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蟲)전쟁

세상 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사계절, 2013.


매우 억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있다. 아저씨 혹은 아줌마라는 호칭에서 누구도 품격과 인격을 연상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아저씨와 아줌마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명사는 뻔뻔함, 능청스러움, 악착스러움 등이다. “혈연관계가 없는 남자 어른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이라든가 “아버지의 친형제를 제외한 남자를 이르는 말”과 같은 사전에 등장하는 아저씨의 뜻은 잊어야 한다. 상식적으로 사용되는 아저씨라는 단어에는 돈 자랑이나 지위 자랑질을 일삼는, 상쾌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중년 남자라는 뉘앙스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그런 단어들이 있다. 품격과 인격을 배제하기 위해 만든 단어, 충(蟲). 그래도 한때는 김치녀, 개똥녀, 된장녀 등등으로 사람임을 분명히 하는 ~녀(女), ~남(男)이 꼬박꼬박 붙었더랬는데 충성스럽게도 충(蟲)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진 지 오래되었다. 일상생활에 사람을, 행동을 벌레처럼 바라보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하루가 멀다고 인터넷을 장식하는 충(蟲)에 관한 기사는 마치 그 단어를 직접 들은 것처럼 진절머리가 난다. 그런 일들이 벌어진 이 사회를 살고 있다는 사실에, 그 일로 오가는 제2차 충(蟲)의 전쟁에.

  이 글은 일찌감치 ‘세속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진절머리를 절절하게 고민한 학자 노명우의『세상물정의 사회학』중 ‘성숙’이라는 제목 아래에 있다. 배운 괴물들의 사회라는 부제를 달고서 그려놓은 이 글이 어제, 오늘 인터넷을 달구는 ‘맘충’이란 단어 때문에 떠올려졌다. 그와 함께 주목한 것은 이 사건들이 전해지는 경로였다. 일명 태권도 사건과 신도시 오줌사건이라 불리는 두 사건 모두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이해’라는 말로 문제를 ‘지적’하고 문제를 ‘무효화’ 하려 한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이 한 아이의 성장과 교육에 사회의 역할이 필요한 시대다. 아이를 위한 공동체의 협력과 지원이 필요하지만 비상식적 행동에 대한 정당성과 타당성을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나서서 그 올바르지 않음, 타인에 대한 배려없음을 교육하는 것이 사회가 할 일일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맘충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몰상식과 배려없음을 질타하는 것이겠지만 왜 맘충만 있고 파파충은 없냐는 목소리 또한 제기된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과 마음은 없이 돌고 돌아 혐오의 감정만을 발산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두 사건 모두 관련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인터넷에 게시했다. ‘올릴 게요’ ‘신고할게요’. 다툼이 벌어졌을 때 ‘소문낼거야’와 같은 말부터 쏟아내고 써내려간 글은 당연 사건의 일부만이 게재될 뿐이다. 다툼이 일고난 뒤 답답함과 억울함으로 하소연하고 조언받기를 원하는 심정을 모르지는 않으나 지인이 아니라 익명의 사람들부터 떠올리는 일은 어느틈에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걸까. 이것 또한 SNS 중독과 관련있는 인정욕구의 한 부분일까, 아니면 투쟁의 방법일까.


개인을 공적 의제로 삼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강해질수록, 방송국에 소소한 사연을 보내는 사람들은 늘어난다. 공적 세계에서 개인이 무존재가 될수록, 사람들은 집요하리만큼 사적인 개인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개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공적 세계와 개인이 과잉으로 넘치는 사적 생활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처량하게도 진자운동을 한다.


  장소와 인물만이 바뀐 비슷한 일이 매일 넘쳐나는 세상에서 각각의 사건은 개별적이지 않고 특정 군집이 되어 혐오의 카테고리에 안착한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라도 충(蟲)을 붙일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충(蟲)을 붙일 집단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보면 되는 건가. 저자는 무관심은 관념적 살인 무기이며 모욕은 자기 존엄을 추구하는 개인에 대한 관념적 살인이라 했다. 그러나 모욕은 일상이 되고 사람들은 관심과 무관심이라는 무기를 기막히게 잘 휘두르는 무사가 되었다.

  세속의 풍경은 평범한 일상의 나날이란 없는 듯이 흘러가고 있다. 좋은 삶을 살아보자는 학자의 시선이 세상을 두루 살피고 점검하는 동안 과연 좋은 삶을 살 수가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너무 많은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기에 차라리 보지 말고 듣지 말자는 생각까지도 들지만 이러한 세상을 잘 보고서 이치를 잘 알아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방어술을 익힐 수 있다는 저자의 말로 다시금 세상을 본다. 삶의 세태에 대한 저자의 설명과 통찰이 너무나 적확하기에 그래도 허허로운 감정이 길게 든다. 어떤 사건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피하고 싶지만 저자의 글은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어서 계속 보고파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가‘족’같은 사회


이상한 정상 가족, 김희경, 동아시아, 2017.


