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 슐리만 150년 전 청일을 가다
하인리히 슐리만 지음, 이승희 옮김 / 갈라파고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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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序言 : 흥미로운 주제의 책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고고학 관련 서적은 아니며, 기행문(혹은 유람기?)에 가까운 책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더군다나 이 책을 쓴 사람이 ‘하인리히 슐리만’이라는 사실에 더욱더 구미가 당긴다. 우리가 흔히 알기로 슐리만은 저 유명한 트로이 유적(이라고 믿어졌던)을 발굴한 사람이 아닌가? 물론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 발굴 당시에는 전문적인 고고학자가 아니었지만 추가적으로 고고학 공부를 해서 학위를 받고, 다양한 유적들을 조사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청나라와 일본 등지를 방문하고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물론 그가 巨富에다가 大商人이었으니 세계여행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아프리카나 인도 등지의 유럽 식민지 국가가 아닌 극동의 국가를 방문해서 어떤 학술적 자료를 남겼다는 점이 신기했다. 또한 인류학자나 역사학자, 지리학자가 아닌 유럽의 고고학자가 동방을 여행하고 기록을 남겼다는 것 또한 재밌었다.

사실 슐리만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 책의 뒷부분(197~199쪽)에도 나오지만 그는 어렸을 때 식품점 점원으로 일했었고, 20대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사환, 통신원, 경리로 일하면서 엄청난 외국어들을 습득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이 고안한 방법으로(그는 이 방법으로 16개국의 언어를 습득했는데 이는 그 나라 언어로 된 책을 계속 읽고 암송함으로써 비상한 암기력으로 문법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도 외국어를 체계적으로 습득해나가는 방식이었다) 영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를 배웠으며(그는 독일 출신) 24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독립적인 사업을 하기 시작한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상인 길드에 가입했고, 20대 말~30대에는 미국 여행을 하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31세에는 모스크바에 지사를 두고 이후 스웨덴어, 덴마크어, 폴란드어, 슬로바키아어를 배웠으며 크림전쟁을 계기로 사업이 번창하였다. 30대 중반에는 라틴어, 고대 및 근대 그리스어를 배웠고 오리엔트를 여행하면서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아랍어, 현대 그리스어를 배웠으며 43~45세에 인도, 자바, 청나라, 일본, 북미와 중남미 등을 여행하였다. 트로이 유적은 그로부터 7년 뒤에 발굴했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그의 고고학 인생은 상당히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후 69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수많은 유적들을 발굴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꿈을 키웠는데 단순히 그를 ‘돈 뿌려대며 고대 유적을 훼손한’ 사람으로 인식했던 것이 잘못이라고 여겨졌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다양한 언어를 습득한 사람은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어떤 분야의 공부가 됐든) 상당히 이로운 점이 많다. 그리고 슐리만은 그러한 다양한 언어를 기반으로 발굴 자금을 확보했고, 그를 통하여 트로이 유적이라고 알려진 그 곳을 오랫동안 발굴조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게 학술적인 면모가 적었던 것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시각으로 당시의 슐리만을 봤기 때문이다. 아마 1세기 뒤의 고고학자가 오늘날 우리를 보면 그 역시 문제가 많다고 할 것이다.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을 파헤쳐서 그것을 개인 소장품으로 전락시키지 않은 것만 봐도(당시 이집트의 수많은 유물, 유적들은 유럽 열강들의 개인 · 왕실 소장품으로 무더기로 팔려나갔다) 다행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그는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모두 부러워할만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어마어마한 재산이 있었기에 돈 걱정 없이 학업과 연구를 병행할 수 있었으며,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식견을 크게 넓힐 수 있었고 엄청난 언어 능력으로 폭넓은 공부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요즘 고고학계에도 슐리만 정도의 능력자(?)는 없지 않은가~그것들이 모두 우연으로 얻어진 바가 아닌 만큼 우리는 슐리만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쪽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책은 슐리만에 대해 색다른 시각을 제시해줄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한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재밌지 않은가?

