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고고학
키스 윌킨스.크리스 스티븐스 지음, 안승모.안덕임 옮김 / 학연문화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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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 구입한지는 2년이 넘었고, 그 와중에 책을 폈다, 닫았다 한지도 역시 2년이 넘었다.

예전에 테르모필레 전투가 벌어진 戰場을 고지형 분석과 연결해서 소개한 글을 간략하게 쓰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어떠한 내용이 실려 있으며, 구체적으로 이 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리하지는 못 했다(당연한 말이다. 완독하지 못 했으니까 -.-;). 어쨌든, 이번 기회에 큰 맘 먹고 완독한 후에 서평을 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간 책을 꾸준히 읽지 못 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책의 내용이 어려웠고, 또 생소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뭐 조금 안 좋게 말하면 비전공자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쓸데없는 소리로만 들릴 내용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으로 해두자(실제 책 뒷부분 ‘역자의 변’ 부분을 보면 역자도 막상 번역을 해 보니 책 자체가 지질고고학으로 많이 편중되었으며, 자연과학적 배경이 없는 일반 고고학도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느낌이 들은 책이었다는 심정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필자도 근 20여일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읽었으니 뭐 할 말은 없다.

먼저 목차 한번 간단하게 살펴보자. 

1장. 환경고고학 입문
머리말
'환경고고학' 정의
환경고고학의 발달
환경고고학자의 연구자료
프럭시 자료에 대한 해석
생태학과 고생태학
고대 생물유체의 잔존
요약 

2장. 고환경 : 고고학적 경관의 연구
'환경'의 의미
고지형에 대한 이해
암석학과 광물학
구조
해수면 변화
하천은 무엇인가
과거 생물상의 복원
비해산 연체동물 기록에 대한 해석
요약

3장. 고경제 : 생물학적 증거로 복원한 고대 생업과 생산
머리말
경제의 본질
생산과 소비
농업의 집약화
고경제의 생물학적 증거
식물고고학
동물고고학
분자생물학적 연구
경제적 질문에 적용된 생물학적 증거
요약 

4장. 환경고고학과 이데올로기
자연환경과 사회적 이데올로기 및 경제와의 통합
환경에 존재하는 자연계의 정령과 신
신화, 은유 그리고 자연의 순환
신을 위한 공물과 의식
소비 이데올로기 

5장. 환경고고학 : 이론가 없는 이론
과학으로서의 환경고고학
패러다임의 창조와 구체화
과학적 고고학
과학인가 과학적 소설인가
이론으로 본 환경고고학의 미래 

6장. 환경고고학의 계획, 해석과 집필
머리말
환경고고학의 계획
텔 엘-아마르나 근로자 마을
환경고고학의 집필

딱 봤을 때 이 책은 ‘환경고고학이 뭔지 소개하기 위한 개론서’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목차를 한번 훑어봤을 때 크게 재밌겠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 국내 고고학계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고, 필자가 몸담고 있는 연구소에서도 이런 환경고고학적인 측면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 역시 이에 대한 관심은 적지 않았다. 물론 심각하게 공부해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책을 통해서 환경고고학이 뭔지 좀 자세하게 알고 싶기도 했고, 환경고고학을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 필자는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어쨌든 다소 어렵게만 여겼던 환경고고학에 대해 대강이라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추후에 공부하듯이 2번, 3번 계속 읽어봐야 할 것 같지만 일단은 이번에 1번 완독한 대강의 느낌만 적어보고자 한다.

 

솔직히 ‘1장. 환경고고학 입문’은 그닥 재미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서술하고 있기에 환경고고학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세히 읽어봐야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라 불라’ 교과서적인 내용이 많아지게 되었고, 재미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눈여겨볼만한 부분들은 분명히 있었다. 환경고고학이 신고고학의 이론적 배경 속에서 탄생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거나, 환경고고학이 과학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고고학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신뢰하기 어려운 학문적 위치를 지녔다는 내용 등은 흥미로웠다. 또한 필자가 수업시간에 배우거나, 책(물론 관련 전공서적)에서 읽었던 것 이상으로 환경고고학의 범위가 넓고, 오늘날 여러 연구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환경고고학이 일반적으로 고대의 경관, 즉 사람이 먹고 자고 생활했던 입지 혹은 경관에 대한 내용만 다룬다고 알고 있었지, 고경제를 분석하는데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솔직히 후자는 전자를 연구하면서 따라오는 부수적인 부분으로만 이해한 것이 사실이다).

 

그 다음 ‘2장. 고환경 : 고고학적 경관의 연구’는 전반적으로 재밌게 본 부분이다. 그만큼 익숙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학교 수업 시간이나 기존의 고고학 서적에서도 접했던 내용들이 나온 만큼 이 부분은 복습하는 차원에서 차근차근 읽어봤다. 하지만 ‘과거 생물상의 복원’부터 끝부분까지는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고식생 연구, 꽃가루 분석, 화분분석을 위한 시료채집, 꽃가루 아시료의 실험실 분석 등등 111~185쪽에 해당하는 내용은 관심분야도 아니었고 단순히 지식의 전달을 위한 내용 전개여서 필자의 독서 의지를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물론 관련 전공자가 보면 개설서로서 잘 정리된 내용을 접할 수 있겠지만 일반 독자들이나 비전공자들에게는 지루한 내용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딱정벌레를 중심으로 하는 고고곤충학에 대한 내용은 흥미로웠다. 딱정벌레는 곤충 중에서 가장 다양하며, 다른 목의 유체보다 고고학적 퇴적층에 더 잘 보존되며(외골격이 갑옷처럼 딱딱해서), 현대의 딱정벌레 생태가 다른 곤충 목보다 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주요 연구대상으로 취급된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각다귀과에 대한 연구도 증대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 곤충들을 갖고 기후와 서식지를 복원하는데, 일부 곤충 종은 매우 한정된 특정의 서식지에만 서식하기 때문에 인간의 활동 영역 복원에 특히 효과적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딱정벌레 중 Tipnus unicolor는 인간의 오물과 섞인 부패 중인 밀짚 속에서만 사는데, 중세시대의 도시 환경에서 흔했다고 한다(하수처리 방법의 변화로 오늘날에는 드물단다). 이를 우리나라에 적용한다면 화장실 유구의 흔적을 찾는데 유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자는 환경 복원을 위한 시료 내에 존재하는 모든 곤충분류군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즉, 발견된 종이 저장 농산물의 해충인지, 인간 또는 동물의 기생충인지, 주거 쓰레기에서 기원한 것인지, 또는 날려들어 온 배후 곤충군인지 말이다. 암튼 고고학적 유적에서 발견된 준화석 곤충에 대한 연구는 주거, 생업, 기술 활동 복원을 위한 매우 강력한 도구라고 역설했는데 필자 역시 이에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150쪽의 도 45를 보면 인간생활과 곤충이 얼마나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저자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멋진 말을 남기기도 했다.

곤충만이 생활 상태를 이렇게 상세하게 복원할 수 있게 해주며, 장인으로 구성된 부유한 사회를 암시하는 멋진 유물과는 상반된 인상을 제공해준다.

이 책에서 필자가 굉장히 주의 깊게 본 부분이 바로 ‘3장. 고경제 : 생물학적 증거로 복원한 고대 생업과 생산’이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환경고고학이 고경제를 복원하는데 주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어려운 내용들이 많았다. 일단 ‘분자생물학적 연구(Biomolecular studies)’에 대한 내용은 지루한 설명뿐이어서 읽는데 힘들었다. 하지만 ‘경제적 질문에 적용된 생물학적 증거’ 부분은 재밌게 읽었던 것 같다. 농업활동을 각 과정별로 분류하고 그에 걸맞은 고고학적 연구사례, 방법론 등을 나열한 것이었는데 굉장히 이채로우면서도 흥미로웠다. ‘경작에 의한 생산, 경작지 입지, 이전의 토지 이용과 경작지 개간, 거름주기, 경작과 제초, 작물의 파종, 수확’으로 각 과정을 분류한 저자들은 굉장히 세세한 부분까지도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어 읽는 내내 ‘와아~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예를 들어 거름주기의 최상의 증거는 어떤 것이 있는지, 극젱이와 쟁기로 땅을 갈았을 때 그 안에서 어떤 시료들을 채취해야 하며 어떤 결과들이 나타나는지 뭐 이런 것들 말이다. 심지어 수확에 대해서도 이삭을 손으로 따는 법, 도구로 따는 법, 작물 전체를 뿌리째 뽑는 법, 낫으로 줄기를 베는 법 등으로 세분화하여 설명하고 있었다. 이런 부분은 국내에서도 연구 사례가 있지만 이처럼 자세하게 언급된 것은 본 적이 없어서 그 점이 또 흥미로웠다. 물론 이외에도 작물 가공과 동물 생산에 대한 부분도 이처럼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었는데, 현장에서의 조사가 보다 세분화되고 디테일해져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저자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같이 ‘현장에서 조금만 더 신경 쓰면 정말 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니 말이다.

4장부터는 인지과정주의 고고학적인 내용, 학사적인 내용, 이론적인 측면 등이 서술되어 있는데 전반적으로 책의 1/3 정도를 차지하고 있지만 읽는데 큰 부담은 없었다. 왜냐하면 고고학도라면 학교 수업 시간에 한번쯤은 다 들었을 법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4장. 환경고고학과 이데올로기’는 전체적으로 인지과정주의 고고학적인 부분이 많았는데, 인류학이나 민속학적인 내용도 많아서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해석의 범위’이기 때문에 한국 고고학계와의 시각 차이나 수준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 A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B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고고자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여러 자료들을 그냥 가장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수준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딱 이것이 正論이다, 하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재밌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암튼 환경고고학을 통해 어떤 사실들을 추론하고, 어떤 것들을 밝혀낼 수 있는지 서술한 부분이어서 비전공자라 하더라도 이 부분은 전반적으로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그 뒷부분은 전체 고고학사 중에서 환경고고학과 관련된 학자들과 이론들에 대해 총괄적으로 정리를 하고 있어 1번 더 공부한다는 생각에 읽으니 괜찮았다. 특히 ‘과학인가 과학적 소설인가?’라고 하는 부분은 우리가 하는 고고학의 성격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하게끔 했다. 또한 실질적으로 환경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한 연구계획서(예시)가 서술되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적용하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뭐 일단은 관련 전공자뿐만 아니라 연구자도 적고, 디테일하게 발굴조사가 이뤄지기 어려운 현장 여건도 있고 하니깐 말이다. 진짜 작정하고 환경고고학적인 연구를 처음부터 시도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북미와 영국에서는 완전하고 설득력 있는 사업 계획서 없이 고고학 조사가 진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사업 계획서는 흔히 외부 전문가의 정밀한 심사를 받는다고 하는데...우리나라는 언제쯤 이런 시절이 올까 싶다. 하지만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지금은 전통고고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지만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우리나라에서도 환경고고학이라는 것이 보편화되고 관련 전공자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보는 바이다.

책 후반부에서는 ‘텔 엘-아마르나 근로자 마을’과 ‘차탈휘익’ 유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정말 유적에서 확인된 수많은 시료들을 갖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단순히 유적에서 수습한 토기편과 각종 유물들, 그리고 여러 유구들을 조사하는 것만으로는 그 유적에 대해서 50% 정도밖에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책에 거론된 대부분의 사례들이 국내 사정과는 맞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방법론적인 측면, 그리고 인식의 측면에서 배울 점이 많았던 것 같다. 아마 우리나라에 위에서 언급한 2개의 유적이 확인되었을 때, 과연 이 책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다양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덮었다.

전반적으로 책에 대한 소감을 말하라면 어렵다. ‘역자의 변’에서도 뭐 이런 비슷한 얘기들이 나오는데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우리가 평소 쉽게 접하지 않는 부분인지라 이는 저자들의 책임도, 역자들의 책임도 아닌 것 같다. 또한 책에 나오는 내용 대부분이 유럽 일부분에 국한되어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적 일부가 포함되어 있어 그 사례가 국내 사정과 적합하지 않은 것들도 많이 있었다. 이는 아마도 동양의 고고학계와 서양의 고고학계가 학풍이 많이 다르기 때문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한편, 이 책 뒷부분에 환경고고학과 관련된 참고문헌들이 죽 나열되어 있는 것처럼(그뿐만 아니라 관련 연구소의 웹사이트까지 기재되어 있다), 역자들이 책 중간 중간에 원서의 내용과 상관있는 국내 연구들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어 그 점이 아주 좋았던 것 같다.

