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기회주의자를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삶이란 영원한 투쟁의 삶, 특히 자신과 투쟁하는 삶이라 생각한다...행복하게 지낼 양이면 쪼다로 살면 된다. 행복은 노예들의 범주이다. 15
인민이여 안녕, 민주주의여 안녕
우리는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 전연 겹쳐질 수 없는 이질적인 주체이면서 생뚱맞게 자신은 하나라고 자처하는 풍경을 마주한 바 있다. 그 때 거리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치며 “헌법1조가”를 불렸다. 자신을 해방의 주체로 내세우는 보편적인 인민이라는 외양을 취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사회적 집단의 묶음에 불과했다. 실은 그 시위대를 조직하고 이끈 것은 1천 6백여 개가 넘는 각각의 사회적 욕구와 이해에 따라 결집한 시민사회단체들이었다. 그리고 이 인상적인 장면은 이른바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상대함에 있어 좌파정치가 얼마나 무력하였는지를 보여주었다. 43-44 (촛불은 왜 무력한가? 무엇을 바꾸었나?)
1990년대 이후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민들의 모임”과 같은 형태를 띤 사회운동이 범람하는 것을 목격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운동에서 사회를 총체화하는 정치적 결정을 스스로 떠맡는 주체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순간 사회운동은 국회를 쳐다볼 뿐이다....우리는 어느 새인가 청문회와 감사의 전문가 및 스타가 되어 맹활약을 떨치지만 사회운동을 조직하고 그것을 정치적 결정의 주체로 구성하는 일에는 무력하기만 한 진보정당의 패주를 이미 지난 십 년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좌파 세력이 자유민주주의적 대의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열정적으로 애쓰는 야릇한 시대에 살고 있었던 셈이다. 44 ( 왜 사회운동은 대의제만 강화시키는가?)
달아나는 사회, 그리고 사회-주의 이후의 정치
사회적인 것을 사회로 변환시킬 수 있도록 했던 주요 조건들(조직화된 노동자운동의 등장과 테일러주의, 포드주의에 기반을 둔 경영자본주의의 정착, 국민국가의 일반화, 현실사회주의의 존재 등)이 소멸한 지금, 과연 사회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합리성의 원리를 발견했던 정치가 소생하거나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65 이제 더 이상 국민이란 이름으로 제공되는 집합적인 연대가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안전에 따라 시장이 제공하는 사이비 연대를 구입하는 산산이 흩어진 개인들의 연대이다. ....시민연대는 국민연대의 추상적이고 얼굴 없는 익명성을 대체한다고 자처한다. 숱한 협동조합, 대부조합, 생활공동체, 화폐공동체 같은 것이 유행하고 장려되고 있다...이것이 연대의 해체인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연대의 조직인지 단정하기 어렵다....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시민연대가 신속하게 시장에 의해 납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66-67(대안공동체, 대안 모색은 왜 삶과 진정한 변혁을 어렵게 하는가? 바꾸는 것은 무엇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 변화의 지점을 고민하고 있는가?)
우리가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들을 때 퍼뜩 떠오르는 것은 그들의 법률적 고용 조건보다 흔히 한국에서 ‘4대보험’이라고 불리는 사회보장의 바깥에 있다는, 불안한 처지이다. 사회국가가 만들어 놓은 사회의 이미지, 즉 국민연대의 체계로서의 사회는 그 연대를 사회보장을 통해 물질화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사회보장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회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는 타인과의 연대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이고, 연대에의 가입과 소속은 사회에의 가입과 소속이란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87 ( 왜 비정규직과 실업자는 국민이 아닌가? 국민일 수 없는가? 왜 시민일 수 없는가? 왜 인간이 아닌가? )
프랑스대혁명은 일체의 봉건적인 특권을 폐지함으로서 부르주아에게 자신의 뜻에 따라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에 의해 비참한 삶으로 몰리게 된 자들이 요구하는 끊임없는 변화로부터 부르주아는 끊임없이 위협을 겪도록 예정되었다. 프랑스대혁명이 선언한 인권과 시민권은, 언제나 변화란 가능하며 그를 위해 누구나 행동할 수 있음을 적어도 이념적으로 약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우리가 인간이라면 나아가 시민이라면 나 또는 우리에게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권리 없는 정치란 말은 정치가 없다는 것과 동일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정치의 잘못을 고치기 위한 가능성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변화를 조직하는 행위로서의 정치, 그리고 그것에 참여할 수 있는 주체의 권리 즉 주권은 처음부터 자신의 이율배반,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을 품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77-78 ( 혁명의 관성은 어떻게 150년을 견딜 수 있었는가? 그 조건은 무엇이었나? )
