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 20세기의 해몽가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8
피에르 바뱅 지음 / 시공사 / 1995년 5월
평점 :
품절


어떤 특정 시리즈의 책들(그것도 다양한 주제의...)을 보면 늘 이렇게 문제(?)가 발생한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없는 부분이 나오면, 책을 읽기는 읽었는데 재미가 없다보니 이걸 해결하지 못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서평은 쓰지 않고, 책만 읽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싶어서 마침 주말에 비도 오고, 시간이 남아서 이렇게 서평을 쓴다(역시 나의 지식 습득의 편협함이란...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지지부진...하루종일 비비적거리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컴퓨터 앞에서 타자를 친다.

프로이트는 그동안 어떤 사람이다~정도만 알고 있었지, 자세하게 알고자 노력하거나 그의 이론이나 저서에 따로 관심을 가져보지는 않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위키백과에서 한번 검색해봤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파의 창시자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억압의 방어 기제에 대한 이론, 그리고 환자와 정신분석자의 대화를 통하여 정신 병리를 치료하는 정신분석학적 임상 치료 방식을 창안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또 그는 성욕을 인간 생활에서 주요한 동기 부여의 에너지로 새로이 정의하였으며, 자유 연상 · 치료 관계에서 감정 전이의 이론, 그리고 꿈을 통해 무의식적 욕구를 관찰하는 등 치료 기법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뇌성마비를 연구한 초기 신경병 학자이기도 하였다. 신프로이트주의에서 프로이트의 많은 이론을 버리거나 수정하였으며, 20세기 말에 심리학 분야가 발전하면서 프로이트 이론에서 여러 결함이 드러났으나, 프로이트의 방법과 관념은 임상 정신 역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생각은 인문 과학과 일부 사회 과학에서 계속 영향을 주고 있다.

그냥 일반적으로 필자가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알고 있던 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왠지 철학 혹은 정신분석이라고 하면 복잡하고 어려운 분야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것만 같아 쉽게 흥미도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고정관념은 새로운 분야(?)의 책을 읽는데 방해가 될테니깐, 이런저런 잡담은 차치하고 책에 대한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책의 초반부는 프로이트의 가족사에 대해서 가볍게 다루고 있었다. 단순히 그가 독일계라고 생각했었는데 유대인이었다니...약간 의외였다. 그리고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해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그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책에 흠뻑 빠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놀라울 정도로 조숙한 지적 수준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불우한 그의 환경이 그로 하여금 책 속의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이런 표현이 적절하려나?) 주제들에 매진하게끔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마치 베토벤의 주변 환경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열정적으로 곡을 쓰게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프로이트는 괴테, 실러, 호머, 셰익스피어, 티에르, 한니발 등의 위인들을 통해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특히 그는 한니발을 젊었을 적 신화적 영웅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한니발과 로마는 유대인의 끈질긴 투쟁과 카톨릭 조직체의 완고함을 상징하는 것과 같았고, 프로이트는 카르타고인의 끈기과 고집에 감탄하면서 당시에 만연해 있던 반유대주의적인 분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이때 당시 의사의 길을 택했던 프로이트에게 인생의 획기를 가져온 인물이 등장한다. 그건 바로 '샤르코'였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신경학자로서, 프로이트는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렇게 그의 밑에서 나름의 훈련과 연습을 통해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결국 '정신분석'이라고 명명하는 치료법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그는 환자가 잊고 싶어서 고의로 밀어낸 기억을 자유연상을 통해 의식의 세계로 들어올리려고 했고, 억압의 실체를 분명히 하여 그것을 해소해 주어야만 치유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억압의 실체에 다가갈수록 성적(性的)인 문제와 점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던 성(性, Sex)과 말이다. 그러면서 그가 평소에 정신분석 작업과 고고학의 유사성에 관하여 자주 강조했다는 문구가 눈에 확 띄었다(p.49). 두 경우 모두 묻혀 있는 것을 발굴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인데, 그런 이유 때문인지 프로이트 역시 상당히 많은 골동품을 수집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클림트와 시엘레를 언급하고 있다(클림트는 개인적으로 여친이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필자 역시도 그 화려함과 세속적임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인체를 가식 없이 묘사하고 인체를 가리고 있던 옷을 거칠게 벗겨 내는 동안, 프로이트는 자신을 파렴치하고 엉뚱한 자들의 진지에 배치시키려는 사람들의 적대감과 계속해서 맞섰다고 말이다(p.66). 이후 구스타프 융(스위스의 정신의학자 겸 분석심리학자)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생각을 꾸준히 정리하게 된다. 그의 업적과 이론은 현재 100%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지만 지속적으로 관심의 대상이며, 연구의 대상이며, 존중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마치 다윈의 <진화론>이 그러하듯이). 그렇기에 저자는 본문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으면서 끝맺음을 하고 있다(p.95).

   
  슈퍼 컴퓨터가 DNA의 비밀을 밝혀 내고, 첨단 장비들이 속속 등장하는 현대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누군가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
 
   

전체적으로 책은 프로이트의 삶에 대해 정리하면서 시기적으로 그가 어떤 이와 만났고, 어떤 생각을 갖게 됐고, 어떤 연구업적을 쌓았는지 등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한마디로 평전에 가까운 내용이다. 그렇기에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별로 관심없는 인물(혹은 분야)에 대한 평전이라면 그닥 재미를 느끼지 못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에 대한 몇가지 사실은 흥미로웠다.

1. 늑대인간의 꿈(pp.110~115)
프로이트는 소설의 등장인물을 새롭게 재해석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어릴적 꾸었던 꿈과 <빨간 모자>, <늑대와 일곱 마리 새끼양>과 같은 동화 등을 연결시켜 새로운 해석을 실시했다. 그 결과 '실제의 사건-아주 먼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바라보다-부동성-성적 문제들-거세-아버지-무엇인가 무시무시한 것'이라는 논지를 이끌어냈다. 얼마전 <레드 라이딩 후드>라는 빨간 모자를 재해석한 영화도 흥미롭게 봤었지만, 프로이트의 이 동화에 대한 해석도 흥미로웠다. 일반인들이 쉽게 지나치고,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무언가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한다는 점이 필자에게는 무척이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2. 나폴레옹에 대한 그의 생각(pp.122~124)
그는 나폴레옹 1세(우리가 흔히 아는 나폴레옹)를 상당히 흥미롭게 분석했는데, 개인적으로 이 글을 읽고 역사 속의 인물들을 이렇게 분석해나간다면 역사 연구에 있어 좀 더 흥미로운 결론이 도출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이트는 나폴레옹이 벌인 일련의 행동들을 그의 심리적인 측면에 치중해 해석하고 있는데, 분명 이를 실증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묘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기에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프로이트에 대해서 거의 상식 수준으로만 알고 있다가, 이 책을 통해서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보의 수준이라는 것이 인터넷 검색 수준 이상을 벗어나는 것들이 얼마 없기 때문에 참신함을 느낀다거나 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가 분석한 연구성과 몇가지는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들을 담고 있었고,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프로이트와 관련된 자료를 좀 더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이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분들에게는 적절한 책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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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바꾼 전쟁의 역사
에릭 두르슈미트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저자는 오래도록 종군기자로서 생활하면서 대부분의 현대 전쟁을 몸소 겪은 독특한 경험의 소유자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뉴스위크>는 그를 '탁월한 재능으로 매스컴의 역할을 바꿔낸 인물'이라고 평했으며, 프랑스의 <르몽드>는 '생존해 있는 그 어떤 장군보다 더 많은 전쟁을 겪고 생존한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이 쉽게 이해가 갔다. 처음 책을 사서 표지를 넘겨보고는, '적과 직접 교전하고,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참화를 누구보다 생생하게 전달해왔기 때문에 그런 시각으로 전쟁과 관련된 책을 썼다면, 어떤 내용들이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날씨라고 하는 테마와 전쟁을 어떻게 잘 연결시켰을까? 하는 기대감도 존재했고 말이다.

책의 전체적인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괴멸된 바루스의 로마 군단 (로마 vs 게르만족)
2. 가미카제, 신의 바람 (원 제국 vs 일본)
3. 비 내리는 파리의 밤 (프랑스대혁명)
4. 두 개의 다리를 건너라 (프랑스 vs 러시아)
5. '테쿰세' 라 불렸던 용사 (미국 독립전쟁)
6. 아일랜드의 대 감자 기근 (아일랜드)
7. 눈 속의 죽음 (제1차 세계대전 이탈리아 vs 오스트리아)
8. 얼어붙은 독일의 전차부대 (제2차 세계대전 독일 vs 소련)
9. 바다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제2차 세계대전 필리핀)
10. 불바다 (제2차 세계대전 서유럽)
11. 삼각주에서의 죽음 (베트남 전쟁)

시기적으로는 서기 9년 로마군의 게르만 침공에서부터 1965년 베트남 전쟁까지 역사적으로 유명한 전쟁들을 연대기 순으로 나열한 것인데, 뭐 대부분은 근-현대 전쟁에 치중하고 있어서 아쉽긴 하다. 근-현대에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최첨단 장비들이 나온다 하더라도 인간이 치루는 전쟁이라는 행위에 있어 자연의 위대한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면 그것에 대해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단, 반대로 근-현대전도 이러할진대 고대에는 오죽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면, 고대의 전투(혹은 전쟁)에 대해서도 적정량의 지면을 할애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고대 전투(혹은 전쟁)에 대해서는 단 2개, 로마에 대한 것과 원나라에 대한 것(그것도 시기 차이가 큰 동-서양 전쟁 각 1개씩)뿐만 있어서 개인적으로 고대 전쟁사에 관심이 많은 필자에게는 아쉬운 부분이었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성향일 뿐이니 혹 이 글을 보고 계신 분들은 괘념치 마시길).