나중에 필요한 부분은 또 찾아보겠지만, 두고두고 읽으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책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 책을 읽는 다른 독자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책 전부를 다 읽어보라고는 권하지 못 하겠고, 관심이 있는 부분은 이 책에서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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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 하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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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보름 만에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서평을 쓰는 것 같다. 석사논문 제출 날짜가 일주일도 채 안 남았음에도 이렇게 이 책의 서평을 쓰는 이유는 논문을 쓰다가 중간 중간 쉬는 시간에 조금이라도 이 책을 읽을 정도로 이 책에 푹 빠졌기 때문이다. 아직 읽어보지 않은 독자분들이 계시다면 정말 ‘강추!’하고 싶을 정도로 재밌는 책이다. 일단 얘기하고 싶은 것은 ‘상’권을 읽었을 때의 흥분과 전율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筆力에 의해 필자가 감동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역사적 지식과 당시 시대상을 파악하는 통찰력은 정말 본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 중간 중간 약간의 소설적 상상력이 가미된 역사해석도 물론 있지만 그것이 결코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닌 것 역시 그녀가 책 전반적으로 신뢰할만한 역사적 사실들을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 서양사 전공자들 중에 이만한 필력을 가진 大家가 없기 때문에, 혹은 그런 분들이 이와 같은 수준의 책이나 연구 성과를 내놓지 못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보고 열광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이라면 설사 그 독자가 관련 전공자라 하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내공의 결과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배은숙이 쓴『강대국의 비밀』을 처음 봤을 때 ‘아! 우리도 드디어 로마사 관련 전공자가 책을 썼구나~’하는 마음에 당장에 책을 구입했다. 하지만 읽으면서 느낀 점은 ‘뭐야! 이거 Adrian Goldsworthy의 The Complete Roman Army와 내용이 거의 유사하잖아! 번역서 아니야 이거!’였다. 그만큼 외국 연구 성과의 힘을 빌리지 않고 고대 그리스-로마사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놓은 대중서적이나 연구서적은 아직 없는 실정이다). 암튼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녀의 이 책이 정말 재밌다는 사실이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오자. 일단 (상)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서 여기에서는 그렇게 할 얘기가 많지는 않다. 다만, 주인공도 바뀌고, 내용도 바뀌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잠깐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하)권이 (상)권에 비해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은 주인공의 위상(?)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상)권에서 지중해를 무대로 활약하는 수많은 해적들이 아무리 코르사르였다지만 주변 국가에서 보기에 그들은 해적일 뿐이다. 당장 우리 땅을 침략해 사람들을 잡아가고 물건을 빼앗아가고 지나가는 우리 배를 약탈해가는 해적이 눈에 보이는데 그들이 피라타인지, 코르사르인지 알게 뭐란 말인가. 그런데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직함을 받게 된다. 그것은 바로 ‘투르크 해군’이라는 직함이다. 해적이 왜 갑자기 해군이 된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전통적으로 해상전력이 강하지 못한 투르크가 해적을 해군으로 조직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상비군 전력으로 운용하면서 해상력을 장악하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해적의 두목을 ‘해군제독’으로 임명하고 국가의 공식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만 달라졌다. 어쨌든, 해적의 위상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것만은 사실이다. 그야말로 제 세상 만난 것처럼 해적들은 지중해를 활개치고 다니게 된다.

아마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헉! 그럼 이제 정말 난리 났네~예전에 해적 신분으로 분탕질하고 다닐 때도 난리였는데 이제는 아예 투르크 해군이라는 직함까지 얻고 공식적으로 해적질을 다니면 유럽 사람들은 정말 큰일 났구나~’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당시 투르크가 술탄 메메드 2세(1451~1481)-바예지드 2세(1481~1512)-셀림 1세(1512~1520)-술레이만 1세(혹은 술래이만 大帝 : 1520~1566)로 이어지는 최전성기를 구가하는 동안, 유럽에서도 베네치아, 제노바 등의 해양 도시국가들이 결코 투르크에 비해 뒤지지 않는 해군력을 보유하면서 지중해 바다를 누볐기 때문이다. (상)권에서 언급했지만 당초에는 미약하기 그지없던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국가들이 이 시기가 되면 수백 척의 범선과 갤리선을 보유하고 지중해 바다를 당당히 활보하던 시기였으니 해적들이 기고만장해진 것과 맞물려 유럽인들 역시 콧대가 높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빅 매치’가 가능해진 시기가 됐다는 소리다.

이 시기 유럽은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적자생존의 법칙만이 남아있는 지극히 인간적 군상들이 밀집해 있는 사회로 변모해간다. 로마 교황의 권위는 바닥을 치고 파문이라는 신의 대리인이 내리는 무시무시한 선언은 콧방귀만 이끌어 낼 뿐이었다. 프랑스, 에스파냐, 헝가리 등 유럽의 강대국들이 각자 영토국가로 발전해가면서 투르크 제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에 맞섰다. 그 사이에서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위치를 절감하고 더욱더 종교와 민족, 국가와 사회를 초월한 등거리 외교에 목숨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현상은 프랑스와 투르크 동맹에서 극에 달하는데 기독교 국가이면서도 에스파냐와 극렬하게 대립했던 프랑스는 투르크와 군사동맹을 맺어 유럽의 비난을 한 몸에 받는다. 베네치아가 비록 욕을 먹으면서도 경제동맹은 맺지만 군사동맹은 결코 안 맺었었는데 프랑스는 선을 넘어버린 것이었다. 투르크가 동쪽에서 치고 들어오고 프랑스가 유럽 각지에서 에스파냐를 공격해 에스파냐의 영향력을 줄이겠다는 것이 프랑스의 의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욕 먹으면서 이룬 동맹도 헛되고 말았으니, 전설적인 해적 두목(훗날 최초의 투르크 해군제독으로 임명된) 바르바로사가 ‘국빈’으로 초대되어 프랑스에 머물면서 온 유럽을 제 집처럼 분탕질하고, 투르크의 군사행동은 생각만큼 적극적으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프랑스는 막대한 배상금(배상금이라 해야 하나? 아니 작별선물이 더 낫겠다. 무려 7만 두카두나 되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지불하고 바르바로사가 이끄는 해적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욕 먹고, 돈 버린 셈이다.

이 시기에는 몇몇 유명한 해적 두목들이 등장하는 것이 볼 만하다. ‘바르바로사’를 비롯해서 ‘유대인 시남’과 ‘투르구트’, ‘울루치 알리’까지. 저자는 당시 투르크의 인재 등용 범위가 상당히 개방적이라는 얘기를 꺼냈다. 맞는 말이다. 유대교를 믿었던 사람이든, 기독교를 믿었던 사람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지금은 알라의 가호를 받으며 이슬람의 집을 넓히는 역할을 담당하는 전사인데 말이다. 물론 정통 이슬람파가 아니므로 사회적인 제약은 어느 정도 있겠지만 당시 마녀 사냥이나 화형, 구교와 신교의 대립 등으로 혼란스러운 기독교 사회보다는 훨씬 나아보였다. 능력만 있으면 성공하는 사회와 능력이 없어도 신분과 지위, 명성이 중요시되는 사회가 있다면 어느 사회가 더 빨리 성공하고 발전할까? 그래도 유럽은 다행이다. 베네치아가 기독교를 믿지 않고 이슬람교라는 종교의 교리에 보다 친밀감을 느껴 행동했다면 유럽의 바다는 과연 누가 지킨단 말인가. 그리고 해군을 조직적으로 정비하지 않고 안일하게 생각한 투르크 역대 술탄들의 성격 역시 유럽 사회를 지키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빨리 끓은 냄비가 빨리 식는 것처럼 투르크 해(적)군은 한동안 지중해를 제 집처럼 활보하다가 일순간 얻어맞기 시작한다.

몰타기사단(로도스기사단의 나중 이름)은 이슬람 해적과 똑같은 짓을 하고 다녀(이슬람 배 약탈, 이슬람 애들 노잡이 등 노예로 쓰기, 이슬람 물건 약탈하기 등) 이슬람 애들을 못살게 굴었고, 눈에 불을 켜고 다니면서 바다에서 만나면 싸움걸기 일쑤였다. (상)권에서부터 나오지만 이슬람 해적들은 규모면이나 기동성면에서는 유럽 국가들을 압도했지만 장비나 항해기술, 조선 수준, 해상전투 능력 등은 한참 모자랐다. 그런 약점을 간파했기에 이 시기 유럽의 해군들은 방어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상초계업무와 함께 직접 원정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바다 위에서의 해상전 뿐만 아니라 상륙전과 진지 점령전까지 병행하면서 말이다. 불과 백여 년 전에는 생각도 못할 일을 유럽 국가들이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에스파냐, 몰타기사단, 교황청 해군, 제노바, 베네치아 등등 수많은 국가들이 이른바 연합함대를 여러 번 결성해 직접 해적의 근거지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히 戰士와 軍士의 능력 차이가 전투에서 현격하게 드러났다. 비록 투르크의 정예병인 ‘예니체리’까지 동원된 대규모 전투들이 벌어졌지만, 규모나 전투 능력적 면에서 순수한 군인들로 이뤄진 군대와 정규군과 비정규군(해적 혹은 용병, 기타 뜨내기들)이 섞인 군대는 차원이 달랐다. 목숨을 걸고 진지를 사수하느냐, 아니면 일단 불리하면 도망갔다가 다시 이해관계에 따라 모여 싸우느냐는 마인드는 천지차이니까 말이다. 투르크가 왜 해군을 그렇게 해적에만 의존하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물론 돈이 많이 드니까, 혹은 지금 당장 결과를 보고 싶으니깐 단기적인 투자에만 의존한 것이겠지만 이후 고구려와 백제를 대규모 해군력으로 제압한 당을 보면 투르크가 그 정도의 정복 욕구는 없었던 것 같다. 뭐 한편으로는 당 태종의 정복 야욕이 술레이만 대제의 그것을 압도하고도 남았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해적의 본거지들이 하나둘씩 까이고 에스파냐는 거기에 진지를 구축하고 눌러 앉는다. 그리고 방어만 한다. 저자가 책 뒤에 부록으로 실은「민족에 따라 다른 해적 대책」부분을 보면 재밌는 내용이 나온다. 로마제국은 해적을 물리적으로 절멸하는 동시에 그들의 본거지를 점령하고 그들을 내륙으로 이주시켜 농지를 주고 생계를 해결하게 했다. 조선 초기 해상세력을 억지로 내륙에 정착시켜 농경을 장려한 것이 떠올랐다. 암튼 해적은 근절됐다. 그와 달리 베네치아 공화국은 로마처럼 강력한 군사력이 없기 때문에 자국 선박의 사활이 걸린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만 일단 장악한다. 그들은 해적들의 본거지를 장악하는 대신 그 곳에서 신선한 물품을 보급 받고 선박수리소를 세워 중고령층의 고용을 보장하는 한편 그 동네 젊은이들을 갤리선 노잡이로 채용한다. 로마와 약간 다르지만 상업 활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답게 경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하지만 에스파냐는 정말 특이했다. 그들은 항구 바깥의 곶 위에 세워진 요새를 장악하고 해적선의 출입을 감시할 뿐 실질적인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에 저자는 비판한다. ‘마치 자신들이 잘났다고 과시하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 같다.’ 고 말이다.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서 에스파냐는 비록 수년~수십 년밖에 차지하지 못 했지만 어쨌든 북아프리카 곳곳에 자신들의 요새를 설치하였고, 지중해에는 이슬람 선박만 보면 어떻게 못 해서 안달이 난 몰타기사단 애들이 빨빨거리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기다가 베네치아 해군은 투르크 해적들이 감히 건들지도 못 하는 대상이었으니 예전에 지중해를 주름잡던 투르크 해적들이 이거 체면이 말이 아니다. 거기다가 술레이만 대제가 야심차게 수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공격한 자그마한 몰타 섬(몰타기사단의 근거지)이 공방전에서 승리를 하면서 투르크 해군은 예전의 위상을 되찾지 못 하는 듯 했다. 그렇게 술레이만 대제가 갔다. 그리고 전혀 술탄이 될 줄 몰랐던 그의 둘째 아들이 셀림 2세로 즉위하였다(첫째 아들인 바예지드는 반란을 일으켰다는 모함으로 죽었단다). 평생 부유한 왕자로서 쾌락에만 탐닉하던 셀림 2세가 뭘 할 줄 알았겠는가. 그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대외원정의 화려한 승리로 메우려고 한다.

