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타운 ㅣ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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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의 주장


베어타운, 프레드릭 배크만, 2018.


  베어타운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 베어타운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굳이 베어타운을 설정할 필요가 없다. 사건도 마을도 모두 베어타운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이 세상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아이스하키의 명성만이 존재하는 소도시, 베어타운은 그저 세상을 조금 축소해 놓았을 뿐이다.


모두들 문화를 운운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모든 조직이 다들 자기들은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가 진심으로 원하는 건 오직 하나, 승리하는 문화뿐이다. 수네도 알다시피 모든 세상이 마찬가지지만 소규모 공동체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는 승자를 사랑한다. 딱히 호감이 가는 부류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승자들은 대개 강박적이고 이기적이며 배려심이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용서한다. 이기기만 하면 그들은 좋아한다.


  작은 마을일수록 공동체가 강하다고 하지만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에 따라  결속의 양과 질이 차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 하나하나의 삶이 곧 공동체와 동일시될 때 구성원이 아니라 공동체 자체를 고수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한 마을을 옮겨다 놓은 만큼 베어타운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생생한 캐릭터의 향연이 맛깔스럽게 펼쳐지며 마을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전한다. 베어타운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니 각종 사회문제들이 산재하고 사람들 사이 우정과 사랑, 음모와 배신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성폭력도.       


가해자에게 성폭행은 몇 분이면 끝나는 행위다. 피해자에게는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다.


그녀는 열다섯 살이니 부모의 동의 없이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나이라고 하고, 그는 열일곱 살이지만 다들 ‘어린애’라고 표현한다. 그녀는 ‘젊은 아가씨’다.


  가해자와 피해자인 청소년들을 대신해 부모와 마을 어른들의 대리전으로 이루어진 싸움은 ‘어른’의 정의와 상식으로 문제를 바라본다. 왜 공동체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지, 정의와 윤리와 상식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권력과 이익의 관점으로 보는지. 가해자가 공동체의 지지에 힘입어 어떻게 당당하게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아니 아예 죄를 짓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지의 반대편에 피해자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절대적인 악을 본 것처럼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여자아이들이 ‘기분 전환용’이라거나 오로지 ‘떡치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학습하게 함으로써 잠재적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 이렇게까지 묻는다면 글쎄, 집단사이에 갈등이 벌어졌으니 더욱 집단을 똘똘 뭉치게 하기 위해서라고,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될까. 그것을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사랑이 아니라 증오라고 베어타운은 보여준다. 아이스하키의 마을 베어타운은 아이스하키 우승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적이라 간주하고 그에 맞추어 사고한다. 마을의 변화와 성공이 아이스하키 우승이라면 아이스하키를 가장 잘 하는 선수는 마을을 구제할 영웅이므로 영웅은 절대로 가해자여서는 안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의리‘처럼 설명하기 힘든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의리는 항상 좋은 걸로 간주된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수많은 호의가 의리에서 비롯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가장 나쁜 짓도 바로 그 의리에서 비롯된다는 거다.


  베어타운이 아니더라도 마을에서 집단적으로 행해진 성폭행이 얼마나 많았는가는, 그것을 어떻게 은폐하는가는, 한국에서 일어난 실제사건들이 보여주었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그 결과들을 가늠케 한다. 그렇다면 베어타운은, 베어타운에서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상마을 베어타운처럼 결과 또한 가상 아니 환상이 아닐까. 삼월 말의 어느 날 야밤에 한 십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일에서 시작한, 베어타운의 이야기….


나중에 검은 재킷의 사나이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왜 그는 진실을 얘기하는 사람이 케빈인지 아니면 아맛인지 고민했을까. 왜 마야의 주장으로는 부족했을까.


  베어타운을 통틀어 이 문장에 이르러서야 감정이 폭발하게 된다. 베어타운이 아무리 마을 전체의 사람들 한명 한명에 서사를 부여하며 길게 이야기를 이어간대도 정체모를 검은 재킷의 사나이의 말이 의미하는 것만큼의 명료함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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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장화
헤닝 만켈 지음, 이수연 옮김 / 뮤진트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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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자화상

스웨덴 장화, 헤닝 만켈, 2018.


