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 타자를 만날 수 있는가






||:친한 친구가 죽었다. 사랑하는 너를 더 이상 매만질 수 없다.
 
포탄 소리가 요란하다. 깜깜한 밤. 문은 왈칵 열리고 “당신은 어느 편이야?” 말을 거는 순간, 나의 목숨은 경각에 달린다.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의 무게도 전장의 상흔보다 더 큰 코로나 시대에 안녕하지 못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말한다는 것과 인사를 나눈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폭력에 노출된 것이자, 그 상황을 감수하며 건네는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한 철학자가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고 그 가족들은 나치에 학살되었다면, 그는 어떤 사유를 할 수 있을까? 하이데거와 후설에게 학문을 배운 그가 이런 현실에서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원고를 막 쓰기 시작한다. 대체 철학은 무엇을 한 것이고,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세계-안-존재, 죽음 이전의 삶. 그 존재. 독립된 존재로서 개인. 발라낸 개인으로서 사유는 제도와 생산력 포식의 세상을 만들어냈다. 신은 죽었지만, 그로 탄생한 개인은 어김없이 자신과 동일한 인물을 만들어낸다. 숱한 이론과 지성도 결국 엘리트주의에 감염되어 서로를 적으로 몰아 사멸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이런 전체성을 지향하는 오디세우스의 모험과 귀환이 아니라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아브라함에게 주목한다. 빚을 진 존재자. 책임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 주체란 무엇인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가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사를 건네는 것은 내가 묵살될 수 있다는 것이며, 타자에게 폭로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나인 것이다. 말하기에서 중요한 것은 거기에 결정적 행위가 성취되었다는 사실이다. 의미의 주고 받기가 아니라 그 와중에도 의미의 생성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나와 타자는 동시적으로 생기하는 것이며, 나에 앞서 타자가 있는 것도, 타자에 앞서 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와 타자는 사건 속에서, 사건으로 동시에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까지 같아진 것은 아닌가 회의한다. 당신은 정신없이 무대만 보는 실재론자 관객은 아닌가. 아니면 시시해져서 흥미를 잃어버린 회의론자는 아닌가. 연출가로서 너무 몰입하지도 않고 너무 분석적이지도 않고, 주제와 주제 이외의 것을 느끼려고 해야되는 것은 아닐까.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시선을 섞는 지향을 가져야 되는 것은 아닌가,하며 후설의 현상학에 기대를 걸어본다. 휴머니즘이라는 이론만 있었지,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늘 곁에 둔 적은 있었던가. 도덕과 법과 평등이란 허구에 앞서서 인간적 공정이 먼저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놓치지 않으면서 말이다.

주체의 종언과 구조주의가 만연한 그 시류에 거슬러 그는 인간주의와 주체성의 복권을 부르짖는다. 세상을 어떻게 달리 이해할 수 없을까? 준 유아적인 태도에 머무르는 철학과 학문의 습속에 대항한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받는 사람은 그런 감정이 있을 때만 성립할 수 있다. 책이란 텍스트는 무엇일까? 그것 자체가 진리이지는 않다. 끊임없이 읽고 다르게 해석하는 의미만이 실천성과 사용성을 갖는 것은 아닌가? 사물 역시 규정된 무엇이 아니라 그 양태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객관적인 것도 괄호를 치고 판단중지를 해보거나 유보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보는 방법을 갖게 되면 분리된 하나가 아니라 서로를 보고 느낄 수밖에 없다.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실재일 것이다. 대상을 소유할 수 없다. 사유할 수 있을 뿐이다. 타자를 이해하는 방식은 이렇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무한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것이다. 그 끝을 열어두는 상태이다. 수렴이 아니라 확산. 독백이 아니라 대화로서 앎을 소생시켜야 한다고 말이다.

애당초 내가 지배하고, 파악하고, 통제가능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는 약하게 될 자이자, 약하다. 약하다는 자체가 타자를 불러들이고 있다. 사랑하는 일은 타자를 위해 마음 아파하는 일이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혼자 설 수 없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으로 자신을 기초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느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되먹임하는 일만이 점점 더 독립된 나를 만들고 나 아닌 나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타자는 빈자, 이방인, 과부, 고아의 모습을 갖는 동시에 스승의 모습을 가지면, 그것이 나에게 자유를 수여하고, 나를 기초 지우는 것이다. 나는 -로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타자를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나를 향유하는 기능에서 비로소 나인 것이다. 나 아닌 것을 끊임없이 자기 안에 투입해나가는 운동성이야말로 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그는 되새긴다.

레비나스 그는 스승들을 쫓았지만 결국 물구나무 세웠다. 강한 자, 명료한 학문의 방식이 낳는 철학의 말로를 뒤튼다.그것이 낳는 폐해를 반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약한 자, 의미를 쌓아가고 연결시켜가는 점점 달라지는 사랑의 풍요로움은 결코 이전 사상가들의 사고와 이론에서 나올 수 없다. 곁의 사람에게 말 걸고 점점 달라지고 세밀해지는 곁의 삶에 아파하고 보듬으면서 친밀해지고 시공간의 집에 정주함으로써 자아가 되는 것이다. 나는 타자의 유책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


볕뉘. 오랜만에 서평을 써본다. 늘 쉬운 일이 아님을 느낀다. 글짓는 이들의 한 땀 한땀을 존중한다. 읽는 순서는 없다. 어디서부터 읽든 반복하시면 글쓴이의 의도를 충분히 감안해주시는 것이다. 감사드리며 새해 복많이 지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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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01-01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 일은 타자를 위해 마음 아파하는 일이라는 구절이 와닿습니다. 첫눈처럼요.
새해도 좋은 기운으로 왕성한 활동 펼치시길 바랍니다. 여울님.

여울 2021-01-01 21: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자주 뵐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