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움직인 동선에 대해 피터지게 절망하라(作)
맥주 캔을 따서 한모금 들이키는데, 문자가 온다. 살아있으면 응답하라....그래서 함께 자꾸 늦어지는 지역 방송의 시스템을 운운하며 시시콜콜한 선거이야기를 한다.
그러다보니 십여년쯤 일이다. 엠비로인해 나서지 않은 사람이 나서고, 말도 되지 않는 것이 말 꺼리가 되는 현실이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자꾸 민주당이 눈앞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외려 진보에 눈길이 간다. 또 한번의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몸으로 열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며, 할 수 있는 것도 별반없다. 온몸으로 성장을 말하는 자본주의신자임이 여실히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진보가 정녕 진보라면 이 환상의 잔치, 이 땅의 어리석은 알을 깰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그래도 한차례 준 것이 아닌가 한다.
죽은 노무현을 빌미로 그들은 성장을 이야기할 것이다. 어떻게 되는 성장인지 모르고 그저 무의식에 감염된 신자들앞에 발전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 치적과 입발린 소리를 어쩔 수 없으므로 또 되뇌일 것이다. 그래 이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다. 디제이와 노무현. 발을 딛고 선 상황은 변함없다. 시민사회단체는 별의별 프로포즈를 다했다. 정치한다고, 제도권의 등을 업고 무엇을 한다고 그렇게 명멸한 수많은 별과 진로를 보았다. 그런데도 반엠비의 응집력만 있다. 아무생각없는 반대의 응집력만 간신히 상황을 유지해나간다.
이 단단한 알을 뒤덮고 있는 자본의 공기와 그 호흡의 중독은 다른 공기로 살 수 없다 한다. 자본주의신자는 자본의 증식이 없는 순간, 목숨이 다한 것으로 안다. 그래서 알을 깰 수 없다. 진보의 바늘들. 진보의 생각들이 아니라 진보의 몸들. 진보의 다른 삶들이 어쩌면 조금씩 조금씩 그 단단한 껍질을 조금씩 조금씩 금을 가게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삶의 동선이 조금씩 다른 공기와 다른 호흡의 맛을 보여줄지 모른다.
구호를 믿을 수 없다. 반대로 나온 구호나, 삶을 담지 않은 구호를 보아왔다. 좋아할 수 있으나 좋아할 것이 없다. 행여 반성한다면...죽은 이를 들여놓지 말고 정말 반성한다면, 말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줄 것이 있는지? 별반 바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