동즐로 같은 이는 ‘주권’의 모순이 어떻게 ‘사회’를 발생시켰는지 추적한다. 그는 권리와 필요를 중재하는 대상으로서 사회란 것이 출현하였음을 밝혀준다. 그리고 그것이 초래한 부정적 효과를 제어하려 억압했던 주권의 모순이 거듭해서 되돌아온다고 말한다. 그건 사고의 방향에서 그는 68혁명의 반란을 사회국가가 만들어낸 사회가 한계에 봉착하면서 마침내 다시 되돌아온 주권적인 개인의 반란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바라본다. 그렇지만 그러한 주권적 개인의 반란은 새로운 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전략으로 흡수되어버리고 만다. 지금 그러한 주권적 개인의 모습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사회 없는 개인의 연대, ‘기업가적 개인’의 연대 아닌 연대로 대체되어버린다. 83-84
제거할 수 없는 정치의 불변항, 노동
정리해고, 비정규직, 더욱 팍팍해진 노동강도, 재병영화된 일터의 문화, 실질임금의 감소 등은 그냥 사회적 현상일 뿐이다. 사람들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노동은 힘들고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박탈당해 있으며 불안정하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사회주의자도 그렇게 말하고 자유주의자도 그렇게 말하며, 노동조합운동가도 그렇게 말하고 자선기관이나 인도주의기관의 활동가도 그렇게 말하고, 마침내 바티칸의 교황도 그렇게 말한다. 모두가 자본주의가 초래한 악에 대하여 말한다. 실업과 빈곤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비참한 삶에 관하여 모두 개탄한다. 노동 그리고 노동하는 자의 사회적 삶은 언제나 우리를 화나게 하고 눈물짓게 하고 또 미치게 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94 가나의 시학을 위한 재료가 될 수 있을진 몰라도 정치의 연료가 되기에는 불충분하다.
자본은 영속적인 실업과 빈곤을 통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결국 자본이 존속하려면 그러한 노동권은 제거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노동권은 인권과 시민권이 적용된 이차적이거나 하위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시민이라는 추상적인 이름의 권리에 구체적인 낯을 부여한다. 노동의 자기 영유, 자기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통해 형성된 인간-시민이야말로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시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권은 인권과 시민권의 하위 집합이 아니라 거꾸로 인권과 시민권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노동권을 제거하면 권리를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인간도 제거하는 것이 된다. 109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가 이뤄지는 유동의 영역은 사실 천부인권의 진정한 낙원이었다. 이곳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자유·평등·소유 그리고 벤담이다.”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은 자유, 평등, 소유라는 천부인권의 신조가 기만일 뿐이며, 그것은 벤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즤적 관념을 은폐하는 관념이라는 것이 아니다. 외려 벤담을 추가함으로서 소급적으로 앞의 자유, 평등, 소유라는 세 가지 낱말이 전연 다른 의미로 채색된다는 점을 말한다. 물론 벤담이 추가될 수 있는 조건은 그것이 바로 상품교환의 세계, 노동이 상품이 되어버린 세계일 때이다. 따라서 ‘덧붙여진’ 벤담은, 결국 사후적으로 노동을 상품으로 만들어내면서 자유, 평등, 소유라는 개념들을 새로운 사슬로 묶어낸다. 114
우리는 게토나 방리유, 파벨라 대신에 자신의 얼굴을 숨긴 채 세계를 향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원한을 드러내는 개인을 볼 뿐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에겐 게토나 방리유가 없는 것일까 물어보아야 마땅하다. 120
어쨌든 사회문제라고 명명된 문제, 무엇보다 실업과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는 나선다. 그리고 나아가 국가는 실업과 결부된 사회문제들, 폭력, 범죄, 알코올중독,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병리현상 따위를 해결하도록 종용받는다. 이 과정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답을 알고 있다고 자처하는 정치세력(대개는 극우 포퓰리즘 정치집단)이 부상한다. 그들은 인종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를 내세워 사회문제의 해결을 내세운다.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은 알다시피 실업의 위험에 직면한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의 세계가 보여주는 끔찍한 풍경에 겁을 집어먹은 중산층들이다. 극우 국수주의 정치집단이나 포퓰리즘 정치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이를 문화적인 문제 혹은 사회병리적인 문제로 가늠하려는 시도를 거부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에 고유한 실업문제이기 때문이다. 121
안전이 사라진 세계에서 번창하는 불안의 분위기는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전염된다. 우리 역시 덩달아 노령화 시대, 백 세 시대에 온갖 질병과 불안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지킬 것이냐고 위협하는 보험업자들과 금융업자들의 공갈에 벌벌 떤다....자본이 노동을 (재) 생산할 수 없을 때, 국가는 그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본을 위한 것도 자본에 반하는 것도 아니다. 123
