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그 어리석음의 뿌리
1.
아마 이 책을 보지 못하고 죽었더라면? 후회막급할 것 같다. 절판을 핑계로 읽지 못하고, 짧막한 소개서만으로 지나쳤다면 시간에 바래 잊혀져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재발간(4쇄)되어 저렴?한 가격에 인류가 쌓아놓은 금자탑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이 뭉클하기까지 하다. 솔직한 심경..... 처음부터 호들갑을 떠드는 이유는 나름대로 다짐이다. 헛갈리는 개념때문에 아직 정의수준에도 범접하지 못하고 있는 초라함때문이다.
노예제도 안에서는 노예가 사람이 아니었다. 시민의 자유는 이러한 당연함때문이다. 농노역시 결혼은 물론 생사는 귀족과 영주에게 있었다. 귀족의 자유로움과 풍족함은 여기에 연유한다. 바이올린 1주자. 2주자 하인들로 악단을 조직할 수 있는 풍부함과 가정교사를 입주시켜 가르치는 풍유로움은 지금을 넘어선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하인은 태형은 물론 결혼도 마음대로 시켰다. 똑 같은 인간인가? 아니었다. 소유는 선점으로 때론 땀과 노동으로, 또는 시간의 제한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유는 도둑질이다라고 한다.
소유에 절어있는 우리가 어떻게 이 책 한권으로 그 소유의 인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정신나간 얘기 아닌가? 노예는 잘못되었다고 당신은 이제 확신한다. 그런데 소유제도가 노예제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해본 적이 있는가? 없어져야만 되는 것이란 말이다. 논리상의 모순이 없다. 노예도, 농노도 당신은 풀어주지 않았는가? 왜 소유가 도적질이 아닌가?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는데, 노예는 자유이자 인간이란 말을 어찌 용납할 수 있단 말인가? 피와 살육, 전쟁의 파고가 있고 나서야 아주 조금 그래 노예도 인간이야라는 신음이 새어 나온다. 저자는 연구보고서의 머리말에는 기관의 지원을 충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곧 물의를 일으키게 되고 한 교수의 도움으로 겨우 면책을 면하게 된다.
2.
공기를 소유할 수 있는가? 바다에서 생선을 잡아 소유를 주장하지만 그 바다가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점유를 할 수 있지만 소유를 할 수 없음에도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합당한가라고 되묻는다. 쓸데없는 이유를 가져다붙임으로 그 사유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온갖 반론을 각오하고 그 근원을 다시 문제삼는다. 이 근거는 평등에 있다.
2.1
캐캐묵은 문명의 종말이 다가왔다. 새로운 태양 아래서 지표면도 새로워질 것이다. 한 세대가 사멸하도록 내버려두자. 노쇠한 독직자들이 사막에서 죽도록 내버려두자. 거룩한 대지가 그들의 뼈를 덮지는 않으리라. 세기의 부패에 격분하고 정의의 열정에 목마른 젊은이여. 만일 그대가 조국을 사랑한다면, 만일 인류의 복지를 염려한다면, 자유의 대의를 과감히 껴안아라. 그대의 낡은 이기심을 벗어 던지고 갓 태어난 평등의 도저한 물결에 몸을 맡기라. 그 물결에 잠긴 그대의 영혼은 지금껏 몰랐던 정기와 활력을 얻으리라. 그대의 유약해진 천성은 억누를 길 없는 활력을 얻으리라. 이미 시들어버린 그대의 마음은 아마도 다시 젊어지리라. 맑아진 그대의 눈앞에서 모든 것이 면모를 일신할 것이다. 새로운 감정들이 그대에게서 새로운 관념을 낳을 것이며, 종교, 도덕, 시, 예술, 언어 등이 더 장대하고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대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그대의 신념을 확신하고 심사숙고 끝에 더욱 열정적이 되어 보편적 갱생의 여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대, 사악한 법률의 슬픈 희생자, 빈정거리는 세상에 의해 헐벗고 두드려 맞은 그대, 결실 없는 노동과 희망 없는 휴식에 지친 그대여, 용기를 잃지 말라. 그대의 눈물은 보상을 받으리라. 아버지들이 고통 속에서 씨를 뿌렷으니, 아들들이 환희 속에서 그것을 거두리라.
