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네가 맨가슴으로

 

그날 네가 맨가슴으로

내려앉은 건 한쪽 다리가

펴지지 않아서였던가

아직 잎새 돋지 않은 살의

한쪽 모롱이가 열리면서

나는 네 전신을 받았다

살붙이여, 잦은 흔들림 외에

다른 살이 없을 때 소금쟁이

떠 있는 수면의 안간힘으로

너를 견뎠다, 피붙이여 23

 

음이월의 밤들

 

음이월의 밤들은 저마다

꽃핀 동백 가지 입에 물었다

종일 흐리다 환한 밤에는

진눈깨비 다녀가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운 다음날 아침엔

사랑이 지나갔다, 발자국도 없이 43

 

벌레 먹힌 꽃나무에게

 

나도 너에게 해줄 말이 있었다

발가락이 튀어나온 양말 한구석처럼

느낌도, 흐느낌도 없는 말이 있었다

 

, 너도 나에게 해줄 말이 있었을 거다

양말 한구석에 튀어나온 발가락처럼

느낌도, 흐느낌도 없는 말이 있었을 거다 64

 

 

그렇게 속삭이다가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71

 

국밥집 담벽 아래

 

겨울 오후 국밥집 먼지 앉은

비닐 장판에 미끄러져 들어온

햇빛, 선팅한 유리 창살 격자를

죽은 듯이 눕혀놓는다 아침부터

테니스 치고 땀에 쩔어 들어온

국밥집, 오늘 하루도 벌건 국밥에

썰어 넣은 대파같이 잘도 익었구나

소주 한 병에 여섯이 달라붙어,

구이집 마담의 무성한 거웃이나

재혼한 친구 마누라 탱탱한 궁뎅이

감탄하닥, 비틀거리며 국밥집

나올 때면 부끄러워라 국밥집 담벽

아래 바르르 떠는 참대나무 앞에서

그만, 얼굴 폭 가리고 울고 싶어라 134

 

멍텅구리 배 안에선

 

밤의 별들은 남지나해에서 선상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 같다 지금도 신안 앞바다

어디쯤 새우잡이 배를 타고 있을 젊은이

몇이 모질게 두들겨 맞고 있을지 모른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폭력이

있다 나도 폭력 앞에서는 아버지!하고 무릎

꿇는다 멍텅구리 배 안에선 어쩔 수가 없다

 

밤의 별들 몸 던지는 유원지 못가에 낚시꾼들

갖은 미끼로 물고기를 괴롭히고, 우거진 덤불

숲 황금 거미 한 마리 홀로, 거룩히 빛나신다. 136

 

이성복은 삶과 죽음의 협곡에서 또 다른 육체로 현현된 자신을 발견하며 스스로는 스스로를 부를 수 없다는 성찰을 이끌어낸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부를 때,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닌 다른 것, 3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이물이 되고 만다. 그러면서 그것을 듣()는 사람을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로 겹쳐진 존재의 여러 가지 얼굴 속에 숨겨버리고 만다. 그 순간, 나는 없다. 오로지 나라 불리는, 무언가 나 아닌 것들이 존재의 허방을 메우면서 세상 풍경을 불가사의한어떤 것으로 바꿀 뿐이다. 162

 

마라가 나를 부를 때, 나는 이미 마라의 목소리로 시를 낳으며 죽음 이편의 공간에서 또 다른 축생의 단계로 접어든다. 그리고 그것은 생멸하는 모든 존재의 내부에서 피와 바람을 몰고 수시로 솟구치고 토하는, ‘마라의 한시적 현존 양태가 된다. 늘 같지만, “부풀고 꺼지고 되풀이하면서변화하는 햇빛 한 덩어리가 자신의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그것이 바로 . 시인은 비참의 가상임신형태로 현재의 삶을 기만하는 행복에게, 그리고 그것이 가상 임신인 줄 알면서도 거기에 굴복하고야 마는 스스로에게 복수하기 위해 여태껏, 더디디더딘 발걸음과 스스로에 대한 악착같은 뒤집기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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