Ⅱ. 전체적인 목차와 내용구성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청나라편> 1865년 5월 3일

1장. 텐진으로 가는 길
2장. 옛 영화를 간직한 몰락의 도시, 베이징
3장. 가장 위대한 건축물, 만리장성
4장. 상하이, 전통과 서양 문물의 혼돈 속에서

<일본편> 1865년 6월 28일 에도에서 일본 여행기

5장. 천황의 나라, 일본을 향하여
6장. 아름다운 정원의 도시 요코하마
7장. 양잠의 도시, 하치오치
8장. 에도, 그리고 두 얼굴의 일본인
9장.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로  
 

그는 일본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50일간의 항해 기간 동안 청나라에서 2개월, 일본에서 3주간 체류하면서 쓴 일기에서 발췌하여 이 기행문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각 장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분량 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청나라편은 80여 쪽, 일본편은 100여 쪽 - 해석이나 도판에 의해 원본과 분량 차이가 있겠지만 일본편의 내용이 상대적으로 더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더 짧은 기간에 체류한 일본이었지만 왜 슐리만은 더 풍부한 기록을 자세하게 남겼을까? 역자(譯者)에 의하면 슐리만은 평소에도 일본을 동경하고 꼭 가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선입견과 그가 직접 가서 보고 느낀 점들이 그로 하여금 친(親) 일본파(?)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 청나라와 일본에 대한 이런 슐리만의 인식은 이후 그가 두 나라를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슐리만의 여행 경로를 살펴보면 일단 ‘상하이’에서 출발해서 산둥 반도 ‘옌타이’를 거쳐 ‘다구’로 향한다. 이후 ‘톈진’과 ‘베이징’, ‘구베이커우’ 등을 둘러보고 다시 다구에서 배를 타고 나와 상하이로 향한다. 중국 동부 해안선을 따라 여행한 것으로 전체 중국 중에서 극히 일부분만 둘러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중국의 일부분만 보고 전체 중국을 판단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중국 동해안 지대는 다른 곳보다 선진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개발이나 발전이 빠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슐리만은 청나라의 몰락과 어두운 미래를 보았다.

하지만 일본에 간 슐리만은 그 곳에서 청나라와 전혀 다른 동방의 또 다른 나라를 경험하게 된다. 깨끗하고, 비리가 없고, 절제할 줄 알며 검소하고, 상명하복이 철저한 이 나라를 슐리만은 굉장히 감동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어떻게 보면 두 나라 모두 절대군주제 치하의 국가이며, 똑같이 외세를 배척하면서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국가 전체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었는데, 왜 그 결과는 서로 달랐을까? 그리고 그 차이가 외국에서 여행 나온 1명의 관광객(좀 공부를 많이 하고 통찰력이 남다르지만)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확연하게 보였단 말인가? 정말 그렇다면 청나라가 외세의 침략에 무릎 꿇고 큰 고초를 겪은 것은 필연적이었단 말인가? 슐리만은 이 부분에서 다소 극단적으로 청나라와 일본을 비교하는 듯 하지만 마냥 근거 없는 내용만은 아니기에 그런 부분을 고심하면서 읽는 것 또한 이 책을 즐기는 또 하나의 묘미인 것 같다.  

Ⅲ. 몰락하는 사자, 청나라에 대한 인색한 평가

필자는 청나라 말기, 그들이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잘 알고 있다. 물론 역사책을 통해서다. 하지만 슐리만은 신기하게도 당시 직접 청나라를 방문함으로써 이런 징조를 예측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슐리만은 맨 처음에 ‘청나라 세관에서 일하는 서양인들’이라는 챕터를 소개하고 있었다. 1장의 유일한 내용인데 마치 청나라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알려주는 전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서양인들은 청나라에서 조금만 중국어를 알아도 세관원으로 일할 수가 있었는데, 이는 유럽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수입이 좋았다고 한다. 청나라에서는 오히려 비리가 많고 효율이 떨어지는 자국 출신 관리보다 서양인들을 등용했는데, 그 과정에서 서양인들은 큰 이득을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시 청나라가 ‘기회의 땅’으로 인식될 수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바보 같은 약탈대상’으로도 보일 수 있는 노릇이었다.