또한, 목차를 가만히 보면 3장과 6장은 전쟁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물론 3장의 경우,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행보 및 혁명과 관련하여 전투라고 할만한 요소와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의 제목과 꼭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6장의 아일랜드 대기근 또한 마찬가지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총 · 균 · 쇠』를 보고 처음으로 알게 된 이 내용은 자연과 인간의 상관관계(혹은 농경이라는 산업과 인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언급할 때도 꾸준히 나온다. 이는『박정근의 고고학 박물관 - 선사시대를 이해하는 42가지 열쇠』에서 확인할 수 있다)에 대해 언급할 때 한번도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즉, 전투나 전쟁과는 큰 상관없는 내용인데 어째서 여기에 이렇게 포함시켜 놨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원제를 다시 살펴봤더니 'The Weather Factor'가 아닌가. 그래서 혹시 원래 저자는 딱히 전투(혹은 전쟁)에만 국한시켜 날씨에 대해 쓴 것이 아닌데(물론 전쟁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있긴 했지만,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전쟁 말고 딱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도 역사적으로 큰 사건으로 기록될만한 것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국내에서 번역할 때 이렇게 해석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암튼, 제목이나 목차에 있어서 조금 아쉬웠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만 넘어가도록 하겠다.

전체적으로 각 장에 대한 평가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이미 알고 있었거나, 내용면에서도 새로운 것이 없었던 부분

1장. 괴멸된 바루스의 로마 군단(서기 9년 9월 11일) : 토이토부르거 발트 전투

2장. 가미카제, 신의 바람(1281년 8월 15일) : 쓰시마섬과 이키섬, 큐슈 북부에서의 전투

몇가지 지적사항! (전반적으로 작가의 동양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난 부분이었다)

1) 59쪽을 보면, 몽골기병이 말 위에서 복합궁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석궁을 사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석궁과 활은 분명히 다른 무기인데, 왜 이렇게 서술했는지 의문이다.

2) 또한, 같은 쪽에 나와 있는 기마수병(騎馬水兵)이라는 표현이 생소해서 저자의 주석을 보니, 몽골군이 배를 타고 물을 건널 때에도 항상 말을 데리고 있어서 이런 표현을 썼단다(이 무슨 -.-;).

3) 60쪽의...'무방비 상태의 한족과 고려인을 학살하는 것과, 자신의 가문과 명예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은 일본 무사를 상대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라는 표현은 또 뭣인지. 그럼 몽골이 중국 대륙과 고려를 정복했을 때에는 수월하게 일이 진행됐다는 뜻인가? 고려의 대몽항쟁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이런 표현을 안 썼을텐데 심히 의심스럽다!

4) 61쪽의 미즈키[水城] 해안 성벽에 대해 저자는 주석을 달아 '6세기 이전에 한반도 사람들의 노역으로 축성되었다'고 적고 있다. 6세기 이전에 한반도의 정치 세력이 일본의 정치 세력보다 국력이나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 우위에 선 상태에서 단순히 한반도 사람들이 왜 일본 해안가에 성을 쌓는 노역을 했을까? 이들 성은 북한에서 말하는 소위 '조선식 산성'으로서 당시 이 성을 수축한 주체세력은 일본 내의 한반도 도래인계열이었다. 그런 전후 사정에 대한 이해없이 단순히 '연대+축성의 주체'만 기술하게 되면 누가 봐도 이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많은 내용일 수 밖에 없다. 전반적으로 고대 한-일 관계사에 대한 저자의 인식 부족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5) 61쪽의...'한번 적진 속에 뛰어든 사무라이들은 무서울 정도로 살상력이 뛰어난 검을 휘둘렀다. 그런 전투가 계속되자 몽골군은 자신들의 전투 방식을 잃어버린 채 보조군인 고려 병사들마저 포기했고, 이후 고려군은 가축처럼 도살되었다.'라는 표현도 참...전쟁의 주체는 몽골이지만, 고려를 단순히 보조군(아마 로마 군단에 예속된 보조군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했다)으로 이해하고, 주병력인 몽골군이 퇴각하자 모두 도살되었다고 쓴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6장. 아일랜드의 대(大) 감자 기근(1845년 9월~1849년 7월)

2.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재밌게 재구성 혹은 각색되어 흥미롭게 본 부분

4장. 두 개의 다리를 건너라(1812년 11월 25일) :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스투디안카 마을 근처에서 나폴레옹이 2개의 다리를 급조한 것은 잘 몰랐었다. 한겨울에 공병대장 에블레의 지시에 따라 토목병 300명이 과감하게 명령을 수행했고, 결국 그들은 믿기지 않는 임무를 완수했다고 한다. 저자의 주석에 의하면, 이로부터 130년 뒤에 독일 전차부대가 이 부근을 지나갈때 그 다리의 일부를 보았다고 하니 당시 프랑스 토목병들의 헌신과 희생이 대단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순간, 당시 상황은 수 양제의 별동군 30만 5천명이 고구려에서 느꼈던 그것과 비슷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11월 26일 정오에 다리가 완성되고 1시간에 500명씩 천천히 도하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만들어진 다리는 위태위태했다. 27~28일 양일간 나폴레옹군 중 상당수가 얼음물 속에 쳐박혔고, 봄이 되어 얼음이 녹은 뒤에 러시아 농노들은 3만 6천구의 프랑스군 시체를 그곳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50만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병력이 여기저기 6개월간 두들겨맞아 넝마처럼 변했고, 결국은 수천명만이 목숨을 부지해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폴레옹의 실책은 129년 뒤 어느 독일의 한 최고 통수권자에 의해 또 다시 되풀이 되었고, 그 내용이 이 책의 8장에 서술되어 있다. 이 부분을 또 재밌다고 느낀 이유는 최근에 읽은『프로이트 : 20세기의 해몽가』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내용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책의 123~125쪽을 보면, 나폴레옹 1세에 대한 프로이트의 생각이 간략하게 담겨 있었는데 프로이트는 그를 두고 '나폴레옹은 그의 형 조셉프(Joseph)를 운명적 경쟁자로 느끼고, 기본적인 적대감을 느꼈다. 그가 미망인 조제핀(Josephin)에게 열정적인 집착을 보인 것, 그가 이집트 원정을 나선 것, 그가 제대로 준비도 안 하고 러시아 원정을 갔다가 망한 것은 조제핀에 대한 불성실과, 조제프에 대한 사랑이 원래의 적대감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데 대한 자기 징계였다'는 재밌는 해석을 하고 있다. 굳이 비슷한 예를 따지자면,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과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에 있어서 단순히 정치-군사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군주 개인의 심리적인 상태를 분석한 것과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5장. '테쿰세'라 불렸던 용사(1813년 10월 5일) : 쇼니족 추장의 인디언 독립전쟁

미국 정규군과 인디언의 전투라고 하면 아마 1876년에 리틀 빅 혼에서 미육군 제7기병연대 700명이 전멸한 것을 많이들 떠올릴 것이다. 그 전투의 주인공은 '웅크린 황소(Sitting Bull)'라고 불리는 인디언 추장이었다. 그밖에 '제로니모'라고 알려진 아파치족 전사가 있었으며, 이러한 인디언의 강렬한 저항 대한 오래된 추억은 영화 <라스트 모히칸>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또 다른 인디언의 영웅, 테쿰세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다. '테쿰세의 저주'로도 잘 알려져 있는 그가 영국군과 군사동맹을 형성한 것도 몰랐던 사실이며, 동시기 그가 영웅으로서 대접받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책을 읽으면서 테쿰세가 템즈 강 전투에서 승리했어도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꾸지는 못 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필자 역시 동의하게 되었다. 전투에서 이겼더라도 미국인 이주민들은 꾸준히 인디언의 영토로 유입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골드러쉬와 상관없이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은 결국 인디언을 압도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실제 위대한 아파치족 전사 제로니모 역시도 미국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술에 정복당해 죽지 않았던가(그의 어이없는 죽음 클릭 ☞). 현지 원주민이 그들을 식민지배하려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지형상의 이점을 챙긴다는 것은 어찌보면 상식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테쿰세와 관련된 내용을 잘 정리하고 있어 좋았던 부분이다.

8장. 얼어붙은 독일의 전차부대(1941년 12월 5일) : 독일 중부집단군의 러시아 진격

전체적인 내용은 기존에 인지하고 있던 부분이었는데, 세부적인 전쟁 진행 과정에 대한 묘사가 좋았고, 세세한 몇몇 부분은 몰랐던 것이라서 좋았다. 예를 들면 '스탈린의 유목민 부대(Hordes)'와 아파라트와 리하르트 조르게 등 일본 내 소련의 첩자에 대한 부분, 그와 관련하여 소련이 극동군,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일대의 모든 군 병력을 동원해 독일군을 막아낼 수 있었던 부분 등은 몰랐던 사실이었다. 소련의 거대한 영토와 자원, 막대한 인구와 물자도 그렇지만 동장군이라는 재난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새삼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10장. 불바다(1944년 12월 24일) : 벌지 전투

1944년 12월 16일에 시작하여 1945년 1월 27일까지 진행된 벌지 전투는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으면서도 가장 성과가 없었던, 무의미한 전투가 아닐까 싶다. 몽고메리 장군이 야심차게 준비한 마켓가든 작전이 실패하고, 히틀러는 '라인을 수호하라' 작전을 벌인다. 흔히 아르덴 대공세로 알려진 전투가 바로 이것이다(제2차 세계대전을 그린 유명한 미드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보면 대강의 전쟁 진행 과정을 알 수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그리고 독일군은 제공권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아르덴 숲이 안개로 뒤덮이는 겨울을 작전 시기로 잡는다. 하지만 정원도 부족하고 모든 것이 열악한 상황에서, 결국 작전은 제대로 수행되지 못 하고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아 연합군의 부활한(?) 제공권에 의해 독일군은 격멸된다(저자의 표현이 참 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천상의 문이 열렸던 바로 그 날, 히틀러의 군대는 아우성을 지르며 지옥의 불길 속으로 떨어졌다!'). 이상의 과정이 쉬우면서도 흥미롭게 서술되고 있어 옛 생각을 하면서 즐겁게 볼 수 있었다.