  ”모든 출생에 대한 차별없는 지원에 중점을 두고 출산율 위주 정책에서 삶의 질 개선을 위한 방향으로 전환“한다는 정부의 저출산대책이 발표됐다. 구체적인 내용과 집행은 정책의 방향을 따른다. “모든 아동과 가족에 대한 차별없는 지원”이라는 기조 아래 비혼 출산에 대한 지원을 시작으로 점점 확대될 다양한 가족형태에 대한 지원을 기대하면 좋은 걸까. 정치권은 선거가 끝나서인지 다른 일로 바빠서인지 내가 몰라서인지 저출산대책의 방향과 수준에 대해 딴지없이 조용한 듯하다. 이런 정책방향을 놓고 포퓰리즘, 세금낭비라 외치는 이들은 아직은 없고 실행력이 미흡하다는 지적만이 쏟아지고 있다. 이제 ‘가족’ 의미에 대한 변화를 인정하고 있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정책 집행의 편리성을 위해 만들어진 ‘표준’, ‘규격’이 사회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만드는 요인이다. 특히 군사정권은 획일화된 시스템으로 일군 정책을 최고의 문화와 가치인 것처럼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처럼 고정·확장시켜 따르도록 강요했다. 자세히 알아보면 생각보다 많은 규율이 모두, 그 시절에 한사람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가족주의’가치·이데올로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한국식 가족주의의 토대가 어떻게, 언제 ‘정책방향’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였는지를 알려준다.


전근대사회에서 가족주의가 지배주의적이었던 건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한국 사회의 특이한 점은 흔히들 가족주의가 약해지기 마련인 근대화 과정에서 가족주의가 더 강력해졌다는 점이다. 근대화 과정 내내 국가가 ‘선 성장, 후 분배’의 논리하에 거의 모든 사회 문제를 가족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국가, 정권을 위해 ‘가족이데올로기’가 펼쳐졌고 국민들은 신들린 듯이 그것을 따랐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불편하고 부당하게 타인을 억압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때부터 모든 문제를 가족이 책임지고 희생하는 것을 수용하고 신화처럼 퍼뜨리면서 국가에서 사회문제를 책임지고 복지를 확대하는 필요성을 불편하고 부당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의 근원에 이처럼 특정 정권에 의해 세뇌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근대화시키기에 약화되는 가족주의가 한국에서 강력해진 바탕에 국가가 개입되어 있던 시대,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가족에 관해서는 다시 근대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인가.

  ‘가족이데올로기’는 가족의 부정적인 기능이 더욱 강화되어 왔다. 특히 아내와 아이에 대해 ‘폭력’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인식을 비롯해 비혼·재혼·한부모·다문화 가정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 여성에게 부과되는 출산·양육·돌봄에 대한 과도한 책임, 국가주도로 이루어진 해외입양 등이 한국식 가족주의가 양산하고 있는 실태다. 나아가 한국식 가족주의가 결과적으로 양극화를 가중시키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사회정책이 가족 단위로 설계되는 방식이 지속되면 가족을 형성치 못한 개인, 가족에게서 충실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개인에게는 사회가 또다시 불이익을 가하는 셈이 된다. 또한 소득보장, 교육, 돌봄의 양과 질 등이 가족에게 의존적일 경우 계층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질이 달라지므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양질의 교육과 돌봄 서비스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가족에게 주어진 자유선택이란 곧 개별경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책은 이런 문제들을 외면하고 흔히들 ‘정상’이라 규정짓는 가족에게만 제도적인 혜택을 부여해왔다. 존재하는 모든 가족형태를 인정하는 정책방향에 지속적이고 굳건하게 굳어져 온 편견이 소멸될까. 저자는 ‘가족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도 제시한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저자는 ‘개인적 삶의 독립성을 보장하되 개인 삶의 질은 집단적 책임에 달려 있다’는 스웨덴의 예를 자주 들고 있다. 부모 체벌금지법이나 스웨덴의 보편적 공공보육방법, 육아상담소를 중심으로 한 부모교육 등 스웨덴의 전반적 복지정책에 대해 인상깊게 서술한다.

