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김성남 지음, 이용규 그림 / 수막새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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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볼까.
일단 오늘은 오랜만에 재밌는 전쟁사 관련 책을 소개할까 한다.
필자가 저자한테 책을 받아보고 한번 대강 훑어본 결과, 느낀 첫 소감은 ‘괜찮다~(요즘 유행하는 개그맨 버전처럼)’라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미 수막새에서 출간하는 세계전쟁사 시리즈 첫 번째 책인『전쟁으로 보는 한국사』를 내놓은 바 있는데 그로부터 벌써 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사이 저자의 책은 업그레이드(?)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단 두 권의 책을 나란히 놓고 보니 표지부터 더 세련된 것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단순하면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디자인을 선호하다보니 그렇게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책 왼쪽 상단의 ‘魏, 蜀, 吳’가 도안화된 것을 보고 확실히 느꼈다. 이전보다 책의 비주얼적인 면모가 많이 발전했을 것 같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그럼 서두는 이 정도로 하고 일단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저자는 전쟁사를 전공하고 있는 국내의 몇 안 되는 그야말로 ‘전쟁전문가’이다(필자의 개인적인 바람도 그렇지만 암튼. -.-;). 그리고『삼국지』에 대해 저자는 과감하게 말한다.

‘『삼국지』가 과연 영웅들의 낭만적인 이야기일까?’

저자는『삼국지』(혹은『삼국지연의』)에서 우리는 흔히 영웅들의 이야기에 열광하고, 영웅들의 지략과 전략 등에 환호하면서 정작 그 영웅들이 수행하는 전쟁의 실질적인 주인공들(병사와 민중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이 시기는 춘추전국시대 못지않은 혼란기였음에도 낭만적인 영웅호걸들의 무대로만 생각하는 것 또한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삼국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영웅들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성격에 주목하는 것도 좋지만 그들이 수행한 전투 및 전쟁에 대해서 심도 있게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혼란기였던 당시를 더 잘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필자는 적극 공감한다. 지금껏 삼국시대에 대해 수많은 전투와 전쟁이 있었고, 그 중심에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있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지만 정작 전투와 전쟁 그 자체에 주목한 연구자 혹은 마니아들은 적었던 것 같다. 항상 유명한 전쟁에는 그 전쟁에서 활약한 천재적인 지략가나 뛰어난 무용을 자랑하는 무장들이 언급되었을 뿐, 당시 시대상황(정치, 경제, 사회 등등과 연관된)과 연결시켜 전쟁을 이해하지는 않았었다(대표적인 예로 그 유명한 ‘적벽대전’을 언급할 때 우리는 흔히 제갈량의 화려한 언변과 방통, 주유 등이 펼치는 지략 싸움을 떠올리며, ‘관도대전’을 언급할 때는 안량과 문추를 단칼에 베어버린 관우의 무용을 떠올린다. 필자 역시도 그러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지만 이 정도 집필의도를 갖고 책을 썼다면 필자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책장을 하나 둘씩 넘겼다.

일단 책의 분량은 이전의 책과 큰 차이가 없었고, 중간 중간 삽입된 도판들이 많았기 때문에 읽는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먼저 예전에 필자가 저자의 책에서 꼽은 세 가지 특징들이 여기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1. 시대별로 역사를 구성하지 않고 몇몇 테마별로 단락을 구성함

2. 역사스페셜의 3D 화면을 보는 듯 한 자세하고 신선한 전장 지도가 인상 깊음  

3. 기존에 알고 있던 몇몇 전투에 대한 새롭고 합리적인 해석을 도출하고 있음

물론 이번 책은 100년이 책 되지 않는 짧은 시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시대별로 역사를 정리하지 않기가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저자는 시대별로 각 전투 및 전쟁을 꼽으면서도 나름의 테마를 정하고 있었다. 환란의 시대-군웅할거의 시대-천하통일을 향한 쟁패의 시대-천하통일의 시대 등으로 말이다. 여러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시대 순으로 나열하든, 안 하든 나름의 (일관된) 주제를 엿볼 수 있는 테마가 앞에서 제시되면 뒷 내용들을 이해하기가 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시대 순으로 나누지 않고 그 안에서 다시 테마별로 세분한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주얼적인 측면은 이전보다 확실히 나아졌다. 각 전투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저자는 왼쪽 페이지 하단부에 몇 개의 캐릭터를 이용해서 당시 전투의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보여주고 넘어가고 있었다. 먼저 전투의 명칭이 한문으로 크게 적혀 있었고, 그 앞으로 보병, 기병, 수군 등을 표시한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었으며, 접전을 벌인 부대들의 규모와 부대장, 전투 시기와 장소, 전투 결과 등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어 뒤에 나올 내용을 함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도 이런 디자인으로 이뤄졌으면 좋았을 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투에 대한 세부기록이 적은 한국사인 만큼 그게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전투와 관련된 여러 삽화는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필자는 특히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의 현재 모습을 사진으로 실은 것이 보기 좋았다. 아무래도 중국에 쉽게 가지 못 하는 상황에서 그런 사진들이 있으면 좋은 참고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각 시대의 병사(보병이든, 기병이든)들을 표현한 토용을 실은 것이 볼만했다. 저자의 세심한 측면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볼만한 건 역시 전장 지도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지도는 이전과 큰 차이가 없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표현된 점과 수계(水系)가 표현된 점이 좋았다. 이전 지도에는 수계가 없었는데, 전쟁이 지형의 영향을 많이 받는 만큼 산지뿐만 아니라 수계도 지도에 표현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부 전투 현황을 표현한 지도 역시 이전보다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을 선보였다. 마치 업그레이드되는 게임화면을 보는 듯 한 기분이었다(확실히 리니지1보다는 2의 그래픽이 돋보였고, 스타크래프트1보다는 2의 그래픽이 돋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필자 개인적으로 재밌게 본 전장 지도를 꼽으라면 먼저 ‘하비전투 상황도’를 꼽고 싶다. 문헌으로만 하비성이 잠겼다고 여기고 넘어가는 것과 지도로 대강이라도 보는 것은 분명 달랐다. 이것 역시 앞서 수계가 표현되고 표현되지 않은 지도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준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이릉대전’의 상황도나 ‘양평전투’의 상황도도 색다른 느낌이었다(양평전투에서 고구려 중장기병의 활약상은 미심쩍은 부분이 많지만 전후 양국의 정치상황을 고려한 추정이라 생각하고 넘어가겠다). 둘 다 하비전투와 마찬가지로 문헌으로만 보던 전투 상황을 세밀하게 표현했으며, 당시 전투 상황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과 다른 재해석 부분은 크게 달라진 면은 없다. 이는 이미 삼국시대에 벌어진 수많은 전투 및 전쟁에 대해서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며, 그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연구가 많이 진행됐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다만 전쟁사가의 눈으로 바라본 만큼 전투 및 전쟁에 대한 색다른 해석들이 적지만은 않다.

먼저 저자가 꼽은 전투를 보면 총 15개다. 이 중 황건적 관련된 전투가 2개(영천 · 장사 전투 / 청주 황건적 토벌전)와 촉한 멸망전, 서진 통일전 2개를 제외하면 하비전투, 관도대전, 적벽대전, 관중전투, 서촉 점령전, 한중 공방전, 촉한의 형주 실함, 이릉대전, 가정전투, 오장원 · 합비전투, 양평전투 등 11개(먼저 촉한의 형주 실함 때는 ‘위 · 오 동맹군’이 결성됐고, 적벽대전에서는 ‘유비 · 손권 동맹군’이 결성됐음을 기억하자)가 추려진다. 그리고 전투의 결과를 살펴보면 위나라(혹은 조조)의 승리로 끝난 전투가 7개(하비전투, 관도대전, 관중전투, 촉한의 형주 실함, 가정전투, 오장원 · 합비전투, 양평전투), 오나라의 승리로 끝난 전투가 3개(적벽대전, 촉한의 형주 실함, 이릉대전), 촉의 승리로 끝난 전투가 3개(적벽대전, 서촉 점령전, 한중 공방전)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삼국시대에 벌어진 수많은 전투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저자는 나름의 테마에 맞춰서 전투들을 선별했고, 그것들의 역사적 가치가 어떠했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내용들이 나름의 일관성과 객관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때 전투의 결과만 놓고 봐도 위나라가 어느 정도의 國力(보다 더 자세하게 軍事力)을 보유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조조는 청주 황건적 토벌전에서도 승리했다). 즉, 저자가 정사 기록인『삼국지』를 근거로 최대한 당시 전투(전쟁) 상황을 객관적으로 복원하려고 노력했음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었다.