3. 잘 모르고 있었거나 아예 몰랐는데 이 책을 통해 재밌게 본 부분

3장. 비 내리는 파리의 밤(革命曆 2년 테르미도르[熱月] 9일 - 7월 27일) : 프랑스 대혁명

날씨와 관련된 내용보다는 당시 정치적인 상황은 어떠했는지~가 주된 내용이지만, 로베스피에르라는 인물, 그리고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전혀 몰랐었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볼만 했다. 특히 혁명이라는 거국적인 사건이 파리라는 도시 안에서 어떻게 진행되어 갔는지, 그 긴박감이 잘 묻어나왔고, 그 과정에서 여름 폭풍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던 것 같다.

7장. 눈 속의 죽음(1916년 12월 13일) : 1915~1918년에 벌어진 1차 세계대전 중 알프스 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아는 바가 많이 없지만, 특히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금시초문이었다. 당시 알프스 전쟁이 벌어진 전장을 그린 지도를 보니 '뜨악!' 소리가 날 정도로 주요 전선이 위치한 곳은 험난한 산악지대였다. 베르넬 산(3,035), 마르몰라다 산(3,342), 메초디 산(2,734), 세라우타 산(3,035), 콜디라나 산(2,462), 시에프 산(2,426), 카스텔로 산(2,360), 토파나 산(3,720), 팔차레고 산(2,071), 오르틀러 산(3,902) 등등 엄청난 고지대에서 벌어진 전쟁이라니...쉽게 상상이 안 갔다(역사가들이 그 곳에서 벌어진 전투를 설명할 때 '바위와 얼음 속의 전선'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절대 공감했다!). 알프스라고 하면 한니발이 로마군의 허를 찔렀을 때 넘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기에 아주 생소한 내용이었다.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양자는 알프스 산맥에 형성된 전선을 중심으로 대치했지만 지리한 싸움만 계속되고, 무의미한 희생만 지속될 뿐이었다. 이탈리아는 최정예 산악 군단인 알피니(Alpini) 군단의 병력을 연이어 투입했지만, 산 정상을 장악하기 위한 공방전은 그칠 줄 몰랐다. 그에 대해 오스트리아의 황제수비대는 산 여기저기에 벌집처럼 구멍을 뚫어 질서정연한 빙하도시를 만들면서 이탈리아군의 공세에 대응했다. 특히 콜디라나 산(양털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에서 이탈리아군이 하도 많이 죽어 이탈리아군은 이를 피의 산이라는 뜻으로 콜디상귀라고 불렀다고 한다)을 둘러싼 쟁탈전이 치열했는데(마치 한국전쟁 당시 백마고지, 피의 능선과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6개월 동안 이 곳에서 이탈리아군이 입은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부상 장교 199명, 사망 장교 104명, 작전 중 실종 장교 14명, 부상 사병 5,160명, 사망 사병 1,050명, 작전 중 실종 사병 435명'. 교전으로 인해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 못지 않게 눈사태로 파묻힌 병력의 수치가 상당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한뼘의 영토도 넓히지 못 했다고 하니...인간의 어리석음이 거대한 자연 앞에 여실히 드러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9장. 바다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1944년 12월 18일) : 미 태평양함대의 수난

다가올 필리핀 전투를 앞둔 미 해군 38기동부대 소속의 132척에 달하는 함선들은 역사상 가장 최악의 태풍 궤도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만다. 그 결과, 항공기 146대와 헐 호, 모니건 호, 스펜스 호 등이 실종되었으며 몬터레이 호, 케이프 에스페란스 호, 알타마하 호, 마이애미 호, 산하신토 호, 카우펜스 호, 알윈 호, 듀이 호, 히콕스 호는 전투 불능 상태에 이르렀다. 또한 790명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얼핏 보면 거의 진주만 공습때의 피해에 맞먹는 수치가 아닐 수 없다(12척의 함선 전투 불능 혹은 침몰, 항공기 188대 손실, 2,400여명 사망). 하지만 이건 순전히 무시무시한 자연의 힘에 의한 피해였다니,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타이타닉'이라는 거대한 여객선의 침몰을 비롯해 해양 재난사고에 대해서는 종종 그 무서움을 듣곤 하지만, 미 태평양함대가 이러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정말 일본 입장으로서는 '카미카제[神風]'를 믿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아무리 최첨단 설비를 갖춘, 위용이 대단한 함선이라 하더라도 태풍이 불어닥친 망망대해에서는 한낱 종이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현대식 장비를 갖춘 전함들도 그러한대, 고대 해전에서의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예측할 수 없는 전황의 두려움은 어느 정도였을지 쉽게 짐작이 갔다.

11장. 삼각주에서의 죽음(1965년 8월 2일) : 베트남 전쟁

이번에는 정글이다. 지금까지 험난한 숲(1장)과 망망대해(2장과 9장), 험준한 산지(7장), 광활한 벌판(4장과 8장) 등이 나왔지만 그에 못지 않게 열대우림 지역 역시 무시무시한 자연환경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저자는 10년 가까이를 베트남에서 보냈다는 얘기를 서두로, 경험에 대한 좋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디엔비엔푸에서 식민지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지 못 했던 프랑스군 7,000명이 포로가 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사실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들이 외면했다고 말이다. 미군 장성들은 프랑스군의 대패에 대해서는 수없이 들어왔지만, 프랑스군이 쓴 보고서도, 보구엔 지아프 장군의 보고서도 읽지 않았다(당시 베트남의 지아프 장군이 그 전투에 대해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상세이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미얀마나 뉴기니아 같은 열대지역에서 정글전을 경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특히 미군이 최첨단 장비를 보유했지만, 베트남에 대한 사전 준비가 부족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바오섬에 기습강하 작전을 나선 미군 부대의 상황을 마치 현장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어, 정글에서의 전쟁이 어떤 느낌인지 더 잘 다가올 수 있었다. 확실히 진창에 습한 날씨,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폭우, 얼마 되지 않은 가시권, 물에 젖어 먹통이 되는 장비 등 정글에서 벌이는 전투는 최악의 조건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베트남 전쟁 역시 앞서 살펴봤던 몇개의 전투처럼 실패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유주의는 지켜지지 못 했고, 베트콩들은 결국 승리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베트남의 기후는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전체적으로 무난하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마지막에 실린 에필로그 '2025년에 기후 지배하기'는 날씨라는 것이 현재 사회와 얼마나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는 기후를 예보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문하는 시대가 왔다는 사실, 군사력 증대 요인으로 기후 지배하기 등 그간 미처 생각하지 못 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었다. 미군 기상전문가들은 미국이 다음 세기 초의 기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 이제는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인간 대 자연의 싸움이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할 정도로 인간의 기후 지배史는 날로 발전하고 있었다.

인위적인 홍수, 대양 해류의 변경, 열대 폭풍의 진행 방향 변경, 대기구멍 내기, 극지방 만년설 범위 팽창, 인위적으로 유도한 지진 등 군사기술로만 쓰이던 기술들이 이제는 전지구적으로 인간이 기후를 지배하는데 쓰이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이 대목에서 <은발의 아기토>라는 일본 애니가 떠올랐다. 인간이 지구를 인위적으로 녹지화시키려다가 그 식물들에게 지구가 먹혀버렸다는 설정이 아주 독특했던 애니다). 예를 들어 2025년경 전 세계의 예상 인구는 90억에 이를 것이라 한다. 하지만 지구 전체의 물 중 마실 수 있는 물은 0.26%에 불과하고, 잘 사는 유럽에서조차 7명 중 1명만이 '건강에 좋은 식수'를 마신다고 한다. 심지어 이스라엘에서는 물 배급이 '국가 안보'에 속하고 군에 의해 통제될 정도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인간은 거의 모든 것을 잘 이용해 왔다.
그러나 신은 여전히 날씨를 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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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위대한 여행
앨리스 로버츠 지음, 진주현 옮김 / 책과함께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읽은 책이기도 하고, 오랜만에 쓰는 서평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소개하는 책이 좋은 책이어서 기분이 좋다. 요즘 '현장이다, 보고서다' 나름 바쁜 관계로 책 1권 완독하질 못 하고 있었는데(개인적으로 한번에 책 3~4권을 동시에 읽어가는 스타일이라서 시간이 없을 때는 미처 완독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마침 '책과함께'에서 좋은 책을 보내주셔서 그간의 나태함(?)을 만회할 겸 작정하고 완독을 했다(물론 이 책을 읽으면서도 다른 2권의 책을 같이 읽어 나가는 바람에 빨리 읽지는 못 했다 -.-;). 