 

스웨덴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해법은 집단주의적으로 찾을 때 저출산을 비롯하여 우리가 겪는 위기를 해소할 길이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스웨덴과 비교하면 거꾸로다. 삶은 집단주의적이고 해법은 개인주의적이다. 개인의 개별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가족과 온갖 배타적 관계에 둘러싸여 집단주의적으로 살아가면서 육아, 교육, 주거 등은 다 각자 알아서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말이다.


  ‘내 가족일이니 관여치 말라’는 인식속에서 고준희양 사건과 같은 아동학대·살인이 지속되었고 아내에 대한 폭력을 넘어서서 ‘내 여친’을 들먹이며 데이트 폭력 또한 확산되고 있다. 이 폭력의 근원에 아이와 여성을 소유물로 보는 가부장제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는 관점이 존재한다. 우스운 것은 이러한 가족주의는 가족내에서만이 아니라 회사와 사회에서도 확산되는데 회사는 늘 ‘가족처럼’을 강조하며 사원들을 부림으로써 이익을 취득한다. 언론에 대고 변명인지 인식하지 못해서인지 들먹이는 각종 사장·대표·회장의 말은 “가족처럼 여겨서”이다. 가족처럼 여겨서 착취하고 때리고 막막하고 성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이렇듯 한국식 가족주의는 힘의 논리에, 입맛에 맞게 그 의미가 달라진 채 진행되어 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에 반대하는 개인의 인권의식이지 남의 아이도 내 자식처럼 돌보는 엄마의 눈, 전 사회의 ‘확대가족화‘가 아니다.


  저자는 촛불혁명을 거쳐 변화된 의식이 차별없이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를 형성하는데 역할을 하리라 기대한다. 여전히 배타적이고 편견과 차별은 이루어지고 있다. 의식은 양심에 기대어 변화하지 않고 욕망과 이익이 양심을 덮기도 한다. 일련의 사안들에 대해 근거없는 가짜뉴스들이 횡행하며 합리적인 판단을 흐리게 한다면, 편견과 차별을 부추기며 개인의 이익을 자극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 가족주의를 벗어나는 일도 힘겹지만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가 모두에게 어느 정도 합의된 수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막연하게 느껴진다. 저자의 기대만큼, 정말로 기대해도 좋은가 의문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족어 사전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를 기록하는 또다른 언어


가족어 사전,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2016-04-15.


  많은 작품을 썼지만 국내 번역본은 이 책만 있는 이탈리아 소설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는 파시즘 시대를 살아가는 이탈리아 유대인 가족의 이야기를,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썼다. 이 이야기는 실존 인물들의 이름이 그대로 등장함에도 소설‘로 분류되어 있다. 작가 자신이 ’소설‘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굳이 작가가 ’소설이오' 외치는 이유가 무얼까 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알았다. 처음엔 그저 가족의 실명을 써가며 내밀한 그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인가 생각했는데 이런 단순하고 일차원적 생각을 하는 것이 나탈리아와 나의 차이였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제법 낯익은 이름들이라 잘 알지도 못하는 가족들에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러하기에 이들 가족이 문밖을 나서면 맞닥뜨리는, 문 안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이탈리아의 상황이 비켜가기를 바라게 되는지도 모른다. 독재자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고 흔들던 파시즘과 인종차별의 시대. 이탈리아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시기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탈리아 현대사의 순간순간을 드러내는 증언이기도 하다.

  지식인으로 또한 독재에 맞선 반파시스트 운동을 한 나탈리아이기에 그들 가족들의 독재에 맞선 활약상이나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어떤 담론들이 경건하게 펼쳐지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 시기의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하게 내비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소설은 나탈리아 가족들의 유난스런 성격과 가족간의 대화에 집중한다.


우리 형제는 5남매다. 우리는 각기 다른 도시에 살고 있으며 어떤 형제는 외국에 산다. 만났을 때도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들끼리는 단 한마디면 족하다. 단 한마디, 한 문장, 우리의 어린 시절에 수도 없이 듣고 반복했던 그 오래된 말 한마디면 우리들의 옛날 관계를 단숨에 되찾는다.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우린 베르가모에 소풍 온 게 아니오’라든지 ‘황화수소산 냄새는 어떤지.’ 우리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는 떼려야 땔 수도 없게 이런 문장, 이런 말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문장들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존재하게 될 우리 가족 간의 연대감의 토대를 이루면서, 우리 중 누군가가 “친애하는 리프만 씨”라고 말하게 될 때, 그리고 곧 “그 이야기 좀 집어치워! 도대체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군!”이라고 말하는 성급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우리의 귀에 다시 울리게 될 때, 지구상의 이곳저곳에서 이런 말들이 다시 창조되고 살아날 것이다.