일단 위에 언급된 전쟁들에 대해서는 웬만한 초등학생도 인터넷이나 책, 게임 등을 통해 알고 있을 테니 따로 부연하지는 않겠다. 다만, 눈여겨볼만한 해석이라고 할 만한 것들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먼저 인해전술이 단순히 대규모 병력으로 무식하게 적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교차공격과 스워밍(Swarming, 무리공격)의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점 혹은 농민들로 구성된 비정규 군사조직인 황건적이 이러한 인해전술로 숫자가 적은 관군에 맞서 크게 승리했다는 점(p.34), 조조가 청주 황건적을 토벌하면서 얻은 것은 5~6만여 명의 정예병인 청주병뿐만 아니라(이 부분은 저자도 언급한 바 있는 만화『창천항로』에 잘 나타나 있다. 조조의 군사력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청주병이 강조되어 있다) 연주 및 청주를 기반으로 한 땅과 사람, 경제력이라는 해석(pp.52~53), 관도대전 당시 원소가 동원한 11만 명의 대군이 남으로 진군하면서 누런 먼지와 사투를 벌이다가 행군 도중 낙오되거나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해석(p.75), 관도대전에서 보급의 중요성을 세세하게 언급한 부분(pp.77~78), 적벽대전에서 전염하는 풍토병과 영양부족으로 패한 위나라군에 대한 설명(pp.97~100), 관중지역의 군사력과 기병 전력의 중요성을 설명한 부분(pp.107~109), 목우와 유마에 대한 생각(pp.187~188)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겠다. 이런 부분들은 기존의『삼국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상당히 좋은 또 다른 시각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몇 가지만 더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저자는 책의 제일 처음에 ‘파국을 향하여’라는 제목으로 프롤로그를 실었다. 전한과 후한이 왜 다른 체제의 국가를 세울 수밖에 없었으며, 후한 말기에 삼국시대와 같은 군웅할거 시대가 왜 벌어졌는지 등을 소개했다. 그는 후한시대 지방행정의 기본 단위는 군(郡)과 현(縣)이었지만 후한 중기 이후가 되면 그보다 큰 규모의 행정단위를 관할하는 자사(刺史)가 등장하면서 군웅할거의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보았다. 이전에는 단순히 망국(亡國) 말기의 일반적인 상황들(환관과 외척의 득세와 이어진 황실의 약화, 부정부패를 일삼는 지방 관리로 인한 민란의 발생, 민란 진압에 동원되는 변방수비군과 변방 방어력의 약화, 주변 이족들의 잦은 외침 등)로 인해 혼란한 시대가 찾아왔고, 각 지방의 권력자들이 각각 사병을 이끌고 패권을 잡기 위해 대립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만 생각해보니 ‘서진’ 말기에도 각 군왕(왕족들이 봉해진)들이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어서 오래도록 혼란스러운 내란에 휩싸였으며, ‘당’ 말기에도 지방의 강력한 절도사들이 서로 세력 다툼을 벌여 오대십국 시대를 열었고, ‘청’ 초기에도 강력한 힘을 갖춘 지방 세력가들 때문에 삼번의 난이 벌어졌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책에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인데 바로 ‘6장. 삼국시대와 천하통일’ 부분이다. 저자가 여러 전투들을 소개하고 에필로그 형식으로 삼국시대와 그 뒷시기를 개괄한 부분인데 내용들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먼저 저자는 중국인이 갖고 있는 천하관 인식에 대해 언급하면서 얘기를 시작한다. 이는 중국이 끊임없이 분열하면서도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근본적인 목표이기 때문에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내용이며 이후 삼국의 각 나라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또한 ‘강북이 진정한 중국이다? - 위나라’, ‘강남인의 독자성 - 오나라’, ‘현실적으로 필요했던 천하통일의 명분 - 촉한’으로 챕터를 나눠서 각 나라별로 설명한 부분은 이 책의 ‘백미(白眉 - 이 역시 삼국지에 나오는 얘기지만)’라고 생각한다. 특히 필자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부분은 촉한 부분. 뒷부분에 저자는 삼국의 경작지 분포도를 소개한다. 산맥을 빼고 난 나머지 평지를 색으로 그려 넣었는데 촉한의 국력이 다른 나라보다 훨씬 뒤떨어짐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촉한은 ‘한 왕조 부흥’과 ‘천하 재통일’이라는 명분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이는 왜 힘이 없으면서도 제갈량과 강유가 그렇게 북진을 시도했을까? 에 대한 좋은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앞서 필자는 저자가 썼던『전쟁 세계사』라는 책에서 참고문헌을 언급했더라면 학술적인 부분까지 보완하여 보다 정교한 책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평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책 중간 중간에 그렇게 선행 연구 성과를 각주 처리하고 있어서 학술적인 면을 보완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외국(일본 혹은 미국)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함으로써 우리가 평소 쉽게 접하지 못 했던 세계의 시각을 접한다는 좋은 의미도 찾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앞 장과 관련된 내용을 그린 그림을 한 장씩 집어넣었는데 이게 어찌 보면 딱딱할 수 있는 책의 내용을 중화시켜 대중적인 면을 보완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전쟁으로 보는 중국사』에서는 이런 대중적인 면은 많이 없었던 게 사실이기 때문에 앞선 책들과 비교될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앞의 내용 중 어떤 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넣다 보니 조금 안 맞는 듯 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끝으로 저자가 ‘양평전투’ 이후의 고구려와 위나라의 관계에 대해서『고구려사략』의 내용을 인용한 부분이 있는데(p.232) 이에 대해서는 솔직히 어떤 평가를 내려야할지 잘 모르겠다. 진서(眞書)라고 평가받지 못하는 책의 내용을 함부로 인용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객관적 사실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고 봐야 하는지, 아니면 비록 진위 여부의 논란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사 기록을 토대로 한 사실에 부연하여 참고하는 정도의 내용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도 괜찮은 것인지. 이에 대해서 필자는 솔직히 후자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바로 뒷부분에 ‘수년 동안 절치부심한 고구려는 242년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한 끝에 요동군을 회복하고 위나라의 배신을 응징했다. 그리고 산동성을 장악하고 현도를 수복하면서 위나라군을 유주와 병주까지 밀어냈다.’는 내용은『고구려사략』의 내용인지, 아니면 저자의 생각인지 좀 애매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얼핏 고구려가 산동성을 장악하고 유주, 병주까지 위나라를 몰아낸 일이 있었나? 싶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이 책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한 것 같다. 워낙 흔하게 알려져 있는 내용을 戰爭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내용들이 나열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기존 시각과 다른 시각에서 봤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분명 ‘아하!’하고 머리를 탁 칠만한 재밌는 내용들이 있으므로 그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쨌거나 내용적인 면이나 디자인, 책의 구성, 전장 지도 등등 여러 면에서 이전 책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 이 책은 지금 이 순간, 필자가 저자의 또 다른 전쟁사 책이 나오길 기다리게 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는 것도 같이 밝혀두면서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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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9-12-14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서재에 들려서 좋은 책 소개 많이 받고 갑니다.
늘 감사드려요^^

麗輝 2009-12-14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마린님도 오랜만이네요. ^^ 요새는 바빠서 책을 거의 못 읽었는데 그래도 좋은 책 소개 많이 받으셨다니 다행이네요~연말 잘 보내세요~^^
 
고고학자 슐리만 150년 전 청일을 가다
하인리히 슐리만 지음, 이승희 옮김 / 갈라파고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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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序言 : 흥미로운 주제의 책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고고학 관련 서적은 아니며, 기행문(혹은 유람기?)에 가까운 책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더군다나 이 책을 쓴 사람이 ‘하인리히 슐리만’이라는 사실에 더욱더 구미가 당긴다. 우리가 흔히 알기로 슐리만은 저 유명한 트로이 유적(이라고 믿어졌던)을 발굴한 사람이 아닌가? 물론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 발굴 당시에는 전문적인 고고학자가 아니었지만 추가적으로 고고학 공부를 해서 학위를 받고, 다양한 유적들을 조사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청나라와 일본 등지를 방문하고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물론 그가 巨富에다가 大商人이었으니 세계여행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아프리카나 인도 등지의 유럽 식민지 국가가 아닌 극동의 국가를 방문해서 어떤 학술적 자료를 남겼다는 점이 신기했다. 또한 인류학자나 역사학자, 지리학자가 아닌 유럽의 고고학자가 동방을 여행하고 기록을 남겼다는 것 또한 재밌었다.

사실 슐리만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 책의 뒷부분(197~199쪽)에도 나오지만 그는 어렸을 때 식품점 점원으로 일했었고, 20대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사환, 통신원, 경리로 일하면서 엄청난 외국어들을 습득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이 고안한 방법으로(그는 이 방법으로 16개국의 언어를 습득했는데 이는 그 나라 언어로 된 책을 계속 읽고 암송함으로써 비상한 암기력으로 문법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도 외국어를 체계적으로 습득해나가는 방식이었다) 영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를 배웠으며(그는 독일 출신) 24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독립적인 사업을 하기 시작한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상인 길드에 가입했고, 20대 말~30대에는 미국 여행을 하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31세에는 모스크바에 지사를 두고 이후 스웨덴어, 덴마크어, 폴란드어, 슬로바키아어를 배웠으며 크림전쟁을 계기로 사업이 번창하였다. 30대 중반에는 라틴어, 고대 및 근대 그리스어를 배웠고 오리엔트를 여행하면서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아랍어, 현대 그리스어를 배웠으며 43~45세에 인도, 자바, 청나라, 일본, 북미와 중남미 등을 여행하였다. 트로이 유적은 그로부터 7년 뒤에 발굴했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그의 고고학 인생은 상당히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후 69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수많은 유적들을 발굴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꿈을 키웠는데 단순히 그를 ‘돈 뿌려대며 고대 유적을 훼손한’ 사람으로 인식했던 것이 잘못이라고 여겨졌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다양한 언어를 습득한 사람은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어떤 분야의 공부가 됐든) 상당히 이로운 점이 많다. 그리고 슐리만은 그러한 다양한 언어를 기반으로 발굴 자금을 확보했고, 그를 통하여 트로이 유적이라고 알려진 그 곳을 오랫동안 발굴조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게 학술적인 면모가 적었던 것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시각으로 당시의 슐리만을 봤기 때문이다. 아마 1세기 뒤의 고고학자가 오늘날 우리를 보면 그 역시 문제가 많다고 할 것이다.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을 파헤쳐서 그것을 개인 소장품으로 전락시키지 않은 것만 봐도(당시 이집트의 수많은 유물, 유적들은 유럽 열강들의 개인 · 왕실 소장품으로 무더기로 팔려나갔다) 다행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그는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모두 부러워할만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어마어마한 재산이 있었기에 돈 걱정 없이 학업과 연구를 병행할 수 있었으며,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식견을 크게 넓힐 수 있었고 엄청난 언어 능력으로 폭넓은 공부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요즘 고고학계에도 슐리만 정도의 능력자(?)는 없지 않은가~그것들이 모두 우연으로 얻어진 바가 아닌 만큼 우리는 슐리만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쪽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책은 슐리만에 대해 색다른 시각을 제시해줄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한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재밌지 않은가?