책에 대한 잡설을 몇마디 하자면, 이 책은 BBC 특집기획 다큐멘터리로 방영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류의 책으로는 대표적인 역사 다큐멘터리인 <역사스페셜>을 책으로 묶은 것이 있겠다. 하지만 그 책이 한국사의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주제를 다룬 것에 비해, BBC의 다큐멘터리는 인류의 탄생과 진화에 대한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방송들도 다운받아서 보고 싶었지만(언젠가는 시간을 내서 보도록 하겠다), 그것까지 구해 볼 시간은 없어서 양자(방송과 책)를 비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책이라는 특성상 방송에서 다 못 했던 내용들까지 꼼꼼하게 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책을 딱 받으면 제목 옆에 발자국 한쌍이 찍혀 있고, 제목 주변으로 여러 삽화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뒤에 보면 나오지만, 이 삽화들은 모두 저자인 앨리스 로버츠가 직접 그린 것들로서 중간중간 삽입되어 운치를 살려주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책 표지만 봐서도 일단 흥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물론 고개를 살짝만 돌려보면 책의 두께가 상당해서 순간 움찔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

저자인 앨리스 로버츠는 해부학을 가르치면서 고대 인간의 질병, 해부학, 진화론, 발생학 등에 관심을 두고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인물이었다. 홈페이지(http://www.alice-roberts.co.uk/)도 있어서 한번 들어가 봤는데, 상당히 깔끔한 디자인에 적절한 카테고리까지 한눈에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끔 잘 꾸며져 있었다. 특히 'GALLERY'라는 카테고리를 클릭하면 BBC 방송을 촬영하면서 찍었던 다양한 사진들이 있어서 좋았다. 저자의 사진들이 상당히 많았지만, 그밖에 책에 나왔던 내용과 연관된 사진들도 많이 있었다(물론 책 앞부분에도 원색도판들이 있었지만 여기에는 책에 없는 사진들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방송과 해당 전문분야에서 골고루 활약하는 학자가 많이 없기도 하지만(있긴 있다!), 이처럼 홈페이지를 만들어놓고 대중과 친밀하게 교류하는 사람들 또한 없다는 점에서 '외국과 우리가 정말 많이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역자에 대한 소개도 조금 흥미로웠다.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지금껏 한번도 들어보지 못 했던 분이었다. 이 정도 스팩을 가진 전공자라면 서울대 출신 선생님들 사이에서 한번쯤은 거론되었을 법도한데, 정통 고고학이 아니라 인류학 쪽을 전공해서 법의인류학자라는 흥미로운 직종에 종사하다보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암튼, 책 표지 한장만 넘겨봐도 이래저래 지금껏 읽어왔던 책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점이 더 흥미로웠다.

역시나 책의 시작은 즐비하게 나열된 원색도판들이었다. 지금이야 책을 다 읽은 입장에서 하는 말이지만, 이런 원색도판들이 각 내용과 맞물려 책의 중간중간에 삽입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늘 이런 책을 보면 원색도판은 대부분 앞에 있었던 것 같다(『총 · 균 · 쇠』의 경우 맨 앞에도 있고, 중간에도 있었지만 역시 내용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모아놓고 있어서 보기에는 조금 불편했었다). 그렇게 원색도판들을 살펴보고 목차를 살펴봤다. 목차는 아주 간단해서 딱 5개의 챕터로 이뤄져 있었다. 아프리카 -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 - 북아시아와 동아시아 - 유럽 - 아메리카 등 현생인류의 진출 과정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일단, 책의 내용이 상당하기 때문에 각 챕터의 내용을 세부적으로 논하는 것은 지루하기도 하고 무의미한 것 같기에 각 챕터의 내용 및 필자의 생각은 간단하게 서술하고, 전체적인 책의 총평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먼저 저자는 석기시대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하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아프리카 기원설'과 '최근의 아프리카 기원설', '다지역 기원설 혹은 진화설' 등에 대한 운을 떼고(최근의 아프리카 기원설이라는 것이 있는지 이 책을 보고 처음 알았다), 인류의 계보와 석기의 종류, 빙하기, 각종 자연과학분석법, 유전학 연구 등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일단 딱딱한 도면이나 도판 대신에 가볍게 스케치한 삽화들(인골과 석기를 묘사한)이 있어서 책이 전체적으로 어렵지 않겠구나~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저자 스스로가 '여행'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그 테마에 맞춰 전체적인 내용을 서술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량은 상당히 많지만, 지루하지 않게 저자의 여행에 동참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프리카에서부터 저자의 흥미진진한 여행은 시작한다. 이제는 누구나 현생 인류의 고향으로 아프리카를 꼽는데 큰 이견이 없지만, 여기에서는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는(Out of Africa) 시기가 언제인지, 루트와 방법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국내에 나온 고고학이나 인류학 관련 서적을 보면, 대략의 시기에 대해서는 언급이 있었지만 루트와 방법, 그리고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 남긴 유적 등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고고학, 머리뼈 형태학(아마 원래 용어는 더 멋진 녀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대 환경학, 유전학 등 다양한 연구방법론이 등장하여, 아프리카에 살았던 현생 인류에 대해서 굉장히 생동감있게 묘사하고 있었다. 

그렇게 현생 인류는 플라이스토세의 불안정한 기후 변화에도 해양 자원을 활용하면서 아프리카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에서는 지구 전체에 걸친 미토콘드리아 DNA의 계보도 소개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현생 인류가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상당히 이른 시기에 아프리카 밖으로 진출했다는 내용이 놀라웠다. 물론 여기에서는 유물과 유적이 나온다 하더라도 현대 호모 사피엔스의 인골이 발견되기 전에는 그렇게 단정지을 수 없다고 하고 있긴 하다. 하긴, 사용하는 도구의 변화를 두고 무조건 사용하는 인종의 변화와 연결시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마치 고고자료를 이용해 고대 인종의 세력범위를 밝혀내려 했던 제국주의식 고고자료 해석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이라는 최첨단 과학에 더 주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서는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라고 불리는 호미니드에 대한 내용이 흥미로웠다. 예전에 어떤 책을 보고(정확한 제목이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호빗족과 같은 소인족이 동남아 일대에 살았다는 내용을 보고 엄청 신기해 했던 적이 있다. 이를 두고 호모 속이 아프리카가 아닌 아시아에서 진화했을 가능성(다지역 기원설 혹은 진화론과 관련된 내용)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저자는 분명하게 아니라고 밝히고 있었다. 왜냐하면 DNA 분석 결과, 그렇게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저자의 말에 따르면). 개인적으로 필자는 아프리카 기원설과 다지역 기원설을 동시에 염두에 둘 수는 없을까~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저자가 너무 아프리카 기원설에 집착해 이야기를 서술하는게 약간 불편하기는 했다. 하지만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에 대해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뭐 더 이상의 반론은 하지 않도록 하겠다(추후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긴 했다!!).

