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감정을 느낄 자아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가 거리를 유지하는 힘을 잃지 않은 채 관계적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인식하라는 하나의 정언 명령이 됩니다. ..낙인찍힌 개념들의 목록 중 총체성과 총체화라는 단어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65

 

사회적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느껴지게 되었다는 맑스의 용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범주이자 특히 루카치의 베버적 유산과 본격 맑스주의적 유산의 어떤 종합의 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근본적으로 전문화, 노동분업, 노동과정 자체에 깔린 사회적·심리적 파편화를 상징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용어는 또한 격자 형태로 이뤄지는 데까르뜨적 확장, 데까르뜨적 공간의 추상화를 상징합니다. 데까르뜨적 공간의 추상화에 동반되는 여러 종류의 인식적 전문화과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심리가 새롭게 분할되고, 그에 따라 육체 자체가 그 감각기관이 새롭게 분할되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개념적 추상화가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76

 

서양의 우리 경험에 따르면, 생태학적 정치는 중산계급의 정치로 되기 쉽고 하층계급의 사람들은 흔히 그것과는 상충되는 다른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생태학적인 목표도 달성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더 큰 집단적인 정치적 기획의 일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기획이 아직 창출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140

 

미적인 것과 욕망의 영역, 심층 성격 등등을 포함하여, 종전 형태의 자본주의나 사회체제 자체의 세력권에서 어떤 의미로 벗어난 구석이 인간본성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오늘날 탈근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무의식에 대한 침투와 식민화입니다. 예술이 상품화되고 무의식 자체도 매체와 광고 등등에 의해 상품화됩니다. 141

 

근본적으로 달라진 오늘의 조건에서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의 그러한 환기를 우리가 되살릴 수 있다면, 그때는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문화의 타락이라든가 인간심리의 타락이라고 부르는 현상들에 대해 판단을 내릴 근거가 되는 어떤 가능한 인간본성의 좌표를 갖게 되리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이 유토피아 및 미래의 시간과 변증법적인 관계에 서야지, 현대사회에 의해 상품화 또는 비속화되고 있는 지금 이곳의 어떤 정태적 인간본성을 연역하는 작업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144

 

사실주의 시대에는 사회적으로 좀더 단순한 상황이라 상대적으로 알기 쉬운 서사적 가닥과 구성들을 통해 총체성의 비전을 달성할 수 있는데, 모더니즘 시기에 오면 총체성의 재현가능성의 위기가 옵니다. 바로 여기서 현실의 각부분이 어떻게 상호 연관되는지를 보여주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제국주의 세계체제 내에서 총체성을 재창출하려는 모더니즘의 비상한 형식적 실험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전지구적 체제 아래서 우리는 그러한 어려움의 또다른 영역에 이르렀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현존하는 형태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어떤 정치적 비판을 한다면, 그들이 이러한 시도 자체를 포기해버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재현이란 불가능한 일이고 총체성이란 없는 것이라고 그들은 결정해버렸고, 그 결과 각기 다른 상황에서 사실주의와 모더니즘 양자에 공통적으로 긴장과 원대한 포부를 갖게 해주던 요소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149

 

정치적·경제적 위기 자체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이 없이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예술가가 이 총체상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럴 이유나 동기가 없어져버리니까요. 다시 말해서, 본질적으로 이런 형태의 인식의 지도 작성은 심미적 동기에 조금도 못지않게 정치적 동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151

 

그들이 포크너와 마르께스에게서 발견한 것은, 작가로 하여금 사회의 표면을 기록함과 더불어 그 좀더 심층적인 역사의 이러한 지속적인 영향도 마치 지진계처럼 동시에 감지하게 해주는 새로운 서사적 장치였습니다. 한국의 역사는 물론 그보다도 더욱 파국적이고 충격적이었을 터인데, 루카치적 명제의 실현을 바로 그런 데서 봅니다. 즉 루카치는 18세기 영국 소설이 사회의 표면을 인지하다가 스콧과 발자끄에 이르러 좀더 심층적인 역사를 발견하고 이를 수용하는 과정을 서술합니다...어쨌든 더 많은 것을 포함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생각건대 더 복잡해지고 더 흥미로워지리라는 것입니다. 153

 

포스트모더니즘 전반, 지금 이 시대 전체가 공간의 새로운 중요성으로 특징지어진다는 점입니다. 모더니즘 시기에 시간 또는 시간성이 중요했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최근에 대두한 맑스주의의 가장 흥미있는 새 형태 가운데 하나는 급진적 지리학자들의 작업인데 도회적인 것과 지리학·지정학 등등을 동시에 분석하는 것으로, 공간적 맑스주의라 부름직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식의 공간 분석을 더 발전시킬 수 있고,..당신이 한국의 상황을 그려내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이런 새로운 의미에서 공간적 변증법이니까요. 162

 

탈근대 시기에 국제주의와 지역주의 사이에서 새로운 변증법이 성립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그것은 대단히 풍부한 정치적 가능성을 담은 새로운 종류의 연결이자 대립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전이 역사적 시기들에는 많은 경우 지역에 대한 집착이 퇴행적인 정치를 낳았는데 오늘날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고, 전체 굮제적 현실과 밀접히 연결될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새로운 공간적 사고의 이점을 찾아내는 열쇠가 이런 데 있다는 생각입니다. 163

 

정치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정치행위가 다중적이라는 사실을 늘상 기억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정치에 참여하고 있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어떤 만족스러운 단답형 해답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한가지 차원에서는 새로운 전지구적 상황에 합당한 어떤 사회주의 개념을 재창조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제주의라는 차원에서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식으로 지식인들간의 새로운 연결망, 지식인들의 전세계적 연결망을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167

 

볕뉘. 인터뷰집이다. 1982년부터 인터뷰한 것을 모아서 발간하였다. 인터뷰 사이사이 연결한 글들의 겹쳐지고 큰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다. 읽다가 1989년 백낙청교수와 대담한 것이 끌렸다. 알튀세르가 스탈린의 몰락에서 맑스를 다시 읽었다면, 소련이 몰락하는 지점에서 제임슨은 사고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백낙청교수는 민족문제와 통일, 삼사중의 현실을 타개할 방법을 되묻고 있다. 몇가지 특징적인 대담사이에 밑줄을 그어둔다. 역사라는 바다에는 역사의 물고기를 낚는 집어등이라도 있어야된다는 말인가? 흘러가고 놓친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총체정, 전체성의 그물에 걸릴 수 있을까...흥미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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