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제가 낳은 야수이고, 오늘은 지난 십년의 숙성이다.

뒤풀이, 부문운동이란 것, 소비자와 생산을 가르고, 소비자운동과 노동운동을 가르고, 그 장벽은 쉬이 넘어서지 못할 것이란 것, 그 성이란 것이 나름대로 집착이 있어, 나름대로 서열이 있어 쉽게 양보하지 않으리란 것. 그러니 더 불안해지는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자신의 기득권을 내놓지 않고, 더 쫙 붙들게 될 수 밖에 없다는 현실. 공공성을 갖는 기관들의 혁신이나 개혁은 이렇게 해서 어려운 것이고 늘 타겟이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필요하지 않으면 정리해야 한다. 개혁대상이므로 정리해야 한다는 것. 구태를 갖고 있으므로 정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온다. 공공 가치, 상위의 가치가 더 우세하므로 하위의 노동자로서 갖는 가치는 더 부족하다. 공공가치가 더 지체된다면 하는 순환논리에 대한 해답으로, 그래서 정리해도 싸다. 공공가치라는 명분아래 노동자로서 권익과 그 이득을 지켜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공공가치가 더 중요하므로 더 중요하지 않는 가치는 잘라내도 된다.

이땅에 살면서 경쟁력이 없다면 퇴출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고, 은근히 약자들에게, 조금 낫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칼날을 들이댄다. 그렇다면, 사람이란 것이 이것저것 부위별로 나누고 조각낼 수 있는 것이라면, 병든자도 노인도, 사고로 장애를 가진 이들은 모두 경쟁력이 떨어지므로 거꾸로 이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한다가 맞는다.

부문운동도 서열이 있는 것이므로 노동도, 농민도 중요하고, 다른 부문은 서열에서 한참 떨어지는 것이므로 중요하고 비중을 별반 둘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 기껏 필요해도 보조적인 위상밖에 가질 수 없다라고 하는 것들. 아마 세뇌의 기억은 아닐까? 세상의 것들을 물건이나 조립가능한 것으로 보는 기계주의자들의 생각은 아닐까? 그토록 단순한 논리를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현실아닐까? 현실이 그렇게 돌아가다보니 어느새 물들어서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아프지 않고, 나는 사고나지 않고, 나는 늙지 않고, 나는 대박을 맞을 것이고, 나는 짤리지 않을 것이고.......나는 결코 약자가 되지 않을 만큼 능력이 있다는 자만으로 늘 나날을 충전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도도함이 살아있는 것을 서열로 줄을 세우고, 도식화하고, 부속품처럼 갈아 낄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불감의 흔적이 그렇게 내비춘다.

이런 말없는 동의가 모든 일터를 룰렛게임에 버금가는 s,a,b.c.d 순환시스템으로 상대평가의 늪으로 빠뜨렸다. 그리고 그 해악이 어디에 미치는지도 묻지 못하게 한다. 당연한 것으로, 나는 아니다란 평가의 악순환. 누가 점수를 매기는지, 누가 서열을 매기는지도 인식을 애써하지 않으려 하면서 말이다.

사고나는 이도 말이없고, 아픈이도 말이없고, 늙은 이도 말이 없고, 부채에 신음하는 이도 말이없고, 짤린이도 말이없고, 약자는 늘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세상이므로, 그렇게 잘나가는 이들은 또 다시 서로를 가려내고 총을 서로의 머리에 겨눈다.