그리고 키프로스 섬을 공격하기로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지역에서 나는 포도주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으므로. 하지만 저자는 얘기한다. 베네치아 영토가 된지 100여 년 동안 키프로스 섬은 최고 명주의 지위를 얻은 포도주를 생산했지만 과연 베네치아인이 경영하지 않고 투르크인이 경영했다면 그렇게 됐을까 하고 말이다. 마치 고려청자가 원 간섭기를 받기 전에는 국제교역에서 최고의 상품가치를 지녔지만 원이 유라시아를 하나로 만들어버린 다음에 더 이상 최고의 상품가치를 얻지 못 했던 것처럼 투르크인이 키프로스 섬을 공략하면 더 이상 그 포도주는 최고 명주가 안 됐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 같다. 암튼 이 간단한 이유 때문에 셀림 2세는 10만 명이 넘는 대군과 200척이 넘는 배를 집결시키고, 이 결심은 투르크와 줄타기 외교로서 돈벌이에 활용한 베네치아를 결국 기독교 사회로 돌아서게 했다. 마치 미국 상선을 U-보트 작전으로 침몰시켜 단기적인 이익만 챙기려던 독일이 결국 미국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제력을 지닌 괴물을 적으로 돌려버린 것처럼 말이다.

키프로스는 버텼다. 수천 명의 방어군이 10만이 넘는 대군을 상대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곧 유럽의 연합함대가 결성됐다. 베네치아 110척, 에스파냐 본국 14척, 에스파냐 지배하의 나폴리와 시칠리아에서 36척, 에스파냐 해군제독 도리아 소유의 22척, 교황청 12척, 몰타기사단 3척, 사보이아 공국 3척, 기타 3척 등 전체 283척의 선박과 8만 명이 넘는 병력(지휘관과 선언, 노잡이 포함, 기독교 사회에서는 노잡이가 노예가 아니었으므로 난전이 벌어지면 이들이 모두 전력으로 활용되었다)이 집결한 것이다. 이에 맞선 투르크 해군은 소형 갤리선인 ‘푸스타’를 포함한 270척의 대부대. 양측 모두 최고의 베테랑을 지휘관으로 기용하여 맞붙게 된다. 한쪽은 해적, 한쪽은 상설 해군을 유지하는 유일한 국가였던 베네치아의 남자들. 저자는 말한다. ‘지중해 세계 최대이자 최후의 해전이 될 레판토 해전’이라고 말이다. 여기에 극적인 양념(?)이 가해진다. 키프로스 섬에 상륙한지 1년여, 투르크측 지휘관인 무스타파 파샤는 항복하면 모두 살려준다는 약속을 하고 성문을 열라고 하였다. 수비대는 속았고 성안의 살아남은 모든 사람이 죽거나 노예로 팔렸다. 유럽인들은 분개했다.

저자는 레판토 해전 부분은 그녀가 따로 쓴 책『레판토 해전』을 참고하라고 언급하면서 간단히 넘어갔다. 암튼 1571년 10월 7일, 벌어진 이 전투는 기독교 측의 압승으로 끝났다. 정면으로 바다 위에서 적과 붙지 않고 게릴라전으로 일관해온 해적들이 얼마나 잘 싸웠을까 싶기도 하다. 투르크측 전사자는 8천명이었으며 여기에는 총사령관 알리 파샤를 비롯한 투르크 궁정 고관의 대부분, 예니체리 군단장과 그 부하 400명, 투르크가 공략하여 영토로 삼은 레스보스 · 키오스 · 네그로폰테 · 로도스 섬의 총독들, 바르바로사의 두 아들, 우익 총대장(해적) 샬루크 등이 포함됐다. 포로는 1만 명이었으며, 침몰한 배는 갤리선만 80척이었고 137척의 배가 나포됐다. 물론 기독교측도 피해는 컸다. 전사자는 7,500명에 부상자가 8,000명이었으니 말이다. 그 중 50% 정도가 모두 베네치아의 피해수치였으니 레판토 해전은 실상 베네치아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이끌어낼 수 없는 승리였을 것이다(필자는 군대 가기 전까지만 해도 레판토 해전의 주력이 에스파냐인 줄 알았다. 창피하게도. 저자는 오히려 한술 더 뜬다. 에스파냐 역시 투르크처럼 해군력이 약한 나라라고, 무적함대가 쉽게 깨진 것처럼 베네치아 없는 해군은 의미가 없다고 말이다. 이런 과감한 표현 좋았다).

이제 책의 막바지에 도달했다. 레판토 해전 이후 역시 베네치아는 달랐다. 베네치아는 다시 투르크와 극비 동맹을 맺어 이후 70여 년간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물론 베네치아는 계속 돈 버는 기계로 번성했다. 하지만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패하면서 지중해는 더 이상 유럽의 중심 패권지가 아니었다. 이제 세계의 중심은 대서양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의 빛나는 외교와 절묘한 정치 감각을 모두 인정한다. 하지만 어찌 보면 베네치아인들은 지리적으로 불리했던 것도 있었다. 영국과 같은 위치에서 베네치아인들이 활동했다면 어찌했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if)’은 없으니 넘어가자.

저자는 마무리 짓는다. 왜 지중해 연안지방이 오늘날은 관광지로 유명한데 하필이면 바로크 시대 건물이 제일 오래됐고 19세기 이후의 건물들이 많은지 반문하면서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7세기부터 18세기까지 1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북아프리카에서 드나들던 해적들 때문이었다. 이 해적을 빼고 지중해역사를 얘기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전혀 몰랐다. 그 새로운 지식의 장을 열게 해준 저자에게 무한한 존경과 고마움을 다시 한 번 표하고 싶다. 어쨌든 1740년 투르크는 해적행위를 전면적으로 금지한 ‘해적금지령’을 내렸고, 1816년에는 해적의 주요 근거지였던 트리폴리, 튀니스, 알제리에서도 해적금지법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화하면서 해적은 근절되기 시작했고 결국 1856년 코르사로든, 피라타든 모든 해적행위를 엄금한다는 ‘파리 선언’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최근 소말리아 해적들이 극성인데 요즘 같은 시기에도 해적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참 아이러니하다.

책장을 다 넘기고 나서도 저자는 책을 손에서 못 놓게 만들었다. 또 다른 부록으로 그녀가 지금까지 썼던 다른 책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안 읽었으면 빨리 가서 이것부터 읽고 오라고 명령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필자도 모르게 그 중 몇 권을 구입하고 말았다. 압도당해서였나? 어쨌든,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그 즐거운 일을 이 책과 함께 겪어서 또한 즐겁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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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4-25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밌게 글을 쓰셨군요.정독했습니다.역시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필력이 대단하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군요.추천도 꾹!

麗輝 2010-04-25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노이에자이트님. 재밌게 보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 그래도 이왕 쓴거 재미없다고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깐요. 역시 님도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책을 즐겨 보시는가 봅니다. 추천 꾹! 감사합니다. ^^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 상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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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간만에 본 재밌는 책을 하나 소개하려 한다. 오랜만에 고속버스를 탈 일이 생겼는데 시간때울만한 것이 없어 학교 도서관에서 급하게 빌린 책이지만 읽고 난 지금은 굉장히 잘 골랐다는 생각이 가득하다. 책 제목은『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세계』(상)이며 그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의 최근작이었다. 이 책은 서점을 오가며 몇 번 표지를 보긴 했지만 확 와 닿지 않았었는데 마땅히 빌릴 책이 없어서 급하게 집어 들고 나오게 됐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은『로마인 이야기』시리즈(다 읽지는 못 했다)와『신의 대리인』(읽으면서 정말 대단한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밖에 읽어보지 못 했는데 이 책을 다 읽은 지금은 그녀의 나머지 작품들도 다 읽어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생겨났다. 그만큼 재밌는 책이라는 소리가 될 수 있으려나? 필자가 너무 주절주절 말이 많다고 여길 것 같아서 그만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필자가 처음 겉표지만 놓고 봤을 때는 단순히 제목 그대로 로마가 멸망한 이후 지중해세계, 그러니까 유럽이 어떻게 변했는지 혹은 고대 로마와 중세 유럽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서술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머리말(?)에서부터 저자는 흥미로운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바로 ‘海賊’말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일본에는 해적이라는 말 밖에 없지만(한국이나 중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일본 밖에서는 두 종류의 해적이 있다고 한다. ‘Pirate(피라타)’와 ‘Corsair(코르사르)’가 그것인데 쉽게 얘기해서 우리가 흔히 아는 해적은 전자로서 비공인 해적이고, 후자는 공인된(아니, 묵인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해적이라고 한다. 당연히 동양에서 해적이 공인되었을 리 만무하다. 물론 일본 정부에서 왜구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어느 정도 묵인해준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공인한 것은 아니었다. 이 후자에 속하는 해적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영국 엘리자베스 1세 휘하의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을 꼽을 수 있겠다. 암튼 그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을 언급하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더불어 그녀는 두 단어가 모두 라틴어에서 나왔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전자가 고대 로마시절부터 내려온 단어라면 후자는 분명히 로마 멸망 이후 중세 라틴어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인즉슨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지중해 세계에서 활개치고 다니던 해적은 (어느 누군가로부터) 공인된 존재였으며, 그 이전에는 없었던 존재라는 소리가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로마가 멸망하고 어째서 지중해에 해적이 넘쳐나게 되었단 말인가? 불과 머리말 3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도 이 책이 내뿜는 흡입력이란 결코 작지 않았다. 그러면서 저자는 자극적인 문구를 끝으로 본론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해두고 싶다. 검은 바탕에 하얀 색으로 해골을 물들인 깃발을 돛대 위에 높이 내걸고 접근하는 해적선은 카리브 해의 해적밖에 없었다는 것, 그것도 사실은 소설이나 영화 속의 이야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

