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비가 오면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발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44

 

그의 집 지붕 위엔

 

그의 집 지붕 위엔 두 개의 첨탑이 솟아 있었다

아버지, 하고 그는 큰 소리로 불렀다

 

폐가 앞에서 삼 년을 기다리다가

그는 또 걷기 시작했다 자기를 무너뜨리며

 

온종일 그는 걸었다 자기를 무너뜨리며

다시 걸었다 어두운 궁륭에선 태아처럼 꼬부리고 잤다

일어나 다시 걸었다

 

좋은 약도, 사랑도 소용없이

그는 걸어갔다 열덩어리 해가 꺼지지 않는 길을 68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강이 하늘로 흐를 때,

명절 떡쌀에 햇살이 부서질 때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감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 16

 

푸른 풀이여

 

푸른 풀이여

풀 위에 누운 두려움이여

내가 죽고 무엇이 더 죽어야

푸른 네 줄기가 꺾이겠는가

 

푸른 풀이여

어느 시대, 어느 고을에서도 멀리

무덤 뚜껑을 열고 보는

완강한 물결이여

 

어는 세대로부터

배다른 다른 세대로까지

물결치듯 너울대는

무겁디, 무거운 어깨춤이여

 

자꾸만 안으로 감기는 푸른 눈썹이여

잦아들지 않는, 잦아들지 않는 푸른 경련이여 39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미지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41

 

그대 위의 푸른 나뭇가지들

 

그대 위의 푸른 나뭇가지들

그 위로 밤,

그 위로 하늘, 갈라터진 별들

 

마음의 갈기가 잔잔히 흔들리고

잊혀진 곳에서 수문 열리는 소리

 

그대가 헤매는 거리를 다 헤매고

마침내 그대 자신을 헤맬 때

기다리라, 기다리라

 

기적처럼 떠오를 푸른 잎사귀 58

 

오래 고통받은 사람은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은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71

 

환청일기

 

붉은 열매들이 환청의 하늘 위에 시들고 있다

나는 들지 않는 칼을 들고 내 희망을 자른다

내가 귀기울일 때마다 그들은 울음을 그친다

 

우리의 그리움 뒤쪽에 사는 것들이여,

그들은 흙으로 얼굴을 뭉개고 운다 74

 

밤이 오면 길이

 

밤이 오면 길이

그대를 데려가리라

그대여 머뭇거리지 마라

물결 위에 뜨는 죽은 아이처럼

우리는 어머니 눈길 위에 떠 있고,

이제 막 날개 펴는 괴로움 하나도

오래 전에 예정된 것이었다

그대여 지나가는 낯선 새들이 오면

그대 가슴속 더운 곳에 눕혀라

그대 괴로움이 그대 뜻이 아니듯이

그들은 너무 먼 곳에서 왔다

바람 부는 날 유도화의 잦은 떨림처럼

순한 날들이 오기까지,

그대여 밤이 오는 쪽으로

다가오는 길을 보아라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길이

그대를 데려가리라 82

 

이성복이 그린 화자 나의 삶의 도정은 통과 제의적 도정이다. 치욕적인 삶, 죽지 못하게 하는 어머니, 저 세계로의 길 떠남, 되돌아옴이라는 네 단계의 도정은 시련과 극복, 죽음과 재생이라는 통과 제의의 도정이다. 그것은 삶의 표면에서 일어난 도정이며 동시에 삶의 내부에서 얼어난 도정이다. 그 도정은 그것이 시작과 종말을 같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사적 도정이다. 서정적 자아는 회상의 달무리 속에서 삶과 삶을 이루는 사물을 본다. 그런 의미에서 통과 제의적 도정은 서정적 도정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의 선적 움직임에 관련되어 있는 도정이다. 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