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반진리 그리고 삶
말의 DNA, 논리의 DNA - 방사선조사식품에 관련하여 작은 강연을 이어듣는다. 피곤의 누적이다.들으면서 기술-경제논리가 결합하여 말을 만든다는 느낌이 든다. 안도현의 연탄재가 아니라 연탄이론이, 탄음식이론 등으로 기존 관념을 전도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싶다. 그런데 그 말의 DNA는 경제의 매듭만 있고, 모든 다른 논리를 숨겨버려, 다른 논리를 복속시키고 있다. 기술을 먹어치우고, 과학을 자양분으로 해서 만든 논리는 다른 담론의 DNA를 괴멸시켜 증식을 시킨다. 이렇게 다른 것을 거세한 논리를 만든 이들은 전도사가 되어 생태-사회-문화-입장들의 가치를 곁가지에서 잘라버린다. 몇차례 말이 섞이면서 아-아를 반복하다보면 프리젠테이션의 이면이 가리고 있는 배후는 오간데가 없다.
과학과 기술에 경제란 포인트만 둔 논리의 횡행 속에, 또 다른 논리가 모두 서열화되거나 작용을 하지못하게 한다. 삶은 진리다. 이런 반진리가 사실과 위험성을 숨기고 삶으로 넘어오고 있다. 이런 말의 디엔에이에 대한 대응과 면역은 어디에서 생길까? 삶의 관점으로 다양한 입장과 관점으로 다른 디엔이를 접붙이는 방법으로 가능할까? 경제만의 논리를 배제하고 그곳에 소비자와 주부와 생산자와 이해관계자의 이해를 접붙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접붙이는 것이 그 기술과 과학을 지금을 살아내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과학과 기술의 괴물에 잡혀먹히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을 삶의 사람의 수중에 넣는 일은 더디지만 그 결들에 다양한 입장을 예민하게 결합시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
뱀발. 정리를 하다보니 지난 글이 생각난다. 다시 말미를 보니, 진리가 살아갈수록 진리의 씨앗이 만들어질 때, 좀더 반진리가 거동할 수 없도록 혼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이다. 삶에는 환원논리가 작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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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 있는 씨앗이 잠재적으로 거기에 있는 것처럼 진리는 아직 기꺼이 행동하지는 않는다. 가움과 얼음 얼게하는 추위는 씨앗이 있는 곳에서 발아를 중단시킬 수 있으며 과일을 맺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 전염병은 진리의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얼음얼게 하는 추위이자 가뭄이다. 전염병은 진리가 살 수 없는 곳에서 지배한다. 그러므로 눈은 묘목이 무엇을 할지 또는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보다 가뭄과 추위의 예방에 진리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염병에 일차적으로 집중해야 한다. 묘목은 삶을-주는-태양을 향해 가는 자신의 길을 알 것이다. 305
진리는 환경뿐만 아니라 자신과 충분한 접촉을 의미한다. 진리는 다른 사람의 방식과 구별되는 자기 자신의 방식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동료에게 그가 살아갈 수 없는 진리를 강요하는 것은, 그가 지니고 다닐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의 실존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비참할지라도 잘 정돈된 생활방식의 균형을 깨는 것을 의미한다.292
진리는 지각하는 '살아있는 것'과 지각되는 '삶'사이에 충분하고 직접적인 접촉이다. 그 접촉이 좋을수록 진리의 경험은 더 충만하다. 살아있는 지각의 기능들이 잘 조정될수록 진리는 더욱 포괄적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지각은 살아있는 원형질의 움직임의 조정 정도에 따라 정확하게 조정된다. 그러므로 진리는 '살아있는 것[사는것]'과 살아지는 것 사이에 상호작용하는 자연스런 기능이다. 진리는 당신 속에 있고 당신 속에서 작용한다. 진리를 살아간다.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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