흠. 그렇지. 아무래도 우리는 소설작품(『보물섬』)이나 만화(『원피스』), 영화(‘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해적하면 검은 바탕에 하얀 색 해골이 그려져 있는 깃발을 해적의 트레이드마크인 양 여겨 왔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럼주를 마시며 약탈로 얻은 금화를 나누면서 술집에서 크게 웃고 떠드는 해적.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해적은 이러한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처럼 꾸미고 다니는 해적은 오히려 적다고 할 만큼 이는 특정 이미지가 크게 부각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마치 한국영화 중에 조폭을 다룬 영화들(넘버3, 조폭마누라, 짝패, 친구 등등)이 대거 흥행을 거두고 널리 알려지면서 조폭 생활이 미화된 면이 없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어떡하다가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암튼 저자는 그러한 이미지(일반상식이 고착화된 것 마냥)들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당당히 깃발을 내꽂고 사나이의 로망처럼 바다를 누비고 다닌 것이 아니라 적의 취약한 부분을 골라 몰래 숨어들어가거나 거짓정보를 흘려 적을 혼란시키고 갖은 범죄(살인, 약탈, 강도, 강간 등)를 저지르고 다녔다고 말이다. 그렇다. 이제 저자는 본론에서 2가지를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첫째, 로마 멸망 이후 지중해세계는 해적이 지배했으며, 그 해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낭만적인(?) 해적과 아주 달랐다. 오히려 당시 해적은 하나의 생업수단으로서 비즈니스로 여겨질 만큼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즉, 암흑시대라고 부르던 중세시대 지중해는 그야말로 무법천지였으며 그 와중에 새롭게 등장한 경제구조가 해적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둘째, 해적의 피해를 가장 심하게 입은 것은 이탈리아나 시칠리아 섬, 프랑스 남부 연안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이름 없는 수만~수십만의 기독교인들이었다. 하지만 그간 이런 얘기에 주목하는 관련 연구자는 별로 없었다. 프랑스 남부가 위태로웠다, 이탈리아 전역이 피해를 입었다, 제노바 상선이 약탈당했다...등의 서술은 나왔었지만 그 당시 살았던 사람들 한명 한명에 대해 서술한 연구 성과는 없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저자는 서로마 제국이 오도아케르에게 로마를 내주고 난 이후의 상황부터 소개하고 있었다. 과거 제국이 건재했을 때 지중해는 그들의 내해였지만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등을 상실하면서부터 지중해란 위험한 경계가 되고 말았다. 어디서 갑자기 해적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런 경계 말이다. 저자는 엄밀히 말해 지중해 동부뿐만 아니라 지중해 서부(이탈리아나 시칠리아 섬 등 지중해 한복판에 위치한 곳들) 역시 당시 비잔틴제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닿는 지역이었지만 비잔틴제국은 그곳을 지킬 엄두도, 의지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그러면서도 세금만은 꼬박꼬박 받아갔다. 얼마나 얄미웠을까). 즉, 지중해 서부가 일종의 정치적 공백지대로 남았던 것 같다. 마치 6~7세기 요서 지역에 수-당의 군현(비록 아주 작지만)이 있었지만 일종의 완충지대로 작용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지중해 서부를 장악한 것은 사라센인들이었다. 당시 신흥종교인 이슬람교는 무서운 속도로 그 세를 확장했는데 기독교 세계에서는 아랍인과 아랍인에게 정복당한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 무어인들을 모두 사라센인으로 통칭했었다. 그리고 그 ‘사라센인=이슬람교도’는 ‘해적’과도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여기서 조금 의문이 들긴 했다. 페니키아 식민지 시절과 카르타고 시절만 해도 북아프리카는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이자 번영을 구가했던 동네였다. 또한 제국이 번영했을 당시 북아프리카가 제국의 주요 곡창지대였다는 사실도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는 그곳이 해적이 판치는 동네가 됐단 말인가. 저자는 말한다. 경제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안정과 평화가 필요하다고. 로마의 정치적 영향력이 지중해 바다 속으로 흩어지면서 그 지방의 생업경제는 파괴됐다. 농경민이 안정적으로 생업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오래도록 발전했던 농업기술은 점점 퇴색했을 것이다. 농경민이 북아프리카를 떠난 후에 그 곳을 차지한 것은 原住民이었던 베르베르인, 무어인 등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농경과는 거리가 먼 사막민족들이었으니 이제 그들이 선택할 생업활동은 많지 않았다. 바다로 나가 어업을 하거나 아니면 해적질을 하는 것뿐이었다.

분명 이들은 해양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민족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다로 나가 해적질을 하게 됐는데 얼마 안 있어 이 해적질이 비즈니스로 굳어 버렸다. 더불어 이슬람교는 이교도를 죽여도 별말 안 하는 교리를 갖고 있어 이러한 비즈니스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필자가 놀란 것은 로마가 패권을 잃어버리자마자 지중해 서부에서 그 공백을 메꿀만한 정치체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세계사 교과서 혹은 시중에서 파는 책을 통해서 유럽역사(혹은 서양사)를 배운다. 그리고 로마 멸망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서로마는 오도아케르 이후 게르만족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림’, ‘동로마는 이후 비잔틴제국이라 불리며 기독교 세계의 방파제 역할을 하며 번영함’ 뭐 이런 정도의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 해적에 대한 내용은 없으며, 북아프리카에 대한 언급도 없다. 프랑크왕국이 세워지기 전에 무수히 스쳐가는 게르만족의 왕국과 그 이후의 왕국 사이에 이탈리아 도시국가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다만 이슬람교가 확산된 이후 기독교와 대립하게 되면 잠깐씩 언급하는 정도였다. 즉,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은 필자가 거의 처음 접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라는 소리가 된다. 그래서 더 재밌었다. 모르는 것을 알아간다는 것만큼 흥미로운 것이 또 있을까.

해적에 대한 내용은 앵거스 컨스텀의『해적의 역사: The History of Pirates』라는 책에도 잘 나와 있었다(지금 찾아보니『단숨에 읽는 해적의 역사』라는 책도 작년에 나왔단다). 하지만 거기에 사라센 해적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로마 멸망 이후에 북유럽 해적을 잠깐 언급하고 바로 그 유명한 바르바리 해적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물론 몰타기사단에 대한 내용을 비롯해 중세시대 해적을 언급하면서 간략하게 소개는 됐지만, 이 책에서처럼 거시적인 안목에서 사라센 해적을 다루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놀라울 따름이었다. 정말 구멍이 뻥 뚫린 역사의 한 맥락을 찾은 듯 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라센인들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배를 타고 정박하는 곳마다 닥치는 대로 쳐부수고 뺏고 불사르고 돌아왔다. 가장 좋은 표적감은 당시 모든 기독교적 열망이 속세의 물건으로 표현되어 있던 수도원과 교회 등이었다. 이보다 조금 늦게 노르만족이 유럽 전역을 분탕질할 때(뭐 얼마 후 이슬람세력과 만나기도 하지만) 그들 역시 유럽 각지의 수도원과 교회 등을 약탈했다. 그 곳에는 신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고민하는 사람들이 갖다 바친 무수히 많은 재화들이 산처럼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사라센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이런 곳을 약탈해 배에다 싣고 쓸 만한 남자(노예로 팔기 위해), 여자(가사노예 겸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들도 납치해갔다. 물론 그들이 수도원이나 교회만 약탈한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지만 배가 정박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들이닥쳤다. 그렇다고 ‘나 해적이요~’라고 하지도 않았다. 정박지의 동맹국 깃발을 달거나 신원이 불분명한 상태로 접근해 불시에 해적질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런 북아프리카의 해적집단을 유럽 국가들은 어떻게 할 도리도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필자는 당시 해적들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동양에서도 해양세력이 패권을 잡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의지를 지닌 해양세력과 단순한 해적(물론 경제적인 목적이 강했으며, 일부 종교적 · 정치적 색채도 띠긴 했지만)들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倭寇라고 불리던 일본 해적집단이었다. 그들은 전국시대 내전의 소산물로서 한마디로 정규군이었다. 하지만 먹고 살 길을 찾기 위해 고려나 중국 해안가를 분탕질했고 몇 차례 격퇴당하기도 하였지만 조선 초기까지 난리도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히 해양세력이라고 하지 않는다. 해적이라고 하지. 그렇게 봤을 때 지중해에서 난리치던 그들도 단순히 해적이라고 해야 옳을까? 책을 더 읽다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들이 비록 해적질을 하고 살아갔지만 엄연히 이슬람교라는 단일신교의 테두리 안에 포함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앞서 언급했던 ‘코르사르’였기 때문에(왜구는 어느 정도 묵인은 했어도 일본 정부가 공인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코르사르는 정경 유착된 경제 집단이었다) 알라의 축복을 받는 신의 자식들이었고, 기독교 세계에 맞서 최전방에서 활약하는 전사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이슬람교와 관련된 테러리스트 집단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집단의 규모가 거대했다는 점에서 분명 양자는 차이가 있겠다.

그런 사라센인들은 이후 ‘성전(지하드)’을 벌인다. 간단하다. 기독교세계를 정벌하자는 것이다. 이미 북아프리카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일파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지 못 했지만, 유럽에 정착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또한 동쪽에서는 비잔틴제국이 연신 잽을 맞으며 카운터펀치가 오길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당시 기독교세계는 동~서 어디나 모두 이슬람 세력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이슬람세력 역시 지중해를 건너 北進을 시도했다. 해적들이라고 표현된 그들은 비록 잘 훈련된 정규군은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유럽 남부를 뒤흔들어 힘을 빼놓으면서 야금야금 자신들의 발판을 넓혀가고 있었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한번 크게 쳐들어왔다가 안시성 앞에서 혼쭐이 나게 도망간 다음 고구려 변경에서 야금야금 국지전으로 괴롭혔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비록 영토를 정복하지는 못 했지만 잽을 계속 맞고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는 곧 상대편 선수를 무너뜨릴만한 지경까지 이르게 하니 말이다.

그 대망의 격전지는 바로 시칠리아 섬.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섬도 있지만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사이에 딱 걸쳐있는 시칠리아 섬이 두 세력(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격전지가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이전에 아테네에서도 그렇게 눈독을 들이던 동네가 이 곳 아닌가. 그리고 결과는 이슬람세력의 승리였다. 그들은 단번에 정복하지는 못 했지만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가 결국 비잔틴제국의 영토였던 시칠리아 섬을 알라의 보호 아래 넣는데 성공했다. 여기에서 독특한 현상이 벌어진다. 그렇게 두 세력이 대립하고 싸우는 와중에도 양자의 교역은 꾸준히 진행되었으며, 시칠리아 섬에서는 종교의 자유까지 허용됐다. 세금을 내고 안 내고의 차이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이슬람교는 기독교인에 대해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물론 해적들은 여전히 기독교인을 잡아다가 노예로 만들었고 말이다. 모든 기독교인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곤란하다. 정기적으로 제대로 된 세금이 들어오지 않으니 말이다. 양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시칠리아 섬은 양 문화가 혼합된 독특한 문화가 싹튼다. 마치 낙랑 문화가 중국과 고구려 사이에서 독특하게 꽃피웠던 것처럼 말이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들이 처음에는 그야말로 미약한 존재였다는 점이다. 또한 초창기 해양 도시국가들은 가에타, 아말피, 피사 등등이었는데 이는 우리가 흔히 아는 국가들과 다르다. 세계사 관련 서적에서 흔히 언급되는 것은 제노바, 베네치아, 피렌체 등이다. 물론 책의 뒷부분에 나오긴 한다. 이러한 초창기 해양 도시국가들은 종교적 압박에도 불구하고(교황이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는 이교도와의 교류를 묵인하겠는가) 북아프리카의 사라센인들과 교역함으로써 부를 챙겼다. 하지만 힘은 없었다. 그래서 항상 뺏겼다. 물론 몇 번 대들기도 했지만 알다시피 어설프게 대들었다가 진압당하면 그 다음에는 더욱더 가혹한 탄압만 있을 뿐이다. 저자는 그녀의 다른 저서『바다의 도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당시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들에 대해 잘 알려면 이 책을 보라고 권하고 있다(조만간 읽어볼 참이다). 그러면서 여기에도 간략하게 그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들이 이슬람 해적들과 싸우면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 과정이 대단히 흥미진진했다. 사라센해적은 지중해를 주름잡으며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지만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들은 결국 이집트인들이 침략자 힉소스인에게 배워 그들을 다시 몰아냈던 것처럼 사라센해적과의 꾸준한 교류 속에서 그들을 이겨낼 힘을 길러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흔히 아는 르네상스 시대 강력한 해양도시국가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강력해진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들은 서로 연합하여(때론 프랑스 같은 열강도 협력했다) 지중해 서부를 장악하기 시작했고, 저자는 이를 두고 ‘십자군 시대 이전의 십자군’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유럽 남부 혹은 이탈리아 곳곳에 퍼져있던 사라센해적의 근거지는 모두 사라지고 심지어 시칠리아 섬마저도 북에서 내려온 노르만족에게 빼앗겼다(물론 그 이후에도 시칠리아 섬만의 독특한 문화적 양상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물론 보수적인 프랑스, 스페인 왕가가 지배하기 전까지만). 지중해가 다시 기독교 세계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후 레판토 해전에서 완전히 이슬람세력이 깨져나간 것은 뭐 많이들 알고 있으니 생략하자.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해적들은 여전히 활동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깨부수고 없애버려도 근거지를 완전히 정복하지 않는 이상 그 효과는 그리 크지 않다(拔本塞源이라는 말을 기억하자). 고려 말 박위와 조선 초 이종무가 쓰시마 섬을 1번씩 정벌해 본보기를 보여줬어도 왜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마침 유럽에서는 ‘십자군’이 유행처럼 번지며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하지만 애초의 목표가 변질되면서 허울뿐인 십자군 원정도 끝을 맺는다. 물론 여기에서도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저자는 이들을 ‘경제동물’이라고까지 칭하고 있다)들은 종교와 국경의 벽을 허물고(?) 이런저런 경제행위를 일삼는다. 소년 십자군이 단체로 노예로 팔린 일, 라틴제국이 성립된 일 등을 꼽을 수 있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라센해적들이 활동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즈음 되면 이탈리아 해양도시국가라고 하는 강력한 해군력을 지닌 존재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해적들은 그들의 비즈니스 스타일을 바꾼다. 이제는 대규모 혹은 소규모로 여기저기 난타전을 벌이며 약탈하고 빼앗고 납치하지 않는다. 그들은 노예를 중점적으로 획득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유럽인들이 돈을 써서 노예들을 다시 되찾아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목숨 걸고 성을 공격하고 힘들게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 된다. 이제는 사람만 왕창 잡아오면 걔네들이 언젠가는 돈으로 바뀐다는 소리가 된다. 고구려 초기 한나라 변경을 미친 듯이 공격해서 그 주민들을 잡아온 것을 떠올려보자. 한나라는 이를 막대한 돈을 주고 다시 바꿔오기 시작했다. 고구려인들이 그 짭짤한 돈벌이를 언제까지 계속했는지 상기해보자. 투자 대비 이득이 훨씬 큰 경제활동을 선호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능일 것이다.