Ⅱ. 전체적인 목차와 내용구성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청나라편> 1865년 5월 3일

1장. 텐진으로 가는 길
2장. 옛 영화를 간직한 몰락의 도시, 베이징
3장. 가장 위대한 건축물, 만리장성
4장. 상하이, 전통과 서양 문물의 혼돈 속에서

<일본편> 1865년 6월 28일 에도에서 일본 여행기

5장. 천황의 나라, 일본을 향하여
6장. 아름다운 정원의 도시 요코하마
7장. 양잠의 도시, 하치오치
8장. 에도, 그리고 두 얼굴의 일본인
9장.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로  
 

그는 일본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50일간의 항해 기간 동안 청나라에서 2개월, 일본에서 3주간 체류하면서 쓴 일기에서 발췌하여 이 기행문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각 장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분량 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청나라편은 80여 쪽, 일본편은 100여 쪽 - 해석이나 도판에 의해 원본과 분량 차이가 있겠지만 일본편의 내용이 상대적으로 더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더 짧은 기간에 체류한 일본이었지만 왜 슐리만은 더 풍부한 기록을 자세하게 남겼을까? 역자(譯者)에 의하면 슐리만은 평소에도 일본을 동경하고 꼭 가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선입견과 그가 직접 가서 보고 느낀 점들이 그로 하여금 친(親) 일본파(?)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 청나라와 일본에 대한 이런 슐리만의 인식은 이후 그가 두 나라를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슐리만의 여행 경로를 살펴보면 일단 ‘상하이’에서 출발해서 산둥 반도 ‘옌타이’를 거쳐 ‘다구’로 향한다. 이후 ‘톈진’과 ‘베이징’, ‘구베이커우’ 등을 둘러보고 다시 다구에서 배를 타고 나와 상하이로 향한다. 중국 동부 해안선을 따라 여행한 것으로 전체 중국 중에서 극히 일부분만 둘러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중국의 일부분만 보고 전체 중국을 판단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중국 동해안 지대는 다른 곳보다 선진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개발이나 발전이 빠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슐리만은 청나라의 몰락과 어두운 미래를 보았다.

하지만 일본에 간 슐리만은 그 곳에서 청나라와 전혀 다른 동방의 또 다른 나라를 경험하게 된다. 깨끗하고, 비리가 없고, 절제할 줄 알며 검소하고, 상명하복이 철저한 이 나라를 슐리만은 굉장히 감동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어떻게 보면 두 나라 모두 절대군주제 치하의 국가이며, 똑같이 외세를 배척하면서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국가 전체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었는데, 왜 그 결과는 서로 달랐을까? 그리고 그 차이가 외국에서 여행 나온 1명의 관광객(좀 공부를 많이 하고 통찰력이 남다르지만)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확연하게 보였단 말인가? 정말 그렇다면 청나라가 외세의 침략에 무릎 꿇고 큰 고초를 겪은 것은 필연적이었단 말인가? 슐리만은 이 부분에서 다소 극단적으로 청나라와 일본을 비교하는 듯 하지만 마냥 근거 없는 내용만은 아니기에 그런 부분을 고심하면서 읽는 것 또한 이 책을 즐기는 또 하나의 묘미인 것 같다.  

Ⅲ. 몰락하는 사자, 청나라에 대한 인색한 평가

필자는 청나라 말기, 그들이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잘 알고 있다. 물론 역사책을 통해서다. 하지만 슐리만은 신기하게도 당시 직접 청나라를 방문함으로써 이런 징조를 예측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슐리만은 맨 처음에 ‘청나라 세관에서 일하는 서양인들’이라는 챕터를 소개하고 있었다. 1장의 유일한 내용인데 마치 청나라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알려주는 전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서양인들은 청나라에서 조금만 중국어를 알아도 세관원으로 일할 수가 있었는데, 이는 유럽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수입이 좋았다고 한다. 청나라에서는 오히려 비리가 많고 효율이 떨어지는 자국 출신 관리보다 서양인들을 등용했는데, 그 과정에서 서양인들은 큰 이득을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시 청나라가 ‘기회의 땅’으로 인식될 수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바보 같은 약탈대상’으로도 보일 수 있는 노릇이었다.

슐리만이 굳이 만리장성 이전에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일단 접고 책장을 넘겼다. 그는 배를 타고 가면서 거쳐 간 몇몇 도시를 언급한 이후 인구가 40만이 넘는 거대 도시 톈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면서 2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 이제껏 여러 대륙에서 지저분한 도시들을 많이 목격했지만 특히 톈진은 더럽고 혐오감을 주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여행자의 오감(五感)이 끊임없이 수모를 당해야만 한다 -

그동안 유럽 각지에서 상업 활동을 하면서 여행을 다녔던 슐리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계 그 어떤 것보다도 중국의 톈진이 더럽고 혐오감을 준다고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1천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으며, 화베이[華北] 지구의 중앙 직할시로서 원대(元代)부터 교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톈진이 왜 이런 악평을 받아야 하는지 의아할 정도다. 이는 유럽 우월주의 사상에 익숙한 슐리만의 발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청나라에 대해 그가 갖고 있던 선입관도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당시 청나라는 동치제(1856~1874) 치세로서 증국번, 이홍장 등이 주축이 되어 추진한 양무운동(1861~1894)으로 부흥을 꿈꾸던 때였다. 하지만 이미 아편전쟁(1840~1842)과 태평천국운동(1851) 등으로 국가체제가 흔들리더니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베이징이 함락되기도 하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얼마 되지 않아 슐리만이 청나라에 도착했으니 과연 그가 청나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지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슐리만이 중국에서 칭찬하는 것이라고는 ‘만리장성(이 거대한 인공물은 슐리만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한 대상이기도 하다)’과 뛰어난 솜씨를 가진 배우들이 등장하는 ‘경극’ 뿐이다(그것도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하다고 평했으나 극장의 무대구조나 관객들의 관람태도는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둘레 12킬로미터, 높이 8미터 성벽으로 둘러싸인 자금성을 통치자의 감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며, 베이징이라고 하는 거대한 도성(마르코 폴로가 극찬해 마지않던)에서 뭔가 놀랄 만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가 한껏 실망했다고 쓰기도 했다. 슐리만이 단순히 문화재나 관광지를 찾아 청나라를 방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물론 그 당시 자금성이 지금의 자금성처럼 관광지로서 한껏 정비된 모습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그 웅장함이나 화려함, 거대함에는 감탄사 한번 내지를 법도 한데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베이징에서 나와 만리장성으로 향하는 동안 오래된 하수시설의 잔존물, 파손된 기둥머리와 추녀의 돌림띠, 거리의 오물 더미 속에 파묻힌 각종 조각들, 피해가야만 할 정도로 붕괴된 위풍 있는 화강암 다리 등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혹평한다.

- 이 모든 것들로 미루어 본다면, 지금은 몰락하고 타락한 인종이 거주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위대하고 창조적인 민족이 살았으며, 지금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거리에 단층의 초라한 오두막만 보이지만 옛날에는 화려하게 포장된 거리들과 커다란 집들 그리고 위풍당당한 궁궐들이 있었다는 말이 맞기는 한 것 같다. 정말 이곳이 과거에는 화려한 수도였단 말인가? 베이징의 웅장한 성문과 성벽이 말해주듯이 그것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지금 눈앞에 설펴지는 이따위 도시를 지키기 위하여 이런 위대한 건축물들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

당시 청나라가 어느 정도로 몰락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베이징은 금 · 원 · 명 · 청의 네 정권에서 700여 년간 도성으로 이용한 곳인데 원대의 대도성(大都城)을 명대에 약간 고쳤으며, 청대에는 서쪽 교외에 원림을 많이 조성하여 그 화려함을 더 했다. 특히 서태후가 해군 군비를 전용하여 중건한 이화원은 규모가 크고 풍경이 아름다워 베이징 성내의 황궁에 비하여 손색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류제헌, 2004,『중국 역사 지리』, 문학과 지성사, pp.272-273). 그런 베이징이 이처럼 몰락했으니, 청나라가 곧 몰락할 것이라고 예견한 슐리만이 탁견(卓見)을 가졌다고 칭찬할 일만도 아닌 듯싶다.

하지만 그는 만리장성 앞에서 그간의 냉정한 비판이 눈 녹듯이 사라진 것처럼 감탄사를 연발한다. 당시 만리장성이 지금처럼 잘 정비된 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이곳저곳을 암벽 등반하는 기분으로 올라서고 주변 경관을 살펴보면서 자세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벽돌의 규격에서부터 축성방법, 주변의 자연지세, 성벽의 구조 등등에 이르기까지. 그러면서 원형아치의 기원과 문화적 속성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고고학자의 그것이었다. 그는 앞선 비난(거의 이 정도 수준의 비판)을 모두 접어두고 만리장성을 두고 ‘태곳적 거인들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작품’이라고 칭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만리장성 역시 그의 날카로운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는 만리장성의 웅장함이 청나라의 궁색한 변명이자 마지막 최후의 보루와도 같이 느껴졌나 보다. 다음처럼 글을 남긴 걸 보면 말이다.