  스웨덴의 한 섬에서 살고 있는 일흔살 프레드리크 벨린의 집은 어느 가을 밤 불타버린다. 이웃 섬과 본토에서 한밤중에 불을 끄러 왔지만 제대로 된 고무장화 하나 건지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불타고 그는 겨우 목숨을 건진다. 외과의사로 의료사고를 낸 후 오랜 시간 홀로 살고 있던 그는 자신의 집 방화범으로까지 의심받는 신세가 된다. 의사이던 시절에도 인생의 무상함과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던 벨린에게 화재로 모든 것을 잃은 상황은 상실감과 인생의 회한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그의 삶은 환자의 엉뚱한 팔을 자르고 난 후 도망치듯 섬으로 들어와 섬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래도록 교류한 섬사람들은 특별히 그와 잘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고 벨린의 삶에 크게 영향을 끼칠 만큼의 성향도 아니었다. 하지만 화재와 함께 찾아온 딸 루이제와 취재차 온 어린 여기자 리사 모딘은 그의 삶을 결코 평온케 만들지 않는다.

  그는 리사 모딘에게 이성적으로 끌리며 사랑을 꿈꾸고 존재조차 몰랐던 딸의 황당한 행동에 힘겨워하면서도 딸 루이제를 챙기고 보살피려 애쓰며 섬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화재의 용의자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애를 쓴다. 그는 이렇게 화재 후 살아나던 상실감과 인생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감정 위에 애정과 분노, 희망 등을 섞으며 섬에서만 살던 삶의 패턴을 바꾸기도 하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노년이란 생물학적 나이는 그를 욕망에 충실하게끔 놔두지 않는다. 노년이란 죽음에 관한 빈도와 깊이를 더하게끔 하니까.


그렇게 곧 죽게 될, 그리고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보고 싶은 소망을 가진 중환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그 미술관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죠. … 그 사람들 대부분이 꼭 보고 싶어 하는 게 렘브란트의 자화상이에요, 그중에서도 특히 늙었을 때의 자화상. 눈과 눈이 마주하는 그 만남이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길을 좀 덜 고통스럽게 만들어주죠.


  마을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감정들 또한 쌓아간다. 외딴 폐가에서 수집벽을 갖고 살거나,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거나,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거나, 그들 또한 섬에 찾아든 자신처럼 고독과 두려움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음을 이해해 간다. 벨린에게는 마을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보고싶은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같았다. 


그 사람들에게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 내게서 그들 자신을 보아왔다는 사실을 이해 봄과 여름 동안 깨달았다.


어두운 현관복도에 가만히 서 보았다. 혼자 사는 사람의 고독에 항상 따라붙는 어떤 떫은 냄새가 분명히 느껴졌다. 불이 나기 전의 내 집에서도 같은 냄새가 났었을까?


  스웨덴 장화는 뭔가 다른, 독특한 특징이 있는 줄 알았다. 장화가 스웨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거나 장화의 최대 생산국이 스웨덴이라거나 그런 이야기라도. 하지만 스웨덴 장화에 대한 주목할 만한 특징을 찾지 못했고 작가와 소설 배경이 스웨덴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냥 평범하기 그지없는 장화. 노년이란 그냥 장화같은 것 아닐까.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고 가지고 있을 장화처럼 곁에 있는 것. 그런 장화지만 화재가 난 이후로 제대로 장화를 구할 수 없었던 벨린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이지만, 항상 그것을 맞을 준비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때로는 거부하고 싶기도 한 것이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잘 몰랐던 마을 사람들처럼 오랜 인생을 살아본 뒤에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제때 구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 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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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로니 프로젝트
김솔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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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o)

마카로니 프로젝트, 김솔, 문학동네, 2018.