여기에서 당시 이슬람세력과 기독교세력의 경제구조가 언급된다. 이슬람세력은 당시 유럽에서 목재부터 선박에 필요한 모든 도구, 액세서리(귀중품) 등을 모두 수입한다. 수출하는 건 별로 없으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세력은 이슬람세력과 끊임없이 교류하길 원한다. 바로 사하라사막에서 올라오는 막대한 양의 황금 덕분이다. 대항해시대가 찾아오고 유럽 열강이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설치하면서 황금에 목말라한 것도 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암튼 유럽 애들이 가져갔던 황금은 노예를 되사기 위해 다시 이슬람 쪽으로 돌아온다. 이 대목을 읽고 있자니 마치 아편을 팔아 중국에 넘어갔던 은을 다시 뺏어갔던 유럽 열강이 떠올랐다. 청나라에서 그렇게 아편을 반대하고 탄압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세력은 노예를 되사가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 완전 중세판 ‘쉰들러 리스트’다.

이제는 이 책의 백미인 ‘구출수도회’와 ‘구출기사단’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자. 앞서 필자가 언급한 것처럼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2가지 중 나머지 한 가지가 바로 이 것이다. 앞에서 나왔듯이 해적에게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한 만 명당 1명 정도가 좀 유명한 사람이랄까? 암튼 그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어느 세계 역사나 마찬가지겠지만.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을 주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는 국경을 초월한 자원봉사집단(?)인 구출수도회와 구출기사단이 조직되었다. 그들은 십자군 전쟁처럼 무력으로, 성전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되찾자는 취지에서 조직되지 않았다. 순전히 노예로 끌려간 사람을 돈을 주고 다시 구해오는 일을 했을 뿐이다. 이러한 조직의 활동은 곧 이슬람세력의 못된(?) 경제활동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떤 학자는 그들이 구해온 사람이 1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물론 정확한 통계수치는 모르지만. 하지만 구출기사단의 경우 무려 560여년에 가까운 시기동안 평균 2년에 1번꼴로 꾸준히 사람들을 구하려 북아프리카로 향했으며,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돈을 뺏겨 그냥 돌아오는 기사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꾸준히 자신의 할 일을 계속 해나갔다. 이런 내용도 이 책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당시 십자군 원정을 떠날 당시에도 북아프리카의 ‘목욕장(고대 로마시대 대중목욕탕이 황폐화되자 이슬람세력은 그곳에 노예들을 기거시켰다)’에는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기독교도 노예가 있었지만 십자군은 이를 몰랐다. 아니 모른 척 했다고 해야 하나? 그들은 大義를 위해 小를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역사는 목욕장과 노예들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필자는 오히려 십자군의 진정한 의미는 이들 2개의 조직이 이뤄낸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가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숭고한 정신으로 박애와 평화를 실현했던 이 2개의 조직이 오히려 역사적으로 큰 조명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얘기한다. 지중해에서 해적이 언제쯤 사라졌는지 아느냐고. 혹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때가 1492년인 것을 아는가? 아니면 마젤란이 마젤란 해협을 겨우겨우 통과한 것이 1520년이 것은? 혹은 아메리카 13개 식민주가 영국에게 독립을 선언한 것이 1776년이라는 것은??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상당히 근대의 사건들이라고 배우는 것들이다. 그럼 이번에 다른 것을 한번 살펴보자. 1571년은 레판토 해전에 종군했다가 에스파냐로 돌아올 때 세르반테스가 해적에게 납치된 해이다. 또한 1779년은 구출기사단이 마지막 구출행을 다녀온 해이기도 하다(정말! 18세기 말까지!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1797년은 중세 지중해를 주름잡던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한 해이며,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공하여 식민지를 만들면서 비로소 지중해에서 해적이 사라졌다. 참고로 서로마가 멸망한 시기는 476년이며 이슬람 세력이 오늘날의 리비아(북아프리카)를 이슬람화한 시기는 644년이다(그로부터 54년 뒤 이슬람세력은 카르타고를 정복하면서 북아프리카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사라센 해적이 얼마나 오랜 시간 활약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간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에 놀랐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김성호의『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을 읽었을 때의 전율이 느껴졌다. 전혀 몰랐던 역사의 한 귀퉁이를 알아버린 느낌이랄까.

마지막으로 ‘사라센의 탑’이라고 불리는 이탈리아인들이 세운 사라센 해적 대비용 감시탑의 도판들을 죽 보면서 책장을 덮었다. 지금은 대부분 절벽이나 높은 지대에 축조되어 멋진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예전에는 얼마나 이것 하나에 목숨을 걸어야 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니 씁쓸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도판을 일일이 책에 실어서(물론 본인이 안 찍고 어디서 제공받았을 수도 있지만) 당시의 상황을 잘 소개하고 있어 그 점도 좋았다. 이탈리아로 무작정 날아가 그 지역의 어떠한 공교육의 도움도 없이 그 지역의 역사를 이렇게 깊이 통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저자를 무한정 존경스럽게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도판에서 그러한 저자의 의지가 엿보이는 것 같아 또 한 번 대단하다고 느낀다.

아직 ‘하’권을 읽지 않았지만 벌써 필자의 가슴은 두근거린다. 또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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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김성남 지음, 이용규 그림 / 수막새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음.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볼까.
일단 오늘은 오랜만에 재밌는 전쟁사 관련 책을 소개할까 한다.
필자가 저자한테 책을 받아보고 한번 대강 훑어본 결과, 느낀 첫 소감은 ‘괜찮다~(요즘 유행하는 개그맨 버전처럼)’라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미 수막새에서 출간하는 세계전쟁사 시리즈 첫 번째 책인『전쟁으로 보는 한국사』를 내놓은 바 있는데 그로부터 벌써 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사이 저자의 책은 업그레이드(?)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단 두 권의 책을 나란히 놓고 보니 표지부터 더 세련된 것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단순하면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디자인을 선호하다보니 그렇게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책 왼쪽 상단의 ‘魏, 蜀, 吳’가 도안화된 것을 보고 확실히 느꼈다. 이전보다 책의 비주얼적인 면모가 많이 발전했을 것 같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그럼 서두는 이 정도로 하고 일단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저자는 전쟁사를 전공하고 있는 국내의 몇 안 되는 그야말로 ‘전쟁전문가’이다(필자의 개인적인 바람도 그렇지만 암튼. -.-;). 그리고『삼국지』에 대해 저자는 과감하게 말한다.

‘『삼국지』가 과연 영웅들의 낭만적인 이야기일까?’

저자는『삼국지』(혹은『삼국지연의』)에서 우리는 흔히 영웅들의 이야기에 열광하고, 영웅들의 지략과 전략 등에 환호하면서 정작 그 영웅들이 수행하는 전쟁의 실질적인 주인공들(병사와 민중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이 시기는 춘추전국시대 못지않은 혼란기였음에도 낭만적인 영웅호걸들의 무대로만 생각하는 것 또한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삼국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영웅들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성격에 주목하는 것도 좋지만 그들이 수행한 전투 및 전쟁에 대해서 심도 있게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혼란기였던 당시를 더 잘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필자는 적극 공감한다. 지금껏 삼국시대에 대해 수많은 전투와 전쟁이 있었고, 그 중심에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있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지만 정작 전투와 전쟁 그 자체에 주목한 연구자 혹은 마니아들은 적었던 것 같다. 항상 유명한 전쟁에는 그 전쟁에서 활약한 천재적인 지략가나 뛰어난 무용을 자랑하는 무장들이 언급되었을 뿐, 당시 시대상황(정치, 경제, 사회 등등과 연관된)과 연결시켜 전쟁을 이해하지는 않았었다(대표적인 예로 그 유명한 ‘적벽대전’을 언급할 때 우리는 흔히 제갈량의 화려한 언변과 방통, 주유 등이 펼치는 지략 싸움을 떠올리며, ‘관도대전’을 언급할 때는 안량과 문추를 단칼에 베어버린 관우의 무용을 떠올린다. 필자 역시도 그러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지만 이 정도 집필의도를 갖고 책을 썼다면 필자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책장을 하나 둘씩 넘겼다.

일단 책의 분량은 이전의 책과 큰 차이가 없었고, 중간 중간 삽입된 도판들이 많았기 때문에 읽는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먼저 예전에 필자가 저자의 책에서 꼽은 세 가지 특징들이 여기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1. 시대별로 역사를 구성하지 않고 몇몇 테마별로 단락을 구성함

2. 역사스페셜의 3D 화면을 보는 듯 한 자세하고 신선한 전장 지도가 인상 깊음  

3. 기존에 알고 있던 몇몇 전투에 대한 새롭고 합리적인 해석을 도출하고 있음

물론 이번 책은 100년이 책 되지 않는 짧은 시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시대별로 역사를 정리하지 않기가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저자는 시대별로 각 전투 및 전쟁을 꼽으면서도 나름의 테마를 정하고 있었다. 환란의 시대-군웅할거의 시대-천하통일을 향한 쟁패의 시대-천하통일의 시대 등으로 말이다. 여러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시대 순으로 나열하든, 안 하든 나름의 (일관된) 주제를 엿볼 수 있는 테마가 앞에서 제시되면 뒷 내용들을 이해하기가 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시대 순으로 나누지 않고 그 안에서 다시 테마별로 세분한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주얼적인 측면은 이전보다 확실히 나아졌다. 각 전투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저자는 왼쪽 페이지 하단부에 몇 개의 캐릭터를 이용해서 당시 전투의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보여주고 넘어가고 있었다. 먼저 전투의 명칭이 한문으로 크게 적혀 있었고, 그 앞으로 보병, 기병, 수군 등을 표시한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었으며, 접전을 벌인 부대들의 규모와 부대장, 전투 시기와 장소, 전투 결과 등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어 뒤에 나올 내용을 함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도 이런 디자인으로 이뤄졌으면 좋았을 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투에 대한 세부기록이 적은 한국사인 만큼 그게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전투와 관련된 여러 삽화는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필자는 특히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의 현재 모습을 사진으로 실은 것이 보기 좋았다. 아무래도 중국에 쉽게 가지 못 하는 상황에서 그런 사진들이 있으면 좋은 참고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각 시대의 병사(보병이든, 기병이든)들을 표현한 토용을 실은 것이 볼만했다. 저자의 세심한 측면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볼만한 건 역시 전장 지도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지도는 이전과 큰 차이가 없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표현된 점과 수계(水系)가 표현된 점이 좋았다. 이전 지도에는 수계가 없었는데, 전쟁이 지형의 영향을 많이 받는 만큼 산지뿐만 아니라 수계도 지도에 표현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부 전투 현황을 표현한 지도 역시 이전보다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을 선보였다. 마치 업그레이드되는 게임화면을 보는 듯 한 기분이었다(확실히 리니지1보다는 2의 그래픽이 돋보였고, 스타크래프트1보다는 2의 그래픽이 돋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필자 개인적으로 재밌게 본 전장 지도를 꼽으라면 먼저 ‘하비전투 상황도’를 꼽고 싶다. 문헌으로만 하비성이 잠겼다고 여기고 넘어가는 것과 지도로 대강이라도 보는 것은 분명 달랐다. 이것 역시 앞서 수계가 표현되고 표현되지 않은 지도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준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이릉대전’의 상황도나 ‘양평전투’의 상황도도 색다른 느낌이었다(양평전투에서 고구려 중장기병의 활약상은 미심쩍은 부분이 많지만 전후 양국의 정치상황을 고려한 추정이라 생각하고 넘어가겠다). 둘 다 하비전투와 마찬가지로 문헌으로만 보던 전투 상황을 세밀하게 표현했으며, 당시 전투 상황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과 다른 재해석 부분은 크게 달라진 면은 없다. 이는 이미 삼국시대에 벌어진 수많은 전투 및 전쟁에 대해서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며, 그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연구가 많이 진행됐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다만 전쟁사가의 눈으로 바라본 만큼 전투 및 전쟁에 대한 색다른 해석들이 적지만은 않다.