암튼, 책의 209~212쪽 부분을 보고 굉장히 재밌긴 했다. 호모 사피엔스뿐만 아니라 호모 에렉투스도 훌륭한 항해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른 시기에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를 나와 아시아로 퍼져 나간 후 여러 지역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다고 주장하는 로버트에 대한 얘기가 그것이었다. 이에 대해 저자는 20~10만년 전에 우리의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나왔다는 화석과 유전학 연구 결과를 들어 반박하고 있었고, 로버트는 유전학 결과를 믿지 않기에 현생 인류는 200만 년전에 기원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이것은 다지역 기원설을 믿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냉소적이면서도 이런 투의 문장이 재밌었다(물론 번역상 이렇게 된 것이지만 원래 문장의 분위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면서 로버트의 말이 더 인용된다. 그는 여전히 아프리카 기원설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들은 영국인들 뿐이며, 저자도 영국인이므로 그런 생각에 세뇌되었다고 극단적인 발언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가 한방 날리는 대목이 나온다. 로버트는 본래 회사원이었다가 뒤늦게 고고학에 입문해 수천개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했지만, 결국 그가 쓴 논문은 자신이 편집하는 학술지에 발표했던 것들이라는 것이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풉~하고 웃음이 나왔지만, 어쨌든 저자는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존중하면서 글을 끝맺고 있었다(아마 로버트도 이 책을 봤으리라). 순간, 한국 고고학계에서 청동기시대를 전공하는 원로 교수님들이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치(절대연대)를 믿지 않고, 유물에 의한 상대편년을 더 중요시하는 것에 대해 젊은 고고학자들이 문제 제기를 했던 것이 떠 올랐다. 자연과학적인 방법론이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지만 인간의 직관에 의존한 연구 방법론과 함께 다 같이 중요시 여겨져야 된다는 점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책은 아프리카 기원설과 다지역 기원설의 차이점, 양자를 주장하는 학자들에 대한 소개를 조금씩 하면서 점점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역이 아시아로 넘어오면 이제 중국의 베이징원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베이징원인은 실종된 뒤 어떻게 됐는지 아직도 미스테리인데, 이 책을 보니 1950년대에 저우커우뎬에서 추가로 베이징원인의 인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내가 놀란 것 이상으로 저자가 그 실물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이 갔다. 중국의 우신즈 교수는 일반적인 중국 학계의 견해대로 호모 에렉투스에서 현생 인류로 진화해 오늘날의 중국인의 조상이 되었다고 주장했고, 역시나 저자는 그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개인적으로 뼈만 갖고 이런 큰 얘기를 하는 것에는 조금 의문이 들긴 한다. 저자 스스로 얘기하고 있듯이 '같은 집단 안의 다양성이 때로는 서로 다른 집단 간의 차이보다 큰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뼈가 다르다 하여 그것을 무조건 다른 집단, 다른 인종으로 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김병모의 고고학 여행 1』을 보면 제천 황석리 고인돌에서 나온 인골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몇개 안 되는 사례를 갖고 일반화를 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특히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저자가 동아시아에는 아슐리안 석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부분이었다. 이를 두고 미국 고고학자 할램 모비우스라는 사람은 1955년에 '동아시아가 문화적으로 수준이 떨어진 변두리'라고 얘기했단다. 왜냐하면 3만년 전 즈음에야 비로소 중국에서 후기 구석기 문화가 확인되고 있으니 말이다. 분명히 중국에도 현대 호모 사피엔스가 살았을 시기에도 1~3만년간 당시 사람들은 단순한 형태의 석기를 사용했던 것이다(이를 두고 우 교수는 중국인이 현지에서 진화한 사람의 후손이라고 얘기하고 있고, 저자도 이에 대해서는 딱히 반박을 마구마구 하지는 못 하고 있다). 이를 두고 저자는 당시 동아시아의 환경상 무거운 석기 이외의 가벼운 목기 등을 사용하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에 석기는 유럽처럼 발달하지 못 했다~라고 보면서 결코 당시 동아시아의 문화 수준이 뒤떨어진 것은 아니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연천 전곡리에서 아슐리안 석기가 출토되어 보고된 바 있으며, 이는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출토된 것임이 이미 공인된 상태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걸 보고 크게 2가지 생각이 들었다. 한국 고고학의 연구성과가 해외에 그만큼 소개가 많이 되지 않아서든가, 한국 고고학의 연구성과가 해외에서 인정을 받지 못 한다든가...이 2가지때문에 이와 같은 내용이 남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거기다가 동아시아의 농경을 언급하면서 청원 소로리 유적이 언급 안 된 것도 좀 신기했고. 어쨌든, 한국 고고학이 아직 세계적인 시각 속에서는 변두리에 머물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유럽의 네안데르탈에 대한 내용 역시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 전체적으로는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이며(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지식은 루치아노 말무지가 쓴 秀作『네안데르탈 아이들 시리즈』와 에릭 트링카우스 등이 저술한『네안데르탈』이라는 책에서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어려운 부분은 없었지만 마지막에 소개된 지브롤터의 유적들은 처음 보는 부분이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기억에 오래 남았다. 유럽의 끄트머리인 지브롤터는 당시 네안데르탈인의 피난처가 아니라 이미 10만 년 이상 살아왔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유럽에서 호모 사피엔스와 대립하던 네안데르탈인이 결국에는 최후의 패배자가 되어 유럽 각지에서 쫓겨난 것처럼 묘사되곤 하는데, 네안데르탈인을 연구하는 클라이브의 경우 이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호모 사피엔스만큼이나 환경에 잘 적응했으며, 해양 자원도 잘 활용했었다. 특히 네안데르탈인 하면 추운 빙하기를 견디어낸 거친 이미지로만 기억하고 있지만, 지브롤터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들은 따뜻한 지중해식 기후를 사랑하던 사람들이었다는 클라이브의 묘사가 충격적이었다. 그와 더불어 체코 공화국의 돌니 베스토니체 유적에 대한 내용도 소개되었는데, 이는 리처드 러글리의『잃어버린 문명 - 석기시대의 비밀』(참고로 언급하자면, 최근에 읽었던 석기시대 관련 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기도 하다)에서도 다룬 바가 있어서 반가웠다. 

저자와 떠난 여행의 종착점은 신대륙, 즉 아메리카였다. 아메리카의 선사문화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것이 클로비스 문화다. 클로비스 화살촉으로도 유명한데, 저자는 클로비스 문화보다 이른 시기의 유적들을 소개해주고 있었다. 특히 칠레의 몬테베르데에서는 초가집과 집 외부의 화덕 등이 확인되었으며, 1만 4천년 전 그 지역 사람들이 먹었던 야생 감자의 존재도 확인시켜 주었다. 이 유적은 1만 4600~1만 4000년 전의 것으로서 클로비스가 최초의 아메리카인이라는 주장이 완전히 틀렸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단순히 시베리아와 알래스카가 연결된 베링지아를 건너 북아메리카에서 남아메리카까지 인류가 이동했을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북대서양을 따라 북미 동북방에서 인류가 이동했을 가능성을 언급한 브루스 브래들리의 의견도 소개하고 있어 참신했다. 정말 신자료가 지속적으로 나오면서 기존의 이론들에 금방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총평을 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먼저 스케치한 듯 러프하면서도 간결한 삽화와 도면, 저자가 스스로 그린 삽화들이 상당히 이색적이었고, 독자로서 받아들이기에 부담이 없어서 좋았다. 고고학 서적하면 왠지 정교한 도면(솔직히 전세계적으로 정교한 유물-유구의 도면을 남기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 뿐이다. -.-;)과 다양한 도판들이 덕지덕지(?) 있어야만 할 것 같은데, 이 책에서는 오히려 그런 기대(?)와 달리 가벼운 사진과 삽화들을 집어넣었다. 전체적인 내용에 비해 그런 부분들이 좀 적은 것은 아니었나~싶기도 하지만 책의 내용이 어렵지 않고 답답하지 않아 큰 상관은 없었던 듯 싶었다.

그 다음으로 어렵지 않은 서술(아마 이건 역자의 공로가 상당히 크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어를 자연스러운 자국어로 100% 바꾼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니깐)과 부드러운 문체, 종종 던지는 의문형 문장과 다양한 가능성 속에서 합리적인 논지를 이끌어가는 방식 등이 마음에 들었다. 예전에 마틴 존스가 쓴『고고학자, DNA 사냥을 떠나다 : 인류의 비밀을 밝히는 최첨단 고고학(The Molecule Hunt)』라는 책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책에 비해서 훨씬 이해하기 쉽고 더 재밌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여행이라는 테마와 접목한 데다가 방송용으로 제작된 내용에 기반한 책이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어쨌든 더 재밌고 흥미로운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최신 연구 성과들을 최대한 소개하고 있어서 가장 좋았던 것 같다. 물론 학술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중간중간 꼼꼼하게 참고문헌과 각주를 달아놓고 있어서 필요할때 찾아볼 수 있기에도 좋았다. 인류의 탄생과 진화, 석기시대에 대해서는 필자의 전공분야가 아니라서 어디까지나 개설적인 내용만 숙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음으로써 기존의 낡은(?)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꺼운 책인만큼 그 안에 담긴 내용 또한 상당히 유익한 것들이 많아서 이번에 후배들에게도 이 책을 읽으라고 추천했다(특히 1명은 석기를 전공하고 싶어하고, 다른 1명은 선사시대에 관심이 많은 녀석이다).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책과함께' 출판사에 감사드리며...이만 글을 줄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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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 태양의 화가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7
파스칼 보나푸 지음, 송숙자 옮김 / 시공사 / 1995년 2월
평점 :
품절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전질 구입후 두번째 읽는 책이다. 읽은지는 한참 됐는데도 이제서야 간략하게나마 서평을 쓰는 건 순전히 필자 본인의 게으름 때문이다. 먼저 서평을 쓰기 전 좀 부끄럽지만 웃긴 일이 하나 있어서 잠깐 소개하고 넘어가자.

이 책의 원제는『Van Gogh, le soleil en face』이다(외국 번역서의 원제를 살펴보는 건 종종 필자 개인적인 기쁨이다). 처음에는 이걸 보고 '음~soleil은 태양같고, face는 얼굴일텐데, 무슨 뜻이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저자의 약력을 보니 파스칼 보나푸는 작가이자 미술사학자로서 '서양화에서의 자화상'이라는 주제로 연구를 실시해 지금까지 초상화에 대한 여러 저작을 남겼다는 설명이 있었다. 그래서 '흠. face가 들어가는 걸 보니 초상화 혹은 자화상 어쩌구 하는 제목인가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네이버에  'le soleil en face'라고 치니 다음과 같은 번역이 검색됐다. '태양을 마주하며' ... 음 (순간 정적)... '그래! 외국어는 배워야만 해.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되뇌이면서 조용히 책장을 하나씩 열었다. -.-;

사실 이 책을 읽기 전 반 고흐에 대해 알고 있는 필자의 지식은 거의 밑바닥 수준이었다(T.T). 네덜란드 출신의 인상파 화가에, 정신이상으로 자기 자신의 귀를 자르기도 했고 결국 자살한 화가, 훗날 야수파(포비슴) 화가들에게 모티브를 제공했다는 정도? 그리고 반 고흐의 그림 중에서 아는 것도 몇 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반 고흐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일단 이 책은 반 고흐에 대한 작품 설명뿐만 아니라 반 고흐의 전기에 대해 나름 소상하게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반 고흐 평전' 정도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번 해 본다. 일단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참고로 네이버를 검색하면 그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  클릭)

그럼 책을 읽으면서 몰랐던 부분이나, 깊은 감명을 받은 점 등을 설명하는 것으로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1. 반 고흐의 영원한 동반자, 동생 테오