슐리만이 굳이 만리장성 이전에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일단 접고 책장을 넘겼다. 그는 배를 타고 가면서 거쳐 간 몇몇 도시를 언급한 이후 인구가 40만이 넘는 거대 도시 톈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면서 2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 이제껏 여러 대륙에서 지저분한 도시들을 많이 목격했지만 특히 톈진은 더럽고 혐오감을 주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여행자의 오감(五感)이 끊임없이 수모를 당해야만 한다 -

그동안 유럽 각지에서 상업 활동을 하면서 여행을 다녔던 슐리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계 그 어떤 것보다도 중국의 톈진이 더럽고 혐오감을 준다고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1천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으며, 화베이[華北] 지구의 중앙 직할시로서 원대(元代)부터 교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톈진이 왜 이런 악평을 받아야 하는지 의아할 정도다. 이는 유럽 우월주의 사상에 익숙한 슐리만의 발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청나라에 대해 그가 갖고 있던 선입관도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당시 청나라는 동치제(1856~1874) 치세로서 증국번, 이홍장 등이 주축이 되어 추진한 양무운동(1861~1894)으로 부흥을 꿈꾸던 때였다. 하지만 이미 아편전쟁(1840~1842)과 태평천국운동(1851) 등으로 국가체제가 흔들리더니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베이징이 함락되기도 하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얼마 되지 않아 슐리만이 청나라에 도착했으니 과연 그가 청나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지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슐리만이 중국에서 칭찬하는 것이라고는 ‘만리장성(이 거대한 인공물은 슐리만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한 대상이기도 하다)’과 뛰어난 솜씨를 가진 배우들이 등장하는 ‘경극’ 뿐이다(그것도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하다고 평했으나 극장의 무대구조나 관객들의 관람태도는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둘레 12킬로미터, 높이 8미터 성벽으로 둘러싸인 자금성을 통치자의 감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며, 베이징이라고 하는 거대한 도성(마르코 폴로가 극찬해 마지않던)에서 뭔가 놀랄 만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가 한껏 실망했다고 쓰기도 했다. 슐리만이 단순히 문화재나 관광지를 찾아 청나라를 방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물론 그 당시 자금성이 지금의 자금성처럼 관광지로서 한껏 정비된 모습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그 웅장함이나 화려함, 거대함에는 감탄사 한번 내지를 법도 한데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베이징에서 나와 만리장성으로 향하는 동안 오래된 하수시설의 잔존물, 파손된 기둥머리와 추녀의 돌림띠, 거리의 오물 더미 속에 파묻힌 각종 조각들, 피해가야만 할 정도로 붕괴된 위풍 있는 화강암 다리 등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혹평한다.

- 이 모든 것들로 미루어 본다면, 지금은 몰락하고 타락한 인종이 거주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위대하고 창조적인 민족이 살았으며, 지금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거리에 단층의 초라한 오두막만 보이지만 옛날에는 화려하게 포장된 거리들과 커다란 집들 그리고 위풍당당한 궁궐들이 있었다는 말이 맞기는 한 것 같다. 정말 이곳이 과거에는 화려한 수도였단 말인가? 베이징의 웅장한 성문과 성벽이 말해주듯이 그것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지금 눈앞에 설펴지는 이따위 도시를 지키기 위하여 이런 위대한 건축물들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

