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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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참 불쌍타의 시절을 지나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문학동네, 2018.


  그러고 보니 영미소설의 대다수, 수많은 작가의 책을 정영목 작가의 번역으로 읽었다.   저자는 27년간 200여 권을 번역했다고 하니 놀랍고도 가늠되지 않는다. 이 책은 어떤 작가보다도 기억에 남는 번역가 정영목의 번역의 방법과 번역에 대한 생각이 녹아 있다. 독자들이 말하는 ‘번역투’ 문장에 대한 생각, 번역의 역할과 번역가로서의 자세, 번역과 글쓰기 등에 관한 저자의 고민과 생각 등은 번역 작가들 덕분에 여러 나라의 저작을 편하게 읽어왔으면서도 쉽게 ‘아, 번역투’라고 하던, 책이 흥미롭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으면 쉬이 ‘번역탓’으로 돌리던 것을 쑥스럽게 한다.

  레미제라블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 “너 참 불쌍타”라고 번역되었다고 김영하 작가의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이윤기 작가의 신화관련 책에서 도대체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고 영어 원문을 기재하지도 않은 ‘육준강대의’의 정확한 뜻을 찾아 원서찾기 전쟁을 벌였던 일이 생각난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가장 머리를 아프게 했던 번역서였고 배수아 작가가 독일에서 유학하고 로베르트 발저, 페르난두 페소아와 같은 작가들이 국내에 소개·번역되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난다.

  작가의 맛, 느낌을 알고 싶어 원문을 애타게 읽어보고자 했던 적도 있고 영미권이 아니라 동구권, 아랍권, 제3세계 작가들의 작품에 끌리는데 번역되어 있지 않아 읽지 못하고 있을 때의 기분은 답답함을 넘어선다. 그나마 영어로 번역된 것을 재번역하여 나온다면 환호하게 되는데 여러 면에서 우리나라 번역의 세계는 가야할 길이 멀고 고달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 작가들의 좋은 작품들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아 세계에 알릴 기회가 적다는 것, 또한 노벨상 후보로서의 위상을 얻는 일이 힘들다는 것,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의 오역 논란 등이 지속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마냥 안타깝기 그지없다.


서류 양식의 번역이라면 모르지만 소설의 번역은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배우처럼 불가분의 육체성이 번역에 붙어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를 교환하고 이해하는 영역에서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 개입하거든요. 아닌 척하고 싶지만, 투명한 체하고 싶지만, 번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 번역가의 무엇인가가 책 속에 남을 겁니다. 


  AI가 바둑 세계 제패에 이어 번역과 창작에까지 진출한다는 건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저자는 기계의 번역에 대해, 특히 소설 번역은 ‘사람의 일’이라고 말한다. AI가 멋진 번역가가 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말에 안심했던 사람으로서 번역이 사람의 일이라는 저자의 말이 와 닿는다. 계속 사람의 일이었으면 한다.


기계에게는 인간처럼 읽는다는 것, 즉 해석을 통하여 창의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오히려 읽지 않는 쪽이 효율이 좋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고, 따라서 기계는 텍스트를 읽는 길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그 나름의 우회로를 거쳐 인간번역과 같은 수준, 혹은 더 나은 수준에 이를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 우회로는 인간의 길과는 다를 것이다.


   저자는 번역가의 과제는 완전한 ‘번역’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언어’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문체를 우리말로 잘 옮기는 것을 중시하는 저자의 생각이 책 한권 한권을 번역하는 동안 번역의 원칙과 방법이 되었다. 이 책은 번역가가 되려는 이들에게 유용한 책이겠다. 번역이란 무엇인지 번역하면서 부딪치게 되는 고민들, 나만의 원칙과 방법을 찾아가기까지의 저자의 노하우와 깊은 생각들이 같은 직업을 선택하려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생각할 때는 자기 학대적인 면과 과대망상적인 면이 공존하는 듯하다”는 저자의 말이 확, 와닿는다. 그래서 일이란 언제나 힘들다. 내가 하는 일에서 원칙과 방법을 세워 나가는 일이 비록 자기학대를 부추기는 일일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함으로 일을 대한다면 때론 과대망상쯤은 허용될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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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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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지 오래됐다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교양인, 2018-02-14.


