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복

 #1. 옹알이를 하다가 말문이 빨리 트인다는 것은 비디오처럼 무차별적으로 언어를 남발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시작한 말에 엄마가 얼마나 반응을 보였는지의 여부라 한다. 아이는 어른의 시각으로 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감으로, 몸에 닿는 반응만을 보임으로써도 눈에 띄게 나아진다고 한다.

#1-1. 시를 배운다는 일, 건축의 언어를 배운다는 일, 사랑의 언어를 배운다는 일, 그림도, 음악도 옹알이처럼 옹알거리는 앎들은 관계를 요구하지 않을까? 그저 무채색의 관전과 비평에 익숙한 앎이 아니라  몸속으로 조금씩 느끼고, 그것을 틔워주는 사회적 관계로부터 어른이는 어른으로 자라는 것은 아닐까? 몸에 새로운 언어를 틘다는 것은 나이의 문제도 지능의 문제도 아니라 얼마나 예민하고 즐기는지 그것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2. 책에서는 많은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고정적인 관점을 문제삼고 있다. 흑백논리와 어린이를 내려다보는 어른의 시선이다.  좋은 행동, 긍정적인 감정, 좋은 결과는 하나의 묶음으로 보고, 그것이 권선징악처럼 나쁘고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좋고나쁜 흑백의 빛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사이에 무지개처럼 많은 빛깔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영리함과 영악함, 긍정적인 감정이 높은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에서도 높은 수치를 보일 수 있다.

어른의 관점에서 아이를 보면 많은 것이 어긋난다. 아이의 수면부족은 어른과 달리 피곤하지만 견딜만한 것이 아니다. 지능도 변한다. 칭찬도 어른들에게 효과적이지만 아이들에겐 내재적인 동기를 훼손할 수도 있다 한다.

#2.1 일관되지 못한 양육태도가 과잉행동을 부른다한다. 진보적인 아빠들이 전통적인 아빠보다 오히려 더 그럴 수 있다한다. 불편한 진실에서도 김두식씨가 지랄총량의 법칙을 이야기하면서 늘 아이에 대한 맘속시선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말한다. 표현은 하지 않지만 맘속에 있는 아이를 투사하는 욕망이라고 하면 맞을까? 어쩌면 아이들은 더 예민하게 하늘의 먹구름처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격오지에 유배되어 있다. 그 격오지 사회의 관계가 오히려 경쟁과 영악함과 왕따를 재생산하는지도 모른다. 어른과 이웃과 다른 관계가 자랄 틈이 없다. 오늘도 도서관에 그 영악함과 미숙함이 범벅이 아이들이 부모가 모시러 오는 마감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3. 점-선-면을 보다. 칸딘스키의 미술에 대한 견해를 모은 것이다. 점의 효과,역할, 선의 굴곡과 위치, 면의 분할과 모양, 리듬에 따라 설명을 해놓은 것이다. 지금이야 그런 내용에 대한 오해가 없겠지만 통합적인 예술론에 대한 학문적 열망이 팽배했던 것 같다. 좀더 다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없을까 했는데 구도나 배치, 효과에 대한 앎들에 친숙함을 더하고 만다.

 

#4. [아주 특별한 관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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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1. 정은미화가의 그림이 눈에 확 들어왔는데, 안타깝게도 며칠이 지나자 시간에 급속히 바랜다. 그림 몇점 더 얻으려 인터넷검색을 해보니 구할 수 없고 깊은 맛이 없어 그치기로 한다.  전주 경기전에 남은 어진을 비롯해 윤두서를 비롯한 초상들과 얼굴의 깊숙한 묘사가 다가선다. 

2. 관계의 언어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을까? 그 관계를 지탱하는 언어가 아직 생기지 않아 세속화된 연애-섹스-결혼과 구별도 되지 않는다면 현실 속에서 관계는 어떻게 자랄 수 있을까? 옹알거릴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우정이나 사랑이 삶과 근친하다면 우정의 방법도 사랑의 기술도 하나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현실이 선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관계의 성숙이라는 표시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 

3. 양육쇼크 뒷부분 언어발달에 대해서는 촘스키의 언어의 생성문법 언급이 있다. 여러 연구 결과로 온전하지 않은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4. 점, 선, 면 나누고 싶은 것들은 많다. 가상이란 삶 속에 화성은 아니더라도 대위를 하고 싶은데 주춤 주춤거리며 잊혀질까 겂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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