당시 청나라가 어느 정도로 몰락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베이징은 금 · 원 · 명 · 청의 네 정권에서 700여 년간 도성으로 이용한 곳인데 원대의 대도성(大都城)을 명대에 약간 고쳤으며, 청대에는 서쪽 교외에 원림을 많이 조성하여 그 화려함을 더 했다. 특히 서태후가 해군 군비를 전용하여 중건한 이화원은 규모가 크고 풍경이 아름다워 베이징 성내의 황궁에 비하여 손색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류제헌, 2004,『중국 역사 지리』, 문학과 지성사, pp.272-273). 그런 베이징이 이처럼 몰락했으니, 청나라가 곧 몰락할 것이라고 예견한 슐리만이 탁견(卓見)을 가졌다고 칭찬할 일만도 아닌 듯싶다.

하지만 그는 만리장성 앞에서 그간의 냉정한 비판이 눈 녹듯이 사라진 것처럼 감탄사를 연발한다. 당시 만리장성이 지금처럼 잘 정비된 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이곳저곳을 암벽 등반하는 기분으로 올라서고 주변 경관을 살펴보면서 자세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벽돌의 규격에서부터 축성방법, 주변의 자연지세, 성벽의 구조 등등에 이르기까지. 그러면서 원형아치의 기원과 문화적 속성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고고학자의 그것이었다. 그는 앞선 비난(거의 이 정도 수준의 비판)을 모두 접어두고 만리장성을 두고 ‘태곳적 거인들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작품’이라고 칭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만리장성 역시 그의 날카로운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는 만리장성의 웅장함이 청나라의 궁색한 변명이자 마지막 최후의 보루와도 같이 느껴졌나 보다. 다음처럼 글을 남긴 걸 보면 말이다.

- 말할 것도 없이 만리장성은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위대했던 과거의 묘비가 되어 장성을 가로지르는 협곡에서 그리고 장성을 뚫고 지나가는 구름 속에서 청나라의 몰락을 가져온 부패와 퇴폐에 대하여 침묵으로 항의하고 있다 - 

번역이 잘 돼서 그런지는 몰라도 상당히 시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거의 20여개에 달하는 외국어를 습득하고 각지의 문학작품을 두루 암송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슐리만은 이후 길이 67센티미터의 견고한 벽돌 하나를 기념품으로 가져갔다. 이는 당시 고물애호주의(말이 좋아 그렇지, 사실은 보물찾기주의?)에 가까운 고전 고고학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이 돌이 지금 어디 가 있는지는 몰라도 안타까운 심정뿐이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그는 아주 아주 아주 비판적인 시각으로 청나라를 방문해 2개월간 여행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중국인이 도박을 좋아한다는 내용이나 그들이 타고 다닌 말이나 수레의 크기나 구조, 해적선이 활개치고 다니는 당시의 모습, 중국인의 생활상 구석구석까지 아주 자세히 서술하고 있었다. 마치 제국주의 시대 때 인류학자를 비롯한 식민사업의 첨병(尖兵)들이 대상지의 역사와 문화, 민속 등을 샅샅이 훑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국가의 지원을 받거나 어떤 공식적인 임무를 갖고 청나라에 온 것이 아니라 그저 개인적인 여행의 일환으로 청나라를 방문했으면서도 이렇게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그 점이 더욱 독특하다 할 수 있겠다. 필자는 슐리만이 청나라를 방문하는 내내 보다 깨끗하고 우수하고 선진적인(지네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유럽인의 시각으로 여행을 하고 기록을 남긴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일본과 전혀 다를 만큼 극과 극이어서 그저 놀랄 따름이었다. 
 

