬이기도 하고 얽히기도 하고, 삶의 능선에서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막 이어진 새로운 실이기도 하다. 어쨌든 일조를 했고 일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굳이 당연한 이야기를 왜 늘어놓는 것이란 말이야. 한 나라의 역사가, 각 나라의 역사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다를 수밖에 없고, 다르게 만나고 다르게 넘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분기점을, 드러나 사건들을 색다르게 보는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무수한 산불, 수해, 태풍에 대한 피해 등등 산사태에 이르기까지 선을 넘는 것들의 행태와 양상이 우리의 상식이란 고속도로와 더 멀리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갇는 시야와 폭을 훨씬 초월하여 다른 국면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체제는 더욱 옭죄이고, 다음 세대는 전 세대의 쓰레기더미를 찾아 일자리를 구한다. 정상적인 판단도 줄거나 부재하며 논쟁이나 회의나 하물며 토론 같은 것들도 갈수록 드물어진다. 그러니 기획기사같은 것도 미디어에서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이다. 갈수록 메인을 벗어나는 것들의 품질은 떨어진다. 어쩌면 사람들은 뇌를 밖에 꺼내놓고 살아지는 좀비들 같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피맛만 찾을 뿐, 자기가 왜 여기 이렇게 서 있는지를 묻지 못한다. 물어보지 못한다. 답하지 않으려한다. 이런 와중에 내새끼 우리새끼는 그나마 귀여운 맛이라도 있다. 더 챙겨준다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하는 것 아니야. 그러면서 가혹했던 지난 날들을 지워버린다. 맥락이라고는 개나 줘버려하고 자신을 지우고 살아낸다. 그래서 좀비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그렇게 맞닿아 있다. 맹신의 끝엔 자신을 돌아보거나 밖에 서서 바라보지 못한다. 자신만의 예외다.
총칼을 들고 국회에 난입한 일들. 사건. 세계민이 모두 보았는데도 없던 일이란다. 그래서 그 혐오의 끝은 바른 사고를 할 수 없다. 이건 제 자식이 또 그런 짓을 저질러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무수한 사람들이 한 배에 탄 듯, 선장이 가르키는 곳으로 일사분란하게 이리도 많이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말은 거품이 되고 법은 누더기가 되고 신조어는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파고 후빈다. 말인지 된장인지. 어처구니 없는 언론과 매체 미디어는 홍수가 범람하듯 한다.

여기 서 너분은 여기 지금의 문제가 구석기가 아니라 신석기때부터라고 한다. 농업혁명때부터 정착하면서부터라고 말이다. 구석기의 유전자가 지금처럼 공복을 부르짖고 꺼르륵 소리를 몸에 챙겨줘야 하듯이 아직 신석기이후를 유전자를 갖을 준비를 못하고 있다한다. 1만 2천년전부터가 문제다.
동의하는가. 하지 않는가. 그것은 커다란 문제가 아니기도 하다. 300-400년전 자본주의부터 출발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찬찬히 들여다보자. 우리는 폭탄을 가슴에 품고 다니지는 않지만 시동이라는 버튼을 매일 매순간 말 50마리 백마리를 끌고 누비고 다닌다. 이 비좁은 지구 안을 돌아다닌다. 이렇게 말을 걸기도 한다.
좁은가 비좁아지는가 우리 일상이 어떻게 되돌아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