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ing)
내가 할 수 있는 기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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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윤리와 일상을 하나가 되게 만든다면, 삶의 가치나 선택이 다시 복권될 수 있을 여지가 있는가? 회자될 수 있는가? 삶이 좀더 가치로 나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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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힌 글을 보셨나요? 당신의 몸은 어디에 가까운가요? 당신의 가슴은요? 당신의 차가운 머리는요? 당신이 식당아주머니라면, 당신이 도서관 직원이라면? 도서관 직원이 아니라 시간제근무를 하는 일용직이라면? 도서관 관장이라면? 도서관 운영위원회 위원이라면? 며칠전 도서관 게시판 질의응답란을 보다 마음에 걸려 가져옵니다. 

두분 모두 도서관에서 모욕에 가까운 일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절박함이 가슴에 응어리가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절박함을 따라가자니 응당 소외된 도서관 이용객의 모습이 아픕니다. 하지만 이 절박함은 끝까지 그 감정을 가지고 고스란히 올라갈까요? 당신이 관장이라면 어떻게 하실거죠. 당장 바꿀 수 있을까요? 실무자들은 위탁을 주었으니, 매점이 운영되면 어쩔 수 없다. 매점 위탁자가 직원에게 그렇게 시킨 것을 어쩌겠느냐고 하겠죠. 식당 아주머니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사람 한두사람 봐주게 되면 장사 못한다고 하며 또 도서관에 대고 뭐라하겠죠. 설령 운영위원회에서 두번째는 논의가 될 가능성은 큰데, 우리의 권한과 예산에 한정이 있으니 쉽지 않아 몇건은 처리가 되겠죠. 그런데 첫번째는 논의조차 되지 않고 배제될 확율이 크겠죠. 그런데 절박한 이용자들은 학생을 비롯해 이런 친구들이 많이 있겠죠.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 못하겠지만요. 

아마 절박함은 희석될 것이고, 게시판에도 형식적인 답변이 처리될 확율이 큰 것이겠죠. 일이 처분되듯이 말입니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볼까요. 게시판에 글을 올린 두분이 시간이 지나 한분은 공무원으로 한분을 일터를 얻고 상대적인 여유가 생겼다고 해봅시다. 아마 저처럼,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이들이 도서관에서 대접을 받았던 절박함은 사라질 겁니다. 어쩌면 행간의 주장대로 서비스가 형편없으니 삼진아웃제 하고, 친절 모니터링해서 시간제이든 일용직이든 상관없이 근무시간 규정도 개념없는 소비자 정신에 투철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겠지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래요. 시간이 지나도 그런 절박함들이나 일리들을 빗겨서는 관심이나 유사답은 없을까 하는 겁니다. 내가 식당아주머니이고, 위탁자더라도 꼭 사정이 있는 친구들은 봐줄 수 있는 여력은 없는 것인지? 도서관운영위원으로 이렇게 빈 사각지대는 공적인 세금으로 내는 것이므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던지? 이런 친구들은 운영위원회에 참관시켜 소외된 시선이나 절박함이 반영되도록 한다던지? 관장으로 예산만 탓할 것이 아니라 적은 예산으로도 일용근무자나 시간제 근무자들의 여건이나 관리를 개선시키는 노력을 정녕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인지 말입니다. 

게시판 두번째 글의 이야기가 옳으면서도 옳지 않을 수 있죠. ...이따 이어 쓸게요. 쓸데없이 길어지는 듯. 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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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쩌면 윤리는
    from 木筆 2009-09-01 17:25 
       도덕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자유에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도덕이 정치에 근사한 이분법의 도식이라면 윤리는 행동과 순간, 자유의 만끽을 예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행위는 늘 이분의 도식과 적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이분을 감싸고 있는 나머지 여덟, 아니면 나머지 98, 어쩌면 998의 여분에 대한 배려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도 이분의 현실에 치우쳐 늘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처분했다는데 문제가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