Ⅳ. 문명은 최고 수준이지만 도덕관념은 저급인 일본에 우호적인 시각

앞서 언급했지만 슐리만이 일본에 체류한 기간은 청나라에 비해 대략 1/3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다양하고 많은 내용이 담겨 있으며, 그 안에는 긍정적인 내용들도 많이 들어 있었다(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청나라와 비교하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또한 유럽과 비교했을 때 유럽과 다른 점은 저급하다고 했지만, 상당 부분에서는 최고 수준이라고까지 칭하고 있었다. 이는 슐리만 개인적인 감정과 선입관이 작용한 때문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실제적으로 그렇게 보였기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

1865년은 가마쿠라 막부 말기에 해당하며(이듬해에 막부가 패배하고 1867년에는 왕정복고가 이뤄져 메이지유신이 시작한다) 메이지유신 이전부터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일본의 국력은 조선을 상회하고도 남았으며, 청나라도 우습게 볼 정도였는데 이는 슐리만도 적고 있듯이 당시 20명의 다이묘 중 상위 4명의 쌀 생산량만 따져도 알 수 있다. 간가 번의 마에다 가가는 1년에 120만 2,700고쿠(石, 쌀 한 가마를 의미), 사츠마번의 마츠다이라 사츠마는 1년에 76만 800고쿠, 오와리 번의 도쿠가와 오와리는 연간 62만 9,500고쿠, 무쓰 또는 센다이 번의 마츠다이라 무쓰는 연간 62만 6천 고쿠를 생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전국적으로 수백만석 이상의 쌀이 생산되고 있었으며, 사츠마번(대표적인 존왕양이파)의 경우, 자체적으로 서양의 최신 무기로 무장하는 등 군비를 대폭 증강하여 영국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막강한 실력을 가진 지방 세력가였다. 당시 쇄국을 고집하던 조선과는 천지 차이의 국제적 시야를 가졌던 것이다. 끊임없는 긴장과 대립은 평화안일주의에 빠져있지 않게끔 해주며 국가에 활력소를 제공해준다. 막부와 천황의 대립은 미국의 페리가 내항한 이후(1853) 꾸준히 진행됐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은 뚜렷한 국력 신장을 이루게 된다. 내적 투쟁이 외적 확산을 가능케 했다고나 할까.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슐리만이 일본을 방문했으니, 어찌 청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았겠는가.

슐리만보다 일찍 일본을 방문한 타운젠트 해리스는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라는 임무를 맡았다(1858). 하지만 그는 일본 사회의 실태를 알고 나서 이 조약을 강요하는 것을 망설였다고 한다. 그의 심정이 그가 남긴『일본체재기(日本滯在記)』에 잘 나와 있다.

- 그들은 모두 살집이 좋고 옷차림도 좋았으며 행복해 보였다. 얼핏 보면 부자도 빈자도 없다. 아마 이것이 사람들의 진실한 행복한 모습이라 할 것이다. 때때로 나는 일본을 개국하여 외국의 영향을 받게 하는 것이 과연 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나는 질박함과 황금의 시대를 그 어떤 나라에서보다 일본에서 많이 보았다. 생명과 재산의 안전, 전반적인 사람들의 소박함과 만족함 등이 현재 일본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

해리스는 경건한 크리스챤으로서 야만국인 일본을 개종시키기 위해 일본 영사의 직을 열망하여 일본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극동의 야만국에서 ‘지상의 낙원’을 보게 되었고 그가 지닌 크리스트교의 가치관이 크게 동요하였던 것이다(河合 敦/원지연, 1997,『하룻밤에 읽는 일본사』, 중앙M&B, p.252). 그리고 해리스의 이러한 묘사는 불과 7년 후에 이곳을 방문하게 될 한 독일 출신 민간인에 의해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아마 슐리만이 당시 조선까지 방문했다면(물론 조선에 대해 거의 몰랐으니까 오지 않았겠지만) 조선 역시 청나라처럼 일본과 비교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슐리만이 익숙하게 여겨온 서양식 개인주의, 제국주의식의 전체주의, 크게 발달한 상업경제 등이 일본 이외의 두 나라에서는 잘 찾아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족은 접어두고 슐리만의 행보를 다시 찾아가보자. 그가 얼마나 일본을 동경했었고, 지금 그것을 몸으로 잘 느끼고 있는지를 말이다.