- 말할 것도 없이 만리장성은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위대했던 과거의 묘비가 되어 장성을 가로지르는 협곡에서 그리고 장성을 뚫고 지나가는 구름 속에서 청나라의 몰락을 가져온 부패와 퇴폐에 대하여 침묵으로 항의하고 있다 - 

번역이 잘 돼서 그런지는 몰라도 상당히 시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거의 20여개에 달하는 외국어를 습득하고 각지의 문학작품을 두루 암송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슐리만은 이후 길이 67센티미터의 견고한 벽돌 하나를 기념품으로 가져갔다. 이는 당시 고물애호주의(말이 좋아 그렇지, 사실은 보물찾기주의?)에 가까운 고전 고고학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이 돌이 지금 어디 가 있는지는 몰라도 안타까운 심정뿐이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그는 아주 아주 아주 비판적인 시각으로 청나라를 방문해 2개월간 여행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중국인이 도박을 좋아한다는 내용이나 그들이 타고 다닌 말이나 수레의 크기나 구조, 해적선이 활개치고 다니는 당시의 모습, 중국인의 생활상 구석구석까지 아주 자세히 서술하고 있었다. 마치 제국주의 시대 때 인류학자를 비롯한 식민사업의 첨병(尖兵)들이 대상지의 역사와 문화, 민속 등을 샅샅이 훑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국가의 지원을 받거나 어떤 공식적인 임무를 갖고 청나라에 온 것이 아니라 그저 개인적인 여행의 일환으로 청나라를 방문했으면서도 이렇게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그 점이 더욱 독특하다 할 수 있겠다. 필자는 슐리만이 청나라를 방문하는 내내 보다 깨끗하고 우수하고 선진적인(지네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유럽인의 시각으로 여행을 하고 기록을 남긴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일본과 전혀 다를 만큼 극과 극이어서 그저 놀랄 따름이었다. 
 

Ⅳ. 문명은 최고 수준이지만 도덕관념은 저급인 일본에 우호적인 시각

앞서 언급했지만 슐리만이 일본에 체류한 기간은 청나라에 비해 대략 1/3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다양하고 많은 내용이 담겨 있으며, 그 안에는 긍정적인 내용들도 많이 들어 있었다(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청나라와 비교하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또한 유럽과 비교했을 때 유럽과 다른 점은 저급하다고 했지만, 상당 부분에서는 최고 수준이라고까지 칭하고 있었다. 이는 슐리만 개인적인 감정과 선입관이 작용한 때문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실제적으로 그렇게 보였기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

1865년은 가마쿠라 막부 말기에 해당하며(이듬해에 막부가 패배하고 1867년에는 왕정복고가 이뤄져 메이지유신이 시작한다) 메이지유신 이전부터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일본의 국력은 조선을 상회하고도 남았으며, 청나라도 우습게 볼 정도였는데 이는 슐리만도 적고 있듯이 당시 20명의 다이묘 중 상위 4명의 쌀 생산량만 따져도 알 수 있다. 간가 번의 마에다 가가는 1년에 120만 2,700고쿠(石, 쌀 한 가마를 의미), 사츠마번의 마츠다이라 사츠마는 1년에 76만 800고쿠, 오와리 번의 도쿠가와 오와리는 연간 62만 9,500고쿠, 무쓰 또는 센다이 번의 마츠다이라 무쓰는 연간 62만 6천 고쿠를 생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전국적으로 수백만석 이상의 쌀이 생산되고 있었으며, 사츠마번(대표적인 존왕양이파)의 경우, 자체적으로 서양의 최신 무기로 무장하는 등 군비를 대폭 증강하여 영국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막강한 실력을 가진 지방 세력가였다. 당시 쇄국을 고집하던 조선과는 천지 차이의 국제적 시야를 가졌던 것이다. 끊임없는 긴장과 대립은 평화안일주의에 빠져있지 않게끔 해주며 국가에 활력소를 제공해준다. 막부와 천황의 대립은 미국의 페리가 내항한 이후(1853) 꾸준히 진행됐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은 뚜렷한 국력 신장을 이루게 된다. 내적 투쟁이 외적 확산을 가능케 했다고나 할까.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슐리만이 일본을 방문했으니, 어찌 청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았겠는가.

슐리만보다 일찍 일본을 방문한 타운젠트 해리스는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라는 임무를 맡았다(1858). 하지만 그는 일본 사회의 실태를 알고 나서 이 조약을 강요하는 것을 망설였다고 한다. 그의 심정이 그가 남긴『일본체재기(日本滯在記)』에 잘 나와 있다.

- 그들은 모두 살집이 좋고 옷차림도 좋았으며 행복해 보였다. 얼핏 보면 부자도 빈자도 없다. 아마 이것이 사람들의 진실한 행복한 모습이라 할 것이다. 때때로 나는 일본을 개국하여 외국의 영향을 받게 하는 것이 과연 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나는 질박함과 황금의 시대를 그 어떤 나라에서보다 일본에서 많이 보았다. 생명과 재산의 안전, 전반적인 사람들의 소박함과 만족함 등이 현재 일본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

해리스는 경건한 크리스챤으로서 야만국인 일본을 개종시키기 위해 일본 영사의 직을 열망하여 일본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극동의 야만국에서 ‘지상의 낙원’을 보게 되었고 그가 지닌 크리스트교의 가치관이 크게 동요하였던 것이다(河合 敦/원지연, 1997,『하룻밤에 읽는 일본사』, 중앙M&B, p.252). 그리고 해리스의 이러한 묘사는 불과 7년 후에 이곳을 방문하게 될 한 독일 출신 민간인에 의해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아마 슐리만이 당시 조선까지 방문했다면(물론 조선에 대해 거의 몰랐으니까 오지 않았겠지만) 조선 역시 청나라처럼 일본과 비교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슐리만이 익숙하게 여겨온 서양식 개인주의, 제국주의식의 전체주의, 크게 발달한 상업경제 등이 일본 이외의 두 나라에서는 잘 찾아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족은 접어두고 슐리만의 행보를 다시 찾아가보자. 그가 얼마나 일본을 동경했었고, 지금 그것을 몸으로 잘 느끼고 있는지를 말이다.

슐리만이 일본에 처음 도착해서 느낀 것은 그들의 복장과 헤어스타일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청나라와 다르다는 얘기부터 꺼낸다. 일단 청나라에서는 재앙을 막아준다고 하여 커다란 두 눈을 뱃머리에 그려놓고 유성도료를 칠한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배들이 많다고 적은데 반하여 건장한 사내 둘이서 노를 젓는 작은 나룻배들만 있다고 적었다. 또한 일본인들은 아주 기다란 띠(훈도시를 지칭)만 두를 뿐 거의 벌거벗고 온 몸에 문신을 잔뜩 그려놓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슐리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르타뉴 주민들에 대해 묘사한 대목을 인용하고 있었다. 그의 식견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일본인이 몸에 걸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에 놀라면서 헤어스타일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격을 부풀려서 받아먹는 청나라 뱃사공에 비해 정찰제로 운영하는 것에서도 놀랐던 것 같다. 또한 ‘닛폰 무스코(일본의 남아)’라고 말하면서 뇌물에 속지 않는 세관 직원들에게도 상당히 강한 인상을 받았다. 모든 것이 청나라와 달리 잘 짜인 체계 속에서 돌아가는 듯 한 느낌을 책을 읽는 필자도 느끼겠는데, 당사자인 슐리만은 오죽하겠는가? 아마 슐리만은 역시 일본에 오길 잘했다~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후 슐리만의 일본에 대한 감상은 대부분 칭찬 일색이다. 일본의 인위적이면서 구조적인 스타일의 정원을 보고 슐리만은 특히 감동한다. 또한 깔끔한 도로와 건물은 물론이요, 불에 잘 타지 않는 집에 대한 설명도 눈여겨 볼만 하다. 특히 슐리만은 일본 주택들은 ‘청결의 모범’이라고 칭송한다. 청나라와는 전혀 달리 너무나도 깨끗하고 소박하며 깔끔한 스타일의 주거 문화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특히 소박한 세간이 그에게는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 같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결혼하기 힘든 이유로 ‘가구 중독, 사치품에 대한 경쟁, 그로 인해 생기는 막대한 비용’ 등을 꼽았는데 일본에서는 그런 경향이 전혀 없으니 이런 좋은 풍습은 배워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소박하고 깔끔한 문화는 주택뿐만 아니라 사찰에서도 확인되는데 ‘불당 안에는 한 점 티끌도 찾아볼 수 없었고, 창틀은 찢어진 데가 한 군데도 없이 깨끗한 창호지로 발라져 있었다.’는 그의 묘사가 당시 모습을 그대로 그려주는 듯 했다.

그밖에 슐리만은 일본의 비단상점을 두고 유럽의 거대한 백화점과도 비교해 손색이 없다면서 놀라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상업경제는 청나라나 조선보다 훨씬 앞서는 것으로서 유럽과 비교했어도 크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슐리만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상명하복이 철저한 민족, 6개의 계급으로 나눠진 사회구조 속에서 철저하게 짜인 틀에 맞춰 나라가 돌아가는 곳, 굉장히 독창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라는 생각을 슐리만은 가졌던 것 같다. 중세~근대 일본사에 대해 딱히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당시 일본이 전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의 국력을 지닌 나라였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일본이 유럽 여느 국가와 비교했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의 나라였다. 미국의 페리가 일본은 방문하고 외국 열강들과 국교를 튼지 불과 20여년도 안 돼서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것만 봐도 일본의 성장세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 70여년이 지나자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대동아공영을 주장하는 거대 제국주의 국가로 재탄생하게 되었으니 그것만 보더라도 일본의 국력이 당시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슐리만의 묘사에도 그러한 것들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슐리만 역시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놀라고 감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슐리만의 평가 중에서도 안 좋은 것은 있었다. 그건 바로 남녀가 성적으로 개방된 사회였다. 남녀 혼탕부터 시작해서 남녀가 서로 외설적인 무대연극을 즐기는 것들이 슐리만에게는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그러면서도 그는 청나라에서처럼 일본의 연극 역시 수준이 높다고 칭송했다. 그가 예술 쪽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것 하나 때문에 일본에 대해 슐리만은 도덕관념이 저급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렇다고 그것을 아주 야만적인 것으로 매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감찰과 통제의 방법으로 일본을 통치하는 쇼군의 전제군주제적인 통치방식을 언급하면서 일본에서 왜 그런 문화가 자리 잡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즉, 그러한 남녀 혼속 문화가 국가 통치에 방해가 되지 않았기에 규제하지도 않았으며, 그러다보니 오늘날 그러한 문화가 보편화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슐리만이 서양인이면서도 불구하고 일본의 이러한 성문화에 대해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조금 이채로웠다. 당시의 학문적 경향이나 서양인의 인식에 의한다면 그런 것들이 원시적이라고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그러한 도덕관념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상당히 문명화되고 선진적인 부분들을 많이 살펴봤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청나라와 같은 사회였다면 그리 관대한 평가를 받지는 못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0개를 잘하는 사람이 1개를 못 했을 때와 10개 중 9개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그나마 나머지 1개도 제대로 못 해냈을 때 주변 사람들의 평가라고나 할까? 암튼 슐리만은 3주간의 체류 기간 동안 일본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고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Ⅴ. 結論 : 슐리만의 또 다른 면모와 그의 시각에 대하여

