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 알라디너 모꼬지?! , 누리꾼의 공간과 한계
070728 누리꾼 생각글 - 풍요로움을 위한 윤리(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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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x축을 지금이라두자. y축을 시간이라고 하자. 지금이라는 수평면을 상황이 벌어지는 국면(생각면)이라고 하자. 그리고 a라는 사람의 생각, b라는 사람의 생각이 부딪치거나 발화하는 지점이라고 하자. a라는 사람의 생각은 반드시 직선일 필요는 없지만, 일정한 생각의 방향성을 가지고 왔다고 하자. 굳이 a와 b일 필요도 없고, c와 d로 이어진다고 하자. 그러니 다양한 주제로 다양하게 생각면을 가질 수 있다고 하자.
1. 사람들은 발화지점, 논쟁이 열리는 지점에 몰려든다. 논리라는 것이 논거를 대략 꼭지가 3가지 이상이라고 하자. 그러면 생각면의 발화지점을 포위할 수 있다. 그 그물에 들어오거나 근거를 원형으로 하거나, 별모양으로 하거나 하트모양으로 하거나 평면에서 다양한 형태로 그 지점을 에둘를 수가 있다.
2. 그러다보면, 논거를 가진 논리의 그물이 촘촘해지면서, 애초의 감정이나, 쟁점에 담겨진 방향성을 가진 지적,선입견,논의의 출발점이 시간에 따라 사라진다. 그리고 소멸한다. a와 b가 만난 지점, 아니 좀더 정확히 하면 a 든 b든 삶과 생활의 과정을 담고 균열을 낸 지점. 폭탄이 터진 현장이 아니라, 폭탄이 왜 던져졌는가?
3. 논쟁의 출발은 포탄이 터진 파편이 아니다.
4. 그리고 논리의 그물도 허약하기때문에 수선도 해야하고, 시간에 따라 자동수선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지고 이기는 것을 떠나서 과연 a, b, c, d라는 사람이 수용을 할까? 논쟁이 격해질 수록 수용에 대한 마음의 문은 좁아진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라 이것저것 자양분으로 자란 생각이란 것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요한다고 되는 일도 아닌 것 같다. 논리적으로 합당하더라도 몸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는가?
5. 그것도 모르는 쫌생이, 자기생각만하는 뭐뭐. 라는 또 하나의 꼬리표를 만들어 마음 속에 넣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생각들이 충돌한 지점에 대한 관심(이것은 또 언젠가 계기를 만나면 논쟁을 열게된다. 단지 수면 아래 있을뿐..)과 시공간에서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도, 현명하다면 가져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6. 우리의 토론문화가 미숙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a와 b의 또 다른 c와 d일지도 모른다. 단지 수면 아래 있을뿐, 그리고 또다른 생각주머니들이 터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계속 반복될지도.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 한마디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파생된 논리-논쟁에 갇혀 또 다른 논쟁이란 안개에서 헤매고 있다면, 한번의 논쟁에서 모든 것이 결정난다고 여전히 착각한다면, 시간이란 변수 속에 건망증처럼 모두 잊혀지기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7. 익히 예상된(그것 역시 꼬리를 잡다가 생긴 파생된 논쟁?이었다) 일들이 고스란히 재현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상처내지도 상처받지도 않고 이끌어갈 재주있는 분들이 당장 해결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아니면 논쟁이란 나무에 집착해서 혹 숲은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따로따로 꼭지를 떼어 새로운 논쟁거리들과 품은 생각들도 많이 나와 활홀할 지경인데, 사건에 가려 제 빛을 내지 못하거나, 제 값을 받지 못하는 쟁점들도 그냥 묻혀질까봐 아쉽다.
8. 토론도 논쟁도 그 만큼만, 꼭 그 만큼만 자라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