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거나 읽고 있는 책
1. 화가의 신체성
고흐의 터치가 변화한 것이 그런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실제로 작품을 보면 엄청난 힘과 품이 들었음을 알 수 있다. 단시간에 그린 그림과 달리 그가 "밭을 가는 것처럼"이라고 말한 것처럼 구불구불 굴곡을 만들며 그린 것이다. 한 번의 '구불'마다 생명이 깎인다고 할까, 깎인 생명이 캔버스 위에 쌓인다고 할까. 그런 변화는 아를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생레미 시대에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화가가 신체성을 자각해가는 역사이다. 그림을 그리는 힘의 강약이 신체에 전해져 화가에게 들어오는 것이다. 부드러운 붓대신 거친 돼지털 붓으로 그리면, 시각적으로도 다른 것이 나오게 된다. 화가에게는 몸으로 전해져오는 감각이 있다. 근대회화는 이 감각을 강하게 의식했다. 그런 감각이 일단 해방되면 거기에 반응해, 힘을 담아서 리듬을 만들 수도 있고 터치로 두께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림물감의 두께로부터 전해져오는 감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화가의 몸이 알아서 반응해하는 식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매우 신체적이라 생각한다.
고흐는 자신의 감각을 끝까지 관철하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까지 철저하진 못해도, 끝까지 해봐야 한다는 명제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건 머리가 시키는 것이 아니다.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면 마치 자신의 머리로 선택한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고흐의 원근감과 색채에는 신체화된 '삶의 방식'이 투영되어 있다. 303
고흐는 원근법을 부정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 원근법을 부정하지 않고 제대로 지키려 했는데, 그만 원근법을 위반하고 뚫고 지나가게 된다. 고흐가 죽고나서 20-30년뒤 대상자체를 제거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고흐라는 인간 자체가 가진 그런 거리 감각와 인간주의적으로 말하는 고흐 자신의 삶의 방식, 그것도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훨씬 신체화된 듯한 삶의 방식. 더럽고 가혹한 자유 쪽으로 기울어가는 삶의 방식과 원근법을 뚫고 나가 저편까지 가버린 시선은 뗄 수 없게 꼭 붙어 있다.
.
2.
정서에는 기쁨, 슬픔과 같은 개념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명사적 정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받는 듯한', '가슴 설레는' 것과 같은 '형용사적 정서'도 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정서는 오감을 통해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부사적 정서'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말하는 속도, 음의 높낮이, 말하는 이의 표정을 통해 전달되는 느낌이 달라진다. - 부사적 정서란 오감을 통해 전달되고 느끼는 정서적 신호를 뜻한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 정서 공유의 부사적 차원을 가르키는 것이다. 마치 '얼씨구'라는 단어가 탈춤에서는 감탄사가 되지만, 일상에서 비꼬는 단어로 느껴지는 바로 그 차원이다.
부사적 정서, 즉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정서 공유는 수도관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전달하려는 논리적인 앎은 물이다. 물은 수도관이 있어야 흘러갈 수 있다. 수도관의 한구석에 구멍이 나 있으면 물이 흘러가지 못하고 다 새 나간다. 공유가 가능하려면 바로 이 부사적 정서로부터 활성화되는 정서 공유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 부사적 정서가 가장 강하게 활성화되고 공유될 때는 재미 있을 때다.
감정정체를 해결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식은 '내적 민주화'다. 내적 민주화란 자신의 정서적 장애와 결핍증후군을 인식하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많이 슬퍼하고 타인에 의해 진심으로 수용되고 인정받을, 인내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편견과 적대감, 폭력의 위험이 생겨난다. 내적 민주화는 '치료적 문화'를 통해 가능하다. 치료적 문화란 함께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문화를 뜻한다. 강요나 억압에 의해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정서의 공유를 통한 의사소통 방식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타인과 정서공유를 통해 내적 민주화를 가능케 하는 문화다.
순종적이며 획일적인 사고에 쉽게 적응하는의존적인 성격의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에서 자라난 어린이는 자신의 가능성과 꿈을 구체화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할 수 없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주어지는 타인의 눈길을 의식하며, 타인의 기대와 요구를 재빠르게 찾아내는 재주만 발달할 뿐이다. 타인의 요구에만 적응하는 사회화과정은 여타의 심리적 기본 욕구들이 억압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를 '결핍증후군'이라 한다. 어릴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이 부족한 부분을 다른 방식으로 채우려고 한다. 다양한 중독현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억압된 삶의 경험들은 '감정정체'라는 결정적인 정서장애로 이어진다.
서양인은 타인의 존재를 항상 '나'의 상대방으로서 '너'다. 한국인의 상호작용은 사뭇 다르다. 나와 너의 상호작용이 서구인들처럼 곧바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나와너라는 상호주체의 만남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와 남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야만 가능하다. 남은 상호작용의 상대방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질문이 무서운 것이다. 남은 상호작용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무시해도 된다. 관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건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그러나 우리라는 경계선을 넘어오는 순간부터 상대방은 너라는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서구인들과 달리 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 너에게 나는 정말 간까지 빼줄 만큼 잘한다. 우리사이는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인들의 존재근거가 되었던 '우리'라는 그 울타리가 변형되고 해체되고 새로운 형태의 우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그 대안적 우리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지고 만져지는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통한 의사소통과정이 박탈당하면서 에로티시즘의 왜곡이 나타났다.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상호관계성이 왜곡되고, 건강한 일상의 재미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러운 정서적 교류가 박탈된 한국 남자들의 의사소통 장애가 더 더욱 근육과 살을 탐하게 된다.
뱀발.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 근대도 넘어서지 못하고, 모더니즘도 해본 적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이땅의 남자들과 남자가 된 여자들의 천국이기 때문이리라. 나도 그렇게 방점찍고 있는 사람일테고, 점점 울타리는 좁아들고 다독거려줄, 받아줄 곳 하나 없는 곳이다. 그래서 그렇게 간절하게 축구에 동호회, 부나비처럼 모여들고 메뚜기처럼 우리만을 만든다. 너는 안중에도 없고... ... 명사-동사, 부사에 대한 나름의 의미를 잘 정리해둔 것 같아 옮겨 적어본다. 아래책은 저자도 코멘트하고 있지만 심리학적 환원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많다. 현상에 대해 한편 수긍이 가면서도 그에 대한 텃치가 매우 유사하고, 간간이 보이는 편협된 시각도 많이 내비친다. 놀이-재미-문화가 심리적 공감이나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연루된 것이 그토록 많은 제도의 시선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책을 두고가서 지금에서야 접힌 부분을 메모해둔다. 시간이 멀어지니 기억이 희미하다. 외려 기억을 상기시키는 시간이 더든다.(고뇌의 원근법) ...회화의 신체화를 말하니 오치균?의 지필유화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