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간


에피쿠로스는 완전히 달랐다. 본질이 세계로부터 배제된 시간이 그에게는 현상의 절대적 형식이 되었다. 말하자면 시간은 사건의 사건(속성의 속성)으로 규정된다. 사건은 일반적으로 실체의 변화(변이)다. 사건의 사건은 자신 안에서 반성하는 것으로서의 변화, 즉 변동으로서 변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계의 이 순수한 형식이 시간이다. 101쪽


시간이 현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습은 원자의 개념이 본질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습과 마찬가지다. 즉 모든 규정된 현존들의 대자 존재로의 추상과 파괴, 그리고 환원이 바로 그것이다. 102


에피쿠로스는 현상으로서 현상, 다시 말해서 본질의 소외-본질은 현실 안에서 소외로서 자신을 나타낸다-로서 파악한 첫번째 사람이었다. 102


마지막으로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시간은 변동으로서 변동이고, 현상의 자기 안에서의 반성이기 때문에 정당하게 현상적 자연은 객관적인 것으로 정립되고, 또 정당하게 감각적 지각은 비록 그것의 토대인 원자가 이성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하더라도 구체저 자연의 실재적인 판단기준이 된다. 실제로 시간은 감각적 지각의 추상적 형식이기 때문에 시간은 특수하게 실존하는 자연으로서 자연 안에 붙박혀진 필연성이다. 102


감각적 세계의 변화로서 변화, 변동으로서 변동이라고 하는 시간의 개념을 구성하는 현상의 자기 안에서 반성은 의식적 감성 안에서 각각의 실존을 갖는다. 따라서 인간의 감성은 체화된 시간이고, 감각적 세계의 실존하는 자기 안의 반성이다. 103















볕뉘


1. 


미셸 세르는 저작에서 베르그손이 루크레티우스를 끼고 살았다 한다. 수제자로 칭할 수 있다고 말이다. 베르그손은 <물질과 관념>이 아니라 <물질과 기억>이라고 했다. 그는 이미 기존의 이가(二價), 이분의 낭패를 잘 깨닫고 있었다. 물질과 기억, 경험, 감각. 사물자체의 본성과 그것이 용해되는 현실이라는 대양의 표식 역시 같은 궤를 간다.


2.


청년 마르크스를 읽으면서 4장의 이 대목을 보며 깜짝 놀라게 된다. 시간에 대한 무수한 서술을 읽어냈지만, 이렇게 명쾌함은 없었다. 디오게네스의 에피쿠로스 편(3편의 변지)의 기술이 나온다. 에피쿠로스는 당부한 규정, 자연학, 윤리학 세 편의 편지를 쓰면서 이 점은 꼭 기억하라고 반복해서 기억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놓치게 된다고 말이다. 맑스 역사 토 하나도 높치지 않고 저작들의 오류들을 끌어모아 다시 짚어낸다.


3.


명쾌함이란 특출난 방법이기도 하지만 길이기도 하다.



4. 


추상론자이 데모크리토스가 평생을 그 사슬에 메여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지만, 현자에게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 많은 세계경험도 답을 주지 못한다. 갇혀 산다는 것이 이리 무서운 것이다. 등잔 밑은 정녕코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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