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전 노트 몇 곳~
옷 입고 밥 먹는 것이 바로 인륜이요, 만물의 이치라네. 옷입고 밥 먹는 것을 제외하면 인륜도 만둘의 이치도 없네. 세상의 온갖 것이 모두 옷과 밥과 같은 부류일 뿐이지. 그러므로 옷과 밥을 들면 세상의 온갖 것이 저절로 그 안에 포함되어 있고, 옷과 밥 이외에 백성과 전혀 무관하게 또 다른 갖가지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네 147
천하에 훌륭한 글은 일찍이 동심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동심이 항상 존재한다면 도리는 행해지지 않고 견문은 설자리가 없어져 언제든 좋은 글이 써지지 않는 때가 없고, 누구든 좋은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어떤 글이든 새로운 형태를 창작해도 좋은 글이 아닌 것이 없다 287
지금 사람들은 모두 협을 모르지. 협은 인人과 협夾이 합해진 글자로, 사람을 양쪽에서 지탱해야 한다는 뜻이네. 천만인이 위급한 지경에 빠져 있는데, 어떤 사람을 얻으면 안정되고 이 사람을 잃으면 위험해져서 사람들이 너나없이 의지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협이라고 할 수 있네. 지금 사람들은 협을 모르고, 거꾸로 검을 휘두르고 원수를 갚는 것을 협으로 여기니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네. 367
새로운 진보는 언제나 필연적으로 어떤 신성한 것에 대한 모독으로 나타나고, 낡고 나날이 쇠망해가면서도 습관적으로 숭배받던 질서에 대한 반역으로 나타난다. 379
청관의 해악은 대체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노잔유기에 나오는 강필이라는 청관으로, 스스로 돈을 도모하지 않는다고 여겨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죽이고도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경우이다. 이런 인간은 도덕을 자부하면서 인성을 상실할 정도의 단계에까지 이르러 탐과보다 훨씬 무섭다. 둘째는 스스로 경세제민에 뜻을 두었다고 생각하는 청관으로, 고집스럽게 자기 뜻대로 하면서 걸핏하면 철완의 수단을 채택한다. 이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 청관의 방침이 일단 잘못되면, 그 해악의 거대함은 무지막지하고 아무 생각 없는 탐관이 악행을 저지른 것에 초과한다.....이 관점은 심리 활동(의지 과정)규칙에 부합하는 것으로, 동기와 효과 통일론이다.....탐관의 해악은 작고 청관의 해악은 크다. 탐관의 해악은 백성에게까지 미치고, 청관의 해악은 아들 손자에게까지 미친다. 400-401
자연스럽게 성정에서 발현하면 자연스럽게 예의에 머무는 것이지, 성정 이외에 또 머물 예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격이 맑고 또랑또랑하면 음조가 자연스럽게 또랑또랑하고, 성격이 편안하고 느긋하면 음조가 자연스럽게 느슨하고 완만하며, 활달하면 자연스럽게 호탕하고, 우대하면 자연스럽게 장렬하며, 침울하면 자연스럽게 쓰라리고, 예스럽고 기괴하면 자연스럽게 극히 기괴하다. 이런 격이 있으면 이런 조가 있어 모두 성정의 자연스러움을 말한 것이다. [정(내용)과 율(형식)의 관계와 정과 예의의 관계] 묽으면 맛이 없고, 곧으면 정이 없다. 완곡하고 자태가 있으면 예쁘기는 하되 우아하지 못하고, 침착하고 심각하면 정신이 상하고 쉽게 약해진다. 얕으려 해도 안 되고 깊으려 해도 안 된다. 율에 얽매이면 율의 제약을 받으니, 이는 시의 노예요 그 실책은 너무 겸손함에 있다. 율의 제약을 받지 않으면 율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이는 시의 마귀요 그 실책은 너무 내세움에 있다. 441
포정이 양생의 도를 말한 적이 있는데, 그의 말을 어떻게 이해했소? 이여진이 말했다. 포정이 소를 잡는 데 칼을 잘 써서 칼이 상하지 않듯, 지인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삶을 잘 영위하여 삶이 손상되지 않는 다는 말은 아닐까요? 444
명名을 좋아하면 안 된다고 이여진이 말했다. 탁오가 말했다. 명을 좋아하는 것이 무슨 해가 되오? 명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세간의 좋은 일 중 하나지요. 정말 명을 좋아한 경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내가 보기에 옛날 대성인은 모두 명교名敎로 천하를 이끌었소. 명법이라 하고, 명리라 하고, 명의라하고, 명절이라 하여 여러가지 명칭능 다르지만 세상 사람들을 유혹하지 않는 것이 없소. 만약 명이 없으면 난처한 일이니, 어떻게 천하 만세를 교화할 수 있겠소? 이여진이 최상의 경지는 명이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말한다. 무명이면 또한 당연히 더 좋지요. 그러나 무명은 바로 천지의 시작인데, 누가 감히 이에 해당되겠소. 445