19세기 중반 유럽 열강은 전 세계를 그들의 식민지로 삼으면서 기고만장하였다. 그리고 슐리만 역시 그런 시기 독일에서 태어나 상업 활동으로 巨富를 축적했기에 전형적인 유럽인의 마인드(Mind))를 갖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청나라와 일본에 대한 기행문은 상당히 객관적인 시각에서 쓰인 것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물론 청나라와 일본에 대한 그의 선입관과 사사로운 감정이 섞이긴 했지만 그가 글로 남긴 기행문을 보면 상당히 구체적인 부분까지, 세세하게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어떤 교훈이나 메시지를 얻으려고 했던 것 같다. 아무리 동양에 속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유럽보다 못 났다~라는 생각보다는 잘 한 것은 배우고 못 난 것은 자세하게 묘사해서 기억하려는 것 같았다. 이러한 부분은 그간 슐리만에 대한 다른 고고학 관련 서적에서 볼 수 없던 부분이었던지라 그 자체로서 신선했다. 특히 그가 청나라와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을 당시 이 두 나라는 유럽 열강의 위력을 실감하고 그들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변혁을 겪던 시기였다. 그만큼 그 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외교관과 일부 공식 허가를 받은 상인 등에 불과했는데 그는 한 사람의 외국인으로서 자유여행을 다녔기에 이 기행문이 더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이 기행문은 슐리만 한 사람의 눈으로 당시 사회를 바라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슐리만은 자신의 눈으로 그 당시의 유럽 열강과 동양 국가들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일반 백성들의 세세한 삶까지도 묘사하고 마치 처음 보는 연구대상을 연구하는 학자의 마음으로 모두 기록으로 남겼던 것이다.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쓴『황금가지』가 떠올랐다. 인류학 · 종교학 · 신화학 분야의 고전 중의 고전인 이 책은 1890년 2권으로 출간된 후 이후 20세기 초까지 계속 개정판이 나왔는데, 나름 서양인의 눈으로 세계 각지의 문화에 대해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슐리만이 쓴 책 역시 짧은 기간 청나라와 일본을 방문하고 남긴 글이지만 그 사료적 가치로서의 중요도는 결코 작지 않았다.

도굴범, 약탈자, 보물사냥꾼 등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슐리만에 대해 새롭게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 그가 서양인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입장에서 청나라와 일본의 사회 전반을 바라보고 당시 상황을 잘 묘사했다는 점. 이 두 가지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하며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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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고고학
임효재 지음 / 집문당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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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원로 고고학자가 쓴 개설적인 내용을 담은 책들이 시중에 적지 않게 나온 편이다. 이미 필자가 서평을 쓴 바 있는 김병모 선생님이나 조유전 선생님을 비롯해서(『한국고고학개설』을 쓴 김원룡 선생님까지 친다면야) 아직 서평을 쓰지 않은 이선복 선생님까지 어떻게 보면 비슷비슷한 내용(혹은 구성)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다르기도 한 책들 말이다. 그렇게 봤을 때 오늘 필자가 서평을 쓰려고 하는『두더지 고고학』은 앞서 소개한 책들보다 조금 재미가 없는 책이라는 얘기를 먼저 하도록 하겠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김병모 선생님의 책처럼 저자(임효재 선생님)가 학문을 처음 시작해서 최근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그 내용이 소개되면서 저자 개인적인 생각이 곁들여져 있는 책으로 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조유전 선생님처럼 특정 주제에 따라 자신의 연구 성과를 정리했다는 느낌도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점이 이 책의 단점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겠다.

먼저 이 책은 김병모 선생님의 책과 달리 자신의 고고학 연구인생을 전부 소개하지도, 그렇다고 그 안에 자신의 감성을 풍부하게 담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저자가 연구를 진행하면서 당시 이슈가 됐던가, 아니면 유명했던 내용들 위주로 소개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물론 저자의 생각이 포함되어 있긴 했지만 어떤 사실에 대한 짧은 코멘트 정도였기 때문에 그다지 심적으로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조유전 선생님처럼 아예 한국 선사 ․ 고대사에 대해 특정 주제들에 맞춰 내용을 구성한 것도 아니고 시기적으로 구분한 것도 아니어서 약간 어정쩡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책 안에 도판이 너무 적어서 고고학 관련 개설서 중에서 따분한 편에 속하는 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자는 1960년대 대학교 3학년 시절 古 김원룡 교수님을 따라 강원도 춘천에 있는 교동 동굴 유적에서 완형의 빗살무늬토기를 수습하던 흥분된 기억이 엊그제만 같다고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필자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 하니 저자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럼 책의 구성과 내용에 대해 차분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일단 목차부터 살펴보자. 

1장 태고 밝히는 고고학의 신비
2장 신석기인의 세계
3장 벼농사 전파경로 바꾼 신자료
4장 고인돌 왕국
5장 한강유역의 고대 유적 발굴 성과
6장 일본 열도에 가득 찬 한국 문화의 숨결
7장 베일 벗는 중국 고고 문화
8장 스미스소니언에서 본 박물관의 세계
9장 국제 학술대회의 이모저모

먼저 1장에서 구석기시대 관련된 내용을 말하면서 저자 스스로 고고학을 어떻게 공부하게 됐고, 한국 구석기문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인정받았는지를 언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고고학 발굴에서 문제가 되는 여러 요소들’은 왜 들어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건 교재로 쓰이는 아주 딱딱하고 재미없는 고고학 이론서에나 들어가 있을 법한 내용인데 말이다. 물론 어느 정도 학술적인 내용을 가미하고자 한 저자의 의도가 엿보이기는 했지만 그 바람에 이 책의 집필 의도가 학술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것인지, 개설서로서 흥미 위주의 정보 전달을 하려고 했는지 애매모호하게 되어 버렸다. 차라리 발굴 과정과 관련된 도판이나 현장에서의 에피소드를 적절히 섞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이전에 구석기시대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 하셨는데, 이런저런 얘기들이 일관되지 않게 섞이는 바람에 장을 따로 하나 더 만들던가, 아니면 구석기시대 이외의 내용을 좀 줄이든가 했으면 더 나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강유역의 고대 유적 발굴 성과’라는 장도 조금 어정쩡한 느낌의 챕터였다. 저자는 자신의 연구 인생을 나름 시기적으로도 배열하면서 그 중 몇 가지를 묶어서 한국사에서의 시기(구석기-신석기-청동기-삼국시대 혹은 그 이후)와 비슷하게 맞추고자 했던 것 같은데 그러다보니 이런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5장에서는 방이동 ․ 석촌동 고분군 및 몽촌토성(백제), 아차산 일대의 보루(고구려), 아차산성(통일신라)을 소개하고 있어 신라 관련 유적은 아예 없었으며(물론 저자가 관련 유적을 발굴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백제 민락동 유적이나 천안 용원리 고분의 경우 관련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그다지 흥미를 갖고 접근하기 어려운 유적들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냥 저자와 관련 있는 유적 중에서 삼국시대 관련된 것의 자료를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을 꼽으라면 필자는 주저 없이 이 부분을 꼽고 싶다.

