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노동가치의 보상체계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자의 생계만을 보장할 뿐 미래를 위한 임금을 포함하고 있지 않는 반면, 자본가는 보상받지 못하는 집단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 부를 축적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독립과 안전, 미래의 이익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이 재생산의 맹아, 삶의 영원한 근원, 생산도구이자 생산의 원천에 대한 준비에 대해서 자본가는 생산하는 자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면서도 결코 이에 대해 보상하는 법이 없다. 그리고 노동자의 빈곤, 유한계급의 사치, 조건의 불평등을 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기만적인 거부이다. 우리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라고 적절하게 명명했던 것은 이 기만적인 거부에 다름 아니다." 178
소유! 그 확장의 필요성
프루동이 자본주의적 소유를 비판한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소유를 철폐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그는 소유가 국가의 권력을 견제하여 균형을 이루게 한다고 평가한다. 그 다음에 그는 자본주의체제에서 소유권에 결부되어 있는 불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 이 권리를 보편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소유는 " 모든 사람이 합의하고 있기"때문이다. 모든 시민은 생산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유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프루동은 주저하지 않고 '평준화'에 대해 말한다. 헛되이 소유체제를 파괴하려고 시도하는 대신, 끝에 가서 모든 사람에게까지 소유를 확장시키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루동은 노동조합에 기반한 새로운 '계약'을 제안한다. 179
진보, 그 어리석음의 뿌리
해방된 노동계급은 "관점이 결여"되고 "사업상으로 미숙할"수 있기 때문에 "사업이라는 종목"에 필수적인 입문을 하기 위해서는 "산업게와 상업계의 유력자들"과 동료가 될 필요가 있다. 프루동은 여기서 혁명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기교의 결여, 충분한 경제 지식의 부족과 결부되어 있는 중대한 문제를 건드린다. 레닌은 이 딜레마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선량할 수 있고, 근본적으로 정직하고 대의에 헌신하고 죽음을 무릅쓰지만, 상업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사업가가 아니라서 사업을 배운 적이 없고, 사업을 배울 의사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업을 첫걸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공산주의자는, 지난 4세기 동안 세계가 주시했을뿐 아니라 자본주의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유럽 40개 나라가 주시하고 있는 가장 위대한 세계 혁명을 이룬 혁명가라 할지라도, 10년 동안 가계와 창고를 분주하게 뛰어다닌 것밖에 한 일이 없는 평범한 점원에게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점원은 자신의 일에 능숙하기 때문이다. 책임감 있는 공산주의자, 헌신적인 혁명가는 자신의 일에 능숙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이 이 점에 무지한 것조차 미처 모르고 있다." 183
사회계약론의 그늘
루소 이론의 영향을 받아 "전제정치의 통치 형태를 모방하면서 본능의 정치를 원리의 정치로" 대체한 민주주의는 다시 한 번 실패하기 전까지 전체주의에 빠져 있었다. 모든 일방적인 정치관은 혁명에 이를 수 있는 위험이 아주 크다....하나의 원리가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자마자 제도가 망가지기 시작했음을 경험적으로 논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흡수, 숙청, 배제, 수구, 몰락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인류혁명은 이런 식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사회나 자연에 이미 존재하거나 새로이 만들어지는 것은 "대립하는 요소들의 결합이나 그 요소들의 운동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원주의적 변증법의 이념에 근거하고 있는 정치만이 진정한 진보를 실현할 수 있다....프루동은 아나키 속에서도 질서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아나키가 무질서도 동의어도 아니고 조직화의 부재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191
프루동에 따르면, 사회계약설은 "전적으로 정부의 사상"이다. 본래 사회계약은 계약 당사자에게 외부에서 부과된 권위를 세우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증진시킬 목적으로 '계약 당사자들 간에' 체결된 협약이다. 계약은 뼈와 살을 가진 개인들이 정해진 범위와 기간 안에 그들 간에 '거래'하기로 합의한 행위이다. 사회계약이란 충분한 권리를 지닌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들 사이에서 매우 공정하고 상호적인 관계가 수립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계약은 사회집단 내부에 제한되며, 제삼자의 손에 그들의 자연권의 일부를 양도할 필요가 없게 된다....루소가 계약의 요점을 무시한 채 부차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보이면서 시민들 간의 정치적 관계만을 언급하는 데에서 그쳤다.192
