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싸움의 기록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은 채 마루로 다시 기어 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비명,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 테야 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 버릴 테야 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 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꽃어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번 소리 질렀다 이 동네는 법도 없는 동네냐 법도 없어 법도 그러나 나의 팔은 죄 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시장에서 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문 열어 두어라 되돌아올 때까지 톡, 톡 물 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55

 

그 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63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어느날 갑자기 망치는 못을 박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비는 잠들지 못한다 어느날 갑자기 재벌의 아들과 고관의 딸이 결혼하고 내 아버지는 예고 없이 해고된다 어느날 가자기 새는 갓낳은 제 새끼를 쪼아먹고 캬바레에서 춤추던 유부녀들 얼굴 가린 채 줄줄이 끌려나오고 어느날 갑자기 내 친구들은 고시에 합격하거나 문단에 데뷔하거나 미국으로 발령을 받는다 어느날 갑자기 벽돌을 나르던 조랑말이 왼쪽 뒷다리를 삐고 과로한 운전수는 달리는 버스 핸들 앞에서 졸도한다

 

어느날 갑자기 미루나무는 뿌리채 뽑히고 선생은 생선이 되고 아이들은 발랑까지고 어떤 노래는 금지되고 어떤 사람은 수상해지고 고양이 새끼는 이빨을 드러낸다 어느날 갑자기 꽃입은 발톱으로 변하고 처녀는 양로원으로 가고 엽기 살인범은 불심 검문에서 체포되고 어느날 갑자기 괘종시계는 멎고 내 아버지는 오른팔을 못 쓰고 수도꼭지는 헛돈다

어느날 갑자기 여드름 투성이 소년은 풀 먹인 군복을 입고 돌아오고 조울증의 사내는 종적을 감추고 어느날 갑자기 일흔이 넘은 노파의 배에서 동덩이 같은 태아가 꺼내지고 죽은 줄만 알았던 삼촌이 사할린에서 편지를 보내 온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옆집 아이가 트럭에 깔리고 축대와 뚝에 금이 가고 월급이 오르고 바짓단이 튿어지고 연꽃이 피고 갑자기, 한약방 주인은 국회의원이 된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갑자기, *이 서지 않는다

 

어느날 갑자기 주민증을 잃고 주소와 생년월일을 까먹고 갑자기,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풀섶 아래 돌쩌귀를 들치면 얼마나 많은 불개미들이 꼬물거리며 죽은 지렁이를 갉아 먹고 얼마나 많은 하얀 개미 알들이 꿈꾸며 흙 한점 묻지 않고 가지런히 놓여 있는지 72

 

몽매일기

 

1

한 시대의 여물인 고통과 한 시대의 신발인 절망감 너는 나는 물이요 웃는 물이요 너는 표현할 수 없었다 한 시대의 비행과 한 시대의 불혹증을 한 시대의 길가에서 너는 사랑의 편지를 주웠지만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았다 너는 사망했다 그리고 먹고 마셨다 한 시대의 습기와 한 시대의 노린내를 너는 두 개의 입으로 토해 냈다 자고 나면 햇볕에 이불을 말리고 떠벌려 입을 말리고 시들어 갔다

 

2

처음엔 물건이 사라지고 다음엔 물건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한 세대가 오고 또 한 세대가 간다 처음엔 비 맞은 성냥이 안 켜지고 다음엔 비 맞은 해바라기가 빛난다 끔찍하다 비 맞은 공포여, 웃음과 신음의 화촉

 

어떻든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어떻든 살 수 없다는 마음을 업고 발바닥이 땅을 업고 그림자가 실물을 업고 쓰레기가 밥상을 업고 입이 자꾸만, 항문을 빨고

 

천국은 유곽의 창이요 뜨물처럼 오는 희망, 희망 - 늙은 권투 선수

 

처음엔 고통이 사라지고 다음엔 고통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뒤집힌 눈, 잔물결 지는 눈썹, 영화는 끝났고 다시 시작된다

 

3

거룩한 거룩한 거룩한 지연 지루한 사랑 마음이 물질이 될 때까지 견디기 못 견디기 고통은 제가 고통인 줄 모르고 고통은 제가 고통인 줄 미처, 모르고 여기는 아님 여기서 기쁨까지 거리, 파동 여기서 죽음까지 거리, 파동 껴안은 사람들 사이의 무한한 거리, 파동 여기는 아님 여기 있으면서 거기 가기 여기 있으면서 거기 안 가기 여기는 아님 거기 가기 거기 안 가기 여기는 아님 피는 강물 소리를 꿈꾸기 달맞이꽃, 노오란 신음 소리를 꿈꾸기 한 고통이 다른 고통을 부르기 다른 고통이 대답하기 대답 안 하기 대답하기 여기는 아님 78

 

아들에게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그곳에 조금씩 다가갔다 폭력이 없는 나라, 머리카락에 머리카락 눕듯 사람들 어울리는 곳, 아들아 네 마음 속이었다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遲鈍의 감칠맛을 알게 되었다 지겹고 지겨운 일이다 가슴이 콩콩 뛰어도 쥐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는다 지겹고 지겹고 무덥다 그러나 늦게 오는 사람이 안 온다는 보장은 없다 늦게 오는 사람이 드디어 오면 나는 그와 함께 네 마음 속에 입장할 것이다 발가락마다 싹이 돋을 것이다 손가락마다 이파리 돋을 것이다 다알리아 구근 같은 내 아들아 네가 내 말을 믿으면 다알리아 꽃이 될 것이다 틀림없이 된다 믿음으로 세운 천국을 믿음으로 부술 수도 있다 믿음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작부들과 작부들의 물수건과 속쓰림을 만끽하였다 시를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사랑을 응시하는 것이다 빈 말이라도 따뜻이 말해 주는 것이다 아들아 빈 말이 따뜻한 시대가 왔으니 만끽하여라 한 시대의 어리석음과 또 한 시대의 송구스러움을 마셔라 마음껏 마시고 나서 토하지 마라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고향을 버렸다 꿈엔들 네 고향을 묻지 마라 생각지도 마라 지금은 고향 대신 물이 흐르고 고향 대신 재가 뿌려진다 우리는 누구나 성기 끝에서 왔고 칼 끝을 향해 간다 성기로 칼을 찌를 수는 없다 찌르기 전에 한 번 더 깊이 찔려라 찔리고 나서도 피를 부르지 마라 아들아 길게 찔리고 피 안 흘리는 순간, 고요한 시, 고요한 사랑을 받아라 네게 준다 받아라 88

 

더 살 수 없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우연히 스치는 질문 - 새는 어떻게 집을 짓는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풀잎도 잠을 자는가, 대답하지 못했지만 너는 거기서 살았다 붉게 물들어 담벽을 타고 오르며 동네 아이들 노래 속에 가라앉으며 그리고 어느날 너는 집을 비워 줘야 했다 트럭이 오고 세간을 싣고 여러번 너는 뒤돌아 보아야 했다. 58 모래내 1978

 

남들처럼 나도 두어 번 연애에 실패했고 그저 실패했을 뿐, 그때마다 유행가가 얼마만큼 절실한지 알았고 노는 사람이나 놀리는 사람이나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세월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 갔고 나는 또 몇 번씩 그 비좁고 습기찬 문간을 지나가야 했다 99 세월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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