필자가 오히려 이 책에서 볼만한 부분이라고 여기는 곳은 뒷부분에 몰려있다. 6~9장이 바로 그 부분인데 먼저 6장에서는 저자가 일본에서 한국과 관련된 유물과 유적을 소개하고 있어서 그 점이 재밌었다. 특히 필자가 실견했던 유물과 유적에 대해 언급한 부분들이 많아서 친근하기까지 했다. 그 당시에도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확인된 유병식동검과 세형동검, 유리질관옥 등에 대해 한국과의 관계성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국내에도 이러한 대단위 취락을 복원해놓은 유적공원이 하루빨리 조성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말이다(울산 검단리 유적이나 부여 송국리 유적을 복원하려는 계획이 있다고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논의가 진행된 단계인지 궁금하다). 또한 오키나와가 고려~조선시대때 한국과 지속적인 교류를 가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오키나와에서 한국계 빗살무늬토기가 나왔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물론 신석기시대에도 원양항해가 가능했지만 오키나와까지 갔으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밖에 지금은 다소 개방적으로 소개되었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깜깜무소식이었던 중국 고고학계에 대한 내용을 소개한 것도 흥미로웠다. 필자가 속한 연구소도 최근에는 중국학자들과의 교류가 활발한데 솔직히 동북공정을 비롯한 중국 내 정치적인 입김이 작용한 학문적 움직임만 아니라면, 중국 고고학계의 연구 성과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중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회가 많이 바뀌긴 했어도 학술적으로 여전히 중국 학계는 높은 벽을 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국과 일본이 꾸준한 학술교류를 통해 언젠가는 과거 한-일간의 가슴 아픈 역사적 과오에 대해 해결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과 달리 중국과 한국은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대립해야만 하며 그것이 학문적인 연관성에도 크게 작용할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또한 저자가 직접 참여하거나 관여한 각종 국제 학회 등에 대한 내용은 필자로 하여금 느끼는 것이 많게 하였다. 꾸준한 국제 활동을 통해 저자는 국제학계에서 한국 고고학의 위상을 드높이는데 노력했으며, 실제 한국 고고학계는 그러한 선학들의 노력을 통해 오늘날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북한 학자와의 학제간 교류나, 학회에서 중국 학계를 강도 높게 비판한 내용들은 차후 한국 고고학계가 어떤 장래성을 지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정치색이 강하게 투영된 북한학계지만 중국이나 일본 같은 외세의 역사왜곡에 맞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반자로서 같이 걸어 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한국 고고학계는 이제 막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고 있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아직 학계의 70%는 전통고고학자이며, 10%는 신고고학자인 상황에서(나머지 20%는 중간 입장) 세계 고고학계의 학문적 경향을 따라가는 것은 너무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외국과의 학술적 교류를 행함으로써 꾸준히 그 위상을 높이고 연구의 질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따로 적지 않은 장을 마련해서 이런 내용들을 담고 이런 부분들에 대해 고민한 것은 정말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을 비롯해서 외국 박물관에 비해 우리의 현실은 너무 열악하다~는 내용들이 나왔는데, 이 부분은 크게 공감하지 못 했다. 솔직히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경우만 해도 물론 규모가 거대하고 전시유물도 풍부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마케팅과 박물관 기획 ․ 전시와 관련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을 갔을 때 그 규모에 놀라기는 했지만 전시품의 질적인 면에서는 크게 감흥을 느끼지 못 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가면 또 다른 느낌일 테고 저자가 그 곳에서 연구 활동을 했던 것에 비해 필자는 관람객의 한사람에 불과했으니 이런 감상이 지금 무의미하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가서 본다고 그때의 생각이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또한 미국, 중국, 일본의 예를 들면서 한국의 박물관 수가 상당히 적다는 점을 문제라고 꼽았지만 박물관의 수보다 질이 어떠한지를 좀 따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도 싶었다. 솔직히 중국의 박물관 역시 최근 동북공정 등을 통해 유적을 개방하고 관람객을 유치하기 위해 잘 꾸며놓은 티가 나지만 시설이나 박물관 운영 시스템 측면에서 볼품없는 것들이 많은 실정이다. 또한 일본이 아무리 깨끗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는 나라라고 해도 국립박물관은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적고, 지방의 소규모 박물관들은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게 없는데다가 볼만한 것도 별로 없어 크게 와 닿지 않는다. 미국만 해도 박물관 수가 1만개라고는 하나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물이 어떤지도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여담이지만 <박물관이 살아있다>처럼 관람객이 없어 망해가는 박물관은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다 있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그 나라의 박물관 문화를 보려면 일단 국립박물관이 기준 지표가 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물론 우리나라 박물관이 아직은 유물을 전시하는 창고 같은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미국처럼 관광자원으로서, 상품자원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여러모로 中道를 지키는 것이 가장 적절한 듯싶다.

암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었다. 앞서 필자가 소개했던 책들이 학술적인 내용이나 흥미 위주의 정보들을 적절히 섞어서 구성했다면, 이 책은 저자의 감상이나 정보, 학술적인 내용보다는 저자가 현재 한국 고고학계에서 느끼는 점, 비판하고자 하는 점, 한국 고고학계가 나아가야 할 점 등을 고민하고 정리한 측면이 강한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들이 모두 신문기사나 박물관 신문 같은 곳에 기사나 칼럼 형식으로 실렸던 것들 역시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신문 기사를 정리한 듯한 책이지만(내용이 짧고 주제가 간단명료하며 도판이 적다는 점 등등) 일단 구성이 독특하고 현실적인 부분과 연계한 비판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 있으므로 그 점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한번쯤은 그러한 고민을 해봐야 하기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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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박물관 - 역사의 상식을 뒤집는 발칙한 고고학 여행
라인하르트 하베크 지음, 김희상 옮김 / 갤리온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오늘도 재밌는 책을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필자가 이 책에 대해 ‘재밌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단순히 그 내용이 재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책의 구성이 ‘대단히 흥미 위주의 가십(gossip)거리’와 ‘학술적인 고민을 요구하는 내용’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의 영문 제목은 ‘Mystery Museum(신비한 박물관)’이며, 원서(독어) 제목은 ‘Dinge, Die Es Nicht Geben Durfte(수용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들 - 필자가 한 번역이 맞나 모르겠다, 틀리다면 조언 부탁드립니다 -.-;)’이고 번역서의 부제는 ‘역사의 상식을 뒤집는 발칙한 고고학 여행’이다. 제목만 딱 봐도 대략 어떤 내용들이 나오는지 짐작할 수 있는데 대개 이런 책들은 아주 큰 단점을 하나 갖고 있다.

- 아무리 신기하고 놀랄만한 유물 · 유적이라도 학술적으로 접근하여 그 실체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고 흥미 위주로만 소개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가십거리 이상이 될 수 없다 -

지금까지 그런 류의 책은 많았다. 이미 古典이라고 불릴 만큼 널리 알려진 그레이엄 핸콕의『신의 지문』,『신의 암호』,『신의 봉인』,『신의 거울』시리즈를 비롯하여 최근에 나온 루크 베르긴의『고고학의 기밀문서』까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을 담은 책들이 아주 많다(필자는 이런 책들 중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소재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개 이러한 책을 쓰는 사람들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 ‘고대 지구인들은 외계문명의 영향을 받았다.’와 ‘현재 학계에서는 새로 쏟아져 나오는 이러한 자료들을 무시한다.’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책을 읽은 독자들 역시 ‘믿을 만하다.’와 ‘에이~그런 것이 어딨어~’라는 식으로 서로 상반된 입장을 보이게 된다. 이 책 역시 이러한 견해들이 엿보이고 있고, 독자로 하여금 서로 상반된 반응을 끌어낼 만하다. 단, 다른 책들이 신기한 것들을 소개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과 달리 이 책에서는 어떠한 과학적인 접근방법(특히 고고학과 관련된)을 거쳐 연구되고 있는지를 소개하고 저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이 책에 나오는 아이템들이 학술적으로 어느 정도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라는 것을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 

그럼 책에 대해 한번 얘기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책을 읽기 전 표지를 한번 보면 이 책이 굉장히 재밌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꾸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윗부분에는 영문 제목, 한글 제목, 한글 부제, 독문 제목이 차례대로 쓰여 있어서 표지를 딱 봤을 때 이 책의 내용이 어떠한지를 굉장히 강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래쪽에는 원형돔 지붕의 건물 사이사이로 이 책에 나오는 아이템들이 그려져 있었고, 그 주변으로 각 장의 제목들이 조그마한 크기로 빽빽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필자가 특히 재밌게 봤던 것은 ‘작은 구멍이 뚫린 해골(게다가 해골은 검은 양복을 입고 시가를 한 대 피우고 있다 ^^;) 옆으로 권총을 겨누고 있는 손이 그려져 있는 모습’이었다. 이건 이 책의 첫 번째 장에 해당하는 내용인데 이 그림 한 장으로 그 내용이 어떤 식인지를 알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필자가 책을 읽기 전에는 이 표지가 정확히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몰랐기에 처음에는 이 그림을 못 알아봤지만, 책을 다 읽고 이렇게 서평을 쓰면서 다시 보니 정말 재밌었다.

그리고 책을 뒤집어보면 ‘문명의 탐험가들이 찾아낸 13가지 고대의 비밀’이라는 문구 아래 이 책의 목차가 죽 나열되어 있었다. 차례대로 읊어보자면 ‘인간의 족보를 다시 쓴 유골 - 해머, 진화론에 금을 내다 - 바위 속 양서류 화석의 정체 - 고대 중국의 생화학 기술 - 태아 수정 과정이 담긴 암석 - 메소포타미아의 배터리 - 2100년 전의 천문학 - 19세기에 날아오른 파라오의 비행기 - 고대 아메리카를 찾아온 황금 우주선 - 기묘한 조각상을 좇는 사람들 - 신화 속 타락천사가 나타나다 - 콜럼버스를 끌어내린 바이킹의 비석 - 이집트 제사장의 과학’인데 목차를 본 사람은 느끼겠지만 일단 13가지 모두 엄밀히 말해 고고학적인 분야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돌아와서 ‘인간의 족보를 다시 쓴 유골’이나 ‘해머, 진화론에 금을 내다’, ‘바위 속 양서류 화석의 정체’ 등은 고고학보다는 고생물학 혹은 지질학 쪽에 더 가까운 소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고고학적으로 인정받는 고고자료가 되려면 일정한 발굴과정을 거쳐 출토양상이 뚜렷하게 밝혀져야만 하는데 이 책에 소개된 적지 않은 사례가 수습되거나 골동품 수집가에 의해 구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그저 ‘아~신기하다!’ 혹은 ‘음~그럴 수 있겠네~’라고 생각되고 말 뿐이다. 어쨌든 최근에 나온 책이라서 그런지 처음 보는 소재들이 많아서 일단 흥미를 갖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은 ‘추천의 글’이다. 저자인 라인하르트 하베크의 부탁을 받은 베스트셀러『미래를 기억하다』(국내번역서가 아직 없는 것 같다, 6개의 인터넷 서점 싸이트에서 검색되지 않았다)의 저자 에리히 폰 데니켄(신비주의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은)이 쓴 글인데 그는 말미에 이렇게 쓴다. 