  내 인생의 영화라고 꼽을 만한 것이 없다. 딱히 영화를 즐기지 않으니. 이 폭염 속 극장에서 음료를 마시며 시원함을 즐기는 영화에 대한 환상도 없다. 가기까지가 귀찮아진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은 연례행사가 되기 일쑤다. 아니, 영화관에 가는 일이라고 해야 하나. 갑자기 ‘혼자서 보는’ 이라는 말이 낯설어진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과연 혼자서 하는 일인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보는 아는 누군가가 없이 영화를 본다는 말이다. 영화관은 사람으로 넘쳐나니까. 그럼 이건 혼자서 하는 게 맞나?! 그렇게 보면 철저하게 혼자서 하는 건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책을 읽는 시간은 철저히 ‘혼자’라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영화보다는 책이 혼자서 하기에 알맞은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해본다. 당연, 작가는 이런 질문을 예상했듯이 이렇게 말한다.


‘혼자서 본 영화’가 ‘나 홀로 극장에’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영화와 나만의 대면, 나만의 느낌, 나만의 해석이다. 나만의 해석. 여기에 방점이 찍힌다. 나의 세계에 영화가 들어온 것이다.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같은 몸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 몸(뇌)에 자극을 준 영화에 대한 해석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한 작품을 천만 명이 본다면 그 영화는 천만 개의 영화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하는 것에 대한 매력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여 이야기를 들어본다. 하지만 이 책은 혼자서 보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혼자서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인생 문제를 해결해주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에 타인이 필요치 않고,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외로움을 원한다고 말한다. 인생문제가 대부분이라도 해결된다는 이 뻔뻔스러운 고백에 28편의 영화를 보는 저자의 시선을 따라간다. 영화에 대한 감상보다 ‘혼자서’에 더 꽂혀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픈 마음이 더 크지만, 영화마다 시선을 녹여내는 작가를 따라가다 나도, 여러 생각에 잠기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자는 가족과 사회에서의 사랑과 상처, 젠더와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관한 평소의 시선을 그대로 녹아 낸다. 다양한 영화들 그 에피소드들에서 저자가 생각하고 주장하는 바에 관해 더욱 세밀한 시선을 채집하며 사회에서 수동적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여성에 대해, 그렇게 만드는 사회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희진 작가의 책을 읽었다면 젠더에 대한 저자의 시선을 알기에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강철비> <의형제> <용의자> <공조> 영화를 관통하는 시선은 재밌게 봐진다.


당대 남한 여성들의 낭만적 사랑의 욕구가 반영된 ‘남북’ 영화는 역설적으로 북한 여성이나 남한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성애 제도에서 보는 사람(관객)이 여성일 때, 대상(화된 인물)은 남성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사라졌다. 그래서 이런 영화들을 남북 화해와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영화라고 평가하는 것은 사실이 아닐뿐더러 위험하다.


  한때 북한은 ‘나쁘고 악하고 아름답지 않은‘이 총체적으로 형상화되었다. 그러던 것이 공공경비구역 JSA 즈음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최근 잇따른 북한이 소재로 등장하는 영화에서 북한에 대한 묘사는 확연히 달라진다. 북한 남성들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기본으로 멋진 외모까지 갖춘 남성으로 등장한다. 저자는 그런 변화에 영화의 주소비층인 젊은 여성들의 욕망, 북한 남성 판타지가 숨어 있다고 말한다. 젠더의식이든 이데올로기든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늘 자본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자본주의가 강자다. 이데올로기를 전환시키는 그 탁월함.

  

우리가 본 영화는 우리의 인생과 붙어 있다. 몸으로 영화를 본다.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아니라 관객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


  영화에서 저자가 집어내는 상처와 문제들은 대부분 젠더 문제로 귀결된다. 저자의 말처럼 영화를 보는 내내 저자가 살아온 삶이 어디에 머무는가를 보여준다. 타이타닉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장면이 화로에 끊임없이 석탄을 넣고 있는 노동자라고 말했던 운동권 선배의 시선을 떠올린다. 나는 책이든 영화든 이 사회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때그때 달라요… 그래도 책을 읽고 생각을 주절거리는 것이 인식 확장을 위한 노력의 한방편이라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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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잠든 동안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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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불완


세상이 잠든 동안, 커트 보니것, 문학동네, 2018.