일단 반 고흐의 인생에 있어 그의 동생 테오가 그렇게 중요한 존재였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테오는 약간 과격하며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형을 언제나 잘 보살폈으며, 형의 병수발은 물론 형이 그림을 그리면서 예술혼을 불태우는데 있어 물적 · 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혼하고 나서도 동생의 형에 대한 사랑과 지원은 그칠 줄 몰랐는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동생이 있었기에 형은 어떻게 보면 뻔뻔하게 계속 생활비와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물품을 살 돈 등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고, 둘 사이가 멀어져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도 다시금 동생에게 의지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반 고흐는 1872년 8월부터 세상을 뜰 때까지 편지를 굉장히 많이 썼는데, 네덜란드어, 영어, 프랑스어로 쓰인 편지 중 668통은 그의 친구이자 동반자였던, 그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것들이라고 한다. 그는 편지에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 혹은 구상 중인 그림의 스케치를 그려넣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삽화를 그린 엽서에 편지를 쓰기도 하는 등 동생에게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얘기하고, 그와 생각을 공유하고자 노력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반 고흐가 있기까지는 그의 동생 테오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종교적 신념과 예술적 혼

반 고흐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목사였으며, 반 고흐 역시 어릴때부터 신앙심에 의지하는 젊은이였다.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던 그였기에 그는 화랑에서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성직자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암스테르담 신학대학에 낙방하고 브뤼셀 복음학교에서도 자질이 부족하다는 결정이 내려져 평신도로서 전도활동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러다가 광부들이 모여사는 보리나주로 떠나게 되었고, 이곳에서 그는 최하층민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오두막에서 지내며 전도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괴팍한 성격이 종교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는 전도사의 길을 걸을 수 없게 되었고, 곧 그는 자신과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을 그림으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그의 그림 인생은 순전히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가 만약 원하던대로 성직자의 길을 제대로 걸었다면, 과연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일을 계속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가 성직자가 되지 못 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것이 곧 그림그리기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성직자가 되기에는 부족했던 그의 성정은 고스란히 화폭에 전해지게 되었고, 그의 신앙심과 그의 성격이 그대로 스며든 것이 바로 <어깨에 삽을 메고 있는 사람>, <채탄광>, <귀가하는 광부들>과 같은 작품으로 이어진 것이다(솔직히 브뤼셀 복음학교가 반 고흐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은 그의 그림에 대한 몰두가 아니라, 그의 지나친 자기희생 정신과 격정적인 성격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인습을 아랑곳하지 않는 광기어린 성격을 학교 당국은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서가 있는 정물>과 같은 그림을 지속적으로 그리면서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종교계에서 이단아처럼 취급받은 그에게 고독은 곧 더 강한 신념으로 대체되었으며, 반복되는 스케치를 통해 스스로 자신을 가두었던 혼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3. 반 고흐의 다양한 스타일과 계속되는 혼란

그의 초기 작품은 렘브란트와 밀레, 할스와 같은 어두운 풍이었으며, 그림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 했던 그는 이후 라파르트나 안톤 모베와 같은 화가를 만났지만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해나갔다(모베는 당시 모든 미술학교에서 사용하던 고전적인 석고상을 반 고흐에게 그리기를 권유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했고 두 사람의 관계는 결렬됐다). 그는 초창기에 색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펜을 이용하여 단순한 스케치 위주로 습작을 그려나갔다. 그러다가 점점 수채화 기법을 연습하기 시작했고, 후에는 갈대로 만든 펜을 이용해 좀 더 세부적인 선을 표현하기도 했다(실제 저자가 책에 순서대로 소개한 반 고흐의 작품을 보면, 그림 실력이나 색채, 표현기법 등이 눈에 띄게 발전하고 달라지는 것을 독자가 느낄 정도이다). 그러면서 그는 풍경화를 그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인물에 계속 주목하게 된다. 

그러면서 1882년 반 고흐는 색채감에 집중하게 된다. 밀레가 1857년에 그린 <만종>같은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1883년에 <토탄을 채취하는 여인들>이라는 작품을 완성했다. 양자의 모티브는 동일하지만, 보다 어둡고 거친 선으로 표현된 반 고흐의 작품은 <만종>에서 느낄 수 있는 평화롭고 성스러운 느낌이라기보다는 억척스럽고 역경을 이겨내는 의지가 엿보이는 그림이다. 뒤이어 그가 완성한 <누에넨 농촌여인의 얼굴>, <바느질하는 농촌여인> 등은 굵은 선과 거친 색채감 속에 어두움이라는 주제가 잘 반영된 작품이었다. 뒤이어 오두막 내부의 어두움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의 표현과 행동 하나하나에 구체화을 부여하려 했던 그의 작품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라파르트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기까지 했다(동시대 문화사조와 많이 달랐던 것 같다). 물론 반 고흐는 그의 비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루벤스의 작품을 접하면서 '매우 단순하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 좋겠다. 그림, 특히 스케치가 보여주는 기법의 단순함은 거침없이 흐르는 손놀림에서 비롯된다.'라고 평가하고 그의 본보기로 삼았다.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인 거장이었던 루벤스는 타오르는 듯한 색채와 세부묘사로 생동감을 전해주는 작품을 많이 그렸다(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알고 있다. 잘못됐다면 체크 부탁! ^^;). 이는 한눈에 봐도 반 고흐의 기존 작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이라는 것을 미술작품에 문외한인 사람이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인상주의를 접하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이용한 색채와 색감을 중시한 인상주의를 접한 그의 작품은 점점 변하기 시작한다. 널리 알려진 1888년작 <빈센트의 침실>이라든가, <해변가의 고기잡이배>와 같은 작품은 이전에서 볼 수 없던 화려하고 눈부신 느낌을 강렬하게 주는 작품들이었다. 그렇게 그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또 다른 화가 고갱과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그 와중에 <해바라기>, <우체부 롤랑>을 비롯한 몇 점의 <자화상>을 그리게 된다.

이후 그는 자신의 귀를 자른 후 자화상을 그리기도 하고, 점점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狂人이야말로 남들이 모르는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는 것인지, 그의 예술혼이 절정에 다다를 시점에 그는 정신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이후 생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에 들어간 그는 거기에서도 여전히 밝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그려낸다. 그 와중에 그린 것이 1889년 9월에 그린 <별이 빛나는 밤>인데 개인적으로 필자가 반 고흐의 그림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그가 화풍이 변화한 다음 그린 몇점 안 되는 어두운 분위기의 그림인데, 그 와중에서도 어둠 속의 불빛이 잘 표현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그가 빛의 양면성을 잘 표현하면서 뭔가 득도한 듯한 느낌이 나는 그림이기도 하고, 그의 과거 화풍과의 접점에 서는 그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정점에 선 사람이 할 일이라곤 내려오는 것 밖에 없다고, 그가 곧 죽을 운명에 처하면서 이런 그림 속에 자신의 심정을 담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 본다.

4. 지극히 인간적이어서 원초적이기까지 한 화가

반 고흐의 꿈은 애초에 성직자였다. 가족의 전통이기도 했지만, 그 자신의 신앙적 정열의 표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당시 사회의 관습에 어울리지 못 하고 그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 그가 새롭게 뛰어든 미술계에서도 당대의 그에 대한 평가는 그리 후하지 못 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성격에 기인한,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매일 생필품을 구할 걱정을 하는 무직자였으며, 자신의 그림을 비판하는 사람과 결렬하는 옹고집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으며, 자신이 싫어하는 화풍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격을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매일 자기를 위해 헌신하는 테오의 고마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끊임없이 지원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친하게 지낸 고갱에 대한 불만을 테오에게 편지를 써서 뒷담화를 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정신착란과 예술적 정신 등이 뒤엉켜 자신의 귀를 자르고 자화상을 그리는가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 미술작품에 대해 얘기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캔버스에 옮기기도 했다(마치 최근에 방영한 미드 <프린지>에 나오는 월터 비숍 박사와 같은 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가 자신의 복부에 총을 쏘고 자결하기까지...그는 분명 남들이 알지 못 하는 말 못할 고민도 많았을 것이며, 무수한 고뇌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생활관을 만들어냈던 것 같다. 

그런 인간적인 면은, 그를 더 원초적이게끔 보이게 했고, 그런 점은 그가 사회와 동떨어지게 하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사회와 격리된 듯한 그의 이러한 생활 속에서 그는 오히려 캔버스 위에 남들과 다른 독창적인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879점의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해 몇마디 더 하자면, 책 맨 뒤에(늘 그렇듯이 올칼라 화보가 실린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의 맨 뒤에는 흑백으로 따로 챕터를 마련한 공간이 있다) 그가 동생 테오와 나눈 편지 몇편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어 반 고흐의 인간성(?)에 대해 더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생활했던 공간을 사진으로 실은 것도 좀 신선했다. 왜냐하면 본문 중에 그가 자신이 머물렀던 숙소나 몇몇 건축물(건물이나 다리 등)을 스케치든, 수채화든 화폭에 담은 것들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실물과 그림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었고,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지나치는 공간에 과거 반 고흐의 숨결도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직접 가서 보고 느끼면야 더 좋겠지만, 지금은 일단 책으로라도 감상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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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 잃어버린 도시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6
클로드 보데 지음 / 시공사 / 1995년 2월
평점 :
품절


시공 디스커버리 전질을 사고, 처음으로 책을 읽었다(이노무 게으름). 이번 주제는 필자 개인적으로 많이 접하지 못 했던 '마야'에 대한 것이었다. 마야하면 딱 생각나는 것이, 아즈텍과 같이 중미에서 존속했던 고대 문명이라는 것, 인신공양과 희생, 거대한 피라미드를 가진 문명, 수많은 소국들이 난립하며 경쟁하던 문명...뭐 이런 것들일 것이다. 또한, 마야 문명은 멜 깁슨의 <아포칼립토>에서 나름 잘 소개된 적도 있었는데, 몇권의 세계사 책에서 본 것 말고(예를 들면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와 같은 책), 마야에 대한 전문 연구서는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이번에 읽은 책은 필자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 

먼저 이 책의 성격을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이전에 소개했던 총서 2권『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와 비슷하다. 그 책에서도 이집트史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기 보다는 이집트사가 다시 세상에 어떻게 알려졌고, 근-현대를 거치면서 이집트가 어떻게 복원되고, 연구되고, 약탈당했는지 등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번 책에서는 마야가 그 주인공이었다(개인적으로 이집트의 경우, 마야보다는 접했던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큰 상관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마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던 차라 다소 아쉬웠다). 그럼 책 얘기를 좀 해 보기로 하자.