  이탈리아 피렌체, 그곳에서 생활하지 않는 나에게 그 도시는 낭만적 공간이다. 관광객의 눈으로 바라보며 실생활을 잊는다. 100년 전통의 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 문화 또한 환상과 낭만의 분위기를 주는 요인이 된다. 주문해놓고 마시지 않은 커피, 맡겨둔 커피. 이 문화가 경제위기를 타고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커피를 마신 손님이 여분의 커피값을 미리 지불해놓으면 카페의 주인은 입구에 그 숫자를 표시해둔다. 그러면 누구라도 주인에게 무료 커피를 요구할 수 있는데 보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커피 없이는 하루를 시작하거나 끝낼 수 없는 나폴리에서 시작된 전통이다.


  이 카페 소스페스 문화를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킨 이탈리아 피렌체에 미국 본사를 둔 다국적 무기회사의 공장이 있다. 이 무기회사는 이탈리아에 어떤 문화를 심겨놓을까. 카페 소스페소는 여전히, 진행될까.

  본사는 피렌체 공장 폐쇄를 결정한다. 영업 실적이 부진하니까 더 돌아볼 필요 없는 결정이다. 진행해야 한다. 모든 직원을 해고해야 하니 저항하지 않게 잘해야 한다. 본사가 생각하는 ‘저항하지 않게’는 해고될 수밖에 없는 모든 직원들을 위한 최대한의 보상과 안정 협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본부장, 공장장, 부서 팀장들을 중심으로 한 ‘마카로니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들과 생존을 박탈당할 위기에 놓인 일반 직원들의 갈등 속에 본사는 관망하며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팀장들은 함께 일한 동료에 대한 안쓰러움과 배신한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힘겨워하고 직원들은 저항, 시위, 호소, 약탈 등등을 벌이며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이뤄진다. 이 소설은 공장폐쇄 과정에서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들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연대도 부르짖지만 미묘하게 파고드는 이간질에 넘어가며 나와 내 가족의 불안한 미래로 인해 당장의 이익을 더 생각하게 되고, 동료는 타인이 되어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마음들이 ‘이기심, 본성’이라는 이름으로 집결된다. 진창에 빠진 인간이 해야 할 생각과 행동, 마냥 선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할까.

  

인간에 대한 깊은 절망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어떤 절망도 극복할 수 있다는 확고한 논거가 될 수 있었다. 특히 누군가의 시체를 뜯어먹으면서도 여전히 불평하고 있는 자들의 이기심은 니코에게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의무들을 극명하게 주입해주었다. 돼지우리의 진창 속에 하루종일 코를 박고 살면서 정신적 순결과 우주적 이상을 갈망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리 밖으로 나오려면 돼지의 삶과 돼지라는 인식에서부터 해방되는 게 급선무였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공개되는 정부의 비밀문건에 비장하기도 또한 우습기도 한 작전명이 여럿 있었다. 한국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국민을 위한 중요하고 엄중한 것들도 있었지만 국가권력 유지를 위한 작전들이 수두룩했다. 비둘기를 위한 파티도 있었고 계엄령문건이나 사법부의 재판개입, 댓글공작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엄중한 작전명을 달고 진행되어 왔다. 김솔의 마카로니 프로젝트의 주체는 기업이지만, 뭐 다를 리 있을까. 사람의 삶을 진창으로 몰아넣고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무리들에 맞서야 하는 힘없는 자들의 노력은 늘 연대, 연대, 연대. 쉬이 연대를 무너뜨릴 힘을 가진 무리에게 패배하고 마는 이들이 가져야 할 높은 수준의 합리성과 순수한 선, 이 불합리한 균형. 절대적 선에 이르지 못했기에 절대적 악이 이기는 게임.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나약해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나약해진 인간은 오로지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서만 그들을 둘러싼 위험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데도, 더 많은 이익과 더 안락한 조건을 편취하려는 욕망에 이성이 마비되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인간이 늘어가고 있다. 실업과 파산과 가난의 대물림이 이어지는 세태에서 노동은 더 이상 자본가들에게 재갈을 물릴 수 없다. 교육조차도 혁명의 무기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소비가 혁명을 야기한다.


