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에 여기서는 이 책에서의 인상적인 주장 하나만을 뭉뚱그려서(약간은 번안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그저 그런 삶(mere life)’을 ‘진정한 삶(real life)’과 대비시킨다. ‘그저 그런 삶’은 자신의 삶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며,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자자손손) 보존되기를 매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인바, 지젝이 보기에, 자유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일이다(미국의 대통령은 한달씩 여름휴가를 떠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이다”(Liberal democracy is the party of non-Event).

그러한 ‘그저 그런 삶’의 경제적 버전은 ‘아무일 없는 삶’(흔히 ‘여유로운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열심히 일했다고 저 혼자 ‘떠나는 삶’이며, 무료한 삶을 명품 브랜드들로 치장하느라 등골이 빠지는 ‘럭셔리한 삶(luxurious life)’이다(이상은 지젝의 용어들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본질적으로 아무런 이벤트도 없는 삶을 끊임없이 이벤트화하고 스펙터클화하기 위해 난리법석을 떠는 것이 포스트모던한 후기 자본주의의 삶이다.

사실, 지난 한해 우리사회에서 유행어가 되었던 ‘10억’은 이 ‘럭셔리한 삶’에 진입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을 지시하는바, 어느 사이에 ‘진정한 삶’에 대한 기대나 열망 대신에 우리 삶의 풍경이 된 것은 여기저기서 억! 억! 하는 ‘10억의 삶’, ‘럭셔리한 삶’에 대한 집요한 탐욕이다(물론 여기서의 ‘10억의 삶’은 지극히 서민적인 레벨에서의 목표치이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호사스럽다 하더라도 ‘럭셔리한 삶’의 본모습은 아무일 없는, 더불어 의미도 없는 ‘그저 그런 삶’일 뿐이며, 그것은 살아 있지만 이미 죽어 있는, 산송장(living dead)들의 적극적인 가장(假裝)이자 자기연출에 불과하다.

이러한 풍경을 두고, 지젝은 그가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묻고자 한다. “당신은 진정 살아있습니까?” “(유복한 나라의 국민들이여!) 9.11 이후에도 진정 당신들은 살아있습니까?” 그러한 물음이 전제하는 것은 ‘그저 그런 삶’과 ‘진정한 삶’의 존재론적 차이 혹은 거리이다. 단순히 ‘그저 있는 것들’(=얼빠진 것들) 혹은 ‘좀 있다고 하는 것들'(well-being족들)은 ‘정말로 있는 것’이 아니며, 멀쩡히 숨쉬고 두발로 걸어 다닌다고 해서 정말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열린책들)의 러시아 작가 자먀찐의 표현을 빌면, 인간 중에는 ‘살아있고-죽어있는’ 인간과 ‘살아있고-살아있는’ 인간이 있다. 그는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고 기계처럼 행동하는 ‘살아있고-죽어있는’ 인간과 달리 실수와 탐구와 질문과 고통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을 ‘살아있고-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분류한다.

이 차이에 대한 예민한 의식, 자신이 자리잡고 있는 곳에 안주하며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로 있어야 할 곳에 나는 있지 않구나라는 의식에서부터 ‘진정한 삶’으로의 이행을 위한 준비는 마련될 수 있다. ‘진정한 삶’이란 사건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살아있고-살아있는’ 인간들의 실수와 탐구와 질문과 고통을 대가로 얻어지는 사건이란 러시아말로 ‘싸브이찌에(sobytie)’, 곧 ‘함께-있음(being-together)’이란 뜻이다. 때문에 그것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력공격과 같은 유사-행위와는 가장 거리가 멀다. 진정한 행위(action)란 ‘그저 그런 삶’에서 ‘진정한 삶’으로 나아가는 결단을 담지하고 있는 행위이다.

그러한 이행의 길(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초자아의 길(the way of superego)과 행위의 길(the way of the act). 제국주의의 압제에 대항하기 위한 9.11의 테러리스트들의 행위나 <죄와 벌>에서 19세기 러시아의 전제주의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라스콜리니코프의 노파 살해가 (부정적이면서도 불가피한) 초자아의 길을 보여준다면(‘살아있는 삶’(zhivaja zhizn')은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핵심적인 주제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진정한 행위의 길이며, 함께-있음의 윤리이다. 이것이 9.11의 교훈으로서 우리가 깊이 새겨두어야 할 ‘unknown knowns’이다.(by 로쟈)


우리{미국}는 세계의 부를 50퍼센트나 갖고 있지만 인구는 단지 6.3%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다가오는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진정한 일은 ...이런 불균형의 입장을 유지해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감상주의를 배제시켜야 하고... 우리는 인권과 생활기준의 향상과 민주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조지케넌, 존필거, <새로운 세계 통치자들> ) 

1.

135쪽

옛날 독일 민주주의 공화국의 좋았던 시절에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들을 고루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신념(공인된 이데올로기의 믿음)과 지성과 정직이다. 만일 당신이 믿으면서 지성적이었다면 정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지성적이고 정직했다면 신자가 아니었다. 만일 당신이 신자이면서 정직했다면 지성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패권주의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신중하게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지성적일 수도 없고 정직할 수도 없다. 즉 당신은 어리석든가 혹은 타락한 냉소자이다.

 

2.

248쪽

유럽이 서양에서 온 야만인들에 의해 동쪽의 진주를 두번이나 유괴해간 그런 결과로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첫번째는 로마인들이 그리스의 사유를 유괴해서 통속화했고, 그 다음엔 중세시대 초기에 야만적인 서양인들이 기독교를 유괴해 통속화했다. 오늘 날 세 번째로 그 비슷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테러와 전쟁"이 유럽에 대한 미국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경제적 식민지화라는 길고도 점진적인 과정의 꺼림직한 결과가 아닐까? 그런 과정의 매우 신중한 처신이 아닐까? 유럽은 다시금 서양에 의해, 즉 미국의 문명에 의해 납치되지 않았을까? 미국의 문명은 지금 전세계적인 기준을 설정해놓고 사실상 유럽을 그의 영토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뱀발. 번역이 산만하여 마지막장은 재벌읽다. 요점만 조금 건진다.

1. 우리에 빗대어 본다. 지금에 빗대어 본다. 

2. 이스라엘, 레바논... 민간인에게 무차별 포격. 9.11 사건이후 유럽연합은 미국에 의한 일종의 이데올로기-정치적 공갈에 굴복돼 있다. 이라크에 대해서도,  이스라엘-미국의 만행에 대해서도 지금도 눈치보기에 여념이 없다. 상품의 통로만 활짝 열어제친 채....앙꼬없는 찐빵, 별사탕없는 건빵, 알콜없는 맥주, 카페인 없는 커피.... 적이 없는 현실에 가상의 적을 만들어 놓고 키운다. 르완다 학살, 동티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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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8-07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감스럽게도 거의 '지젝 없는 지젝' 번역서이죠. 여울마당님도 고생하셨겠습니다...

여울 2006-08-0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산만합니다. 볼수록. 아예 되보지 않고 갈무리해보는 것이 나을 듯하더군요. 로쟈님 리뷰가 오히려 도움 많이 되었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