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927 좌판(ing)

     
 

숲을 빠져나온 원시의 인간이 세계의 표정을 읽는 이 원초적 기능은 애초에 이 세계를 자기와 무관한 '그것'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너' 즉 2인칭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전개한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저서 [나와 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 그 자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다만 근원어 '나-너'에 있어서의 '나'이거나 '나-그것'에 있어서의 '나'일뿐이다."


그는 다가오는 '너'로서의 사물이 이쪽을 보고 있는 듯한 감각이야말로 의인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나카무라 요시오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정신의 이러한 시원적 상태에서는 아직 '나'의 의식은 자각되어 있지 않다. 이러저러한 '너'를 받아들이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존재로서 '나'의 의식은 나중에 발생한다. 의인이란 이러한 '나'와 '너'의 대화다"(나카무라 요시오 [풍경학입문])


숲에서 나온 원시의 인간이 본 것은 '너'로서의 세계다. 풍경은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자신과 자신이 대면하는 세계를 '나'와 '너'의 관계로 규정함으로써 발생한다. 세계를 인식하는 '나'에 대한 '너'로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풍경은 발생한다. 따라서 풍경은 관계의 미학이다.


... 그런 의미에서 풍경을 만드는 행위는 일종의 사회적 사교행위다. 화이부동이라고 했던가.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되 서로가 잘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이 말은 풍경의 설계원리로도 뜻하는 바가 크다. 234쪽 [관계의 미학, 풍경] 가운데

 
     

 

뱀발. 풍경학...경관공학...경관공?학....?? 변두리학문이라는 것이 있겠는가만은? 이렇게 이름붙이는 것이 중심의 학문이라는 전제를 담고 있으니 거시기 하다. 나름 일리가 있는 학문이라고 치면, 기존에 천대..아니 자칭 공학이라고도 붙이고 있으니 그렇다고 하자. 변두리의 글을 가벼운 톤으로 읽다가보면, 그 중심이라는 것이 '나'와 '자아'에 올인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것을 그렇게 가설을 세우고 쌓아올리 중심학문들은 안녕한가?

오히려 솔깃한 것은 애초 '나'란 것은 없다거나 '너'란 것이 전제되지 않고 '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풍경의 음미가 더 귀담아 듣고 싶다. 변두리가 이러할진대 행여 중심은 과도한 자아때문에 엄한 짓 한 것은 아닐까?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쌓아올린 궤적이, 그 주춧돌을 불안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중심을 의심해보고 싶다. 정녕 우리의 풍경은 안녕한지도? 나와 너가 관계를 맺을 때 발생하는 풍경은 있는지? 나만 있고 늘 너는 변두리인 세상이라....나와너가 그래도 불균등하게 손이라도 잡는 '나-너'의 세상은? 변두리학문이여~ 마냥 제정신 차리지 못하는 중심학문들에 들이대었으면 좋겠다 싶다.

명사의 세계, 동사의 세계, 명사-동사의 세계. 저기 변두리에 있는 부사와 형용사의 풍경은 날개짓할 수 있을까? 명사와 동사가 잠들기 전에...              소개된 두권의 책은 보관함에 넣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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