  이 책을 보며 생각했다. 프로젝트는 얼마나 많았을까, 라고. 지금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프레임들도 언론의 논조들도 따지고 보면 마카로니 프로젝트의 진행 아니던가. 목표를 위해 인간들의 연대와 선한 마음 사이를 파고드는 갈등 조장에서 믿을 만한 것이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은 모순이다. 결국 이뤄지는 것은 인간의 파멸인데, 단지 문학적으로 이상적인 표현으로서 인간 모두 파멸했다고 말한들 무슨 소용인가. 삶의 명백한 현실에서 패배는 또렷이 나타나는데.


인간이 파멸해가는 과정을 덤덤하게 적어 내려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기록하는 일이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파멸의 과정은 명징하고 짧지만 치유의 그것은 불분명한데다가 너무 길고 더디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쨌든 그 과정은 다를 리 없을 것이다. 무너진 인간이 어떻게 치유되고 회복되어가는가는 중요하다. 그것은 어렵고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직원들뿐만 아니라 공장이 있던 인근 식당이 문을 닫고 지역경제가 영향을 받는 상황이 묘사된다. 실제로 해고노동자들의 연이은 자살 소식은 해고라는 사건이 있은 지 오래 시간이 지난 후에도 들려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가에게 권력가에게 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 문화의 순수한 정신을 기대하는 일은 어려운데,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자들에게 절대적 선을 기대하는 일은 당연처럼 되는 것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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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하는 페미니즘 - 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정희진 서문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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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 그리고 건조기


빨래하는 페미니즘-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저, 2014.


  쨍쨍한 하늘 그리고 폭염, 빨래가 잘 마르겠구나.

  찌뿌둥한 하늘 그리고 폭우, 빨래가 안 마르겠구나.

  날씨가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나 팔할의 빨래 생각은 지극히 현실적인 반응일 게다. 내일을 위한 옷과 양말 유무는 밖으로 나가는 데 최소로 필요로 되는 것이니까. 또한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빨래 담당자’의 역할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나와 같이 빨래에 민감한 여성이 있으니 남편의 빨랫감을 집어던진 여자, 스테파니 스탈이다. 최근 페미니즘 경향과 변화의 움직임을 위해선 신간을 읽는 것이 적절할 텐데도 신간들에는 관심과 흥미가 떨어진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의 고전이랄 수 있는 책엔 여전히 관심이 간다. 실천적, 운동적인 접근보다 이론적이고 논쟁적인 책들에 대한 관심일까. 아무튼 그렇기에 페미니즘의 대표적 고전 도서를 ‘다시 읽기’하는 이 책은 다시 또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스테파니 스탈식으로 재세탁된 고전들은 저자의 경험과 버무려져 쉽게 다가온다. 원제보다도 한국판 제목이, 그리고 책표지가 아주 맘에 든다.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고 이야기한다. 인류를 바꾼, 가장 혁명적 발명품으로 세탁기가 상위를 차지하곤 하는데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 사회로 진출할 수 있게끔 했기 때문이다. 분명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의 발명으로 인한 가사노동시간의 단축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제는 날씨까지 극복하는 건조기, 건조기능이 부가된 세탁기도 등장하였으니 ‘여성’의 일이 얼마나 줄어들었는가. 그렇다. 여성의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을 뿐’이다. 여전히 빨래를 비롯한 가사일은 여성의 일일 뿐이다. 그것만은 세탁기가 발명되든 건조기가 발명되든 변하지 않았다.