프루동은 개인만이 선하고 사회는 개인을 타락시킨다고 믿은 것이 루소의 가장 큰 오류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사회를 "거짓으로 가득찬 날조자, 약탈자, 살인자"로 간주하는 것에서 출발한 루소는 "법을 인간 위에 놓는" 정부 형태에 도달할 수밖에 없고, 이는 루소 자신도 인정한 바이다. 달리 말해서 사회적 권리가 새로운 초월성에 종속된다. 법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법을 위해서 존재하게 된다...."국민이라는 추상적 집단은 항상 소수의 기생과 다수에 대한 압제를 은폐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묘한 기만을 동원하여 사회적 무질서를 법적으로 제도화하고, 국민으 주권에 기초해서 가난을 인정하는 것이다." 194-5
만약 18세기가 "루소의 고전적이고 회고적이며 과장된 공화주의에 의해서 진로가 변경되지 않았더라면", '합법적으로' 즉 계약 사상의 발전을 통해서 정부에 대한 부정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시몽이야말로 역사적 고찰과 인간교육으로부터 이러한 부정을 추론해냈다. 196
법과 정의, 왜 다시 시작해야하는가
프루동은 법의 타당성에 대해서 "유력하고 부유한 자들을 위한 거미집, 약하고 가난한 자들이 결코 끊을 수 없는 강철같이 단단한 사슬,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잡아들이기 위한 그물망"이라고 과감하게 이의를 제기한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단순한'법, 그것도 극히 적은 수의 법에 대해서만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국가는 만사를 장악하고, 만사에 대해서 법률을 제정하려는 유혹을 억제할 수 없는 반면, 세상에는 이에 대해 가장 단순하면서 자연스러운 진술인 단 하나의 법만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행하기를 원치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지 말라. 타인이 당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타인에게 행하라"는 것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가장 단순하면서 자연스러운 법이다. 그런데 이 원칙은 명백히 법이 아니다. "이것은 정의에 대한 기초적인 공식이고, 모든 타협을 위한 규칙이다. 198
프루동은 정의가 모든 종교적 의미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의는 인간적이고, 전적으로 인간적이며, 인간적인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정의를 인간성보다 우월하거나 선행한다고 생각되는 원리와 가까이나 멀리 혹은 직간접적으로 결부시키는 것은 정의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정의의 정신은 프랑스혁명에서부터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고 프루동은 주장한다. 혁명 이후에 저마다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정의의 이념이 사회생활에서 중요하게 부각되고 결정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201
철학, 왜 헤겔과 마르크스가 잘못되었는가?
자연과 사회 안에서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율배반은 자연과 지성의 법칙이고 오성의 현상이다. 이율배반이 영향을 미치는 모든 개념처럼 이율배반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이율배반은 대립항들을 통해서 모든 운동의 제1원인, 모든 생명과 진화의 원리로 이제까지 그렇게 존재해왔던 것처럼 영원히 그대로 남을 것이다. 이율배반은 대립항들의 균형을 통해서이건, 다른 이율배반들과의 대립을 통해서이건, 단지 균형을 이룰 수 있을 뿐이다." - 헤겔과 마르크스의 삼원적 변증법에 반대해서 프루동은 이원적 혹은 다원적 변증법 사상을 내세운다. 203
뱀발.
1. 딴청을 부리다가 손길의 지근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책을 편안히 읽다. 막스 슈티리너의 약사가 비교적 자세히 나와있다. 그가 극단으로 나아간 이유와 삶이 번갈아 교차된다. 하지만 역사의 강줄기에서 저끝으로 나아가본 삶이나 사상, 그 막다른 골목, 아니 바닥으로 인해 또 다른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것도 후세에 논하는 일이니 평론가의 자세에서 자유롭지 않다. 헤겔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으나 결국 헤겔의 그물망 안이었다는 비평은 지극히 냉혹하다. 암흑같은 어둠을 몸소 여는 몸부림이란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싶다. 고무같이 탄성이 있는 막을 찟고 막후를 보려했지만 결국 보지 못한다.
2. 그 다음장이 프루동이다. 다른 책에서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을 유려하게 설명해서 마르크스와 비교해서 행간을 읽을 수 있었다. 프루동은 어떨까? 몇몇 요약 꼭지를 옮겨본다. 아쉽게도 아직 소유란 무엇인가를 읽지 못했다. 혹시 다른 책들이 있을까 싶은데 마땅한 번역서들이 없어 더 아쉽다. 찰라처럼 비추는 것이지만, 철학적인 배경, 대의민주주의의 한계, 자본주의의 속살에 대한 긍정, 협동조합의 근간이 되는 이론적 모색들 역시 탐이 난다. 지금의 현실에서 다시 한번 새겨야 될 부분들이 총체적으로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