먼저 저자가 꼽은 전투를 보면 총 15개다. 이 중 황건적 관련된 전투가 2개(영천 · 장사 전투 / 청주 황건적 토벌전)와 촉한 멸망전, 서진 통일전 2개를 제외하면 하비전투, 관도대전, 적벽대전, 관중전투, 서촉 점령전, 한중 공방전, 촉한의 형주 실함, 이릉대전, 가정전투, 오장원 · 합비전투, 양평전투 등 11개(먼저 촉한의 형주 실함 때는 ‘위 · 오 동맹군’이 결성됐고, 적벽대전에서는 ‘유비 · 손권 동맹군’이 결성됐음을 기억하자)가 추려진다. 그리고 전투의 결과를 살펴보면 위나라(혹은 조조)의 승리로 끝난 전투가 7개(하비전투, 관도대전, 관중전투, 촉한의 형주 실함, 가정전투, 오장원 · 합비전투, 양평전투), 오나라의 승리로 끝난 전투가 3개(적벽대전, 촉한의 형주 실함, 이릉대전), 촉의 승리로 끝난 전투가 3개(적벽대전, 서촉 점령전, 한중 공방전)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삼국시대에 벌어진 수많은 전투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저자는 나름의 테마에 맞춰서 전투들을 선별했고, 그것들의 역사적 가치가 어떠했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내용들이 나름의 일관성과 객관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때 전투의 결과만 놓고 봐도 위나라가 어느 정도의 國力(보다 더 자세하게 軍事力)을 보유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조조는 청주 황건적 토벌전에서도 승리했다). 즉, 저자가 정사 기록인『삼국지』를 근거로 최대한 당시 전투(전쟁) 상황을 객관적으로 복원하려고 노력했음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었다.

일단 위에 언급된 전쟁들에 대해서는 웬만한 초등학생도 인터넷이나 책, 게임 등을 통해 알고 있을 테니 따로 부연하지는 않겠다. 다만, 눈여겨볼만한 해석이라고 할 만한 것들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먼저 인해전술이 단순히 대규모 병력으로 무식하게 적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교차공격과 스워밍(Swarming, 무리공격)의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점 혹은 농민들로 구성된 비정규 군사조직인 황건적이 이러한 인해전술로 숫자가 적은 관군에 맞서 크게 승리했다는 점(p.34), 조조가 청주 황건적을 토벌하면서 얻은 것은 5~6만여 명의 정예병인 청주병뿐만 아니라(이 부분은 저자도 언급한 바 있는 만화『창천항로』에 잘 나타나 있다. 조조의 군사력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청주병이 강조되어 있다) 연주 및 청주를 기반으로 한 땅과 사람, 경제력이라는 해석(pp.52~53), 관도대전 당시 원소가 동원한 11만 명의 대군이 남으로 진군하면서 누런 먼지와 사투를 벌이다가 행군 도중 낙오되거나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해석(p.75), 관도대전에서 보급의 중요성을 세세하게 언급한 부분(pp.77~78), 적벽대전에서 전염하는 풍토병과 영양부족으로 패한 위나라군에 대한 설명(pp.97~100), 관중지역의 군사력과 기병 전력의 중요성을 설명한 부분(pp.107~109), 목우와 유마에 대한 생각(pp.187~188)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겠다. 이런 부분들은 기존의『삼국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상당히 좋은 또 다른 시각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몇 가지만 더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저자는 책의 제일 처음에 ‘파국을 향하여’라는 제목으로 프롤로그를 실었다. 전한과 후한이 왜 다른 체제의 국가를 세울 수밖에 없었으며, 후한 말기에 삼국시대와 같은 군웅할거 시대가 왜 벌어졌는지 등을 소개했다. 그는 후한시대 지방행정의 기본 단위는 군(郡)과 현(縣)이었지만 후한 중기 이후가 되면 그보다 큰 규모의 행정단위를 관할하는 자사(刺史)가 등장하면서 군웅할거의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보았다. 이전에는 단순히 망국(亡國) 말기의 일반적인 상황들(환관과 외척의 득세와 이어진 황실의 약화, 부정부패를 일삼는 지방 관리로 인한 민란의 발생, 민란 진압에 동원되는 변방수비군과 변방 방어력의 약화, 주변 이족들의 잦은 외침 등)로 인해 혼란한 시대가 찾아왔고, 각 지방의 권력자들이 각각 사병을 이끌고 패권을 잡기 위해 대립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만 생각해보니 ‘서진’ 말기에도 각 군왕(왕족들이 봉해진)들이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어서 오래도록 혼란스러운 내란에 휩싸였으며, ‘당’ 말기에도 지방의 강력한 절도사들이 서로 세력 다툼을 벌여 오대십국 시대를 열었고, ‘청’ 초기에도 강력한 힘을 갖춘 지방 세력가들 때문에 삼번의 난이 벌어졌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책에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인데 바로 ‘6장. 삼국시대와 천하통일’ 부분이다. 저자가 여러 전투들을 소개하고 에필로그 형식으로 삼국시대와 그 뒷시기를 개괄한 부분인데 내용들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먼저 저자는 중국인이 갖고 있는 천하관 인식에 대해 언급하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이는 중국이 끊임없이 분열하면서도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근본적인 목표이기 때문에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내용이며 이후 삼국의 각 나라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또한 ‘강북이 진정한 중국이다? - 위나라’, ‘강남인의 독자성 - 오나라’, ‘현실적으로 필요했던 천하통일의 명분 - 촉한’으로 챕터를 나눠서 각 나라별로 설명한 부분은 이 책의 ‘백미(白眉 - 이 역시 삼국지에 나오는 얘기지만)’라고 생각한다. 특히 필자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부분은 촉한 부분. 뒷부분에 저자는 삼국의 경작지 분포도를 소개한다. 산맥을 빼고 난 나머지 평지를 색으로 그려 넣었는데 촉한의 국력이 다른 나라보다 훨씬 뒤떨어짐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촉한은 ‘한 왕조 부흥’과 ‘천하 재통일’이라는 명분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이는 왜 힘이 없으면서도 제갈량과 강유가 그렇게 북진을 시도했을까? 에 대한 좋은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앞서 필자는 저자가 썼던『전쟁 세계사』라는 책에서 참고문헌을 언급했더라면 학술적인 부분까지 보완하여 보다 정교한 책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평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책 중간 중간에 그렇게 선행 연구 성과를 각주 처리하고 있어서 학술적인 면을 보완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외국(일본 혹은 미국)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함으로써 우리가 평소 쉽게 접하지 못 했던 세계의 시각을 접한다는 좋은 의미도 찾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앞 장과 관련된 내용을 그린 그림을 한 장씩 집어넣었는데 이게 어찌 보면 딱딱할 수 있는 책의 내용을 중화시켜 대중적인 면을 보완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전쟁으로 보는 중국사』에서는 이런 대중적인 면은 많이 없었던 게 사실이기 때문에 앞선 책들과 비교될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앞의 내용 중 어떤 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넣다 보니 조금 안 맞는 듯 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끝으로 저자가 ‘양평전투’ 이후의 고구려와 위나라의 관계에 대해서『고구려사략』의 내용을 인용한 부분이 있는데(p.232) 이에 대해서는 솔직히 어떤 평가를 내려야할지 잘 모르겠다. 진서(眞書)라고 평가받지 못하는 책의 내용을 함부로 인용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객관적 사실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고 봐야 하는지, 아니면 비록 진위 여부의 논란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사 기록을 토대로 한 사실에 부연하여 참고하는 정도의 내용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도 괜찮은 것인지. 이에 대해서 필자는 솔직히 후자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바로 뒷부분에 ‘수년 동안 절치부심한 고구려는 242년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한 끝에 요동군을 회복하고 위나라의 배신을 응징했다. 그리고 산동성을 장악하고 현도를 수복하면서 위나라군을 유주와 병주까지 밀어냈다.’는 내용은『고구려사략』의 내용인지, 아니면 저자의 생각인지 좀 애매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얼핏 고구려가 산동성을 장악하고 유주, 병주까지 위나라를 몰아낸 일이 있었나? 싶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이 책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한 것 같다. 워낙 흔하게 알려져 있는 내용을 戰爭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내용들이 나열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기존 시각과 다른 시각에서 봤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분명 ‘아하!’하고 머리를 탁 칠만한 재밌는 내용들이 있으므로 그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쨌거나 내용적인 면이나 디자인, 책의 구성, 전장 지도 등등 여러 면에서 이전 책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 이 책은 지금 이 순간, 필자가 저자의 또 다른 전쟁사 책이 나오길 기다리게 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는 것도 같이 밝혀두면서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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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9-12-14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서재에 들려서 좋은 책 소개 많이 받고 갑니다.
늘 감사드려요^^

麗輝 2009-12-14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마린님도 오랜만이네요. ^^ 요새는 바빠서 책을 거의 못 읽었는데 그래도 좋은 책 소개 많이 받으셨다니 다행이네요~연말 잘 보내세요~^^
 
고고학자 슐리만 150년 전 청일을 가다
하인리히 슐리만 지음, 이승희 옮김 / 갈라파고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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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序言 : 흥미로운 주제의 책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고고학 관련 서적은 아니며, 기행문(혹은 유람기?)에 가까운 책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더군다나 이 책을 쓴 사람이 ‘하인리히 슐리만’이라는 사실에 더욱더 구미가 당긴다. 우리가 흔히 알기로 슐리만은 저 유명한 트로이 유적(이라고 믿어졌던)을 발굴한 사람이 아닌가? 물론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 발굴 당시에는 전문적인 고고학자가 아니었지만 추가적으로 고고학 공부를 해서 학위를 받고, 다양한 유적들을 조사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청나라와 일본 등지를 방문하고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물론 그가 巨富에다가 大商人이었으니 세계여행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아프리카나 인도 등지의 유럽 식민지 국가가 아닌 극동의 국가를 방문해서 어떤 학술적 자료를 남겼다는 점이 신기했다. 또한 인류학자나 역사학자, 지리학자가 아닌 유럽의 고고학자가 동방을 여행하고 기록을 남겼다는 것 또한 재밌었다.