- 나는 이 책이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낡은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 기대한다 -



이 책의 집필 의도가 어떠한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뒤이어 저자의 ‘Prologue’가 나왔다. 책을 읽다 보니 그가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라는 전시 기획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았다. 어디선가 이런 비슷한 것을 본 기억이 났다. 그런데 책장을 하나 더 넘기니 그가 기획한 전시가 아시아에서는 한국에서 첫 선을 보이고, 뒤 이어 일본으로 넘어간다는 얘기가 나왔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바로 나왔다. 작년 1~6월 사이에 신도림 테크노마트 특별 기획전시장에서 ‘세계 미스터리 유물전’이라는 전시가 열렸던 것이다. 관련 정보를 좀 얻어볼 요량으로 홈페이지(http://www.themystery.co.kr)를 들어가 봤지만 이미 전시가 끝나서인지(아니면 외압에 의해서인지?) 홈페이지는 폐쇄된 상태였다. 이런 종류의 책은 도판을 좀 많이 실어야 좋을 텐데 이 책은 도판이 별로 없어서 홈페이지에서 사진을 좀 보려고 했던 것인데 못 봐서 아쉬웠다. 그때 이 광고를 보고 가 볼까~했다가 말았는데 지금 좀 후회가 된다.

단점을 하나 꼽은 김에 이번에는 장점(?)도 하나 꼽아보려고 한다. 저자는 각 장마다 앞부분에 유명한 사람의 명언 같은 것을 꼭 실었다. 그것도 그 장의 내용과 꼭 맞는 것처럼 말이다. 마치 김용이 소설을 쓸 때 각 장의 제목을 사자성어로 쓰고 그 제목들을 다 이었을 때 하나의 멋들어진 漢詩가 되게끔 구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를 크라우스의 ‘생각하는 거야 자유지. 세금이 붙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한바탕 소동과 함께 곤욕을 치를 각오는 해야 할 거야!’라는 명언부터 시작해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3차 세계대전에서 어떤 무기로 싸울지는 모르겠으나 4차 세계대전에서는 분명 막대기와 돌을 들고 설칠 것이다.’까지 그 명언을 보는 것도 쏠쏠난 재미다.

그럼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첫 번째 내용은 ‘인간의 족보를 다시 쓴 유골’이다. 마치 강선 달린 총에서 강한 회전력을 띠며 발사한 총알에 맞은 사람과 들소의 두개골에 대한 내용인데 이건 뭐 신기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100만 년 전에 그러한 무기가 나올 리 만무한데 뭐라고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뒤이어 ‘해머, 진화론에 금을 내다’의 내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1억 4000만년 되는 지층에 쳐 박힌 순철로 만든 망치(그것도 엄청나게 순도가 높은)에 대한 것도 할 말이 없었다. 지층상 후대 유입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박힌 철기에 대해 과학적으로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이런 걸 볼 때마다 미래의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아주 먼 과거로 갔다가 그런 물건들을 떨어뜨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들이 일부러 떨어뜨렸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외계인이 와서 그렇게 했다보다는 그런 게 더 낫지 않을까? 아닌가? 암튼 이런 내용을 접할 때마다 당황스러운 건 여전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과학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들을 두고 그냥 말도 안 된다고 무시하는 것보다는 외계생명체의 존재를 인정하거나, 보다 먼 미래의 인류가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왜곡시켰을 가능성을 전제하고 그런 신기한 현상들을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도 싶다. 예전에는 국가를 상대로 한 음모이론이 단순히 가십거리나 흥밋거리로만 거론되었지만, 최근에는 인터넷이라는 엄청난 정보창고의 등장과 아주 느릿느릿하게 진행되는 국가기밀문서의 공개 등으로 인해 어느 정도 대중적인 내용들로 변한 것처럼 언젠가는 주류 학계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이런 내용의 책이 발간되어 번역되고, 또 저명한 신문사에서 고고학 도서 20선에 뽑히는 세상이니 말이다.

세 번째로 나온 ‘바위 속 양서류 화석의 정체’는 엄밀히 말하면 고고학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환경고고학이나 동물고고학쪽과 연관이 될려나? 아주 오랜 세월 단단한 바위나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구멍을 통해 들어간 공간에서 살아가는 양서류에 대한 이야기였다. 가끔 사람도 급한 상황이 오면 도저히 들어갈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작은 공간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봤을 때 이건 크게 신기해 보이지는 않았다. 또 과학적인 실험 결과 아주 작은 구멍들이 있다면 그것을 통해 숨을 쉬고 먹이를 얻을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비단 그런 경우가 양서류에만 해당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더 알아봐야겠지만 이 부분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넘어갔다.

일단 마왕퇴 무덤에서 나온 미라(이런 종류의 미라는 마왕퇴屍라고 따로 분류한다. 이집트나 고비사막 등에서 발견되는 빠싹 마른 미라와 다르게 촉촉하게 피부까지 살아있는 미라여서 말이다)에 대한 내용, 엄밀히 말하면 그 미라가 담겨져 있던 기묘한 액체에 대한 내용(고대 중국의 생화학 기술)이나 메소포타미아의 배터리로 쓰였던 항아리들, 2100년 전의 천문학, 19세기에 날아오른 파라오의 비행기 등은 미스터리라고까지 할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왕퇴 무덤이야 남쪽의 시황릉이라고 불릴 만큼 유물의 가치나 규모면에서 어마어마한 유적이고, 그 안에서는 미라를 둘러싸고 있던 액체 이외에 더 학술적으로 뛰어나고 신기한 것들이 많으니 말이다. 저자는 마왕퇴에서 나온 여러 의서에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처음 나온 내용들이 나왔다고 신기해하고, 그 안에 오행설을 기록한 죽간을 보고 오늘날과 거의 차이가 없다고 신기해하며, 후난성과 인근 지역을 그린 지도를 보고 마치 공중 측량한 것 같이 정확하다고 신기해한다. 동양에서 중국사를 전공하거나 중국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미스터리라고까지 이런 것들을 분류할까 싶다. 아마 이 책의 저자는『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이 중국 측 사료보다 더 정확하다는 것을 알면 까무러칠 것 같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오늘날 지도와 얼마나 정확한지 안다면 더 놀랄 것 같다. 이 부분을 보니 아직도 서양에서는 중국과 동양이 신비스러운 동네라고 여기는 것 같아 조금 이상했다. 이런 상황이니 중국이 동양의 전부 같고, 중국 것은 다 신비스러워하지. 마치 만리장성이 7대 불가사의라고 떠다는 것처럼 말이다. 수억 명의 백성을 거느리고 신에 근접한 인간 중의 최고 인간으로 군림한 역대 황제들이 그 정도 못 하는 게 더 이상할 텐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메소포타미아에서 도금을 할 때 썼다는 전기배터리 역시 과학적인 구조로 이뤄진 도구로서 필자는 오히려 그 자체가 신기한 것이 아니라 그 유물을 연구해서 그것을 전기배터리라고 밝혀낸 윌러드 그레이, 존 B. 페르친스키같은 과학자들이 더 신기했다.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 어떠한 이론적 논지를 전개하는 과학자들이 이런 비과학적인 상상(?)에서 기인한 실험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집트 하토르 신전의 벽에 새겨진 부조가 이런 전기를 이용한 도금행위를 나타낸 것이며, 우아스텍 문명의 장식물 역시 그것을 상징한 것이라는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정말 고대 문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발달된 사회였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단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만약 저자가 한국의 고고학 상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면 아마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국보 141호 다뉴세문경 역시 미스터리로 취급했을 것이다. 지름 21.2㎝의 청동거울 안에는 무려 수 ㎜ 두께의 선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는데 오늘날의 최신 기술로도 한 달이 걸려 복원했는데 똑같이 만들어내지 못 했다고 하지 않는가? 이걸 우리는 외계문명의 영향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외국의 이러한 사례 역시 보다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 각도에서 본다면 2100년 전의 여러 톱니바퀴로 만든 정교한 그리스 천문관측 기구와 기원전 25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집트의 새 모양 행글라이더 역시 그렇게 미스터리한 소재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세계에서 가장 먼저 철학과 과학이라는 학문을 발전시키고,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 건축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만들어낸 민족이라면 충분히 이 정도 과학기술은 보유하고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것들이 신기한 이유는 아마도 그 자체가 정말로 신기하기보다는 ‘오늘날에야 생각하고 만들어낸 것을 이미 예전에 만들어 냈단 말이야?’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조선 사람은 수레나 마차를 사용하지 않았고 당연히 도로나 다리도 제대로 닦지 않았지만 그보다 1,000여 년 전에 살았던 고구려는 이미 대동강에 나무로 다리를 만들고 왕복 4차선 도로를 닦았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 사실을 신기해하지 않는다. 다만 양국의 국가정책과 환경이 달랐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해석할 뿐이다. 그렇게 봤을 때 이 책에서 언급한 미스터리한 여러 것들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태아 수정 과정이 담긴 암석이나 고대 아메리카를 찾아온 황금 우주선은 정말 신기했다. 흐음~이건 아무리 개방적인(?) 사고를 열어도 도저히 오늘날의 시각으로 해석이 안 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스카의 선형유적이 오늘날 고고학이라는 학문 분야의 연구소재로 이해되는 것처럼 이러한 소재들 역시 언젠가는 과학이 보다 발달하면 고고학의 연구대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최근에는 진화론이 흔들리고 창조론(수정창조론이라고 해야 하나?)이 다시 힘을 얻고 있으며, 진화론만이 절대적으로 과학적이라고 믿는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인류 진화과정에서 미싱 링크를 찾기보다는 돌연변이나 변태 등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인류가 태어났다고 보기도 하니깐. 그런 상황에서 너무 현재의 과학적인 잣대로만 세상 모든 것을 규정지으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마지막의 ‘콜럼버스를 끌어내린 바이킹의 비석’(이미 노르만 계열 사람이 콜럼버스 이전에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거기 도착했다는 설은 공인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히려『1421-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의 저자 개빈 맨지스는 정화의 대원정에 참여했던 제독 중 1명이 이끄는 선단이 아메리카에 당도해 그 흔적을 남겼다고 주장하기까지 않은가? 처음에 이 책 보고 왕쇼크 받았지만 이제는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본다)이나 ‘이집트 제사장의 과학’ 같은 경우는 충분히 학술적으로 검토된 사항이 아닌가 싶었다. 이미 현재 남아있는 가축들 대부분은 고대 농부들의 지적 호기심 혹은 우연에 의한 잡종교배 및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녀석들의 후예라는 견해들이 학계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물론 그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가 현미경 등으로 본 유전자 조직을 그대로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관념적으로나, 경험적으로 그러한 개념을 이해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것들을 학술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오히려 몇몇 유물만 갖고 마치 신기한 것인 냥 소개하고 있어 그 점은 좀 별로였다.

