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와 준전문가가 침묵하는 시대, 학자도 침묵하는 시대, 그 끈을 이어주는 완충공간은 없을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 목소리가 울려퍼질 수 있는 공간?

공적 공간의 재구성 - 표면적인 정보가 아니라 준전문가-전문가의 연구자료가 무수히 발표되어왔음에도, 그 협회나 전문가집단은 공적인 발언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 그 연유와 순환구조는 무엇일까? 그 침묵의 정체는 무엇인가? 양심과 침묵의 카르텔사이의 장벽을 뚫고 나오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 준전문가-전문가집단의 공적역할을 만드는 촉진제로 발화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숨죽이게 만들었을까? 생활인과 접점인 공간이 전혀 없도록 만들었을까? 그 경계가 표준화된 언론의 영역과 소비자 사이의 공간만있고 논의의 중심을 벗어나면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일까? 평균적인 시선. 검토의 반복을 떠나 제공되는 정보. 신뢰형성을 가져오는 발언의 숨구멍이 없는 것일까? 공멸할 지 모른다는 잠재의식일까?

학회단위로 순수를 명목으로 알권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공적공간이 너무 없는 것은 아닐까요? 자기분야만, 타분야와 연계성, 그 연계성과 작은 목소리로 공적인 양심을 회복하는 공간이 열릴 수 있는 것일까요? 1)

 

너무나 나만 외치거나, 나만 봐달라고 한 것은 아닐까요? 일상에 너라는 존재는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요? 나의 목전에 칼이 들어와야 움찔하는 상황은 아닐까요? 나와 너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한가요? 이 위기를 넘기면, 여전히 같은 공간에 남는 정규직-비정규직의 문제는 아픔으로 살아날까요? 정규직은 여전히 나만의 문제로 여겨, 너인 비정규직의 문제는 남의 일로 치부되는 것은 아닐까요?2)

광우병 쇠고기가 문제가 어찌어찌되어 논란의 중심을 비껴나면3), 다른 먹을 거리는 안전한가요? 다른 먹을 거리도 나의 목전에 들어와야 그때서야 움찍하게 되는 것일까요? 바쁜 나. 경쟁속의 나가 여유를 찾거나, 숨이 넘어갈 정도의 위험함에 비껴나가는 방법은 없을까요? 너가 들어올 수 있을까요? 위해투성이인, 그것만 피해가면 아니 피해갈 수 있다고 아직도 자만하는 것은 아닐까요?

밥벌이는 신성합니다. 하지만 양심에 어긋나 밥벌이의 신성함을 떨쳐버리고 절벽으로 떨어질 각오를 하면서도 자신을 극단으로 내모는 일. 우리는 안전의 매트릭스나 그 산화를 저 절벽의 끝이 아니라 안전그물망으로 거두어낼 수는 없을까요? 양심의 그물망과 그 공간들을 만들 수는 없을까요? 4)

역사를 퇴행으로 돌리려는 극단적인 행동에 양심의 중심은 흔들립니다. 하지만, 그 양심이 잔뿌리를 내리거나 아픔의 연결고리를 찾지못할 때, 더욱더 풍부한 공적양심의 회복으로 커지지 않을 때, 모면만 하려는, 늘 우리의 일상을 감고 있던 바쁜나를 핑계로 아무생각하지 않던 습속은 일회용으로 그칠 우려도 있는 것은 아닐까요?5)

석유값이 천정부지입니다. 하지만 시간의 간극을 두며 현실로 나타나는 무서움이자 두려움, 섬찍함입니다.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먼저 피할 수 있는 것은 안전한 궁궐같은 돈방석에 올라앉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겐 이 비극을 관전할 수 있는 더 좋은 쾌감으로 변질합니다. 하지만 정말 고통스러운 일은 이 비를 맞아야 하는 우리입니다. 우산하나 얻을 수 없어, 우비하나 얻을 수 없어 그 비를 온전히 맞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점점 비를 맞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불어나고 비는 더 세차게 오는 것이 현실입니다.6)