사실 슐리만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 책의 뒷부분(197~199쪽)에도 나오지만 그는 어렸을 때 식품점 점원으로 일했었고, 20대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사환, 통신원, 경리로 일하면서 엄청난 외국어들을 습득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이 고안한 방법으로(그는 이 방법으로 16개국의 언어를 습득했는데 이는 그 나라 언어로 된 책을 계속 읽고 암송함으로써 비상한 암기력으로 문법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도 외국어를 체계적으로 습득해나가는 방식이었다) 영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를 배웠으며(그는 독일 출신) 24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독립적인 사업을 하기 시작한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상인 길드에 가입했고, 20대 말~30대에는 미국 여행을 하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31세에는 모스크바에 지사를 두고 이후 스웨덴어, 덴마크어, 폴란드어, 슬로바키아어를 배웠으며 크림전쟁을 계기로 사업이 번창하였다. 30대 중반에는 라틴어, 고대 및 근대 그리스어를 배웠고 오리엔트를 여행하면서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아랍어, 현대 그리스어를 배웠으며 43~45세에 인도, 자바, 청나라, 일본, 북미와 중남미 등을 여행하였다. 트로이 유적은 그로부터 7년 뒤에 발굴했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그의 고고학 인생은 상당히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후 69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수많은 유적들을 발굴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꿈을 키웠는데 단순히 그를 ‘돈 뿌려대며 고대 유적을 훼손한’ 사람으로 인식했던 것이 잘못이라고 여겨졌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다양한 언어를 습득한 사람은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어떤 분야의 공부가 됐든) 상당히 이로운 점이 많다. 그리고 슐리만은 그러한 다양한 언어를 기반으로 발굴 자금을 확보했고, 그를 통하여 트로이 유적이라고 알려진 그 곳을 오랫동안 발굴조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게 학술적인 면모가 적었던 것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시각으로 당시의 슐리만을 봤기 때문이다. 아마 1세기 뒤의 고고학자가 오늘날 우리를 보면 그 역시 문제가 많다고 할 것이다.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을 파헤쳐서 그것을 개인 소장품으로 전락시키지 않은 것만 봐도(당시 이집트의 수많은 유물, 유적들은 유럽 열강들의 개인 · 왕실 소장품으로 무더기로 팔려나갔다) 다행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그는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모두 부러워할만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어마어마한 재산이 있었기에 돈 걱정 없이 학업과 연구를 병행할 수 있었으며,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식견을 크게 넓힐 수 있었고 엄청난 언어 능력으로 폭넓은 공부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요즘 고고학계에도 슐리만 정도의 능력자(?)는 없지 않은가~그것들이 모두 우연으로 얻어진 바가 아닌 만큼 우리는 슐리만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쪽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책은 슐리만에 대해 색다른 시각을 제시해줄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한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재밌지 않은가?

Ⅱ. 전체적인 목차와 내용구성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청나라편> 1865년 5월 3일

1장. 텐진으로 가는 길
2장. 옛 영화를 간직한 몰락의 도시, 베이징
3장. 가장 위대한 건축물, 만리장성
4장. 상하이, 전통과 서양 문물의 혼돈 속에서

<일본편> 1865년 6월 28일 에도에서 일본 여행기

5장. 천황의 나라, 일본을 향하여
6장. 아름다운 정원의 도시 요코하마
7장. 양잠의 도시, 하치오치
8장. 에도, 그리고 두 얼굴의 일본인
9장.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로  
 

그는 일본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50일간의 항해 기간 동안 청나라에서 2개월, 일본에서 3주간 체류하면서 쓴 일기에서 발췌하여 이 기행문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각 장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분량 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청나라편은 80여 쪽, 일본편은 100여 쪽 - 해석이나 도판에 의해 원본과 분량 차이가 있겠지만 일본편의 내용이 상대적으로 더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더 짧은 기간에 체류한 일본이었지만 왜 슐리만은 더 풍부한 기록을 자세하게 남겼을까? 역자(譯者)에 의하면 슐리만은 평소에도 일본을 동경하고 꼭 가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선입견과 그가 직접 가서 보고 느낀 점들이 그로 하여금 친(親) 일본파(?)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 청나라와 일본에 대한 이런 슐리만의 인식은 이후 그가 두 나라를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슐리만의 여행 경로를 살펴보면 일단 ‘상하이’에서 출발해서 산둥 반도 ‘옌타이’를 거쳐 ‘다구’로 향한다. 이후 ‘톈진’과 ‘베이징’, ‘구베이커우’ 등을 둘러보고 다시 다구에서 배를 타고 나와 상하이로 향한다. 중국 동부 해안선을 따라 여행한 것으로 전체 중국 중에서 극히 일부분만 둘러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중국의 일부분만 보고 전체 중국을 판단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중국 동해안 지대는 다른 곳보다 선진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개발이나 발전이 빠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슐리만은 청나라의 몰락과 어두운 미래를 보았다.

하지만 일본에 간 슐리만은 그 곳에서 청나라와 전혀 다른 동방의 또 다른 나라를 경험하게 된다. 깨끗하고, 비리가 없고, 절제할 줄 알며 검소하고, 상명하복이 철저한 이 나라를 슐리만은 굉장히 감동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어떻게 보면 두 나라 모두 절대군주제 치하의 국가이며, 똑같이 외세를 배척하면서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국가 전체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었는데, 왜 그 결과는 서로 달랐을까? 그리고 그 차이가 외국에서 여행 나온 1명의 관광객(좀 공부를 많이 하고 통찰력이 남다르지만)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확연하게 보였단 말인가? 정말 그렇다면 청나라가 외세의 침략에 무릎 꿇고 큰 고초를 겪은 것은 필연적이었단 말인가? 슐리만은 이 부분에서 다소 극단적으로 청나라와 일본을 비교하는 듯 하지만 마냥 근거 없는 내용만은 아니기에 그런 부분을 고심하면서 읽는 것 또한 이 책을 즐기는 또 하나의 묘미인 것 같다.  

Ⅲ. 몰락하는 사자, 청나라에 대한 인색한 평가

필자는 청나라 말기, 그들이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잘 알고 있다. 물론 역사책을 통해서다. 하지만 슐리만은 신기하게도 당시 직접 청나라를 방문함으로써 이런 징조를 예측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슐리만은 맨 처음에 ‘청나라 세관에서 일하는 서양인들’이라는 챕터를 소개하고 있었다. 1장의 유일한 내용인데 마치 청나라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알려주는 전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서양인들은 청나라에서 조금만 중국어를 알아도 세관원으로 일할 수가 있었는데, 이는 유럽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수입이 좋았다고 한다. 청나라에서는 오히려 비리가 많고 효율이 떨어지는 자국 출신 관리보다 서양인들을 등용했는데, 그 과정에서 서양인들은 큰 이득을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시 청나라가 ‘기회의 땅’으로 인식될 수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바보 같은 약탈대상’으로도 보일 수 있는 노릇이었다.

슐리만이 굳이 만리장성 이전에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일단 접고 책장을 넘겼다. 그는 배를 타고 가면서 거쳐 간 몇몇 도시를 언급한 이후 인구가 40만이 넘는 거대 도시 톈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면서 2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 이제껏 여러 대륙에서 지저분한 도시들을 많이 목격했지만 특히 톈진은 더럽고 혐오감을 주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여행자의 오감(五感)이 끊임없이 수모를 당해야만 한다 -

그동안 유럽 각지에서 상업 활동을 하면서 여행을 다녔던 슐리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계 그 어떤 것보다도 중국의 톈진이 더럽고 혐오감을 준다고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1천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으며, 화베이[華北] 지구의 중앙 직할시로서 원대(元代)부터 교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톈진이 왜 이런 악평을 받아야 하는지 의아할 정도다. 이는 유럽 우월주의 사상에 익숙한 슐리만의 발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청나라에 대해 그가 갖고 있던 선입관도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당시 청나라는 동치제(1856~1874) 치세로서 증국번, 이홍장 등이 주축이 되어 추진한 양무운동(1861~1894)으로 부흥을 꿈꾸던 때였다. 하지만 이미 아편전쟁(1840~1842)과 태평천국운동(1851) 등으로 국가체제가 흔들리더니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베이징이 함락되기도 하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얼마 되지 않아 슐리만이 청나라에 도착했으니 과연 그가 청나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지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슐리만이 중국에서 칭찬하는 것이라고는 ‘만리장성(이 거대한 인공물은 슐리만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한 대상이기도 하다)’과 뛰어난 솜씨를 가진 배우들이 등장하는 ‘경극’ 뿐이다(그것도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하다고 평했으나 극장의 무대구조나 관객들의 관람태도는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둘레 12킬로미터, 높이 8미터 성벽으로 둘러싸인 자금성을 통치자의 감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며, 베이징이라고 하는 거대한 도성(마르코 폴로가 극찬해 마지않던)에서 뭔가 놀랄 만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가 한껏 실망했다고 쓰기도 했다. 슐리만이 단순히 문화재나 관광지를 찾아 청나라를 방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물론 그 당시 자금성이 지금의 자금성처럼 관광지로서 한껏 정비된 모습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그 웅장함이나 화려함, 거대함에는 감탄사 한번 내지를 법도 한데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베이징에서 나와 만리장성으로 향하는 동안 오래된 하수시설의 잔존물, 파손된 기둥머리와 추녀의 돌림띠, 거리의 오물 더미 속에 파묻힌 각종 조각들, 피해가야만 할 정도로 붕괴된 위풍 있는 화강암 다리 등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혹평한다.

- 이 모든 것들로 미루어 본다면, 지금은 몰락하고 타락한 인종이 거주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위대하고 창조적인 민족이 살았으며, 지금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거리에 단층의 초라한 오두막만 보이지만 옛날에는 화려하게 포장된 거리들과 커다란 집들 그리고 위풍당당한 궁궐들이 있었다는 말이 맞기는 한 것 같다. 정말 이곳이 과거에는 화려한 수도였단 말인가? 베이징의 웅장한 성문과 성벽이 말해주듯이 그것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지금 눈앞에 설펴지는 이따위 도시를 지키기 위하여 이런 위대한 건축물들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

당시 청나라가 어느 정도로 몰락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베이징은 금 · 원 · 명 · 청의 네 정권에서 700여 년간 도성으로 이용한 곳인데 원대의 대도성(大都城)을 명대에 약간 고쳤으며, 청대에는 서쪽 교외에 원림을 많이 조성하여 그 화려함을 더 했다. 특히 서태후가 해군 군비를 전용하여 중건한 이화원은 규모가 크고 풍경이 아름다워 베이징 성내의 황궁에 비하여 손색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류제헌, 2004,『중국 역사 지리』, 문학과 지성사, pp.272-273). 그런 베이징이 이처럼 몰락했으니, 청나라가 곧 몰락할 것이라고 예견한 슐리만이 탁견(卓見)을 가졌다고 칭찬할 일만도 아닌 듯싶다.

하지만 그는 만리장성 앞에서 그간의 냉정한 비판이 눈 녹듯이 사라진 것처럼 감탄사를 연발한다. 당시 만리장성이 지금처럼 잘 정비된 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이곳저곳을 암벽 등반하는 기분으로 올라서고 주변 경관을 살펴보면서 자세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벽돌의 규격에서부터 축성방법, 주변의 자연지세, 성벽의 구조 등등에 이르기까지. 그러면서 원형아치의 기원과 문화적 속성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고고학자의 그것이었다. 그는 앞선 비난(거의 이 정도 수준의 비판)을 모두 접어두고 만리장성을 두고 ‘태곳적 거인들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작품’이라고 칭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만리장성 역시 그의 날카로운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는 만리장성의 웅장함이 청나라의 궁색한 변명이자 마지막 최후의 보루와도 같이 느껴졌나 보다. 다음처럼 글을 남긴 걸 보면 말이다.

- 말할 것도 없이 만리장성은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위대했던 과거의 묘비가 되어 장성을 가로지르는 협곡에서 그리고 장성을 뚫고 지나가는 구름 속에서 청나라의 몰락을 가져온 부패와 퇴폐에 대하여 침묵으로 항의하고 있다 - 

번역이 잘 돼서 그런지는 몰라도 상당히 시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거의 20여개에 달하는 외국어를 습득하고 각지의 문학작품을 두루 암송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슐리만은 이후 길이 67센티미터의 견고한 벽돌 하나를 기념품으로 가져갔다. 이는 당시 고물애호주의(말이 좋아 그렇지, 사실은 보물찾기주의?)에 가까운 고전 고고학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이 돌이 지금 어디 가 있는지는 몰라도 안타까운 심정뿐이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그는 아주 아주 아주 비판적인 시각으로 청나라를 방문해 2개월간 여행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중국인이 도박을 좋아한다는 내용이나 그들이 타고 다닌 말이나 수레의 크기나 구조, 해적선이 활개치고 다니는 당시의 모습, 중국인의 생활상 구석구석까지 아주 자세히 서술하고 있었다. 마치 제국주의 시대 때 인류학자를 비롯한 식민사업의 첨병(尖兵)들이 대상지의 역사와 문화, 민속 등을 샅샅이 훑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국가의 지원을 받거나 어떤 공식적인 임무를 갖고 청나라에 온 것이 아니라 그저 개인적인 여행의 일환으로 청나라를 방문했으면서도 이렇게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그 점이 더욱 독특하다 할 수 있겠다. 필자는 슐리만이 청나라를 방문하는 내내 보다 깨끗하고 우수하고 선진적인(지네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유럽인의 시각으로 여행을 하고 기록을 남긴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일본과 전혀 다를 만큼 극과 극이어서 그저 놀랄 따름이었다. 
 

