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와 모임의 필요성에 대해

책을 통한 공부는 활기 없고 무기력하다. 따라서 우리의 정신을 단번에 자극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대화는 단번에 우리의 정신을 일깨워 주고 단련시켜 준다. 인간의 지식은 모두 상대적이나 '상대적 진리'는 존재한다. 그것은 어떻게 찾아지는가? 몽테뉴의 답은 명쾌하다. '서로 대화하라' 

나는 대학에서 의심스러운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사람들처럼 "결정할 수 없는 가상을 내놓는다." 그것은 진리를 언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탐구하기 위한 잠정적인 시안이나 시도와 같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에세]라고 한 것이다. 그러한 가상은 생각의 재료이지, 신앙의 재료가 아니다. 나는 신을 따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이들이 연습문제를 제출하듯이 내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가르침을 받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성격과 기질에 지나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중요한 능력은 다양한 삶의 방식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삶의 방식에만 달라붙어 매달리는 것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니다. 가장 훌륭한 영혼은 가장 많은 다양성과 유연성을 가진 영혼이다.


글쓰기에 대해

만일 나의 혼이 확실히 대지를 밟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는 이것저것 시도하지는 않으리라. 나의 생각도 고정되리라. 그러나 나의 혼은 언제나 배움과 시련 속에 있다.

몽테뉴가 말하는 에세는 단적으로 말해 '주체적인 판단의 시도'이다. 즉 자신의 체험과 견문에서 얻은 새로운 사고나 주장, 그리고 타인의 체험, 견문과 사고, 주장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인 사고나 주장이다. 따라서 앞서 나온 타인의 선입견 혹은 상투적인 주장을 물리치고, 스스로에게 명백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회의하고 음미한 뒤, 타인의 그것과 다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에세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는 산문'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다.

에세의 경우 기존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즉 자신만의 지적인 스타일, 여유, 멋, 맛, 냄새, 바람, 분위기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역시 '주체적인 표현의 시도'이다.

과거의 것이나 타인의 것과 같은 글이라면 왜 다시 쓰는가? 그야말로 그것은 쓰레기가 아닌가?

 지금을 충만시키는 것에 대해

나는 민중을 사랑하고, 압제자를 미워한다. 그러나 민중과 함께 사는 것은 내게 매순간 고통이다. 나는 민중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하겠지만, 상점 점원과 함께 살기보다는 한달 중 반을 감옥세서 지내는 쪽을 택하겠다.

모랄리스트란 공통의 관심이 인간을 특히 감정이나 정서의 측면에서 자기인식에 이르도록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지성은 약화된다. 아니 과도한 지성이나 정신을 경계한다.

그는 이미 현학이 된 그리스어나 라틴어 공부를 버리고 자기 나라의 속어에 눈을 돌리라고 주장한다. 또한 현재 자신과 더불어 살고 있는 자신과 직접 관련된 사람들이나 사물이야말로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몽테뉴의 [에세]는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에 관한 탐구이다. 그를 상징하는 말인 '크세주(que sais-je)란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뜻이다.


판사, 성주, 시장을 지냈으니 꽤나 성공한 삶이라 할 수 있겠고, 따라서 그가 고독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다를 법도 하다. 그런데도 왜 그가 고독하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그가 나라나 시대의 생각과 삶에 맞섰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시대, 그 나라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을 했고 또한 다르게 살았다. 그래서 그는 고독했다.

모는 은거지에는 산책로가 필요하다. 내 생각은 앉아 있으면 잠들어 버린다. 나의 정신은 다리가 그것을 흔들지 않으면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책 없이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럴 것이다....아름다운 과수원을 혼자서 산책할 때 나의 생각이 한동안 바깥일에 향하는 경우가 있어도, 그렇지 않은 때에는 그 생각을 산책, 과수원, 이 고독한 마음, 그리고 나에게로 되돌이킨다.

나는 그날그날을 살아간다. 또 말하기는 조금 거북하지만, 나를 위해서만 살아간다. 내 의도는 거기서 그친다. 나는 젊어서는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 공부했다. 그 후에는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 공부했다. 지금은 재미로 한다. 결코 어떤 소득을 위해 한 일은 없다. 이런 종류의 책을 통해 내 필요에 충당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나를 치장하려는 낭비적이고 헛된 심정은 버린지 이미 오래다.

나에게는 우울 속에서 자신의 기분을 키우는 것에는 의도와 만족 그리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태도가 있다고 생각된다. 나아가 말하자면 야심조차 거기에 섞일 수 있다. 우울의 무릎밑에는 우리에게 웃음 짓고 아첨하는 약간의 감미로운 그림자가 있다. 그것을 먹고 살아가는 성질의 인간도 있는 것이 아닐까?

독서 흔적

나의 기억력이 나를 배반하고 그 결함이 너무 심해, 몇 해 전에 정독하고 스스로 기록까지 한 책을 내가 모르는 새로운 책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들추어 보는 있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의 기억력을 조금이라도 보충하기 위해  한 권 한 권의 책 뒤에(이는 한 번만 사용할 책에 대해서이지만) 그것을 다 읽은 날짜와, 그 책에서 내가 끌어낸 개괄적인 판단하는 가필하는 버릇을 들여, 그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 대해 내가 품은 풍모나 전체적인 인상을 스스로에게 생각나도록 했다.

뱀발. 조금 옮겨놓는다. 그의 생각의 초입과 말미의 격차는 실로 엄청난데 읽다보면 어느새 대단하지 않다는 생각이 옮겨진다. 그는 저기 멀리 있는 것 같지 않다. 소근소근 생각이나 판단을 유영하듯 잡아준다. 그렇게 빠져나오면 몸에 그 달라진 생각이 붙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잊어버려 헤매는 것도 산책하다 드는 생각도, 생각을 키우는 일도 낯설어보이지 않는다. 간지들 가운데 몇꼭지를 내멋대로 옮겨본다. 크리스마스 이브 상가가 있어 이동하는 와중. 일터일들도 겹쳐 기분이 싱숭생숭한 상태여서 잡념은 다음에 옮겨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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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09-12-26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몽테뉴!
여울마당님,크리스마스는 잘 보내셨나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몽테뉴에 대한 글이 있어 즐겁게 보았습니다.
홋타 요시에의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 시리즈'는 절판이 되어 정말 몇달을 미친듯이; 중고서점부터 여러군데를 찾아다녔으나 결국 못찾아 포기하고 어디 도서관에서 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네요.^^; 동서문화사의 완역 에세를 보았으나 60년대 번역은 읽어내기가 어렵네요ㅠㅠ
ps : 인용된 글귀들은 박홍규 저의 '몽테뉴의 숲을 거닐다'에서 발체된 건가요?

여울 2009-12-27 23:48   좋아요 0 | URL
네 잘 보냈습니다. 오랜만이군요...저도 완역본이 보고 싶은데...인근도서관에도 없네요. ㅎㅎ 네 인용된 글귀는 그 책이구요.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