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 알라디너 모꼬지?! , 누리꾼의 공간과 한계

 

 인터넷 생각글의 풍요로움에 대한 단상

1. 뺄셈

 - 생각글은 어떻게 풍부해질 수 있는가?

 - 왜 입장이 다른 생각글은 인터넷공간에서 공약수를 쉽게 찾지 못하는가?

 - 생각글이 여물거나, 숙성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 인터넷 공간은  왜, 활자에 집착하게 되나, 상처란 감정에 귀기울이지 못하는가?

 - 상처 댓글은 왜 인터넷공간에서 더 증폭되는가? 처음과 지금의 사이를 제기한 쟁점만으로 바라보려는 구분이 필요한가? 가능한가? 할 수 있는가? 상처난 감정이 회복될 수 있는가?

 - ㄱ,ㄴ,ㄷ,ㄹ이란 사람이 다른 주제로 다른 공간에 만나서 논의를 나누었다면, 논의의 진전이 없었을까?

- 소모하거나, 소모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인터넷 생각글 논쟁의 위험수준과, 그 관계를 풀어나가는 법; 생각이 다져지는 공간이 아니라 얇은 종이와 같아서 밟으면 상처나고 으스러지는 공간, 논지가 함유하고 있는 정서, 감정의 흔적에 대한 이해. 뺄셈보다 의도와 장점을 분리해내는 일. 감정에서 출발한 논의를 애초의 의도와 구분해내는 일

- 논쟁에, 논의에 이겨야한 하는가?

- 권력, 억압만 하는가? 사실인가? 가치중립인가? 권력을 생성될 수 있는데, 일방이라여기는 것은, 미시권력이 인터넷공간을 풍요롭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2. 덧셈

-  공간이 소통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할 것

-  쟁점을 명확히 할 것. 발행 생각글의 논지를 단순화할 것. 가치-취향-방식의 보조틀을 꼬투리 삼지 말 것.

-  애초 생각글의 논지에서 얼마나 덧보태어졌는지에 중점을 두어 평가해볼 것.

3. 나눗셈

- 인터넷 공간에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생각을 교감하는 일에는 심연의 강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을 건널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지속적인 지식의 전달에도 불구하고, 감정이나 포인트,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눈동자라는 것이 없기에, 팔짱을 끼거나, 몸을 뒤로 빼는 몸짓이 없기에. 꾸며지거나 덧보태어질 수 있기에 정확한 전달이 어려운 것은 아닐까? 문화적인 역능 부족, 다양성에 대한 논의, 당위성이라는 위장적인 표현은, 현실 공간에서 자기말만 하려고 하는 것, 듣지 않는 문화와 상통하는 것은 아닐까? 학자가 자신의 논리를 반박하는 일에 집요하게 발화지점에서 논의를 확장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상대를 침몰시키려 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을까? 이 지점에서도 논쟁이 아니라, 상대를 나의 논리에 귀속시키려는 욕망이 앞서 실질적인 진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 얼마나 잘 들을 수 있느냐? 발화지점이 어디냐? 우리의 다른 가치에 대한 수용력, 수용수준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수용수준이 성숙되지 않으면, 여러 반찬이나 다른 식성을 몸으로 인정하는 수준에 근사하지 않고서는 논의나 논쟁의 진전으로 인한 상호 변화를 기대한다는 일은 욕심이 되는 것은 아닐까?

- 우리의 문화적 수용성, 수준, 다문화, 다가치에 대한 섞임-융화능력은 어느 수준일까?

4. 곱셈

 - 소통공간이 만들어지고, 그 공간내에서 소통은 현실의 공간과 달리, '유아기' 수준임을 명심할 것. 새로운 방식, 새로운 나눔틀, 나눔 윤리에 대한 성찰을 같은 수준으로 키워내지 않으면, 생각만큼 열린 공간 확장은 한계가 있음. 오히려 다른 기준, 틀을 키워내면, 그 소통공간의 확장-영역은 다른 속도를 가지고 나아갈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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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논쟁의 발화지점 다시보기.....
    from 木筆 2007-10-09 10:03 
    0. x축을 지금이라두자. y축을 시간이라고 하자. 지금이라는 수평면을 상황이 벌어지는 국면(생각면)이라고 하자. 그리고 a라는 사람의 생각, b라는 사람의 생각이 부딪치거나 발화하는 지점이라고 하자. a라는 사람의 생각은 반드시 직선일 필요는 없지만, 일정한 생각의 방향성을 가지고 왔다고 하자. 굳이 a와 b일 필요도 없고, c와 d로 이어진다고 하자. 그러니 다양한 주제로 다양하게 생각면을 가질 수 있다고 하자. 1. 사람들은 발화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