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의 적절한 이름은 자초된 무기력이다

공상과학소설 같은 진보

 

하비 윌러가 언급한 대로 즉각적인 정보는 즉각적인 위기를 부른다이 실질적인 승리가 공상 자체를 공상의 희생자들에게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즉 인류의 일부분이 공상에 의해 위험해지고 노예화되었다. 인류 역사에 유례없는 상황이다.

 

과거에는 모든 발명이 그것의 공상에서 최초 등장과, 구성과 발명의 중간 단계 그리고 작동 장치나 기계로서의 최종 물질화 사이에서 오랜 검증 기간을 거쳤다. 종종 필수적인 도구나 중간재가 우선 발명되어야 했기 때문에 개념이 대담할수록 진행은 느려졌다. 갑작스럽고 때때로 대격변 같은 발명의 동입에 반해 사회는 지금까지는 습관, 관습과 전통적 지혜의 두꺼운 외피에 의해, 천성적인 정신적 나태에 의해 보완되며 안전했다. 발명의 검사와 시험은 내적 오류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사회가 발명의 편의를 도모하도록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이제 우리는 정반대 상황에 직면했다. 최근 기술적 제안은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권리를 확립하는 대신 사회가 그것을 즉각적으로, 어떤 비용으로든지 수용할 수 있도록 변화시켰다.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것은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문화적 지체로 간주된다....

 

중국 철학자 묵자에 의해 스케치된 보편적 사회는 현실화시킬 기술적 주체를 2000년 이상 기댜렸다. 현재 기술이 뛰어난 도덕적 통찰에 뒤처져 있다는 것이 이제 널리 알려져야 한다. 따라서 실제 기술 발명의 힘이 억제할 수 없어지는 순간 그것의 강요와 망상은 현실에 의해 조절되지 않는데, 이 사회가 완전히 받아들인 유일한 현실은 이 물질화된 정신이상과 고정된 사고를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조건에서 기술은 인가받은 비이성이 된다. 301-302

 

볼테르의 진보를 위한 공식-마지막 사제의 내장으로 마지막 왕을 교살하는 것-은 광신도에게 의무를 깨끗이 마치게 하고 사회를 완전히 합리적인 기초 위에 놓은 훌륭한 방법처럼 보인다. 이 가학적인 제의에 충격 받을 사람조차도 다른 분야에서는 미래로의 전진을 재촉하는 방법으로서 과거를 남김없이 파괴하는 초토화정책을 따랐다. 기번의 신조는 문명의 선은 연속적이라기보다 누적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단 과거로부터의 이동이 진보의 기준이 되자, 축적 기능은 박물관으로 넘겨졌다. 274

 

통속적인 용법에서 진보는 공간과 시간에서의 무제한적 이동을 의미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면 반드시 동일하게 무제한적인 에너지가 수반되고 무제한적인 파괴에서 절정을 이룬다. 나의 스승 게네스도 아이디어나 프로젝트에 대해 종종 똑같이 말하곤 했다. “우리는 진행시켜야 한다.” 그리고 게데스는 물레를 매개로 모국 인도의 독립을 추구한 마하트마 간디의 방법과 그의 아이디어는 이미 두 세대 전 사람인 소로, 러스킨, 톨스토이라는 세 원천에서 나왔음을 자부 지적했다. 지난 두 세기 동안 광범위한 기계가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기술 발달이라면 주로 수송 수단들 증기선, 철도, 자동차, 비행기, 로켓 인 것으로 대중의 마음에 각인되었다. 278

 

통속적인 진보의 신념은 이후 진화의 개념을 지지했고 지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것은 불의의 동맹이었다. 헉슬 리가 언급한 대로 진화는 직선적 진보가 아니라 발산, 안정화, 멸종, 진척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유기적 전환에서 변화를 거부하고 연속성을 보장하는 힘은 새로움을 발생시키고 개선을 가져오는 힘만큼 중요하다. 어떤 시기에는 진척이 되는 것도 다른 시기에는 부적응과 퇴화로 밝혀질지 모른다. 여하튼 이제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져야 한다. 변화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거나 자동적으로 가치를 생산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새로움이 개선의 충분한 증거도 아니다. 이것들은 단지 유행이거나 무언가를 팔기 위한 상업적 이익의 광고 슬로건일 뿐이다. 기술 혁신이 모든 인류 발전의 주요 원천이라는 관념은 평이 나쁜 인류학적 우화에 불과하다. 283 284

 

유토피아는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이 현실화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훨씬 더 비참한 문제와 직면하고 있다. 어떻게 그 문제의 최종 현실화를 막을 수 있을까...어떻게 덜 완벽하고 더 자유로운 비유토피아적 사회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문제가 되는 것은 기계화의 실패가 아니라 노력 없는 완벽주의의 성취다. 그리고 이것은 기술적 이상향에서 발견한 사회적 행복의 상을 훨씬 더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다. 이상향의 실제 용도는 어떤 집합적 군집 지역 형태를 예견하는 관측기구같은 서비스였다. 이상향작가들이 제시해 온 다양한 완벽한미래 사회는 사실상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실현할 수 없는 새로운 황금시대의 안내서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은 기술 덕분에 너무 쉬워서 성취할 수 없는 무서운 현실에 대한 주관적 예견이다. 287

 

유토피아와 같이, 공상과학소설의 현재 용도는 현대 문명은 무엇을 추구하며 성취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리 우리가 통제하고 방향을 고치고 피하기 위해 조심해야 하는 유해한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공허한 공상으로서 미래의 자신만만한 탐사를 끝내 버리기는커녕 우리가 그것을 심각하게 취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많은 공상과학소설이 스스로가 믿는 것처럼 우리가 그들의 계획된 미래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충동을 극복하고 급진적으로 다른 목적지, 유기적 발전의 속성과 인성의 필요와 더 잘 양립하는 목적지를 도모해야 한다. 299

 

클라크는 [알라딘의 램프] 장의 마지막에서 그래서 우리는...언젠가 포효하는 공장과 부풀어 오는 창고의 우리 시대가 사라지기를...그러고 나서 우리 후손이 더 이상 소유물을 흩뜨리지 않고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던 것을 기억하기를 원한다.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과 지혜, 웃음과 사랑 같은 평가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300

   

기계적인 세계상과 훨씬 더 급격한 기계적 물질적 진보의 전망, 심지어 간섭하는 엘리트 관료의 통제 아래 과학적으로 운명 지워진 미래에 대한 공포 스토리는 새로운 거대기계를 불가피하고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기 쉽게 만든다. 왜냐하면 모든 탈인간화된 구성 요소는 시스템의 요구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올더스 헉슬 리가 희망하듯이, 너무 없는 질서너무 많음의 악몽간에는 축복받은 간격이 없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음의 악몽이 이미 바로 모퉁이에서기다리고 잇고 있기 때문이다. 유쾌한 모퉁이로부터 멀리 떨여져 여기에 도달했으므로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악몽이 운명적으로 우리를 둘러싸기 전에 소름 끼치는 악몽에 맞서야 한다.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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