  스테파니 스탈은 결혼, 임신, 출산, 육아를 겪으면서 페미니즘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문을 갖는다. 일을 가진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던 그녀의 ‘여성’의 자각은 꿈을 비롯한 많은 것을 포기하게끔 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현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이야기다. 이 혼란과 절망에서 사랑, 죄책감, 좌절이라는 어려움에 맞서기 위해서 스테파니 스탈이 선택한 것은 페미니즘 고전 읽기이다. 그녀의 이 선택은 그녀 자신을 혼란에서 나오게 해줄까. 같은 상황에 처해 같은 감정에 휩싸인 또다른 여성들의 삶의 변화를 이끌어 줄까. 페미니즘 고전이 등장할 때마다 그 책은 여성에게, 세상에 용기를 북돋워주고 모순된 것들을 일깨워주었을까. 페미니즘은 세상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자조에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스테파니 스탈이 들여다본 페미니즘 고전의 목록은 메리 울스턴그래프,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 베티 프리단, 게이트 밀렛,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개럴 길리건, 주디스 버틀러 등 초기 페미니즘, 급진적 페미니즘, 프랑스 페미니즘 등 다양하다. 이 책들을 개괄하고 요약하면서 스페파니 스탈이 처한 개인적 상황에서 느낀 감정을 이야기하기에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셜리의 어머니인 메리 울스턴그래프트와 시몬느 드 보봐르의 개인적인 생애에 쏠리는 관심은 그들이 주장한 페미니즘의 이론과 연계해서 더욱 생각거리를 안겨다 준다. 그들 작가들도 완벽한 생활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이론을 쓰윽 그려낸 건 아니었다. 한계에 부딪치면서 생각하고 깨치고 생각한 고민의 흔적이 담겨 있다.


한때 육아와 가사 노동은 여자들을 연대하게 만들어 주는 주제였습니다. 2세대 페미니즘은 그러한 연대의 힘을 바탕으로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가사 노동은 인종과 계급을 나누고 이민자와 비이민자를 가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남자들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 여자들을 진정으로 해방시켜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공통의 어려움을 가지고 연대했던 여성들이 같은 문제로 서로가 대립하는 상황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같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면 이제는 같이 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애쓴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서 비켜난 지엽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며 그렇게 연대의 틀은 무너져간다. 이러한 역할을 누가, 하고 있는 것인가.

 

일과 양육이 주는 만족도가 얼마나 큰지, 두 가지가 자아실현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비교해 보려는 시도는 허울만 그럴듯할 뿐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두 가지가 서로 다른 종류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직장 맘 대 전업 맘 전쟁’ 같은 자극적 기사들을 내보내면서 그런 중요한 차이를 언급하지 않은 채 오만하게 넘어가 버린다. 


  스테퍼니 스탈을 힘들게 했던 이 세상에서의 여성이라는 자각, 여성 성역할로 인한 스트레스와 히스테리와 함께 찾아왔던 가족과의 불화는 페미니즘 고전을 다시 읽으면서 화해 무드로 나아간다. 상황의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저자의 생각의 변화, 인식의 변화가 동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스테파니 스탈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경험이었고, 이 경험의 이야기를 저자는 세상에 들려주어 다른 이들로 하여금 혼란의 극복방법을 제시하게 한다.


정체성은 지식의 주체가 되는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존재란 과정, 이야기, 대화입니다. 항상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노력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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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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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항상 꽃뱀이 된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창비, 2017-08-30.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어느 시인의 성폭력 이야기를 들었다. 오히려 지금 이야기되는 것보다 더욱 충격적이고 경악스러워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물론 그 이야기를 전한 사람의 ‘권위’에 힘입어 이야기의 타당도와 신뢰성도 높았다. 그 시인의 시는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기에 시와 시인이 분리되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성향을 바꾸어 진보문학의 대가이자 더없이 능력있는 시인이자 문학활동가가 되었는지, 그와 관련한 이야기에 흥미가 솟기도 했다. 어쨌든 그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이다.

  그 시인의 이야기가 수면으로 올라왔을 때 ‘우와, 드디어’라고 안타깝게도 기뻐했다. 잘못을 시인하는 듯이 행동했던 시인은 외신에서 자신의 행동을 적극 해명하고 시간이 흐른 후 형사소송이 아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10억7000만원짜리 재판이 얼마전 시작되어 인터넷엔 여성 시인 이름만 실시간으로 올랐다. 호텔룸 제안 이후의 성폭력 폭로가 이어졌기에 무언가를 ‘노리는’ 폭로라는 부정적 시선도 있었다. ‘미투 권력’이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재판 진행 중인 사건을 둘러싼 거대한 구름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다 싶었는데, 내가 시인의 성폭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편해질 수 없는 마음이 리베카 솔닛의 『모든 질문의 어머니』, 침묵의 강요를 생각나게 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공격당한 경우라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여자를 비난하는데, 그것은 남자를 비난하지 않으려는 방편이다.