Ⅳ. 문명은 최고 수준이지만 도덕관념은 저급인 일본에 우호적인 시각

앞서 언급했지만 슐리만이 일본에 체류한 기간은 청나라에 비해 대략 1/3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다양하고 많은 내용이 담겨 있으며, 그 안에는 긍정적인 내용들도 많이 들어 있었다(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청나라와 비교하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또한 유럽과 비교했을 때 유럽과 다른 점은 저급하다고 했지만, 상당 부분에서는 최고 수준이라고까지 칭하고 있었다. 이는 슐리만 개인적인 감정과 선입관이 작용한 때문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실제적으로 그렇게 보였기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

1865년은 가마쿠라 막부 말기에 해당하며(이듬해에 막부가 패배하고 1867년에는 왕정복고가 이뤄져 메이지유신이 시작한다) 메이지유신 이전부터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일본의 국력은 조선을 상회하고도 남았으며, 청나라도 우습게 볼 정도였는데 이는 슐리만도 적고 있듯이 당시 20명의 다이묘 중 상위 4명의 쌀 생산량만 따져도 알 수 있다. 간가 번의 마에다 가가는 1년에 120만 2,700고쿠(石, 쌀 한 가마를 의미), 사츠마번의 마츠다이라 사츠마는 1년에 76만 800고쿠, 오와리 번의 도쿠가와 오와리는 연간 62만 9,500고쿠, 무쓰 또는 센다이 번의 마츠다이라 무쓰는 연간 62만 6천 고쿠를 생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전국적으로 수백만석 이상의 쌀이 생산되고 있었으며, 사츠마번(대표적인 존왕양이파)의 경우, 자체적으로 서양의 최신 무기로 무장하는 등 군비를 대폭 증강하여 영국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막강한 실력을 가진 지방 세력가였다. 당시 쇄국을 고집하던 조선과는 천지 차이의 국제적 시야를 가졌던 것이다. 끊임없는 긴장과 대립은 평화안일주의에 빠져있지 않게끔 해주며 국가에 활력소를 제공해준다. 막부와 천황의 대립은 미국의 페리가 내항한 이후(1853) 꾸준히 진행됐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은 뚜렷한 국력 신장을 이루게 된다. 내적 투쟁이 외적 확산을 가능케 했다고나 할까.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슐리만이 일본을 방문했으니, 어찌 청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았겠는가.

슐리만보다 일찍 일본을 방문한 타운젠트 해리스는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라는 임무를 맡았다(1858). 하지만 그는 일본 사회의 실태를 알고 나서 이 조약을 강요하는 것을 망설였다고 한다. 그의 심정이 그가 남긴『일본체재기(日本滯在記)』에 잘 나와 있다.

- 그들은 모두 살집이 좋고 옷차림도 좋았으며 행복해 보였다. 얼핏 보면 부자도 빈자도 없다. 아마 이것이 사람들의 진실한 행복한 모습이라 할 것이다. 때때로 나는 일본을 개국하여 외국의 영향을 받게 하는 것이 과연 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나는 질박함과 황금의 시대를 그 어떤 나라에서보다 일본에서 많이 보았다. 생명과 재산의 안전, 전반적인 사람들의 소박함과 만족함 등이 현재 일본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

해리스는 경건한 크리스챤으로서 야만국인 일본을 개종시키기 위해 일본 영사의 직을 열망하여 일본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극동의 야만국에서 ‘지상의 낙원’을 보게 되었고 그가 지닌 크리스트교의 가치관이 크게 동요하였던 것이다(河合 敦/원지연, 1997,『하룻밤에 읽는 일본사』, 중앙M&B, p.252). 그리고 해리스의 이러한 묘사는 불과 7년 후에 이곳을 방문하게 될 한 독일 출신 민간인에 의해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아마 슐리만이 당시 조선까지 방문했다면(물론 조선에 대해 거의 몰랐으니까 오지 않았겠지만) 조선 역시 청나라처럼 일본과 비교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슐리만이 익숙하게 여겨온 서양식 개인주의, 제국주의식의 전체주의, 크게 발달한 상업경제 등이 일본 이외의 두 나라에서는 잘 찾아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족은 접어두고 슐리만의 행보를 다시 찾아가보자. 그가 얼마나 일본을 동경했었고, 지금 그것을 몸으로 잘 느끼고 있는지를 말이다.

슐리만이 일본에 처음 도착해서 느낀 것은 그들의 복장과 헤어스타일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청나라와 다르다는 얘기부터 꺼낸다. 일단 청나라에서는 재앙을 막아준다고 하여 커다란 두 눈을 뱃머리에 그려놓고 유성도료를 칠한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배들이 많다고 적은데 반하여 건장한 사내 둘이서 노를 젓는 작은 나룻배들만 있다고 적었다. 또한 일본인들은 아주 기다란 띠(훈도시를 지칭)만 두를 뿐 거의 벌거벗고 온 몸에 문신을 잔뜩 그려놓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슐리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르타뉴 주민들에 대해 묘사한 대목을 인용하고 있었다. 그의 식견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일본인이 몸에 걸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에 놀라면서 헤어스타일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격을 부풀려서 받아먹는 청나라 뱃사공에 비해 정찰제로 운영하는 것에서도 놀랐던 것 같다. 또한 ‘닛폰 무스코(일본의 남아)’라고 말하면서 뇌물에 속지 않는 세관 직원들에게도 상당히 강한 인상을 받았다. 모든 것이 청나라와 달리 잘 짜인 체계 속에서 돌아가는 듯 한 느낌을 책을 읽는 필자도 느끼겠는데, 당사자인 슐리만은 오죽하겠는가? 아마 슐리만은 역시 일본에 오길 잘했다~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후 슐리만의 일본에 대한 감상은 대부분 칭찬 일색이다. 일본의 인위적이면서 구조적인 스타일의 정원을 보고 슐리만은 특히 감동한다. 또한 깔끔한 도로와 건물은 물론이요, 불에 잘 타지 않는 집에 대한 설명도 눈여겨 볼만 하다. 특히 슐리만은 일본 주택들은 ‘청결의 모범’이라고 칭송한다. 청나라와는 전혀 달리 너무나도 깨끗하고 소박하며 깔끔한 스타일의 주거 문화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특히 소박한 세간이 그에게는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 같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결혼하기 힘든 이유로 ‘가구 중독, 사치품에 대한 경쟁, 그로 인해 생기는 막대한 비용’ 등을 꼽았는데 일본에서는 그런 경향이 전혀 없으니 이런 좋은 풍습은 배워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소박하고 깔끔한 문화는 주택뿐만 아니라 사찰에서도 확인되는데 ‘불당 안에는 한 점 티끌도 찾아볼 수 없었고, 창틀은 찢어진 데가 한 군데도 없이 깨끗한 창호지로 발라져 있었다.’는 그의 묘사가 당시 모습을 그대로 그려주는 듯 했다.

그밖에 슐리만은 일본의 비단상점을 두고 유럽의 거대한 백화점과도 비교해 손색이 없다면서 놀라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상업경제는 청나라나 조선보다 훨씬 앞서는 것으로서 유럽과 비교했어도 크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슐리만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상명하복이 철저한 민족, 6개의 계급으로 나눠진 사회구조 속에서 철저하게 짜인 틀에 맞춰 나라가 돌아가는 곳, 굉장히 독창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라는 생각을 슐리만은 가졌던 것 같다. 중세~근대 일본사에 대해 딱히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당시 일본이 전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의 국력을 지닌 나라였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일본이 유럽 여느 국가와 비교했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의 나라였다. 미국의 페리가 일본은 방문하고 외국 열강들과 국교를 튼지 불과 20여년도 안 돼서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것만 봐도 일본의 성장세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 70여년이 지나자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대동아공영을 주장하는 거대 제국주의 국가로 재탄생하게 되었으니 그것만 보더라도 일본의 국력이 당시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슐리만의 묘사에도 그러한 것들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슐리만 역시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놀라고 감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슐리만의 평가 중에서도 안 좋은 것은 있었다. 그건 바로 남녀가 성적으로 개방된 사회였다. 남녀 혼탕부터 시작해서 남녀가 서로 외설적인 무대연극을 즐기는 것들이 슐리만에게는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그러면서도 그는 청나라에서처럼 일본의 연극 역시 수준이 높다고 칭송했다. 그가 예술 쪽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것 하나 때문에 일본에 대해 슐리만은 도덕관념이 저급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렇다고 그것을 아주 야만적인 것으로 매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감찰과 통제의 방법으로 일본을 통치하는 쇼군의 전제군주제적인 통치방식을 언급하면서 일본에서 왜 그런 문화가 자리 잡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즉, 그러한 남녀 혼속 문화가 국가 통치에 방해가 되지 않았기에 규제하지도 않았으며, 그러다보니 오늘날 그러한 문화가 보편화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슐리만이 서양인이면서도 불구하고 일본의 이러한 성문화에 대해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조금 이채로웠다. 당시의 학문적 경향이나 서양인의 인식에 의한다면 그런 것들이 원시적이라고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그러한 도덕관념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상당히 문명화되고 선진적인 부분들을 많이 살펴봤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청나라와 같은 사회였다면 그리 관대한 평가를 받지는 못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0개를 잘하는 사람이 1개를 못 했을 때와 10개 중 9개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그나마 나머지 1개도 제대로 못 해냈을 때 주변 사람들의 평가라고나 할까? 암튼 슐리만은 3주간의 체류 기간 동안 일본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고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Ⅴ. 結論 : 슐리만의 또 다른 면모와 그의 시각에 대하여

19세기 중반 유럽 열강은 전 세계를 그들의 식민지로 삼으면서 기고만장하였다. 그리고 슐리만 역시 그런 시기 독일에서 태어나 상업 활동으로 巨富를 축적했기에 전형적인 유럽인의 마인드(Mind))를 갖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청나라와 일본에 대한 기행문은 상당히 객관적인 시각에서 쓰인 것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물론 청나라와 일본에 대한 그의 선입관과 사사로운 감정이 섞이긴 했지만 그가 글로 남긴 기행문을 보면 상당히 구체적인 부분까지, 세세하게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어떤 교훈이나 메시지를 얻으려고 했던 것 같다. 아무리 동양에 속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유럽보다 못 났다~라는 생각보다는 잘 한 것은 배우고 못 난 것은 자세하게 묘사해서 기억하려는 것 같았다. 이러한 부분은 그간 슐리만에 대한 다른 고고학 관련 서적에서 볼 수 없던 부분이었던지라 그 자체로서 신선했다. 특히 그가 청나라와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을 당시 이 두 나라는 유럽 열강의 위력을 실감하고 그들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변혁을 겪던 시기였다. 그만큼 그 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외교관과 일부 공식 허가를 받은 상인 등에 불과했는데 그는 한 사람의 외국인으로서 자유여행을 다녔기에 이 기행문이 더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이 기행문은 슐리만 한 사람의 눈으로 당시 사회를 바라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슐리만은 자신의 눈으로 그 당시의 유럽 열강과 동양 국가들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일반 백성들의 세세한 삶까지도 묘사하고 마치 처음 보는 연구대상을 연구하는 학자의 마음으로 모두 기록으로 남겼던 것이다.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쓴『황금가지』가 떠올랐다. 인류학 · 종교학 · 신화학 분야의 고전 중의 고전인 이 책은 1890년 2권으로 출간된 후 이후 20세기 초까지 계속 개정판이 나왔는데, 나름 서양인의 눈으로 세계 각지의 문화에 대해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슐리만이 쓴 책 역시 짧은 기간 청나라와 일본을 방문하고 남긴 글이지만 그 사료적 가치로서의 중요도는 결코 작지 않았다.

도굴범, 약탈자, 보물사냥꾼 등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슐리만에 대해 새롭게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 그가 서양인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입장에서 청나라와 일본의 사회 전반을 바라보고 당시 상황을 잘 묘사했다는 점. 이 두 가지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하며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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