부문운동의 회복은, 사회운동의 활성화는 내것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이다. 부문운동의 합이 간신히 내몸에 붙게되면 조금, 아주 조금 움직일 지 모른다는 자작이다. 하나씩 불감을 걷어내면 스스로 나의 삶을, 통증을 회복해내는 일이다. 조합원으로 개인이 아니라, 생협의 일원으로, 비정규직의 일원으로, 농민의 일원으로, 언론의 아픔을 조금씩 회복하는 일이다. 기계가 아니라 부속품처럼 저 멀리떨어지고 누군가 대행하겠지란 착각을 거두어내는 일이다. 우리 가족의 촘촘한 일상의 동선이 모두 그 부문운동에 그물로 이어져있다는 것을. 당신이 집착하며 이것만 중요하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조금씩 서로 나눠 아파하는데서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운동이란 것. 활동이란 것들이 마치 자본의 대차대조표처럼, 1년을 기간으로 일로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어쩌구저쩌구 서로를 쳐내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삶의 기간을 삶의 공백이나 동선을 감안한 활동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삶을 함께 기획하고 회복해내고, 다른 잣대로 서로를 평가하고 가져가는 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살림살이, 살궁리와 삶 - 활동을 실무자가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아픔과 할 일들, 여건들을 부여잡고 밤새 토론하고 논의하고, 살림을 끌어내고 현실의 틈을 서로 만들어내는 일은 아닐까? 그저 대의나 여건이 나은 헌신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삶을 지금보다 낫게 살아내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다 할 수 있는 생각의 물꼬를 건드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정신없이 살다보니 정신 줄을 놔놓고 살아온 십년이 아니라, 몸으로 헌신해 몸이 닳고 망가지는 그런 나날이 아니라, 그래서 그(녀)와 함께 이렇게 살고 싶다. 최소한 5년은 이렇게 살아야지, 그렇게 살면 그 삶에 기부할 수 있는, 그(녀)의 삶을 변화시켜 5년뒤엔 이런 일을 함께 해봄직한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을까? 부문과 시간의 강박과 사람을 제외한 일에 집착을 조금이나마 벗어난다면?
 

뱀발.  

1. 진보는 늘 감탄하게 만들지 못한다. 한번도 그들의 뒤를 쫓다보면, 머리의 그늘, 분파의 그늘이 얼마나 깊고 깊은지, 절대 꿀리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모습을 보면 대견스럽다. 하지만 그런 강직이 시간이란 함수에 아무런 너-나-너-...의 그물을 바래고 삶에 퇴색해서 본연의 의지는 간 곳이 없다.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그들은 우리 삶을 포위해 그들의 삶으로 전락시켰음에도 아파하지 않는다.  

2. 내 손에 쥔 것만 아플 뿐..다른 이들이 아파하는 것을 아파하지 못한다. 내가 너무도 아프므로, 그래 그 아픈 것을 놓고 서로 엇갈려 손을 맞잡을 수는 없을 것인가? 그 통증이 고스란히 전달된다면 아주 조금 너-나-너...가 무척이나 아프고 외로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팽겨쳐진 삶들에 조금이라고 기운을 북돋을 수 있을까? 서로 원하는 것을 내것으로 끌어당기려하지 말고 느슨한 연대나 아픔. 그리고 삶의 감탄 1..생각의 뿌듯 1,2,3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3. 그리고 그토록 부여잡았던 강박에 벗어날 수는 없을까? 각론의 각개격파가 아니라 삶의 총론을 되짚어볼 수는 없을까? 부문운동의 유니온삽은 없을까? 아니면 5년 삶동지의 유니온 샵은 없을까? 생각도 몸도 가슴도, 손도 발도 서로 빌려줄 수 있다면, 그렇게 연습해본다면....아마 늦지 않을 수도...성큼성큼...감탄이란 것도 낳을 수도, 오늘이 어제가 낳은 야수가 아니라, 오늘이 지난 십년의 숙성만이 아니라 ... 늘 오늘이 어제의 감탄이 낳은 오늘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 오늘의 누적이 또 다른 경로를 만들 수는 없을까? 불안에 치떠는 우리를 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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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91012 죽음, 자유 그리고 사회
    from 木筆 2009-10-13 14:38 
    [칼 폴라니로 가는 여러 산책길에 대한 소묘]란 주제로 텍스트 [초국적자본주의인가 지역적계획경제인가]에 다른 색깔들을 배경삼아 자료를 만들어본다. 가장 잘배우고 알게하는 방법은 가르치는 것이란 말을 실감한다. 시간의 흐름만큼이나 책들이 섞여 어디에 기록했는지도 깜박한다. 어쩌면 하고싶은 이야기는 산책길에 나서기전 준비사항에 있다. 경제인이란, 이분법에 의한 근대인, 직선적인 시간관이나 발전관에 녹아있는 우리는 다른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블로그의
 
 
2009-07-27 2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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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8 08: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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