슐리만이 일본에 처음 도착해서 느낀 것은 그들의 복장과 헤어스타일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청나라와 다르다는 얘기부터 꺼낸다. 일단 청나라에서는 재앙을 막아준다고 하여 커다란 두 눈을 뱃머리에 그려놓고 유성도료를 칠한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배들이 많다고 적은데 반하여 건장한 사내 둘이서 노를 젓는 작은 나룻배들만 있다고 적었다. 또한 일본인들은 아주 기다란 띠(훈도시를 지칭)만 두를 뿐 거의 벌거벗고 온 몸에 문신을 잔뜩 그려놓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슐리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르타뉴 주민들에 대해 묘사한 대목을 인용하고 있었다. 그의 식견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일본인이 몸에 걸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에 놀라면서 헤어스타일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격을 부풀려서 받아먹는 청나라 뱃사공에 비해 정찰제로 운영하는 것에서도 놀랐던 것 같다. 또한 ‘닛폰 무스코(일본의 남아)’라고 말하면서 뇌물에 속지 않는 세관 직원들에게도 상당히 강한 인상을 받았다. 모든 것이 청나라와 달리 잘 짜인 체계 속에서 돌아가는 듯 한 느낌을 책을 읽는 필자도 느끼겠는데, 당사자인 슐리만은 오죽하겠는가? 아마 슐리만은 역시 일본에 오길 잘했다~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후 슐리만의 일본에 대한 감상은 대부분 칭찬 일색이다. 일본의 인위적이면서 구조적인 스타일의 정원을 보고 슐리만은 특히 감동한다. 또한 깔끔한 도로와 건물은 물론이요, 불에 잘 타지 않는 집에 대한 설명도 눈여겨 볼만 하다. 특히 슐리만은 일본 주택들은 ‘청결의 모범’이라고 칭송한다. 청나라와는 전혀 달리 너무나도 깨끗하고 소박하며 깔끔한 스타일의 주거 문화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특히 소박한 세간이 그에게는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 같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결혼하기 힘든 이유로 ‘가구 중독, 사치품에 대한 경쟁, 그로 인해 생기는 막대한 비용’ 등을 꼽았는데 일본에서는 그런 경향이 전혀 없으니 이런 좋은 풍습은 배워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소박하고 깔끔한 문화는 주택뿐만 아니라 사찰에서도 확인되는데 ‘불당 안에는 한 점 티끌도 찾아볼 수 없었고, 창틀은 찢어진 데가 한 군데도 없이 깨끗한 창호지로 발라져 있었다.’는 그의 묘사가 당시 모습을 그대로 그려주는 듯 했다.