세상에서 정말로 문장을 잘 짓는 사람은 모두 처음부터 문장을 짓는 것에 뜻이 있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 형용하지 못할 수많은 괴이한 일이 있고, 그의 목구멍 사이에 토해내고 싶지만 감히 토해내지 못하는 수많은 것이 있고, 그의 입에 때때로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것이 있어, 이것이 오랫동안 쌓이고 쌓여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형세가 되는 것이다. 일단 어떤 정경을 보고 감정이 일고 어떤 사물이 눈에 들어와 느낌이 생기면, 남의 술잔을 빼앗아 자기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에 뿌리고 마음속의 불평不平함을 호소하여 사나운 운수를 만난 사람을 천년만년 감동시킨다. 그의 글은 옥을 뿜고 구슬을 내뱉는 듯하고, 별이 은하에서 빛을 발하면서 맴돌아 하늘에 찬란한 무늬를 만드는 듯하다. 마침내 스스로도 대단하게 여겨 발광하여 크게 소리치며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니, 멈추려야 멈출 수가 없다. 차라리 이를 보거나 듣는 사람들이 이를 바득바득 갈고 어금니를 깨물면서 글을 쓴 사람을 죽이고 싶어하게 할지언정, 차마 끝내 명산에 감추거나 물이나 불 속에 던져 사장시킬 수는 없다. 446
[언선편][탁오노자삼교묘술] - 논저는 600편으로 삼교의 정화를 모아놓은 것이다. 508-9
세세연년 책의 노예라고 비웃더니, 세상살이 까닭 없이 처녀 같다. 세상 어떤 사람이 독서하지 않을까마는, 책의 노예는 도리어 독서때문에 죽는다! 붉은 해 창에 가득 그래도 아직 일어나지 않아, 분분히 잠들어 꿈속에서 지기를 만난다. 게으른 이 몸 늙어서 이룬 것이 무엇인가, 예전처럼 책을 보며 성지를 기다린다.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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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1. 사실 많이 놀라다. **여*님 리뷰를 보고 건성건성 넘기고 책만 덩그라니 모셔두었는데 읽히질 않았다. 어느날 문득 마음에 걸리었고, 그렇게 시작하다. 평전을 들여보다가 분서가 궁금하여, 책을 빌리고 약속 빈틈의 시간에 원중도의 이온릉전을 보다가 울컥하는 것이 치밀어 올라 괜히 눈가만 축축해진다. 남들이 볼세라 주섬주섬 책들을 챙기고 나와 차안에서 마저 눈물을 챙긴다.
2. 한번 공자-석가-예수를 한자리에 모셔 가상대화를 하는 책을 본 적이 있다. 책제목도 저자가 일본인인 것만 기억하고 느낌만 간직하고 있다. 전부 어설픈 이야기지만 유불도나 그리스도에 대한 그 자체로 보지 못하는 편향에 못내 아쉬운 구석이 있던 바다. 원시불교든 제자의 시각이 아니라 그 상황으로 보는 시선들로 인해 삶의 바깥은 없다.에 동의의 생각을 한두점 더할 수밖에 없었다.
3. 최근 루쉰을 읽다보니 고사신편에 노자와 공자, 그리고 묵자가 너무도 시원시원하게 대비된 것을 본다. 예수도 그러하고, 루쉰의 고문연구나 번역도 그러하지만 예리하고 일거에 청량감을 더하는 평은 이지선생을 많이 닮아있다. 5.4운동 연후로 연계성을 아직 확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4. 세상은 옷과 밥, 자연스러움은 폴라니가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를 닮아있다. 삶을 그자체로 판단하고, 인문을 그 상황으로 날카롭게 이해하는 일은 삶 바깥을 미화하거나 폄훼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을 저 삶밖으로 던져 삶도 개인도 자유도 옳아매지 않는다. 삶이 그 자체로 인문 人紋이다.
5. 평전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방대함과 저작, 삶에 진폭에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무섭고, 두렵고 그저 가치를 하나 하나 찟어발라내어 사고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앎과 삶은 어쩌면 그리도 같은 것인지? 함께 품어내지 못하면 그 역시 청관의 부조리만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답답하기도 하다. 
6. 지금까지 역시 겉만핥고 뱉은 구석이다. 들어서는 길에 호흡을 가다듬는다. 많은 것이 얽혀있어 그저 한두가닥의 맥락만을 연결해 가져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지난주부터 어쩌면 부들부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