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움직인 동선에 대해 피터지게 절망하라(作)

통합진보당 사태, '들어나 보자' 토론회 열려
부정·중앙위 사태·비대위·사퇴와 혁신방향 등 4가지 키워드 놓고 열띤 토론

 

뱀발.

 

1. 토론자 세분의 토론을 듣는 내내, 색깔은 다르지만 말 몇마디라도 아끼려는 배려가 느껴진다. SNS로 상황을 보는 것이 피상적이라면.  그 사람들 사이사이를 관통하며 넘으려는 분위기가 애틋하다. 민*련 뒤풀이 자리에 토론회 참석한 인원들이 합석한다. 좀더 솔직하고 좀더 강변하고, 좀더 시간의 길이를 넓혀 생각해보려 하지만 자신의 색깔, 그 자장을 벗어나서 교감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자리가 만들어진 힘의 근원은 평당원의 절박함과 절실함이 이끈 사소함이란 것에 놀랍다. 그 동기이자 친구들의 연대와 시도도 괜찮다. 지역의 정당원에게 새로운 접근의 씨앗으로 번지면 좋겠다는 욕심도 은근히 스며들었다.  좋은 사람들이고 열정이 있는 분들은 쉽게 만나기 힘든데 말이다.

 

2. 당내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당외를 바라보는 시선이 함께 필요한 것은 아닐까? 1%, 2%를 얻었다면 이런 논의자체가 없지 않겠나 싶다. 220만 + 알파의 시선이 녹아있는 진보에 대한 열망과 눈높이에 대한 정치적인 이해가 있으면 안될까 싶기도 하다.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은  누누이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합리적인 보수주의자이다. 그는 최근 한 컬럼에서 진보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그 그릇을 어떠한 형태로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의 현상황이 똑똑한 지도자는 많은데 현명한 지도자가 없는 것은 아닌가라고 일침을 놓는다.

 

3. 집권하려는 진보는 시간에 강한가? 자신의 시각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을 아파했던가? 평범한 사람들이 진보그룹에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지극히 상식적이고,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판단은 아닐까? 시간이 지나더라도 진보주의자는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도 원칙도 본받고 싶은 흔들리지 않는 지극히 작은 파편은 아닐까? 선거때면 그 아이템을 가지고 나타나는 출몰에 길들여진 것이 아니라 색깔이 있는 정파, 이왕이면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패권에 벗어나, 늘 소수파의 의견과 아이디어가 시간이 지나도 다시 들어보고 운영에 접목시키는 유연함들을 더 갈구하는 것은 아닐까? 

 

4. 언론의 비이성적인? 행태를 뛰어넘는  통합의 정치력은, 이미 현실이 되어 괴물로 다가와버린 상황이지만  해결해나가는 정치력를 논할 수 있을까?

 

5. 어쩌면 지역은 다른 목소리와 다른 현실을 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처지에 맞는 또 다른 논의들이 또 다른 작은 국면을 만들어내지는 않을까? 진성당원이 옛날의 영광을 논하는 분회모임들이 아니라, 옛날의 부끄러움을 안고 신입당원의 파릇함에 몸도 참여도 내어주는 헌신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6.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고들 얘기하지만, 늘 시간은 되돌릴 수 있다. 늘 시간은 새롭게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국면이 지나고, 선거가 지나도 있는 사람은 그대로 이다. 정치적인 제도 안의 힘의 발휘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여전히 그물안에 당원들과 바라보는 사람들은 별반 변한 게 없다. 그러니 그 사람의 삶의시선에 눈돌리고 사회문화적인 자산을 위해 차곡차곡 저금하는 일밖에 없다. 이렇게 고통스럽다면, 그 고통의 힘으로 돌리려는 노력이 더 바지런해야 하지 않을까? 저기 멀리있는 서울의 시선에 고정되는 것도 좋지만 지역의 시선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사후의 이야기지만 지역의 다른 이견과 또 다른 방법적인 과정은 없는 것은 아닐까?

 

7. 시간은 만들 수 있다. 절박한 시선과 아픔이 응축된다면 천명?이 넘는 아주 작은 곳을 새로움의 색깔을 퐁당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정치적인 먹거리만에 대한 논쟁을 안고넘어서 일상을 후비는 진보의 반복되는 답습(패턴)을 논할 수 있다면 어떨까?

 

8. 개인적으로 통진당 지지자이자 이름만 년수만 오래된 당원이다. 이번 선거에선 잠재적 숫자확보의 가능성을 믿었기에 녹색당을 지지했다. 하지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건의 배후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것이 진보의 뿌리이자 나처럼 진보연하는 이들의 지난 궤적에 더 관심이 많다. 언제나 그들은 더 똑똑하고 더 당당했던 것은 아닌가? 심리적인 우월함? 과연 믿을 만한 생각인가? 옆의 일상을 살아가는 그(녀)들에게 기대거나 삶을 올려다보기나 한 것인가? 삶의 연대로 이어져 있는 그들의 틈과 틈 사이에 관심이나 있기나 한 것인가?

 

9. 정치는 순간을 살지만, 그래도 사회문화는 다른 시간을 살 수 있다. 너-나의 느낌은 현실에서 또 다르게 시간의 씨앗을 뿌릴 수 있다. 너-나의 시간이 만들고 키우고 자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느낌을 너-나의 일상이란 인큐베이터에 키워보는 것이다. 더 떳떳하게 하고싶은 것은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해야된다는 강박에 벗어나 하고싶은 것들의 연대, 그렇게 일을 저질러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런 시간들이 다르게 자라고 모아져, 그 시간들을 같이 키울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 사회문화적인 자산이 없고서는 늘 뿌리채 흔들리는 것은 아닐까? 진보는 도나 모가 아니라 개,걸,윷의 풍부함에 있는 것은 아닐까?

 

10. 정말 쓸데없이 생각을 키워본다. 정작 당사자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하지만  쓸데없고 딴청을 부리는 이도 많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엄중한 시국에 말이다. 하지만 엄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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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적시간, 사적시간 그리고 진보의 재구성(酌)
    from 木筆 2012-06-01 18:01 
    먼댓글에 모임과 생각을 잇는다. 시간에 대한 맷집을 갖거나, 시간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균질하지 않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진보가 시간에 대한 강박을 갖지 않으려면 공간과 시간이 대한민국 땅덩어리가 다 균질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 자신이 몸담고 호흡하고 생각의 결을 만질 수 있는 생활의 시공간이 이질적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진보의 문화적 진부함을 되새겨 보자는 것이다. 정치적 사건이 있으면 서울말, 서울평, 서울시선으로 도배될
 
 
여울 2012-05-2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댓글의 4년전 기억을 더듬는다. 어쩌면 4년마다 반복되는 통증의 패턴은 이렇게 비슷한지? 아마 4년이전, 그러니 8년전 승리?에 고무된 이면은 너무도 고루했다. 그리고 분당의 절차를 밟았다. 어쩌면 진보연하는 분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서 순수한 것이 아니라 순진하기까지한 진보의 걸음걸이에 딴지를 건 생각들이다. 여전히 물밑에 담고 있는 마음이 그러하다면, 열정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면 한번 곰곰 따져보자. 아마 늦지 않았을 것이다. 미래는 늘 과거에 연유한다. 그만큼 그 수준만큼 역사를 밀고간다. 다행이 운이 좋은 것은 아니었을까? 명심할 것은 작아지고 낮아지는 수밖에, 주변에 발닿고 있는 곳이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