일단, 이 책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잃어버린 도시'라...전세계적으로 쇠퇴한 이후 사라지고, 그 역사를 알려주지 못 한채 파묻혀있는 도시가 얼마나 많겠느냐만은 아메리카의 고대 문명만큼 이런 표현이 잘 어울리는 것도 또 없을 것 같다. 남들은 말타고 철기를 사용하면서, 한참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기 위해 발버둥치던 시기까지 석기를 쓰고, 수레(장난감으로는 썼지만)나 말도 사용하지 않고, 그들 고유의 전통을 지키면서 천년이 넘는 시간을 지내왔다는 것이 정말 신비하고 이상하기까지 할 정도다. 더군다나 마야의 여러 도시유적들은 각 도시국가들의 지나친 대립(전쟁과 노예확보, 인신공양, 거대한 피라미드와 신전 축조)과 각종 이상기후(가뭄, 농경 실패 등)와 맞물리면서 버려지고, 쇠퇴하고,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지지 않았는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고대국가의 멸망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 또한 우리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싶다.

마야 문명과 외부인의 첫 만남은 상당히 흥미롭게 진행된다. 콜럼버스가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착해 이 곳을 서인도제도라고 굳게 믿은후 9년이 흐르고...자마이카 해안을 따라 표류하던 유럽인들은 마침 신에게 바칠 희생양이 필요하던 인디오들에게 좋은 제물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중 대부분이 죽고 딱 2사람이 살아남았는데, '게르니모 드 아길라르'는 족장에게 온갖 충성을 바쳐 노예로 살아남았고, '곤잘로 게레로'는 전사가 되어 부족 간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대장이 되었고, 원주민 여성과 결혼하여 철저히 그들과 동화되었다. 마치 동방 끝자락에 위치한 미지의 나라 조선에 와서 한문 이름도 새로 받고, 현지처를 얻어 살았던 몇몇 유럽인이 생각났다. 그렇게 보면 거리상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유럽과 미지의 세상이 만날 수 있는 한줄기 연결고리는 일찍부터 존재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곧 스페인에 대한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뭐 이미 유명한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이끌고 온 원정대는 노예사냥과 황금광산을 찾기 위해 유카탄 반도에서부터 시작해 내륙으로 약탈권을 넓혀 나갔다. 그의 원정대가 귀국한 이후에는 쿠바 총독이었던 '디에코 벨라스케스'가 자신의 조카 '후안 데 그리할바'에게 군함 4척과 장정 200명을 주고 황금을 찾아오라고 지시했으며, 참포톤이라는 곳에서 스페인군은 현지 인디오에게 패배를 하게 된다. 이윽고 아즈텍과 마야 문명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스페인은 더 강력한 원정대를 조직해 그들을 정복하기를 열망했다. 탐욕스러운 벨라스케스 총독은 그의 충성스런 부관 '코르테스'에게 멕시코 명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그리고 1519년 2월 18일, 코르테스는 11척의 군함에 508명의 병사와 말 16필을 싣고 원정을 떠난다. 그리고 2년 뒤에 아즈텍 제국은 코르테스에게 멸망당한다(참 이런거 보면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수백년간 존속하던 거대 국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 말이다). 

하지만...스페인이 유카탄 반도 전체를 차지하는 데에는 이후 20여년이라는 시간이 더 소요됐다.

1521년 8월 13일, 아즈텍의 수도는 시체와 폐허의 더미에 불과했으며, 1523년 멕시코 서부와 남부가 스페인에게 정복되었다. 1525년, 코르테스는 140명의 병사와 3,000명의 인디오 전사 및 짐꾼, 150마리에 이르는 말과 돼지 및 각종 군수품을 싣고 온두라스를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무려 6개월에 걸친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1546년, 스페인은 유카탄 반도 북쪽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거느렸던 투툴 시우를 굴복시켰다. 그리고 1696년 이트차 호수의 가장 큰 섬에 타야살이라는 수도를 건설하고 세력을 떨치던 이트차족이 스페인에게 굴보가였다. 중앙아메리카가 스페인에 의해 급속하게 정복당하던 시기 이처럼 몇몇 도시들은 17세기 말엽까지도 저항을 계속 했다. 그동안 마야 문명에 대해서 아즈텍 문명보다 덜 중요하게(?) 취급했던 것이 사실이며, 그들의 역사에 대해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아즈텍 제국이 스페인에게 굴복하면서 중앙 아메리카 지역도 자연스레 스페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직 현지 주민들은 새로 들어온 외부인들을 환영하지 않았고, 그들 스스로의 삶과 전통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복과정 속에서 밀림 속에 버려졌던 마야 문명의 거대한 건축물에 주목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첫번째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사려 깊은 민족지학자이자 동시에 냉정한 종교재판관이었던 '디에고 데 란다(1524~1579)'였다. 1535년 최초로 이곳에 도착한 프란체스코회의 사제들이 마야의 우상을 파괴하고, 신전을 불사르고, 원시 제전이나 희생 의식을 치르는 자들은 극형에 처하고, 원주민의 전통적인 문화를 파괴했던 것과 달리 란다는 마야 문명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지만은 않았다. 그는 마야 문명과 용기, 절제, 의지, 서로 화합하는 기독교적 미덕을 보여준 원주민들을 찬사했으며, 그를 선진문명의 창조자로 인식하였다(영화 <콜럼버스> 등을 보면 당시 스페인인의 악랄한 모습이 잘 묘사되는데, 그래서인지 란다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정말 의외였다). 하지만 란다가 둘러본 버려진 도시 유적은 정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것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유럽인에 의한 마야 문명 탐험기가 시작된 것이다.