  참 이상한 것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남성의 ‘성폭력’은 당연하며 이해해줘야 하는 것으로 여성은 절대로 당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얘기된다. 이런 모순적 인식의 기저에는 오로지 ‘남자를 비난하지 않기 위한’ 이유만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리베카 솔닛이 말처럼 페미니즘은 남자들 일이어야 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여자들 일인 것은 그저 그 일이 여자들에게 저질러지기 때문이다. 그 일을 저지르는 건 대부분 남자들이니 어쩌면 페미니즘은 줄곧 남자들 일이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한국판 제목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의 원제는 『모든 질문의 어머니』. 리베카 솔닛은 경험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유머가 깃든 언어로 감각적으로 이야기한다. 지금도 여전히 여성혐오, 데이트 폭력, 디지털 성범죄가 만연하고 “물어뜯는 질문, 질문 속에 이미 답이 포함되어 있으며 실은 우리를 강제하고 처벌하는 것이 목적인 질문”만이 가득한 세상이다. 강요된 정답과 강요된 침묵을 ‘추구’받는 현실에서 여성이 침묵에서 벗어나 이야기해야 함을, 그러한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세상의 언어는, 이야기는 달랐다. 여성들은 항상 ‘어머니됨’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여성의 삶의 방식은 아기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이라는 인식 속에서 여성의 세상은 가부장제 속에서 차별과 편견과 멸시의 언어의 대상이 되어왔다. 모든 이야기들은 남성의 시각에서 이루어졌다. 심지어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리베카가 제시하는 「여자가 읽지 말아야 할 책 80권」 목록은 의미심장하다. <에스콰이어>지가 소개한 ‘남자가 읽어야 할 최고의 책 80권’의 책목록을 비튼 것이다. 리베카 솔닛이 우려하는 것은 이 목록을 좇는 독자가 이들 책을 통해 여성을 배우게 될 텐데 그들은 “여자를 배우고 싶을 때 찾아가야 할 전문가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남자들”이라는 점이다. 즉 이들 책은 여성혐오적인 시선이 가득한 책들로 익히 아는 작가들의 이름이 끝도 없이 등장한다. 탐정류의 소설에서 강간은 어떤가. 강간은 강간범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옷이, 여성이 먹은 것이, 여성이 간 장소가 저지르는 것처럼 묘사된다. 

“남자들은 일종의 날씨처럼, 주변에 감도는 자연력처럼, 우리가 다스리거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불가피한 무언가처럼 추상화 된다. 이런 이야기에서 남자들 개개인은 사라지고, 강간과 폭행과 임신은 여자들이 적응할 수밖에 딴 도리가 없는 날씨가 된다.”


이 나라에는 이런 식의 이야기가 많다. 믿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이야기, 가난의 원인이나 인종차별의 결과와 같은 현상을 드러내기보다 덮어 감추는 이야기. 결과에서 원인을 떼어내고, 의미를 멀찍이 치워버리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에 명확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새로운 인식이다. 오래도록 배제되었고 있음에도 그것을 명할 언어가 없었다면 이제는 개개인이 겪고 있는 경험을 묘사할 단어를 만들고 여성들의 이야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사물을 보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인식을 위한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일, 여성은 이야기가 필요했다. 침묵하거나 답정녀의 세상을 살지 않기 위해서, 나아가 더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차별과 편견의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갖는 일은 그렇기에 필요하다. 결국 리베카 솔닛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 힘닿는 데까지 진실을 말하는 일,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지를 아는 일, 특히 과거에 침묵당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 수많은 이야기가 서로 들어맞거나 갈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 혹시 우리가 가진 특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서 특권을 없애거나 그 범위를 넓히는 일. 이 모든 일이 우리가 각자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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