  “한 가지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오, 올라갈 줄만 아는 사람들.”

  <유행병> 속 인물은 당대 유행하고 있는 병의 근원적인 원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잠든 동안』이라는 표제 아래 16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책에서는 이러한 인물들의 퍼레이드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한가지 밖에 몰라 다른 것에 대한 면역성이 없는 이들의 삶은 복잡하지 않지만 결코 단순하진 않다. 단순성, 하나에 대한 집착만으로도 얼마나 삶이 복잡해질 수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단편집인줄 몰랐다가 단편 하나가 끝날 때마다 아참, 작가가 누구였지 확인하게 되었다. 뭐라고, 커트…보니것이라고? 정말? 이런 생각한지 얼마되지 않아 또다시 작가가 누구더라,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진짜 보니것 작품이 맞아?라는 의문과 설마 내가 보니것의 문체를 모를 리가라는 당혹이 섞여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보니것 작품은 그의 사후에 출간된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집도 마찬가지다. 따져보자면 뭘 그렇게 보니것 작품을 많이 읽었기에 읽으면 ‘나는 보니것의 작품이오’를 알아챌 거라고 그러냐 싶었지만 보니것의 작품에서 느꼈던 매혹이 덜해서, 아주 덤덤하게 책장을 넘긴듯하다. 나 또한 보니것 문체의 한가지밖에 모르는 사람이겠다 싶다. 

  어쩌면 단편집이 가지는 같은 소재와 패턴의 반복 때문에 받은 느낌일 수도 있겠다. 특정한 한가지에 집착하는 인물들 외에 이 책속에는 ‘돈’이라는 소재 또한 반복적이다. 마치 자본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가한 찰리 채플린의 작품이 연상된다. 유행병의 대사와 잇는다면 결국 이 이야기 속엔 돈에 집착하는 인간의 삶이 주된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돈에 집착한다는 것은 곧 돈을 욕망한다는 것인데 대체로 돈에 대한 욕망의 과정도 결과도 거의 모든 작품은 긍정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하지만 보니것은 그것을 좀더 유하고 발랄하게 그리고 있다.

  자신이 만든 기계 여인에 집착하는 천재 공학자, 남성 잡지 속 여인에 빠진 남자, 모형 기차 만들기에 빠진 남자, 전통과 관습에 충실한 모범생 소년이 몰두한 그것으로 인해 외면하며 잃게 되는 것은 사랑하는 여인이다. 반면 돈에 몰두하는 이들은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되거나 유행처럼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돈이 없다면 굶어야 하고 예술을 하는 일은 멀고 험난하지만.


 “어떤 어머니들은 자기 아들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여자들에게 타인으로 만들려고 하죠.”

  <루스>는 아들에 집착하는 어머니와 며느리의 한판 승부가 펼쳐진다. 안타깝게도 며느리는 패배를 절감하는 순간 저 통렬한 말을 남긴다. 그렇다. 아들을 둔 어머니들과 며느리의 싸움, 왜 어머니들은 아들에 집착하며 모든 여자들을 타인으로 만들려 하는지 세월이 흘러도 알 수 없는, 궁극의 의문점이긴 하다. 하지만 아직 며느리를 두지 않은 탓인지 며느리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서다가도, 깨달음에 힘입어 어머니에게로 간다.


자기에 비해 포크너 부인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나 생각하니 기분이 더욱 들떴다. 포크너 부인이었다면 자신의 좁은 삶 속 비극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대합실에 그냥 앉아 있었을 것이다.


  물론 통쾌하지만 그것으로 머물렀어도 좋겠다고, 돌아서서 가지마라고 그냥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을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루스는 ‘자신의 좁은 삶 속 비극’을 살게 될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해 발을 돌린다. 이런.