  생물학 교수인 아버지 주세페 레비는 고집불통에다가 막말도 서슴지 않는데 반해 어머니 리디아는 쾌활한 낙천가로 수다스럽고 집안일보다 다른 일들을 하기를 더 좋아한다. 오빠 셋과 언니 한명을 가진 막내 나탈리아가 ‘보는’ 가족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강하고 사사건건 주세페 레비와 대립한다. 문 밖에는 이탈리아 파시즘이 문 안에는 주세페의 파시즘이 성행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어쩌면 주세페의 아이들은 일찌감치 파시즘에 대항하는 법을 체현하여 반파시스트 운동에 적극적이고 필요성을 절감했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이 개성강한 가족은 유대계이며 억압과 차별을 겪었으리라는 점이 주요했을 것이다. 주세페 자신도 몇 번이나 수감되었고 그런 만큼 자녀들의 반파시스트 운동에 대해 자랑스러워한다. 또한 가족들이 관계하는 이들 대부분이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반파시스트 운동가였다. 그런 이들만을 만났다기보다 그저 이웃으로 친구로 같이 하던 사람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의 독재정치에 반대하게 되었을 뿐이다.


전쟁이 모든 사람의 삶을 즉각 뒤엎고 변화시키리라 우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항상 해오던 일을 계속해나가면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살았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결국엔 위험을 그럭저럭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며 혼란스러운 상태는 벌어지지 않을 테고 집도 파괴되지 않고 탈출이나 고문 같은 것도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도처에서 폭탄과 지뢰가 터지고 집이 무너지고 폐허 더미와 군인과 피난민들이 길을 뒤덮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동할 수 있는 사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베개 밑으로 머리를 밀어넣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전쟁은 그렇게 벌어졌다.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 하루하루가 어떤 형태였는지를 생각하지 못할 때가 있다. 전쟁에도 사람의 일상은 지속된다는 것을 잊게 된다. 거대한 사건에 영향을 받으며 세세한 하루의 삶들이 이어져간다는 것을 잊게 된다. 나탈리아 가족들의 말, 그들만이 통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작가는 이 소설을 써내려갔지만 다른 어떤 가족인들 달랐을까. 등장인물마다의 성격과 직업이 다를지언정 가족마다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가 가족문화가 있다.

  제삿날 각기 다른 곳에 사는 고모들이 모여 상차림을 두고 말들이 오갔다. 음식의 종류, 상차림 시간과 방법 등등. 그때에 고모들의 기준은, 문화는 어디였었나. 어린 시절 그네들 모두가 함께 해온 부모의 차림 예법이건만 시간이 흘러 ‘다른 가족의 문화’라고 말하는 그 지긋지긋한 수다에서 난 또다시 짜증과 함께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가족들만의 가족어로 가족 연대감과 시대의 이야기를 전했던 이 책이 생각났다. 가끔은 나도 작가처럼 가족문화에 우리들만의 충만함에 싸일 때도 있지만 때론 지긋지긋하고 연민의 감정이 느껴질 때가 있다. 열렬히 환영하고 싶지 않은 유대감, 이해하고 싶지 않은 감정에 벗어나고프기도 한 가족의 무게, 가족어 가족문화. 

  나탈리아가 자신의 가족들은 서로간 무신경하지만 단한마디만 족하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가족 역시도 그럴 것이다. 연이은 일들로 가족, 친척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은 어찌 이리도 닮았나 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머리를 내젓게 되는 어떤 것들이 있다. 가족문화는 어떤 경우엔 더욱 공고히 되기도 하고 사회에 맞부딪치며 수정되고 변화되기도 한다. 한사회도 그렇게 흘러가야 한다. 그리고 크고 거대한 사건을 기억하는 세상에서 그 사건들에 영향을 받을 수 없는 개인의, 가족의 역사는 그들의 언어와 역사로 기록되어 세상의 이야기와 맞물려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르카디아
로런 그로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도 찾아가는 곳

아르카디아, 로런 그로프,  문학동네, 2018-2-20.


  ‘인 아르카디아 에고(In Arcadia Ego)’.

  죽음은 아르카디아에도 있다. 모두의 이상을 모아 만든 유토피아에 이 문구를 걸었다면 그것은 자만일까 경각일까. 아르카디아는 “순수한 것. 대지 위에서의 삶이 아니라 대지와 더불어 사는 삶. 상업주의라는 악마에게서 벗어나 우리 손으로 일구어나가는 삶. 우리의 사랑이 세상을 밝히는 횃불이 되게 하는 것”을 희망하며 일군 공동체다. 최초의 아르카디아인 ‘비트’의 일대기는 아르카디아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과도 같다. 아르카디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비트는 그곳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존재이며 그곳에 대한 애정을 지우지 않는다. 비트는 그 공간에서 꿈꾸고 희망하고 사랑했다.