아아, 자유의 신이여! 평등의 신이여! 내가 이성에 의해 깨닫기전에 이미 나의 마음속에 정의의 감정을 심어준 신이여, 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소서. 내가 지금껏 써내려 온 것을 내게 불러준 이가 바로 당신이오. 당신은 나의 사상을 만들어 주고 나의 연구를 지도하였으며, 나의 정신을 호기심에서, 나의 마음을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소이다. 그것은 내가 주인과 노예 앞에 당신의 진리를 널리 펼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나는 당신이 준 힘과 재능에 의해 말했을 따름입니다. 당신의 작업을 완수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몫입니다. 당신은 내가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지 아니면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아아, 자유의 신이여! 아아! 나에 대한 세상의 기억을 지워주소서. 인류가 자유롭기만 바랄 따름입니다. 마침내 깨우친 인민을 그저 나의 희미한 그림자 속에서 볼 수 있게 해주소서. 고귀한 교육자들이 인민을 계도하게 하소서. 사심 없는 마음이 인민을 인도하게 하소서. 가능한 만큼 우리의 시련의 시간을 줄여주시고, 오만과 탐욕은 평등 속에 묻어 버리소서. 우리를 예종 속에 가두어 놓은 이 영예에 대한 허망한 욕구를 꺾어 버리소서. 이 가련한 자녀들에게 자유 속에는 어떤 위인도 영웅도 없다는 것을 알려 주소서. 권세자에게, 부자에게, 그리고 내가 당신 앞에서는 절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을 자들에게 그들의 탐욕이 가져올 공포를 일깨우소서. 그들이 앞을 다투어 회개하게 이끄시고 남보다 먼저 뉘우치는 자를 용서하소서. 그러면 위대한 자든 미천한 자든 박식한 자든 무지한 자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애 속에 맺어질 것이며, 모두 함께 새로운 찬가를 부르면서 당신의 제단을 세울 것입니다. 자유의 신이여, 평등의 신이여! 416-418
3.
이 책의 이론상의 강점은 지금 대부분의 인문사회서적의 주류가 루소,로크,홉스, 마르크스를 바탕으로 되짚고 있는 반면, 사회계약의 본디 관점을 흔든다는 점에 있다. 재산권만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법체계란 현실은 사회계약론의 사고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급함을 보인다. 그 현실만 되짚어보더라고 현 자본주의를 운영하는 기본 체계의 허술함이 나타나고, 애초 그들이 주장한 생명권만 현실과 법에 반영된다라고 하더라고 제도상 이렇게 간접적인 살인이나 자살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에 의해, 왜 살아있는 동안 굶어죽어야 하고, 세상의 분노를 온몸에 안고 죽어야 한단 말인가? 사회계약론자들의 저류에 흐르는 맹점을 파고든다. 뉴턴이든 물리적인 법칙을 통해 세상을 간명하게 이해할 수 있고 통찰을 맛볼 수 있는 것처럼, 사회적 원리나 법칙 또한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재산권, 소유권, 세상이 아귀가 맞게 돌아가는 기본적인 원리인 평등의 관점에서 조목조목 따져본다.
4.
어쩌면 우리는 조목조목 그 원리에 따라 문제들을 푸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세상의 기둥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주조물이 근거없는 모래위에 지어진 것이라고 판단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화 속의 도시 그리이스 로마를 고고학자가 하나하나 재발견하는 인문의 흔적을 살피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기가 발견한 진리가 이렇게 위태로울 수 있는 것이라고, 분서갱유를 당하는 심경이 어떨지 모른다고 두려움을 안고 글을 쓰는 곤란함이 다가설지도 모른다.
5.
서로 얘기를 나누고 싶은 것은 아나키스트라는 밑줄과 후세 이론가들이 폄하하는 비평과 평론이 아니다. 행간에 묻어 있는 절절함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 그 치밀한 연구와 설득하기 위한 당당함이다. 학문의 전문성에 전혀 굴함이 없는 학문들 사이를 꿰뚫는 통찰들이다. 그 과정의 결들만 살피고 읽더라도 세상을 해부하고, 조금 미동하게 하는 과학의 날카로움, 그 과학에 기대고자한 노력을 흔적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