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똑바로 뜨고 본다는 것

1. 앎이란 싸움용이 아니라  거미줄같은 그물촉이다. 승전의 효과를 보려면 각진 앎과 싸움용 화살이 풍부해야한다. 순간의 선택이 당장을 좌우하므로 예민하고 적절한 앎의 구사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못지 않는 정확성과 수사력도 동원해야 되리다. 하지만 변변치 못한 앎, 갈수록 희미해지고 엷어지는 앎이 두렵기도 하다. 하나 하나 그물촉을 만드는 일, 실낱같은 아지랭이 같은 것들이 조금 조금 희미함을 넘어서는 일들. 앎을 가두지 않고 열어두는 일. 쌈닭의 쇳줄같은 강인한 용도의 앎과 진함이 싫다. 그럴수록 약한 자의 변명같지만 앎을 막지 않고 열어두는 일. 가급적 점선으로 배치하는 일. 뒤돌아서서 잊을 지라도 다시금 만나면 실가닥을 진하게 하는 일. 저쪽과 신호를 보내고 있는 일.

2. 아는 것보다 많은 것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 부족분을 담기위해 앎이 강직해진다. 앎을 끌어대야 하므로, 고갈이된 앎이란 더욱 딱딱해져야 한다. 그래서 그 앎들이란 화살촉이 되고, 다른 앎은 섞여서 되살아나지 않고 소진하게 된다. 앎은 그 순간부터 본색을 보이며 돌진한다. 그 앎은 여유가 없어지고 다른 앎들과 사교할 시간도 없다. 그 모래위의 작은 성은 모래바위의 휩쓸림에 여지없이 흔들린다. 그래서 또 작은 성을 찾아나선다. 앎소매상의 탄생은 그래서 부질없다. 만들 수 없는 빈약함과 만들어지지 않는 앎이란 그래서 험담투성이다.

3. 앎이 두렵다. 앎을 넘어설 수 없으므로 앎에 포위된 나는 숨을 쉴 수 없다. 앎이 나를 가둘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 적이 없으므로. 그래도 앎이 희미하게 아지랑이 같이 저기를 비춰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으므로. 앎이 이렇게 마음을 채근하고 저미게 될지 몰랐으므로. 앎이 이렇게 철저히 내가 딛고 선 이 자리의 허위를 성토하리라 생각해본 적도 없으므로. 그것이 그럴까. 몸의 절망과 유사한 것이라고, 삶의 절망과 유사한 것이라고. 그래도 그 절망을 끌고 가는 것에 비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뱀발. 두렵다. 책의 언저리에도 가지 않고 있다. 그가 서성거려 그 문의 초입에 들어서면 온전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자신만만 했는데 책의 초입부터 두다리가 후들거린다. 사립문을 잡을 용기가 서지 않는다. 지난 주말. 잠깐 깬시간을 빼고 서른여시간을 잤다. 잠을 자도 편치 않았지만, 몸도 편치 않았겠지만 기차안에서도, 돌아와 식사시간을 빼곤 잠에 취했다. 두려움인 것 같다. 용기를 내어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