1746년, '안토니오 데 솔리스' 신부는 형제들과 그들의 아내, 여러 명의 조카를 이끌고 팔렌케의 산토도밍고에 도착해 마야의 환상적인 석조 건축물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솔리스 신부는 '라몬 오르도네스'에게 팔렌케의 유적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는 과테말라 총독이었던 '돈 호세 에스타체리아'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리고 총독은 1784년 지방 관리였던 '호세 안토니오 칼데론'을 부랴부랴 팔렌케에 급파한다. 그리고 행정관리였던 그는 거기에서 18개의 궁전과 22개의 장대한 건축물과 168채의 가옥이 포함된 220개에 달하는 건물의 목록을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한다(놀랍지 않은가? 18개의 궁전과 168채의 가옥이라니...수백명의 주민이 거주했던 거대한 도시가 발견된 것이다!). 그러자 이듬해 총독은 건축가인 '안토니오 베르나스코니'를 다시 팔렌케로 파견한다. 마치 일제강점기 당시 건축가와 화가로 구성된 전문 현지조사팀이 한반도 각지에서 연구활동을 벌인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작성된 연구보고서가 당시 세계적으로도 수준급이었던만큼, 이 무렵 스페인에 의해 작성된 보고서 역시 이후 마야 문명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점점 중앙 아메리카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일단 스페인 왕 샤를 3세가 중앙아메리카의 유적과 유물을 보고 싶어했고, 베르나스코니가 죽고 난 다음 새로 과테말라 총독이 된 '안토니오 델 리오' 대위는 조직적으로 유물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델 리오는 '이런 우수한 문명을 미개한 현지 원주민들의 선조가 창조해 냈을리 없다~이는 고대 로마인이 우연히 이 곳에 도착해 전수해 준 것이다.'와 같은 제국주의 유럽인들이 늘 언급하는 과대전파론적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후 새로운 스페인 왕이 된 샤를 4세의 명을 받고 '기예르모 뒤페' 대위가 멕시코를 방문한다. 그는 1805~1807년 사이 3차례에 걸쳐 고고학적 탐사를 실시했고, 그때 동행한 멕시코 출신 삽화가 '루시아노 카스타녜다'는 각지에서 훌륭한 삽화들을 그려 오늘날까지 남게 되었다. 그는 이전까지 작성된 삽화에 비해 훨씬 우수한 작품들을 남겼지만, 아직까지도 삽화 곳곳에는 화가의 상상력이 동원된 흔적이 역력했다. 즉, 19세기 초만 해도 마야 문명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은 존재하지 않았단 뜻이다. 이후 멕시코 일대의 유적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게 되었고, 1828년 프랑스의 '앙리 바라데르'가 뒤페와 카스타녜다의 자료를 접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윽고 멕시코 일대의 유적에 대한 각종 저서가 출간되면서 당시까지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된 이집트와 인도의 고대문명만큼이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봤을때 여러 학자들의 논문에서 근거자료로 활용된 자료들을 작성한 뒤페는 당시까지 중미 고대 문명을 연구한 사람 중 가장 분별력이 높고, 학구적 열망이 높았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1827년 중앙아메리카 연방에서 일하던 '후안 갈린도'는 코판에서 한달 넘게 머물면서 각지의 건조물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스케치를 남기게 되었다. 그의 연구성과는 당시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컸던 파리 지리학회에도 여러번 소개될 정도였으며, 그는 중앙 아메리카 각지의 보고서와 함께 지도까지 작성했다. 하지만 마야 발견의 위대한 예술가이자 최후의 위대한 탐험가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은 뭐니뭐니해도 '장 프레데릭 막시밀리안 드 발덱' 백작이었다. 100살이 넘은 나이에도 70대의 모습을 유지한 그는 정열적인 탐험가로 세상 모진 풍파를 다 겪은 인물이었던 그는 경력도 화려했다(물론 일부 뻥도 좀 포함되었을 듯). 그는 희망봉을 탐험했으며, 42차례나 혁명운동에 참가했고, 프랑스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가했는가 하면, 사략선을 타고 인도양에서 해적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그는 19세기 전반부에 크게 활동했으며, 마야 문명과 힌두, 헤브루, 그리스, 이집트 문명과의 연관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멕시코에서 무려 11년을 보낸 그가 남긴 유카탄 반도의 아름다운 삽화들은 이후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19세기 초중반이 되면 이제 마야 문명은 낭만주의 예술가나 탐험가가 아닌 진정한 학자들의 연구대상으로 변모하게 된다. '존 스테판스'는 이미『이집트, 아라비아, 페트레아와 성지 여행기』,『그리스, 터키, 러시아, 폴란드 여행기』를 써서 유명했는데, 어느날 발덱 백작이 쓴『유카탄 지역의 진기한 여행』의 복사본을 발견하고 3번째 책을 기획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런던에서 만난 젊은 건축가 '프레드릭 캐서우드'와 함께 중앙 아메리카로 떠난다. 그 둘의 결실은 1841년『중앙아메리카, 치아파스, 유카탄 여행기』로 출간되었는데 이 책에서 고고학적 서술은 1/3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험담으로 가득했다(어쨌든 책은 대성공이었다). 당시 캐서우드의 예술적 정확성은 스테판스의 엄격한 서술방식에 잘 부합하면서 당대의 새로운 기준을 설정했지만, 여전히 삽화에 있어 어느 정도의 상상력은 가미가 되었다. 암튼, 그들이 1842년에 출간한 책은 무려 44곳의 유적지에 대한 고고학적인 내용과 삽화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책은 19세기 내내 매년 재판을 찍을 정도로 호황이었다. 그만큼 스테판스가 마야 고고학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또 다른 시각으로 넘어간다. 지금껏 마야의 도시 유적(건축물이라든가, 도시 그 자체라든가) 혹은 마야인들의 문화와 풍습이 주된 관심사로서 연구되었다면 이제는 마야의 고문서가 주인공이다. 마야 문헌은 크게 세 종류인데, 마야의 상형문자로 쓰인 필사본과 스페인 정복 이후 토착민이 쓴 것을 라틴 문자로 번역한 것, 스페인 정복자들과 사제들 혹은 관리들이 쓴 연대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중 주목되는 것이 바로 첫번째 정복 이전 마야인이 남긴 그들 고유의 문자기록들이었다. 현재 마야인의 기록은 3개의 사본만이 남아 있는데(4번째 사본이 최근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첫번째는 1739년 드레스덴 왕립 색슨 도서관장이었던 요한 괴체가 빈을 여행하는 동안 구한 '드레스덴 고문서 사본'과 1815년 옥스퍼드 대학에 재학 중이던 에드워드 킹, 즉 젊은 킹스버로 경이 수집 및 재정리한 '킹스보러판'이다. 두번째는 1859년 동양학과 아메리카학을 연구하던 젊은 연구자였던 프랑스의 레옹 드 로스니가 파리 국립도서관 휴지통에서 발견한 '페레시아누스 사본' 혹은 '파리 사본'이며, 세번째가 바로 브라쇠르 드 부르부르 신부가 어렵사리 찾아낸 '치말포포카 고문서'였다. 특히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인디오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언어와 역사, 문화에 대한 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여기에서 내용은 다소 뒤에 나오는 부분이지만, 고문서에 대한 연구는 이후 마야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각종 기록과 삽화, 고문서 등이 연구되면서 마야 문명에 대한 전모가 하나둘씩 밝혀지던 그때 새로운 발명품은 마야 역사연구에 새로운 전환점을 불러 일으켰다. 그건 바로 1839년 8월 은판 사진술이 출현한 것이었다. 이미 앞서 언급한 스테판스와 캐서우드도 사진기를 동원한 적이 있지만, 흡족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 결국 삽화로 대체하였고 초보적인 사진술은 환영받지 못 했다. 하지만 스테판스의 책을 읽고 감명받은 '데지레 샤르나이'는 1858년 멕시코로 떠나 47장의 사진과 사진 석판 2본을 첨가한 커다랗고 값비싼 사진집을 작성하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2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사진가이자 고고학자로 활동했던 그가 새롭게 시도한 것은 사진술 말고 하나가 더 있었으니 그건 바로 주형을 뜨는 것이었다. 샤르나이는 영국의 젊은 신사 '알프레드 모슬레이(그 역시 스테판스의 저작을 보고 이 일에 뛰어들었으니, 그가 남긴 업적이 어느 정도였는지 재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의 후원을 받아 각지에서 건축물의 주형을 뜰 수 있었다. 솔직히 이 주형을 뜬다는 것은 그렇게 익숙치가 않았다. 일제강점기때에도 유물이나 건축물을 직접 반출해가는 경우는 있어도 주형을 뜨는 경우는 별로 없었는데 이는 아마도 우리 고대문화에 있어 부조나 조각 등을 많이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암튼 당시 유럽에서는 이 방법이 크게 유행한 것 같다.

이윽고 1884년 '테오베르트 말러'에 의해 치아파스와 우수마신타 계곡, 페텐에 산재한 소규모 유적들과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유적들(피에드라스 네드라스와 나란호와 같은)이 조사되는가 하면, 이들 연구성과가 전시회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는 등 마야에 대한 연구는 갈수록 활발해졌고, 그렇게 시간은 20세기 초반으로 넘어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보남파크의 화려한 벽화유적이 발견된 것은 1946년이었다. 사진작가 '질리 하르'는 지금까지 아무도 확인하지 못 했던 새로운 유적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학계의 큰 이슈로 자리잡았다. 왜나하면 벽화의 내용은 지금까지 마야 문명에 대한 인식을 100% 뒤집어놓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잔인한 고문장면과 참수형, 희생의식, 전쟁과 노예사냥 등 폭력적이면서도 원시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마야인을 온순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수준높은 문명인이라고 언급하길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루스'는 본격적으로 제대로 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거대한 피라미드와 비취로 만든 화려한 부장품들이 파묻힌 티갈의 분묘유적 등이 발견되면서 마야 문명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덧붙여 마야의 상형문자에 대한 해석 및 연구도 급진전을 이루게 되었고, 20세기 중반까지도 잘못 알고 있던 마야인에 대해 이제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조금씩 하게 된 것이다. 

이상으로 책에 대한 소개는 마치도록 하겠다. 필자가 전체적으로 시기별로 마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사람들을 주욱 나열했는데, 이는 일단 필자 스스로가 마야 문명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특히 마야史보다는 마야 문명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과정, 硏究史가 흥미롭기에 좀 주절주절 떠벌린 것이 있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의 업적(업적이 아닌 것들도 더러 있지만)이 정말 200년 남짓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것도 재밌었다. 더 나아가, 그 200년간의 업적은 최근 수십년동안 얻은 업적에 비한다면 아주 작은 것들에 불과했으며, 인류는 비로소 최근에 와서야 제대로 마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로웠다. 마야인이 본능적이며, 폭력적이며, 오만한 민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 불과 60여년 전이라니. 

그리고 책 뒷면에는 늘 그렇듯이 원서로만 접할 수 있는 그런 자료들의 단편이나마 소개되어 있었다. 앞서 언급한 스테판스나 갈린도의 보고서 혹은 책의 내용 일부, 레옹 드 로스니의 상형문자 연구성과, 그리고 마야의 20진법 및 그들의 상형문자를 이해하는 최근의 연구성과와『포폴 부』라는 현전하는 마야-키셰족의 경전에 나오는 그들의 신화 등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당시 유럽인들이 그린 여러 삽화들을 다수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고대 이집트를 묘사한 삽화도 많지만 이 책에서는 특히 삽화의 변천에 대한 이야기도 상당한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즉, 애초의 삽화와 지금의 삽화, 마치 3D로 복원한 듯한 선명한 최근의 모습까지를 비교하고 있으며 각 삽화를 남긴 사람들의 잘잘못까지 언급하고 있었다(예를 들면 상상력이 많이 가미되었다든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수준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점 등). 또한 이집트의 상형문자와는 또 다른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마야의 상형문자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위해 삽화가 다수 삽입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거기다가 내용 중후반부에 사진술이 발견되면서 마야 문명 연구에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내용 기술과도 어느 정도 잘 부합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마야 유적지를 찍은 흑백사진 몇장과 최근의 컬러사진 몇 장이 전부이고, 대부분은 삽화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어디 인터넷서점 서평을 보니 이 점을 단점으로 꼽던데, 필자는 오히려 색다르고 책의 구성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점은 그만큼 오늘날도 마야에 대한 최신의 연구성과가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우리가 마야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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