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 구경하기 어려운 남쪽 도시에 몇 년 만에 눈이 내린다. 하얀 나라를 베란다 밖으로 바라보며 뜨듯한 거실바닥에 배를 대고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보던 시간이 강물처럼 흘렀다. 가끔 마음이 날을 세우면 그때의 그림책을 꺼내어 본다. 94 내 이름은 해적판

[ ] ˝사람들은 생각을 묻기보다 기분을 묻지. 왜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봐 달라구. 나? 나는 생각을 조심하지.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되고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격이 되고 성격은 운명이 되지.˝ 74 습관

[ ] 함께 있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믿지 않는 것에서 진정한 사랑은 출발하는 게 아닐까 101

[ ] 쓰는 것으로 기억하고 쓰는 것으로 사랑하고 쓰는 것으로 나아가고자 ‘쓰는 것은 모든 것의 끝‘이라는 릴케의 말을 나는 오해하는지도 모른다. 쓰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으니까. 104

[ ] <유리정원>을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보면서 이분들의 귀에 파고들 문장과 의미 있는 대사에 집중했다. 영화 속, 지훈이라는 작가가 소설 ‘유리정원‘을 써 내려가는 장면에서 관객은 그 남자의 중저음 목소리로 문장을 듣게 되는데, 유연하고 고아한 풍취가 있었다....안타깝게도 초록 유화물감을 뿌려놓은 듯 환상적인 화면은 보지 못하는 이분들이 장면 설명을 듣고 상상의 나래를 활짝 폈기를 113 베리어 프리

[ ] ˝문제는, 삶에서든 글쓰기에 있어서든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혹독한 날씨는 이야기의 완벽한 원천이다˝라고 하면서도 근 장엄하거나 거대한 날씨에서 나온 이야기보다 호수의 표면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평온함을 느낀 어느 여름 아침의 발작적인 행복감을 속삭인다. 136 완벽한 날들의 한 가운데서

[ ] 풍경은 그렇게 눈으로 담기고 마음으로 남는다. 풍경은 오롯이 나만의 세상이 되고 멀어져가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손 흔들어준다. 내가 시간을 달리는 게 아니라 시간이 나를 훑고 지나가고 나를 보듬었다 보내 주는 것이다. 다정한 미소를 환하게 지으며, 그 훈훈한 작별의 미소가 시간의 속박에서 나를 풀어주고, 나는 오늘도 무한원점을 향해 역방향의 느린 탈주를 꿈꾼다. 162 무한원점

[ ] 청사포 가는 길은 등대로 가는 길이다. 동백섬을 돌아 바다와 구름 언덕 해운대를 지나, 달맞이언덕에서 출발하면 맞춤이다. 세련된 카페와 갤러리가 모여 있고, 문화의 장으로도 한몫하는 달맞이 언덕에는 아베크족과 촬영하는 신랑신부들 발길이 잦다. 달맞이 공원 아래로는 문탠로드가 있다. 달빛을 받으며 걷는 산책로이다. 그 시점이자 종점, ‘달빛나들목‘에 서면 해운대 해안과 동백섬, 광안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170 청사포 가는 길

[ ] 살아가는 일은 풍경을 거느리며 자전거 페달을 밟아가는 일이다. 허리춤에 매달고 달리는 풍경은 온전히 나의 배경이고 동반자이며 나를 키워가는 힘. 오월 장미넝쿨 담장이 아니라 십일원 성마른 담벼락일지라도 들썩이지 않게 무게를 잡아주는 옆날개, 어떻게 펼쳐질지 쌩쌩, 삶은 설렘이다. 183 景3

[ ]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건 발뒤꿈치에 달려오는 그림자를 감당하기 버거워서가 아닐까. 회피하고 싶어서든지. 찬연한 빛과 엄중한 그늘 탄식의 빛과 안식의 그늘 끌어안아야 할 우리의 모든 것. 188

[ ] 하얗게 터지는 폭죽소리 손안에 쥐어지는 한 움큼의 고소함, 행복은 구체적 풍경 사랑은 구체적 삶의 味感이다. 232 愛2


볕뉘.