노동의 편에 설 때에 비로소 실업은 자신을 재현할 수 있으며 아울러 자신을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실업이 노동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여겨질 때, 그것은 그저 비참한 삶의 상태에 불과할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자신을 대표할 어떤 내용도 가지고 있지 않은 지리멸렬한 사회적 사실에 머물고 말 것이다. 이럴 때 실업문제란 환경 문제, 고령화 문제, 가정폭력 문제 같은 수많은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그렇지만 그에 연루된 사람들이 조금 많다는 이유로 조금 더 중요해진 문제일 뿐이게 된다. 127
한 낱말이 정서적으로 쇠락한다는 것은 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김지하의 “신 새벽 뒷골목에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라는 시구에 나오는 ‘민주주의’란 낱말은 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는 평범한 용어가 아니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말을 뇌면서 떨거나 전율했던 이들에게,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사물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128
노동의 새벽에서 노동은 그저 세상사의 한 부분, 즉 객관적인 사태가 아니라 세상에 관한 시점의 차이를 낳는 대상으로 주관화된다. 노동은 바깥 세계에서 벌어지는 삶의 사태가 아니라 갑자기 내가 세상을 응시하는 입장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주관화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노동에 ‘관한’ 시가 아니라 노동이란 대상을 통해 촉발된 새로운 ‘주체’의 시점을 표상하는 시가된다. 그러나 지금 노동이란 말은 시체말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아무 감응을 주지 않는다. 130
인간-시민이란 범주의 등뒤에는 항시 노동이라는 유령이 붙어 다닌다. 그것은 결코 제거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우리는 오직 정치적 공동체와 권리의 주체만이 있는 정치학을 요구하며 노동 없는 해방의 정치를 강변하는 주장이 부쩍 관심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들 역시 평등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평등이란 착취와 그를 대신할 평등이 아니라 ‘시민 됨’의 자격이라는 문제를 둘러싼 평등이다. 특히나 사회국가에서처럼 포용하면서도 불평등을 생산하는 세계가 아니라 ‘배제’가 문제되는 세계에서 평등을 더욱 그런 평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자신의 지위에서 영영 벗어날 길이 없어 보여 마치 특수한 정체성을 가진 자연스런 인구학적 집단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이들...결국 이들에서 배제란 현실은 노동의 정치에 앞서 시민권의 정치가 우선시되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한다. 132
무엇이든 권리의 가면을 쓰고 등장할 수 있는 권리의 낙원이 나타났을 때, 전적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부르주아적 권리이다. 우리는 분명 권리의 낙원에 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공교육을 거부하고 무력화할 수 있는 학습자-소비자의 권리, 파업이라는 노동자의 단결권을 제어하는 희대의 권리로 등장한 손해배상청구권 등만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정체성의 정치를 비롯한 소수자 ‘권리’와 같은 것은 인권-시민권은 실체가 없는 순수한 형식일 뿐이라는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것처럼 보인다. 135
노동을 통해 매개된 민주주의의 전환, 인권-시민권의 제도화야말로 진정으로 민주주의의 재민주화란 이름에 부합하는 것이 될 수 잇다. 한국 사회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민주화란 바로 그러한 사회적 시민권을 합당하게 규정하고 현실화하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민주주의의 재민주화는커녕 민주주의의 탈민주화라고 부를만한 사태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그 어떤 정치적 민주화도 그들이 말하는 경제의 민주화, 탈국가화, 규제완화 등의 이름에 의해 손쉽게 무효화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137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상품 소유자의 사적 소유를 언제나 우위에 둔다. 그리고 노동 역시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그런 세계는 언제나 터무니없는 불평등과 착취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사라지고 있는 사회국가가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연대의 다른 이름인 사회를 통해 고용된 노동자는 물론 실업자, 여성, 아동, 노년, 질병에 걸리거나 재해를 입은 자 등의 삶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오직 시장에 입장할 수 있을 때, 즉 고용될 수 있을 때에만 그런 보호와 안전을 제공받는다는 데 익숙해져 가고 있다. 권리의 토대는 오직 시장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인권과 시민권을 쇠퇴시키고 민주주의를 타락시키는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실업은 사회문제도 아니고 노동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다시 노동의 정치가 돌아와야 한다. 민주주의로서의 정치가 돌아오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141
종합할 수 없는 두 가지, 정치와 경제