뭐 이상이다. 그럼 이 책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한번 정리해보자.

장점 1. 학술적 내용과 가십거리가 될 만한 신기한 내용을 적절히 섞었다.
장점 2. 각 장마다 명사들의 명언을 실어 전체적인 내용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했다.
장점 3. 가십거리가 될 만한 신기한 내용도 학문적으로 검토하고자 노력했다. 

단점 1. 관련 도판이 너무 적어서 이런 종류의 책으로서 참고자료가 너무 적었다.
단점 2. 학술적 내용을 섞은 것은 좋았는데 너무 한쪽 면만 보고 소개한 것들이 많았다.

저자는 말미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메르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현명했다고. 우리가 남긴 최첨단 저장매체(DVD, USB 메모리, CD 등)는 수백 년도 못가 망가지고 없어질 텐데 수메르인들이 남긴 원시적이고 부서지기 쉬운 점토판은 오늘날까지 남아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맞다. 수천 년 뒤 고고학자는 21세기 인류에 대해 과연 어떻게 해석할까? 이런 것들이 문헌사학과 다른 고고학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인류 문명이 늘 발전되었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이래서 고고학을 공부할 때 큰 걸림돌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만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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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도 풀지 못한 인류 문명의 비밀 - 세계 미스터리 속 고고학 상식 세계 미스터리 속 사회.과학 상식 시리즈 3
왕옌밍.짜오용펑 지음, 김수현 옮김 / 파라주니어(=파라북스)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오늘은 조금 쉽게 고고학을 접할 수 있는 책을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제목은 조금 거창한 듯 하지만 이 책의 소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전반적으로 고고학과 관련된 신기한(흥미 위주의) 이야기들을 소개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고고학자가 아닌 출판사 편집장들인데 그런만큼 독자가 흥미를 느낄 수 있을만한 이야기들을 잘 선별했으며, 책의 구성이나 디자인 또한 깔끔하고 산뜻했다. 처음에는 나이 어린 독자들을 위한 책인 줄 모르고 구입했는데, 읽다 보니 어린이뿐만 아니라 학생이나 어른들에게도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책의 목차를 보면 크게 고고학의 미스터리, 민족과 종교, 풍습과 전통이라는 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장은 다시 5~6개의 챕터로 나눠져 있었다. 그리고 몇개의 챕터에는 말미에 '뉴스 속 고고학'이라는 Tip을 따로 마련해서 현재 그 문화재나 유적이 어떻게 이슈화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어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러한 구성은 어린이책의 전형적인 스타일인데, 이는 그만큼 독자들에게 가장 잘 어필할 수 있는 스타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옮긴이의 글' 부분의 배경에는 세계 지도가 그려져 있었으며, 각 장의 첫부분에는 선사시대 암각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런 디자인 하나하나가 이 책과 상당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장을 넘기면서 전체적으로 책의 구성과 디자인, 색감 등은 상당히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하나씩 넘겼다.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면 전체적으로 어려운 내용은 거의 없다. 오히려 다른 책에서 여러번 다룬 내용들도 더러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장의 'Chapter 01. 고대 트로이 전쟁의 유적은 어디 있을까?' 나 'Chapter 02. 로제타석에 담긴 상형문자의 뜻은 무엇일까?', 'Chapter 09. 신비한 스톤헨지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 등이 그러했다. 이런 내용들은 이미 고고학 관련된 서적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접하는 내용인데다가 이제는 어느 정도 일관된 견해들이 나온 부분이기도 해서 주인장의 눈에 크게 들어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Chapter 03. 남아메리카 피라미드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모방일까?'나 'Chapter 05. 미케네 문명은 어떻게 멸망했을까?', 'Chapter 07. 아마존 여인국은 정말로 존재했을까?'와 같은 부분은 상당히 볼만했다. 일단 이런 주제들은 고고학 관련된 서적에서 쉽게 나오지 않은 부분인데다가, 고고학적으로 상당히 오래전부터 연구가 진행된 내용이어서 어떻게 보면 대중적이라기보다는 학문적인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실제 전세계의 피라미드를 두고 이집트에서 전파되어 나간 것이라는 학설이 한때 지배적이었는데 이러한 전파론은 오늘날 수많은 비판을 받고 그 설 자리를 잃은 것이 사실이다. 고구려만 봐도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장군총과 같은 거대한 적석총을 수없이 많이 만들었는데 그러한 것들을 하나의 단일한 루트를 통한 전파론적 시각에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겠다. 또한 미케네 문명은 오늘날 해상민족에 의해 멸망했다고 알려져 있는데(물론 다른 견해도 있으며, 이 책에서는 그러한 여러 견해들을 소개하고 있다) '슐리만=트로이 유적'이라는 공식에 가려져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내용이어서 더욱 눈에 띄었다. 마지막으로 아마존 여인국을 고고학적으로 다룬 책은 이 책이 처음인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도 안동에 여인왕국의 왕궁터로 전해지는 유적지가 있으며, 동방에 여인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여럿 보이고 있는데 그것과 연계해서 생각하니 재미있었다. 특히 미국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카자흐스탄의 러시아 남부 초원에서 발견한 여성이 묻힌 무덤들에 대한 내용은 처음 접하는 것인데, 더 자세히 알아보면 재밌는 내용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Chapter 04. 파라오는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었을까?'와 같이 내용을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제목(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저주를 언급한 챕터다)은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고, 'Chapter 08. 이스터 섬의 거대한 석상은 누가 만들었을까'에서는 환경 변화와 인류 문명의 발전양상에 대한 내용이 조금 더 언급됐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장을 읽고 난 주인장의 소감은 '굉장히 잘 쓰인 책이다.'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책의 두 저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주제에 대해 서술할때 반드시 학계의 여러 견해들을 언급하고 있었다. 물론 두 저자가 각 주제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내용에 대해 하나의 일관된 견해를 피력하지는 않고 있다. 다만 그 주제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곁들이고, 그 주제에 대한 학자들의 상반된 견해, 혹은 변화된 견해 등을 소개한 뒤 오늘날 이 주제들이 어떻게 이슈화되고 있는지 언급하고 있는데, 그러한 구성들은 이 책이 전문성과 대중성을 겸비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한 내용은 'Chapter 09. 신비한 스톤헨지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에 가장 잘 드러나 있었다. 특히 솔즈베리 스톤헨지 복원도 및 우드헨지와 시헨지의 사진을 첨부하는 등 최근의 연구동향까지 잘 소개하고 있었는데 이는 독자로 하여금 상당한 수준의 고고학적 지식을 쌓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2장의 제목은 '민족과 종교'인데 앞선 내용보다는 덜 유명(?)한 내용들이 실려 있었다. 주인장이 눈여겨 본 부분은 'Chapter 03. 네안데르탈 인은 정말로 멸종했을까?'와 'Chapter 04. 인류는 어디에서 기원한 것일까?', 'Chapter 05. 북경원인의 화석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였다. 일단 챕터 3과 4의 경우, 인류학과 고고학 등지에서 아직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있는 부분으로서 지극히 학문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를 재밌게 풀어서 서술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전문적인 내용을 대중성있게 적절히 소화해서 풀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읽는데도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북경원인의 화석에 대한 내용(전쟁 중에 사라졌다는 내용)은 주인장도 얼마전『고고학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처음 접했는데 이 책에서도 소개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물론 주인장이 공부가 짧아 최근에야 이 사실을 알았을 수도 있지만 어린이용 책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고고학적 지식들을 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선했다.

3장은 이 책에서 가장 덜 고고학적인 내용이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또 그만큼 재밌는 내용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었다. 'Chapter 02. 로물루스의 약탈혼 전설은 지어낸 것일까?'만 봐도 주인장이 다른 책에서 접하지 못 했던 내용인데, 이러한 전설에 부합할만한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물론 이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다른 견해들을 내놓았지만 로마의 시조 및 혼인풍습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는 것 자체로도 볼만했다. 또한 'Chapter 03. 누가 스핑크스를 만들었을까?'의 내용도 처음 보는 내용들이 많아서 신선했으며, 'Chapter 04. 코코스 섬의 보물은 어디에 묻혀 있을까?'  의 내용은 오늘날까지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보물탐사와 어느 정도 결부되어 이해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상이다. 주인장이 앞서 여러번 밝혔듯이 이 책은 상당히 잘 쓰인 고고학 대중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도 단순히 삽화와 도판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하여 독자들에게 시각적인 효과만 극대화한 그런 책이 아니라 어느 정도 전문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책이다. 어린이 책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전문적인 내용과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게끔 소개된 여러 학설들을 담고 있는 것은 물론이요, 관련 전공자가 아니면 고고학도라도 쉽게 접하기 힘든 최신의 자료들과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어 어른들도 읽는데 전혀 모자람이 없을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최신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주인장에게는 상당히 큰 매력으로 다가왔는데, 요즘같이 인터넷의 발달로 어린이들도 클릭 몇번으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점에 이렇게 최신 내용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눈에 띄지 못 하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앞서 고고학을 조금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라고 소개했지만 그렇다고 결코 쉽게 읽고 잊어버릴만한 책이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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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9-09-07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재밌다고 하시니까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늘 좋은 책 추천 감사드립니다.^^

麗輝 2009-09-07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부담없이 읽는데는 아주 적절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번 읽고 소감 얘기해 주세요. 이거 제가 괜히 오바해서 소개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