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어진 동백꽃은 그래도 핀다.(ing)

플라톤 다시보기 - 고작과 이나 사이

3만명 중에 1만 2천명을 대통령을 한 셈이고, 민회에서 말한 사람은 면세의 특권도 있었다.(쿡!)

 

 

 

 

 

 




잡감. 지난번 폴라니의 책을 보다가 아테네의 살림살이에 해당되는 부분을 상세설명을 본 기억이 있다. 아래의 인구에 대한 서술처럼 우리가 그렇게 우려먹는 그리스인은 고작 3만의 삶이었다. 이책을 읽으면서 관심이 가는 부분의 소피스트의 삶이다. 궤변론자로 폄훼된 그들의 동선은 아이러니하게도 노예제 자체를 부정했다는 점들이 나온다. 더구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관조적 이데아는 이런 흔적들을 샅샅이 소각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런 점들과 맥락은 잊혀지고, 삶 바깥의 것으로 삶을 옭아매고, 철학을 옭아매고 했던 상흔의 출발점이란 지적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민주정을 바랬던 것이 아니라 지긋지긋해 했으며 스파르타, 이집트의 운영에 매료되었다는 점도 그 출발을 알린다. 이러한 점의 김상봉 교수의 서양철학에 대한 반성과도 맥이 닿아있는 것 같다.

인구의 절반이 살아가면서 대통령을 한다는 사실은 강수돌 교수의 강연 가정과 이어진다. 그는 내 스스로 대통령이다라는 가정을 해야한다고 한다. 그래야 어떻게 할 것인지 사안에 대해 고민과 참여, 삶에 긴장은 좀더 나은 정치를 할 수 있게 만든다고 한다. 청소년들에게 강연하는 점이나, 그의 주장이 처음엔 낯설기도 했지만 일리가 있다고 여긴다.  직접민주주의 분권의 실마리가 저기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리라. 3만명의 보다 좋은 삶, 행복한 삶에 대한 고민과 참여는 이렇게 2천5백년을 우려먹은 출발이기도 했는지 모른다. 늘 노예와 여성이 전제로 걸려있긴 하지만 인간적인 삶을 시작하기엔 이 사회가 너무나 풍요롭고 가진 것이 많다.

이렇게 쌓은 탑의 근저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시민을 소각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주춧돌이 있다. 거기에서 자란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가 있다. 철인정치가 아이라 철인경제와, 철인사회와 철인문화가 이 지경으로 인간의 삶의 공백을 만들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산술적으로 말하자면 60억이나 되는 인간이 있는 지구가 이 지경까지 왔는데, 고작 3만이 그것을 우려먹는 자양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늘 3만을 다른 세상을 만들 수는 있겠다는 과도한 산술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몽상이 아니라 유토피아 언저리에 있는 것들을 현실로 가져와 끊임없이 되묻고 타산해야 한다. 현실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기에, 세상은 결코 허투루 낭만으로 살 수는 없는 것이기에. 하지만 유토피아의 한꼭지 한꼭지는 무한한 상상으로 충만해야 한다. 많은 상상을 해볼수록 현실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워지고 있지만, 민주주의에 대해서 두루뭉실하고 밍밍해지는 현실을 개탄하는 저자의 지적이 공감한다. 저기 근저부터 다시 한번 사실을 검토해보는 것도 좋은 출발점이라 여겨진다. 

--물음의 전환~-


뱀발. 

1. 제목이 약하다 싶다. 소크라테스 두번죽이기와 달리 내용의 강도에 비해 제목을 순하기 그지없다. 전공자들이 떼를 들고 일어날만도 한데, 그런 기사를 접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학문하고 삶하고 구분하는 것이 일상이어서 그랬을까? 저자가 삶하고 학문을 근사시켜서인가? 학문은 학문이고 이 세상에 별반 의문을 갖지 않는 평범한 학자로 저기 먼 그리스인의 삶과 지금은 애초에 다르다는 가정때문일까? 들구 반발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학자들이 인내심이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본다. 

2. 진지하게 3명이든 30명이든 300명이든 삶에 착근시킨다면 아주 아주 조금 다른 샛길은 날 수 없는 것일까? 사안들을 좀더 다른 것에 함침시키는 연습이나 다른 일상으로 향한 기웃거림으로 번지거나... 책을 읽다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박홍규님이 참 외롭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나저나 오늘 대전에서 강연이 있다는데...망설여진다. 두탕이 가능하겠는가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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