그밖에 슐리만은 일본의 비단상점을 두고 유럽의 거대한 백화점과도 비교해 손색이 없다면서 놀라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상업경제는 청나라나 조선보다 훨씬 앞서는 것으로서 유럽과 비교했어도 크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슐리만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상명하복이 철저한 민족, 6개의 계급으로 나눠진 사회구조 속에서 철저하게 짜인 틀에 맞춰 나라가 돌아가는 곳, 굉장히 독창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라는 생각을 슐리만은 가졌던 것 같다. 중세~근대 일본사에 대해 딱히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당시 일본이 전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의 국력을 지닌 나라였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일본이 유럽 여느 국가와 비교했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의 나라였다. 미국의 페리가 일본은 방문하고 외국 열강들과 국교를 튼지 불과 20여년도 안 돼서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것만 봐도 일본의 성장세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 70여년이 지나자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대동아공영을 주장하는 거대 제국주의 국가로 재탄생하게 되었으니 그것만 보더라도 일본의 국력이 당시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슐리만의 묘사에도 그러한 것들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슐리만 역시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놀라고 감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슐리만의 평가 중에서도 안 좋은 것은 있었다. 그건 바로 남녀가 성적으로 개방된 사회였다. 남녀 혼탕부터 시작해서 남녀가 서로 외설적인 무대연극을 즐기는 것들이 슐리만에게는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그러면서도 그는 청나라에서처럼 일본의 연극 역시 수준이 높다고 칭송했다. 그가 예술 쪽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것 하나 때문에 일본에 대해 슐리만은 도덕관념이 저급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렇다고 그것을 아주 야만적인 것으로 매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감찰과 통제의 방법으로 일본을 통치하는 쇼군의 전제군주제적인 통치방식을 언급하면서 일본에서 왜 그런 문화가 자리 잡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즉, 그러한 남녀 혼속 문화가 국가 통치에 방해가 되지 않았기에 규제하지도 않았으며, 그러다보니 오늘날 그러한 문화가 보편화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슐리만이 서양인이면서도 불구하고 일본의 이러한 성문화에 대해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조금 이채로웠다. 당시의 학문적 경향이나 서양인의 인식에 의한다면 그런 것들이 원시적이라고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그러한 도덕관념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상당히 문명화되고 선진적인 부분들을 많이 살펴봤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청나라와 같은 사회였다면 그리 관대한 평가를 받지는 못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0개를 잘하는 사람이 1개를 못 했을 때와 10개 중 9개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그나마 나머지 1개도 제대로 못 해냈을 때 주변 사람들의 평가라고나 할까? 암튼 슐리만은 3주간의 체류 기간 동안 일본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고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Ⅴ. 結論 : 슐리만의 또 다른 면모와 그의 시각에 대하여

19세기 중반 유럽 열강은 전 세계를 그들의 식민지로 삼으면서 기고만장하였다. 그리고 슐리만 역시 그런 시기 독일에서 태어나 상업 활동으로 巨富를 축적했기에 전형적인 유럽인의 마인드(Mind))를 갖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청나라와 일본에 대한 기행문은 상당히 객관적인 시각에서 쓰인 것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물론 청나라와 일본에 대한 그의 선입관과 사사로운 감정이 섞이긴 했지만 그가 글로 남긴 기행문을 보면 상당히 구체적인 부분까지, 세세하게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어떤 교훈이나 메시지를 얻으려고 했던 것 같다. 아무리 동양에 속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유럽보다 못 났다~라는 생각보다는 잘 한 것은 배우고 못 난 것은 자세하게 묘사해서 기억하려는 것 같았다. 이러한 부분은 그간 슐리만에 대한 다른 고고학 관련 서적에서 볼 수 없던 부분이었던지라 그 자체로서 신선했다. 특히 그가 청나라와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을 당시 이 두 나라는 유럽 열강의 위력을 실감하고 그들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변혁을 겪던 시기였다. 그만큼 그 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외교관과 일부 공식 허가를 받은 상인 등에 불과했는데 그는 한 사람의 외국인으로서 자유여행을 다녔기에 이 기행문이 더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이 기행문은 슐리만 한 사람의 눈으로 당시 사회를 바라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슐리만은 자신의 눈으로 그 당시의 유럽 열강과 동양 국가들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일반 백성들의 세세한 삶까지도 묘사하고 마치 처음 보는 연구대상을 연구하는 학자의 마음으로 모두 기록으로 남겼던 것이다.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쓴『황금가지』가 떠올랐다. 인류학 · 종교학 · 신화학 분야의 고전 중의 고전인 이 책은 1890년 2권으로 출간된 후 이후 20세기 초까지 계속 개정판이 나왔는데, 나름 서양인의 눈으로 세계 각지의 문화에 대해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슐리만이 쓴 책 역시 짧은 기간 청나라와 일본을 방문하고 남긴 글이지만 그 사료적 가치로서의 중요도는 결코 작지 않았다.

도굴범, 약탈자, 보물사냥꾼 등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슐리만에 대해 새롭게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 그가 서양인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입장에서 청나라와 일본의 사회 전반을 바라보고 당시 상황을 잘 묘사했다는 점. 이 두 가지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하며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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