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생태론 (1)

코뮌주의가 마르크스주의에서 배워 온 것은 철학, 역사, 경제학, 정치학을 포괄하는 조화로운 사회주의 체계의 모색 노력이다. 그리고 코뮌주의가 아나키즘에서 배워 온 것은, 위계구조는 리버테리언사회주의 사회를 통해서만 극복된다는 주장, 그리고 아나키즘의 반국가주의와 연방제다.  112

 

세상 사람, 즉 대중도 과거의 진보적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과 너무도 다르게 변하고 있으며 향후 수십 년간은 더욱 그럴 것이다. 자본주의가 초래하고 있는 변화들,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새롭고 광범위한 모순들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우리는 지난 두 세기 동안 거의 모든 혁명운동이 과거로부터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광범위한 중산층을 설득하여 새로운 민중적 프로그램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불만에 찬 소부르조아의 도움 없이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하는 시도는 일말의 가능성도 갖기 어렵다.  126-127

 

국정운영과 정치의 차이

 

국정운영과 정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 뿐 아니라 상호 반대되는 긴장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파들은 계속 이 둘을 같은 것으로 혼동해 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는 국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특권 계급의 이해관계 아래 시민을 지배하고 시민을 손쉽게 착취하기 위해 고안된 기구이다. 반면 정치란, 그 말 뜻 자체가, 자유 시민이 공동체의 일 처리와 자유 수호에 적극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는 1790년대 프랑스 혁명가들이 일컫던 시민주의의 구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라는 단어 자체가 도시를 뜻하는 폴리스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고대 아테네에서 이 말은 늘 민주주의와 함께 사용되는 가운데 시민에 의한 도시의 직접 지배를 의미하였다. 그러다가 수 세기에 걸쳐 이런 시민참여의 정치가 퇴락하고, 특히 계급이 형성되면서, 필연적으로 국가가 등장하고 그 국가에 의한 정치 영역의 침식과 합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139

 

국가와 정부의 차이

 

국가와 정부는 다르다. 국가는 억압하고 착취하는 계급이 피착취계급을 규제하고 강제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임이 분명하지만, 정부 내지 정치는 협의가 필요한 삶의 문제를 평화롭고 공정한 방식으로 다루기 위해 고안된 제도들의 총체다. 공무를 처리하는 시스템으로서의 모든 제도화된 협의기구는 국가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정부의 형태일 수밖에 없다. 한편 모든 국가는 응당 정부의 한 형식이긴 하지만 계급 억압과 통제를 위한 폭력 수단이다. 마르크스주의자와 아나키스트에게는 공히 곤혹스러운 것이지만, 피압박 민중들은 수세기에 걸쳐 군주, 귀족, 관료계급의 횡포에 저항하여 헌법의 제정을 요구했고 입헌 정부의 수립, 심지어 법률과 규범의 제정을 요구했다.  141-142

 

지나치게 단순한 이념인 에코-아나키즘과는 달리, 사회적 생태론은 친환경적으로 구성된 사회란 과거로 돌아가는 형태여서는 안 되고 앞으로 전진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래서 사회적 생태론은 전자처럼 원시적 삶, 내핍 생활, 극기 등을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물질적 향유와 여유를 강조한다. 사람들이 즐겁게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문명 창조와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하려면 지적, 문화적 자기 계발의 여유가 필요한데, 삶의 이런 여유를 마련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기술과 과학을 거부하거나 경시해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행복과 여유 창조를 위해 과학기술을 적극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생태론은 배고픔과 물질적 궁핍의 생태학이 아니라 풍요의 생태학이다. 143-144

 

자본제 사회 전반의 비판

 

코뮌주의는 위계적인 자본제 사회 전반을 비판한다. 그것은 정치와 경제 모두를 바꾸고자 한다. 코뮌주의의 목표는 경제의 국유화냐 아니면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유지냐에 있지 않다. 그것의 목표는 경제를 자치체의 통제 아래 두는 데 있다. 코뮌주의는 생산수단을 자치체의 생존과 지속의 한 방편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모든 생산 기업에 대한 권한은 지역 의회가 갖는다. 그리고 지역 의회는 공동체 전체의 이해관계 충족을 위해 생산 기업이 맡아야 할 역할을 결정한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 만연한, 삶과 노동의 분리는 극복되어야 한다. 그래야 시민의 다양한 욕망과 욕구가 상실되지 않고, 생산 과정에서도 예술적 창조의 도전이 이루어지며, 생산이 제반 사상과 자기정체성의 확립에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된다. 고든 차일드가 신석기 시대 말기 도시 형성에 관해 쓴 글의 제목처럼, "인간은 스스로를 만들어간다. Humanity makes itself." 그리고 인간이 자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지적 발전, 심미적 발전일 뿐 아니라, 욕구의 확대를 통해서, 또 욕구충족을 위한 생산 방법의 확대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인간이 자신을 발견하는 것,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잠재력과 그 실현을 확인하는 것은 창조적이고 유용한 활동을 통해서다. 152-153