석유로만든 물건, 물건, 물건들...우리 일상을 살아숨쉬는 거의 대부분이 석유로 인한 것이죠.7) 하나에서 열까지...점점 해일로 커져 다가오는 모습이 너무도 짙은 어둠입니다.  현실화되기를 바라지 않지만 이미 현실임이 안타깝고 어이없고......................모든 관행과 기존 사고를 누리고 있던 상식은 부서져야될지도 모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 연결고리 속에 나-너로 진화하지 않으면, 그 연결고리를 급속히 나-너-나-너-나의 그물망으로 진화시키지 않으면, 그 그물 속에 다른 불씨를 옮기지 않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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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 녹을 먹고있는  전문가-준전문가 집단의 내부에서 자신의 일로 양심선언을 한 김이태연구원과 공무원노조지부장. 대운하 연구든, 광우병의 문제는 농수산부의 과장이하 각종관련협회(수의사,육우가공,동물사료...등등)의 전문가_준전문가는 해외사례부터 문제점 대책까지 모든 사실들을 낱낱히 꿰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협회이름으로 보고서와 논문도 많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문제는 수면위로 올라옴에도 이들의 발언이 신뢰의 고리를 국면을 바꿀 수 있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 나라에선 없었다는 점이다. 양심과 전문가의 역할사이에 벌어진 현재의 이 일은 여러 파장을 함유하고 있는 것 같다.

2), 4)  교과부, 2mb 정부의 통폐합과 민영화 작업으로 연구기관과 공공기관. 비대위나 노조의 움직임과 어려움에 아픔의 눈길이 가면서도 여전히 이 사회의 개인으로서 투쟁, 그 연결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럴리도 없겠지만 상황의 변화로 통폐합과 민영화, 쇠고기수입반대가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가정을 하고, 2mb 이전의 관점으로 사유를 해보자. 내 목전의 문제가 자의든 타의든 해결되었으므로, 위험에서 벗어났으므로 이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불쑥 집단이 진화하여 모든 문제를 연결시키고 공적아픔을 느끼는 감수성을 회복할까? 이 지점에서 의문이 든다.

6), 7) 석유. 원자재, 재료, 곡물, 운송..자영업..생계의 극단으로 몰리는 것이 이론이 아니다. 환율도 겹치고, 일상에서 가난한 사람부터 한 두달사이의 삶의 파장이 겁이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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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5-28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가끔 이런 상상을 합니다.
지식인은 비대한 문어가 아닐까 하는.
머리는 지식의 과포화 상태로 엄청 크고 언제든 지식이나, 물질 등 필요한 것이라면
나꿔챌 빨판(기회주의적)도 발달되었는데 몸엔 근육이 없다는 것.
즉, 양심의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 흐물렁한 단백질 덩어리를
말하는 것입니다만 사람에겐 육체의 근육이 일정분포 필요하듯 정신의 근육없는
지식은 개인적 영달 외에는 쓸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합니다.
너무 이상한 상상이죠?ㅎㅎㅎ
-지식인이 아니라고 흰소리 마구 해대는 여우-

여울 2008-05-29 09:06   좋아요 0 | URL
제가 좀더 심하고 엽기적인 상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음 이야기해야 되나.. 아니 이야기하지 않을래요. ... 생각이라는 것도 혼자 만든 울타리만 지나면서 스스로 보초를 세우는 자발적 복종은 아닐까 싶기도 해요. 실제 그렇지도 않을텐데. 근육도 많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있는데. 스스로 자책하거나 세뇌당하거나 아니면 누구도 근육을 인지시켜주지 못하거나... ...그런면에서는 몸으로 어려운 현실을 견디어내면서도 여전히 되풀이되는 투표행위나 사고를 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해요..... 어떡하죠.?! 묘책은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