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행위나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 개인의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상호주관적, 혹은 사회적 조건에 주목하면서 바로 인정을 이 조건으로 규정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역으로 개인을 무시하는 행위를 비윤리적 행위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무시를 고착화시키는 사회를 병리적 사회로 비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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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네트가 정의의 타자로 제시하는 것은 '배려'를 강조하는 윤리적 입장이다. 왜냐하면 이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특수한 사람들에대한 비대칭적 의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라는 정의의 원칙의 경계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인정"을 일종의 새로운 행위 및 사회운영 원칙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으며, 바로 우리는 이 인정 원칙을 정의의 원칙과 배려의 원칙을 넘어 이 양자를 포섭할 수 있는 제 3의원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의로운 행위나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 개인의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상호주관적, 혹은 사회적 조건에 주목하면서 바로 인정을 이 조건으로 규정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역으로 개인을 무시하는 행위를 비윤리적 행위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무시를 고착화시키는 사회를 병리적 사회로 비판할 수 있다.
한 공동체 내에서 각개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적 보편성에 대한 인정이며, 이 개인의 생활방식과 능력에 가치를 부여하며 연대를 형성하는 것이 개인적 특수성에 대한 인정이며, 친밀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정서적 존재로서의 개인에 대한 인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인정의 형태를 개인의 정체성 차원에 따라 차별화시킨다면, 인정의 원칙은 정의의 원칙이나 배려의 원칙과 서로 구별되면서도 연결점을 갖는다. 왜냐하면 권리의 인정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라는 정의의 원칙에, 그리고 사랑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알며 이들을 보살피려는 배려의 원칙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인정의 원칙은 정의의 원칙의 타자를 포용하면서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잇고, 역으로 배려의 원칙의 타자를 포용하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갖는다. (옮긴이의 글에서)
루소 - "미개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산다. 이에 반해 사회 속의 인간은 항상 자신의 바깥에서 살면서 오직 타인의 입장 속에서만 살려고 한다." 34
헤겔과 루소 - 하나의 총체성으로 형성된 것이 두 부분으로 붕괴한다는 것은 헤겔의 해석에 따를 때 이미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규정된다. 이에 반해 루소에게 이상적 출발상태는 일종의 전체가 아니라, 고립된 개별자들의 병존이다. 그리고 루소가 잘못된 사회적 발전과정으로 본 것은 자기관계적 존재가 함께 모임으로써 자신의 중심축을 상실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두 사상가는 성공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을 달리 보고 있다. 루소에게는 가능한 극단적인 자족상태가 성공적 삶의 조건이라면, 헤겔에게 그것은 공동선에 기초한 상호간의 의무이다. 37
루소는 아무런 장애도 없는 자기관계를, 헤겔은 공동체에 살아있는 인륜성을, 그리고 마르크스는 노동을 통한 대상화를 각각 인간의 만족스런 자기실현의 전제로 보았다면, 니체에게 그것은 삶을 긍정하는 가치지평이 실행력 있게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학적 해석모델은 철학만이 점증하는 윤리적 상대주의의 도전에 맞서 무언가 보편주의적 전제들에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론적 도구를 예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경험적 연구를 통해 루소, 헤르더, 훔볼트가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기했던 문제를 해명하려 했다. 다른 한편 역사주의를 통해 극복된 것이라 여겨졌던 역사철학적 사고유형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증대되었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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