1. 화 영 시 경

 

꽃, 꽃그림자. 꽃그림자 드리운 시간풍경이라.  . 전시회의 여독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이렇게 마음주제를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갑다 싶어 한 손에 들어오는 책장을 넘긴다. 아니 사진첩을 펼쳐든다. 아니 달콤하고 아련한 산문집을 들려있다. 어느새 난 바닷가를 거닐고 있고, 그녀가 말한 릴케를 만나고 윤동주를 다시 만난다. 잊혀진 마광수도 말이다. 신수원 감독의 유리정원도... ...풍경이 데려다주는 곳으로 가보니 어느 새 사이렌이 지키고 서있는 그리스의 협곡이기도 하다. 수필가인 그녀의 이 책은 담백하면서도 날카로운 글맛으로 독특한 장르처럼 느껴진다. 사진에 담겨진 글도 말이다. 어느 새, 책 숲을 거닐다 보면 막과 막 사이를 너머 저편 그녀의 삶의 편린들이 잡히기도 한다.

2.

 

전시회가 끝나고 그동안 스쳐지났던 대구역앞을 시작으로 구석구석 발품을 팔며 돌아다녔다. 그래서야 이제 겨우 대구의 근대와 지금이 조금 읽히기 시작했다. 양산을 지나 발걸음 아니 마음걸음은 벌써 부산 앞바다를 거닐고 있다. 구석구석 발품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풍경의 사진들과 쉬어가는 짬짬이 손에 잡힌 이 꽃같은 책의 갈피를 넘기며 다시 볼 것 같다. 부산의 바람과 꽃과 삶의 풍경을... ... 그녀가 가리키는 저 편을 헤아려보면서 거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3.  생각, 시간 그리고 삶

 

미셸 투르니에는 책이란 주제의 산문에서 점자책을 이야기한다. 눈이 아니라 손끝으로 읽는 독서는 어떠할까 하고 상상한다. 그의 말에 이끌려 손끝으로 읽는 책의 관능미에 넘어갈 뻔핸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잘 보이지 않으면 청력이 예민해지고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진다는 말에 그만 뜨끔해버렸다. 그 생각의 짧음에 말이다. 요즘 어떠세요가 아니라 어떤 생각을 하세요라고 묻고 싶었다. 한 모임의 15주년 기념식에 가서 쓴소리를 담고 지난 흔적을 거슬러 올라가며 아쉬운 것들이 뭍어나왔다. 그 시간들은 분명 우리를 훑고 지나갔지만 우리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 주위를 맴맴 도는 것은 아닐까?  늘 물어봐야 할 것을 묻지 않고 살아왔으므로 또 그렇게 지나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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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들리나요 마음을 살살 어루만져주는 눈물나게 고마운 저 소리가
    from 처녀자리의 책방 - 화영시경花影時景 2019-12-28 13:02 
    여울님이 쓰신 리뷰인데 이상하게 <화영시경>으로는 나오지 않고 두번째, 첫번째 책으로 검색하면 나온다. 시스템 오류인지 무언지 잘 모르겠지만 마음 담아 쓰신 소중한 리뷰가 묻혀 미안하기도 아쉽기도 하여 이렇게 먼댓글 트랙백을 건다. 여울님은 화가이자 시인이다. 마음결이 섬세한 분이라 처음에 여자분인 줄 알았다. 선입견이 작동한 거지. ^^올 11월에 대전에서 시그림 전시회를 하셨다. 꼭 가보고 싶었는데 도저히 일정이 여의치 않아 못 가봤다.
 
 
2019-12-27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30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7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9-12-28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셀 투르니에도 점자책을 언급했군요. 손끝으로 읽는 관능미는 영화적 상상일 가능성이 커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점자 읽기는. 손끝으로 더듬더듬 읽는 수준도 꽤 오래 연습되어야 하구요. 생후 백일에 시력을 잃은 사십 대 후반 남성 시각장애인분이 제가 본 분 중 단연코 제일 잘 읽는 분이었어요. 그래도 눈으로 줄줄 읽는 만큼은 안 되구요. 그래서 음성도서를 아주 많이 다방면으로 들으세요. 듣기는 집중력을 특히 더 요구하는 일이지요^^

여울 2019-12-30 09:3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때론 상상력이 논리만 쫓아가다보니 현실비약하는 경우가 생기는군요. 잘 느끼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