한때 신이 당신에게 사랑하라고 주셨던 불완전한 사람을 봐줘요.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신이 허락하신다면,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고 조금이라도 좋아해보도록 해요. 그리고 여보, 제발, 다시 불완전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사람이 되어줘요.


  한가지 생각을 가치관, 신념, 중독 등의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쪽으로 기운다면, 물론 이미 지나치게 치우쳐 있지만, 그것은 모든 이들을 타인으로 나아가 적으로 돌리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들이 이기적이라는 말로 내버려두고 싶은데 굳이 또, 루스처럼 그들을 어여삐 여기며 그 삶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있어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싶다. 그들은 올곧이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제니>속 천재 공학자의 아내가 남기는 편지는 그들에게 남기는 글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그들을 포용하라며 남기는 메지지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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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
크리스틴 페레플뢰리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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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크로싱


지하철에서 책읽는 여자, 크리스틴 페레플뢰리, 현대문학, 2018.


  책과 함께 모험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폭염에는 쓱, 사라지는 모양이다. 지하철이나 기차를 타고서 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책 한권을 읽고 돌아오는 여정을 생각해보기도 했으나 폭염이란 움직이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가득차게 하면서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남겨두지 않도록 한다. 집과 직장을 오가는 생활을 하다가 출근 시간 두 정거장이나 먼저 내려 다른 곳으로 가면서 새로운 일과 맞닥뜨리게 되는 주인공 쥘리에르처럼 평소와는 다른 패턴으로 움직이면, 겪어보지 않은 새로운 일을 만날 수 있을까.

  쥘리에르가 일상적인 패턴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는, 아니 두 정거장이나 먼저 내려 평소와는 다른 출근길을 선택함으로써 맞닥뜨린 세계는 지각, 질책이라는 현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니라 ‘책 전달자’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는 곳이다. 지하철에서 졸음 끝에 꾸는 꿈이라도 마냥 희한한 꿈이겠거니 싶은 이 몽상과도 같은 세계는 ‘무한 도서협회’다. 한가득 쌓인 책을 정리하고 있는 남자 솔리망은 사람들에게 알맞은 책을 전달시켜주는 책 전달자의 역할과 활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달자는 책을 자연이나 기차 안에 되는대로 놓아둬서는 안 됩니다. 책들이 독자를 찾으려면 우연에 맡겨서는 안돼요. 그 사람이 책에 독자를 골라줘야 해요. 관찰하고, 더 나아가 어떤 책이 필요한지 감이 올 때까지 독자를 쫓아가야 하죠. 착각하지 마세요, 이건 진짜 일입니다. 우리는 도발하려고, 일시적 변덕 때문에, 혹은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선동하려는 의도로 책을 나눠 주는 게 아닙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그러지는 않아요. 나와 함께 일하는 훌륭한 전달자들은 큰 공감 능력을 가졌습니다. 상대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어떤 낙담과 원한들이 쌓여 있는지를 느낍니다.

  

  이 공간에서 편안함과 행복을 느낀 쥘리에르는 부동산 사무소로 출근하는 일을 그만둔다. 이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처한 상황과 내면을 관찰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위로와 조언을 해줄 책들을 전달하는 책 전달자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책 전달자라는 역할은 쥘리에르 자신에게는 모험이지만 점점 이 역할을 통해 타인을 도우며, 책 전달자의 의미를 찾아 성장하는 쥘리에르의 여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에게 공감되는 책들이 등장한다. 이 소설의 묘미는 그런 책들에 대한 소개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만 이 책은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책, 내 인생을 바꾼 책을 좀더 스토리를 가미해서 추천하는 서점의 도서목록이다. 조금 더 즐겁게 표현하자면 타인에게 책을 추천할 때 느끼는 쾌감, 희열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무한도서협회는 독서클럽 같았고 책 전달자의 역할은 각각의 회원들 같다. 살아가면서 고민을 겪는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하며 건네는 책, 그것이 그들 삶에 지금 고민에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야기할 때의 누군가도 결국 책 전달자인 것이다.