경제가 정치를 결정한다는 것은 결국 경제가 정치의 궁극적 대상이라는 말이 아니다. 정치는 ‘사고된’ 경제, ‘반영된’ 경제가 아니다. 제임슨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한 번만 제곱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제곱해야 한다. 경제는 직접 정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외려 정치가 스스로의 대상을 갖도록 함으로서 정치를 결정한다. 따라서 정치의 비밀은 정치 자체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자신의 비밀을 갖는 것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정치 자체의 차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다른 곳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비밀을 풀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정치란 순전한 형식에 속하고 그것의 실질적 내용은 경제에서 찾아야 한다는 식의 아둔한 경제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경제에 의한 결정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앞서 말한 것을 떠올리자면 경제와 정치를 종합할 수 있는 제3의 자리를 찾고자 애쓰지 않으면서, 즉 두 사이의 불가분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양자의 전치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길, 그것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159-160
알튀세르는 전체와 총체를 구별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헤겔이 총체를 주장했다면 바로 그것을 전체란 범주로 전환한 것이 마르크스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말한다. 실은 이 두 개념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그의 평생의 목표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문제이다. “최종심급, 구조화된 전체, 과잉결정, 모순을 불균등성” 같은 명제들은 실은 바로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된 것들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총체와 전체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를 우리는 총체란 중심과 기원을 갖는 반면 전체란 탈중심성과 불균등성 그리고 원인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자본의 한계는 자기 자신인 것처럼, 자신을 총체화할 수 없는 자본의 한계를 전체라는 개념으로 나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경제는 정치를 결정한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다. 경제는 근본적으로 모순에 의해 시달리기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총체로서 완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정치로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177-178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결정하는 경제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시에 흔히 현실경제, 경제현상이라고 부르는 경제도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경제는 두 가지 대립적인 규정의 결합이다. 지젝은 이런 대립적 규정 사이의 차이, 두 가지 경제 사이의 간극이 정치를 낳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지젝은 ‘전부는 아닌’ 다시 말해 그것을 완결적인 총체로 닫아버리지 못하게 하는 적대, 모순(=경제+으로 인해 정치가 등장하게 된다고 말한다. 179
박근혜 정권이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대표하기는커녕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이해를 대표하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권은 과도한 특권을 누리는 나머지 집단에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보통 국민을 대립시킨다. 그리고 사람들은 순순히 그렇게 믿는다. 그러므로 현정권을 비판하는 사회운동에 대한 대중의 전반적 반응은 야박하게 말하자면 짜증스럽고 성가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을 포퓰리즘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자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모두를 대표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우리는 성실하게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착한 국민과 조금도 “특권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우리에게 기생하는 사회의 공적이라는 대립을 통해 더할 나위 없이 인기를 누리는 정치권력과 마주하고 있다....포퓰리즘은 바로 그런 두 제곱된 사고가 불가능할 때 불투명하게 보이기만 하는 정치를 그리기 위해 만들어낸 무력한 표상일 뿐이다. 184-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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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뉘. 어젯밤 치통이 파도처럼 밀려와 애를 먹는 와중, 다시 한번 완독한다. 저자 스스로 비망록으로 쓰고 보여주기 부끄럽지만 애써 읽어주신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몇달 책 속의 책과 고민을 섞어본다. 서재 속 변증법의 낮잠을 강독한 분들이 함께 들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눈다는 것은 책만이 아니다. 경험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또 다른 사유의 방법을 문득 가져가는 것이기도 하다. 책 읽는 이들에게 골방은 그런대로 봐줄 만도 하지만 이렇게 외유를 하는 것도 더 좋은 방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