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반진리 그리고 삶
[황해문화 가을호]의 권두언과 소설과 만화, 시, 한윤형의 글을 보다. (상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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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도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진리 counter-truth를 능숙하게 알아야 한다.(1) 문제는 왜 사태에 대한 진리가 있느냐가 아니라 왜 진리가 우세할 수 없느냐이다. 모든 진리 및 평화설교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쟁이와 사기꾼과 수다꾼이 그렇게 넘쳐난다면, 진리를 가로막는 매우 강력한 무엇인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거짓은 오래 지속되지 않으므로 그것은 거짓 자체일 수 없다. 적절한 진리를 가로막는 다른 종류의 몇몇 결정적 진리가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그것을 반진리라고 부른다.
제도적 거짓말을 지지하고 정당화하는 (2) 반진리를 아는 것은, 앞으로 발전할 소지가 있는 진리가 이 세계로부터 벗어난 거짓말보다도 더 나쁜 거짓말로 바뀌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해야 할, 사회적 궁핍을 극복하는 일에 속한다. 진리는 공허한 장식을 위해 거울 속으로 넣어지지 않도록 보호되어야 한다. 310
(3) 진리의 사용[적용]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예술이며, 전염병에 맞선 싸움에서 중요한 진리를 무기로서 사용하는데 필요한 요령을 얻기 위해서 모든 다른 예술처럼 경험에 의해서 끈기 있게 발전되어야 하는 예술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유행상인"에 "진리행상인'을 덧붙일 뿐이며, 우리의 노동의 단 하나의 대상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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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도중 이야기를 나누다 [반진리]라는 메모가 생각난다. 그리고 아침 도착한 황해문화를 들고 내려오는 길에 보다나니 생각이 겹친다. 먼댓글을 이어본다. 글 가운데에도 있는 이야기지만 법적남편을 가진 여성이 애인이 있다면 당신은 어떠한가? 불륜인가? 일부일처의 도식만을 말하고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겠는가? 그런데 그 여성이 남편이 폭력을 늘 행사한다던가 불능이라던가 그녀와 맞지 않는다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녀는 거짓없이 진리를 살아갈 수 없다. 그녀의 삶은 반진리가 진리보다 더 강력하다.
진보는 어떨까? 이분구도에 사로잡혀, 진리만을 말하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진리를 찾아내서 빼내어 쳐들고 제발 이 진리를 바라보세요라고 구걸하는 것은 아닐까? 진리를 추상화시킬대로 시켜놔서 아무런 잔뿌리조차 현실적응력은 없는 것은 아닐까? 어느 덧 진리행상인으로만 전락하여 현실에서 별반 귀기울려주는 이 조차 부족한 것은 아닐까? 진리가 있느냐가 아니라 왜 우세할 수 없느냐가 문제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치부하는 반진리의 결을 찾아내는데 더 예민해져야 한다.
진리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예술이다. 경험에 의해 끈기있게 발전되는 것이라면, 지금의 진보와 우리는 되돌아볼 점들이 많이 있다. 시선이 어디에 있어야 하고, 몸이 어디에 섞여야 하고, 가슴이 어디에 뜨거워져야 하는지, 마음을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 말이다.
그런점에서 1983년생 한윤형의 [루저는 '세상 속의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는 88만원세대의 결을 세세히 놀라울 정도로 예민하게 그리고 있다. 박정애의 소설도 김해자의 [그때 나는 어디를 보고 있었을까]란 시, 김성희의 [아빠를 위하여] 만화도 아리고 아프다.
어쩌면 나도 너도 너-나도 사회적 궁핍을 벗어나는 일인 반진리를 아는 일에 궁색하다. 아니면 블랙박스로 만들어버려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은 아닌지 한다. 권두언에서도 이야기하는 바이지만 생각좌파-몸우파인 현실의 간극에서 아무도 진보의 삶을 살아내고 싶지 않고 눈길주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나마 자유주의자의 유용성이 그나마 쿤내나지 않게 하는 지금이지 않나싶다. 그 유용성은 활동하는 공간도 그럴 것이며, 일터도, 삶터도 그러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지 않나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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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신 바람구두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예지란 표지 딱지에 금테를 둘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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