마침내 나는 두꺼운 책들 속에 모든 질병과 모든 치료제들이 감춰져 있다고 믿게 되었다고, 아니, 그렇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책에서 배신을, 고독을, 살인을, 광기를, 격분을, 다른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고도 나에게 뭔가를 강요할 수 있고 내 존재를 망가뜨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난다고. 때로는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할 수 있다고. 아프리카 소설이나 한국 동화를 읽다가 영혼의 단짝을 만나는 것이 우리 인류가 똑같은 악덕들로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서로 닮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덜 악해지기 위해 이럭저럭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그러기 위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에게 미소 짓고, 서로를 어루만지고, 무엇이 되었든 감사의 표시를 나눌 수 있다고.


  쥘리에르가 느끼는 모든 것을 체험하였기에 사람들은 책을 읽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인에게 책을 추천하고 또한 함께 모여 독서클럽을 만들어가는 것일 게다. 북크로싱book-crossing 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말이다. 북크로싱 안내서라고 할 만한 이 책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쥘리에르에 쉬이 공감하며 읽게 될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는 쥘리에르의 과감함을 부러워하면서 말이다. 다만 생각보다 책 전달자의 여정은 폭염 중에 읽기에는 아주 단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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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히샴 마타르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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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버지의 부재에 대처하는 자


귀환, 히샴 마타르, 돌베개, 2018-03-30.


  소설이라 여기고 읽던 책이 퓰리처상 논픽션 부분 수상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등장인물 한명 한명의 현재가 어떤지 알고 싶어졌다. 그렇게 찾은 한 명의 기사에선 익숙한 냄새가 흘러 넘쳤다.

  “독재자 카다피의 차남, 올해 리비아 대선 출마”

  

   이 책은 작가인 히샴 마타르가 실종된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여정이다. 그의 아버지 자발라 마타르는 어디에 있는가. 카이로, 뉴욕, 런던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는 히샴이 여덟살에 떠나온 나라는 리비아는 지금도 내전으로 정권이 안정되지 않고 난민이 속출하고 있다. 이런 불안정한 나라를 만드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 이는 1969년 군사 쿠데타로 리비아를 장악해 독재자로 군림한 무아마르 카다피다. 작가 히샴의 아버지 자발라는 카다피 정권에 반대하며 이집트 카이로로 망명했지만 영향력있는 자발라는 1990년 3월 12일 카이로에서 이집트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어 리비아의 아부살림 교도소에 수감된다. 히샴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히샴의 삼촌과 사촌도 많은 이들이 카다피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감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1996년 6월 29일 아부살림에서 1270명의 정치범들이 학살당했고 이후 아버지의 소식은 끊어졌다. 그러나 이날 이후로도 아버지를 보았다는 증언이 있었기에 히샴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은 리비아의 역사이자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꿈꾸는 이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히샴의 할아버지 하메드 마타르 또한 이탈리아 식민 통치에 투쟁했으니 리비아의 국민들은 오래도록 주권을 찾고 독재에 맞서는 투쟁의 역사를 지속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마침내 40년 독재집권자인 카다피는 이들 국민들의 저항과 투쟁으로 2011년 카다피는 축출된다. 그렇게 아랍의 봄이 왔고, 수감되어 있던 히샴의 삼촌과 사촌은 석방되었지만 아버지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1996년의 그 아부살림 교도소의 학살 현장에 아버지가 있었으리라는 것이 확실하고 사실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장면처럼 히샴에게 스며들기도 했다. 아부살림 교도소의 처형이 있던 그날 히샴이 6년 동안이나 감상했던 그림 대신에 마네가 그린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라는 그림을 오래도록 보고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운명을 느낀 어떤 힘의 작용을 믿게 한다. 무척 슬픈 장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계시리라는 희망을 가지던 가족들은 이제 명확한 언어로 그날의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려 한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히샴 또한 반정부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투쟁에 힘썼고 그또한 독재에 저항했다. 이 요구에 협상자로 만나게 된 독재자 카다피의 차남 세이프 알 이슬람은 지연작전을 쓰며 방해하더니 그의 포지션을 아주 잘 정하여 실천했다.