 

좋은 삶의 추구

 

코뮌주의의 삶이 실현되면 기존의 경제학은 윤리학으로 바뀐다. 기존의 경제학이 가격 문제와 희소자원에 주로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윤리학은 인간의 욕구를 실현하는 일, 좋은 삶을 추구하는 일에 중점을 둔다. 물질욕과 이기주의 대신에 사람들 사이의 연대, 그리스어로 표현하자면 인간에 대한 사랑philia이 자리 잡는다.  154

 

코뮌주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회에 참석하는 다양한 직업의 노동자들이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자의 자격으로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시민으로서 민회에 참석한다. 그러니까 직업은 특수 직종의 노동자지만 사회 전체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시민으로 참가한다는 말이다. 시민은 특수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자, 전문가, 개인이라는 편협한 신분 의식을 버려야 한다. 자치체의 삶 자체가 이런 시민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 새로운 시민을 받아들이고 젊은이들을 교육한다. 결국 민회는 의사결정 기구일 뿐 아니라 복잡한 공동체의 문제, 지역의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사람들을 시민으로 키우는 교육의 장소이다. 153-154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당시 지역자치체의 고유 기능은 도구적인 것이 아니요, 경제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당시 아테네인의 삶을 돌아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판단은 맞는 것 같다. 지역자치체는 사람들이 모여 연합하는 무대요, 주민들이 함께 사회적, 정치적 조율을 이루어내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런 공동체적 삶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지역자치체는 인간이 이성, 자기의식, 창조성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구현하는 탁월한 터전이었던 것이다. 결국 고대 아테네인에게 정치는 현실의 정책 업무를 다루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안고 있는 시민의 활동이 곧 정치였다. 모든 시민은 도시의 제반 활동에 윤리적 존재로서 참여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158

 

아나키즘과 차이

 

 

코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점이 많지만, 진정한 형태 즉 순수한 형태의 아나키즘과는 더욱 그렇다. 아나키즘 앞에 무정부주의적, 사회적, 신, 심지어 리버테리언 등 어떤 형용사가 붙어도 사정은 같다. 코뮌주의를 아나키즘의 한 변종으로 보는 것은 두 사상의 차이점을 간과하는 것이고, 두 주의가 민주주의, 조직, 선거, 정부 등에 대해 서로 상충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코뮌주의라는 정치적 용어를 만든 셈인 파리코뮌 투사 귀스타브 르프랑세는 단호히 선언했다. " (나는) 코뮌주의자다.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코뮌주의는 권력의 문제에 관여한다. 자칭 아나키스트들입네 하는 이들의 소위 공동체운동과 사뭇 다른다. 공동체주의자들이 벌이는 사업의 예는 서민차고지, 인쇄소, 생협, 뒷마당 가꾸기 운동 등이다. 하지만 코뮌주의자들은 온 힘을 모아 시의회 선거에 참여한다. 왜냐하면 시의회는 잠재적으로 매우 중요한 권력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또 코뮌주의자들은 시의회로 하여금 법률적 권한이 있는 마을 회의를 만들게 한다....이렇게 만들어진 마을회의는 그런 국가기관들의 법적 지위를 박탈하고 무력화시키는 노력을 할 것이다. 그러면 법률적 권한을 가진 마을 회의는 권력행사의 실질적 엔진이 된다....다음단계로 자치체 간 동맹을 맺고 그 동안 국민국가가 했던 역할에 도전하게 된다. 161-163

 

마지막으로 코뮌주의는 아나키즘과 달리 다수결의 원리에 따른다. 많은 사람이 모여 의사결정하는 데는 이 방법이 가장 공정하다. 본래의 아나키즘은 이 원리가 다수에 의한 소수 지배의 원리로서 권위주의적이므로, 다수결이 아니라 합의에 의한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합의란 것은 다수의 결정에 한 사람만 반대해도 무산되는 것이다. 따라서 합의를 고집하게 되면  사회 자체가 무너질 위험이 있다. 소수자의 권리는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목표로 하는 자유의 구체적 현실에서는 반대 의사를 지닌 소수자의 권리가 다수자의 권리만큼이나 언제나 충분히 보호되도록 해야 한다.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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