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위의  배

 

1

 

너의 말이 쓰다
밤새 너의 말을 벼린다
벼리다보니 말의 무기와 앎의 사리가 생긴다

 

 

어느 밤끝도 매서운 날
너를 만나
슬그머니 무기를 들이민다
이견의 창끝에 살점이 뚝뚝 떨어진다

 


이번에는 이긴 것 같다
피 좀 더 흘릴 것이다
헤어지는 길 속으로 통쾌하다
앎의 사리가 더 몸으로 퍼져 기운차다
너의 그림자가 쓸쓸해보이니 기분은 좋다

 

 

2

 

그를 만난다
너 얘기를 한다
그 아픔을 삼키지 못해
그는 칼 끝을 숫돌로 갈고 있다 한다


이전의 이전의 행적까지 꼼꼼이
일상의 궤도를 지도에 그린단다
서늘한 기운이  뒷정수리에 박힌다


그를 만날 것이다

 

아니 언제나 만난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시선은 스친다

어쩌다 너를 다시 만난다
싫은 자리 마지 못해
만나지만, 술이 돌고, 꼭지가 돌아
맺힌 말이 가슴에서 터져 나온다

 

3


그날이 올지 몰랐으나
그의 고름이 뚝 떨어져 상처가 드러난다
이렇게 그의 숨을 꺾으니 맺힌 응어리가 풀린다

그는 내편이어서 아프다

이제 그(녀)의 말은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는다

 

4

 

그(녀)는 우리 말 때문에
책장 속으로
플라톤의 동굴로 숨어든다
동굴 밖의 그림자가 싸가지없다면서

이론의 이념의 신주단지를 찾아 떠난지 오래
그는 이론의 이론의 이론의 촛불을 찾아
드디어 불을 밝힐 수 있다 한다

 

 

여기가 아닌 저기의 불을 모셔와
불을 지필 수 있다고 한다.
벌써 산의 중턱에 오른 사람이 태반이다.
마을도 잊고
마을 사람들도 잊고
저자 거리의 장사꾼들도 잊고
면벽의 나날은 외롭기는 하였지만
조금만 더 오르면 올라가면, 이론과 이념과 정파의 적만
나의 무기로 섬멸할 수 있기에 자신이 넘친다.

 

 

5

 

산으로 향하는 곳곳 피고름이 흥건하다
떨어져나간 살점이 여기저기다
썩어 문들어진 핏점을 먹고 싹이 터버렸다
산의 봉우리에는 숨이 가쁘고 저기로 가는 사람의 호흡이 거칠다

 

빛은 찬란하지만
어둠을 밝힌다지만
너무 춥고 시리다. 겨울로 겨울로 향하는 길이 가엾다.

 

앎의 사리들로 몸이 버거워 움직일 수 없다

 

6

 

너의 그늘이 사라지자
나의 지지대는 없다
너는 무기가 너무 많아 움직일 수가 없다
산 위에는 사람들로 요란하다
'때문에'와 '때이기'에가 난무한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도 없다
가는 길은 끊어진지 오래
피고름과 살점의 흔적만 어설프게 남아있다
흙과 뒤덤벅이 되어 자란 잡초로만
거꾸로 된 이정표가 안개 속에 흐릿하다

 

7

 

사공을 자처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너의 말에 떨어져나간 살점을 챙겼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떨어진 피고름에 피는 꽃들만 보았어도
내려가는 길을 찾았을 것이다

저기만 모시지 않았어도
여기에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칙연산만 하였어도
산봉우리들은 아직 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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