세이프의 측근들은 그를 비롯해서 삼촌들과 살레에게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석방 소식을 전했다. (…) 의례적인 인사말과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이 모든 것이 끝나자, 그들은 석방을 위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위대한 지도자에 대해 지금까지 반대했던 것을 공식적으로 사과한다는 서류에 서명하는 것.”


  세이프는 시위에서 정부 당국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의 가족에게 어떤 사과나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2011년 민주화 시위가 확산되었고 카다피는 은신처에서 시민군에게 체포되는 중 사망했다. 아랍의 봄이 없었다면 강력한 카다피의 후계자로 군림하였을 세이프는 카다피 집권 당시 대량학살 혐의 등으로 기소돼 2015년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곧 사면되었고 복역한 지 6년 만인 2017년 출소했다. 그리고는 곧 정계 복귀, 대통령 출마 선언까지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익숙한 행보…리비아는 지난날의 고통을 잊었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선보인 그 앞날을 보지 못한 건가.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아들이 다시 정권을 잡는 미래는 어떻게 될까. 학살과 사치의 독재자의 아들이 반성도 없이 사과도 없이 당당히 제 존재를 과시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 태어날 때부터 독재자의 아들로 권력을 쥐었던 자의 ‘나라를 위해서’라는 말이 헛헛하게 들린다. 그의 무개념과 나라를 제 것으로 여기는 몸에 밴 갑질적 사고가 불쾌를 넘어 치가 떨린다.   

  세이프가 독재자의 아들이라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세이프의 행보가 그가 제시하는 리비아의 미래를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비전과 신념은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대한민국의 독재자의 딸과 닮아 있다. 단지 그 딸이 독재자의 딸이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딸이 가지는 가치와 신념이 ‘독재자의 가치’를 우러르고 칭송하고 있기에 반대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간 대한민국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일들이 널려 있다. 2대에 걸친 독재정권에 의해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고, 가족들은 ‘죽음’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들을 히샴처럼 찾고 있을 것이다.

  갈 곳없는 반독재 활동가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던 히샴 어머니의 말없는 희생을 기억하는 누군가처럼 수많은 이들이 독재에 맞서 투쟁했고 희생했다.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이들, 그들은 히샴의 아버지처럼 억압의 시절들 속에서도 “어떡하든 살아남아라, 어떡하든 살아남아라”라는 메시지를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히샴이 이미 돌아가셨음을 인지하는 아버지의 행적을 찾는 것, 그가 이 험악한 독재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메시지를 다져가기 위한 길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히샴은 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를 그의 아버지와 자신으로 치환시켜 이런 생각을 전한다.


오랜 세월 동안 내 마음 한구석을 늘 차지했던 이 친숙한 시구가 처음으로 그 의미가 달라지고 확장되었다. 그 말들은 이제 텔레마코스에 대한 것만큼이나 오디세우스에 대한 것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자기 아버지가 여생을 고향 집에서 편안하고 위엄 있게 살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은 아들의 바람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래서 마침내 아버지가 편안하게 집을 떠나 고개를 돌리고 정면을 바라보며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해드리고 싶은 아들의 소망에 관한 이야기다. 오디세우스가 길을 잃고 헤매는 한 텔레마코스는 집을 떠날 수 없다. 오디세우스가 집에 없는 한, 아무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는 모든 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

   

“걱정 마라. 난 잘 있어. 난 잠시 지나가는 폭풍에 흔들리지도, 약해지지도 않는 산과 같은 사람이야.” 

  “깊은 미로 같은 동굴 안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극도의 절망 속에 유폐된 느낌”을 받았던 히샴의 생각의 전환은 아버지의 여정을 찾는 과정이 있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아버지와의 헤어짐이 방향감각을 잃고 길을 잃기 쉽게 한다는 그의 속내가 오랜 여정의 끝에 길을 찾음을 보게 될 때, 아버지의 부재는 부재가 아니었음을 느끼게 한다. 아니 올바른 방향을 나아가는 아버지의 부재는, 결코 부재로 남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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