  비트의 시선으로 보는 아르카디아는 흔히 이야기되는 유토피아의 모습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때의 유토피아는 환경적으로는 아름답고 깨끗하고 문명이 거치지 않은 듯한 자연풍광을 가진 섬으로 묘사된다. 또한 함께 토론하고 일하는 사회다. 희망을 안고 출발했던 공동체는 오래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1970년대 히피 문화가 그러하듯이 아르카디아는 이상적인 목표를 가지고 그에 맞는 규칙을 정했지만 히피문화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약물은 그들의 지향을 무너뜨리는 원인이기도 했다. 실제 히피문화가, 그들의 저항운동이 보여주었지만 자유의 상징이 왜 마약과 약물의 절정으로 치닫는지는 참 모를 일이다. 자유와 방종의 그 끈끈한 관계. “자유가 너무 많으면 공동체는 썩기 마련이다. 그것도 아주 빨리.”  

  아르카디아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난 후 최초로 태어난 아이라는 상징성을 갖는 비트이기에 그가 아르카디아에 갖는 남다른 애정은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인구과밀과 가난과 굶주림과 갈등이 이어지고 마약과 범죄가 들끓는 아르카디아의 변화되는 모습에도, 사람들은 흩어지고 아르카디아는 와해되었어도 비트는 아르카디아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는 행복했던 곳으로 기억되는 곳, 아르카디아.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공부하던 “정신에는 자기 고유의 공간이 있고  자기 안에서 지옥의 천국도, 천국의 지옥도 만들 수 있다”는 『실낙원』의 문장이 비트에게 일찌감치 각인되었을 지도 모른다. 비트는, 이미 아르카디아라는 공간을 이상적인 곳으로, 유토피아로 구현해 놓았고 그리움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그곳이 무너졌든 아픔과 상실을 겪었던 곳이라는 것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아르카디아의 바깥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기억 속에 더 크게 자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르카디아 사람들의 실험이 모두 아름다웠던 건 그곳이 시골이어서가 아니란 걸 모르시겠어요? 중요한 건 사람이었어요. 서로와의 연결, 모두가 모두에게 의지했던 그 친밀함, 그것 때문이었다고요. 지금 시골 마을들은 다 죽어가고 있어요. 미국적인 작은 타운이란 것은 죽어가고 있고, 지금 그때와 같은 감정이 존재하는 유일한 곳은 여기, 도시예요. 수백만의 사람들이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바로 여기라고요. 이곳, 여기. 지금이 유토피아보다 더 유토피아예요. 이웃이라고는 딱따구리밖에 없는 아버지의 숲속 작은 집보다 더 유토피아라고요. 모르시겠어요? 우리 아이들 전부가 여기에, 아르카디아 아이들 거의 전부가 여기 도시에 있잖아요. 우리는 모두 도시로 왔어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요. 여기가 그것과 가장 가까운 유일한 곳이에요. 친밀함. 연결. 이해하시겠어요? 다른 곳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비트가 외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공간적인 특성이 유토피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 함께 했던 공동체의식, 그러한 것들이 유토피아를 규정한다는 것을. 그러나 현재 안전하게만 보이는 도시 공간 역시 지속적인 안정을 보장하지 않는다. 비트가 사진작가로, 교수로 살아가는 도시는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된다. 알 수 없는 병이 휘도는 세상을 떠나 비트가 찾아간 곳은 아르카디아다. 엄마가 없는 그의 딸 그레테와 루게릭 병을 앓는 그의 어머니 해나와 함께. 어쩌면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공간을 떠난 뒤의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기 위한 이유일지 모르나 다시 돌아온 폐허가 된 아르카디아라는 공간에서 비트가 보는 것은 유토피아와도 같은 지상낙원의 아르카디아, 그때의 모습이다.

  소설의 분량은 제법 되는데도 아르카디아에서 벌어진 사건보다도 아르카디아를 묘사하는 문장이 많다. 그렇기에 비트의 긴 인생의 시간은 너무나 쉽게 축소되어 이야기된다. 매력적이게 아르카디아를 묘사하려는 작가의 노력에 비해 아르카디아가 그렇게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쉽게 아르카디아의 몰락이 서술되었다는 것도 크지만 이상향으로 추구하는 공동체적인 질서를 갖추고 생활하는 모습이 매우 적게 서술되었던 것도 이유가 아닐까 한다. 아르카디아가 시골이어서 유토피아가 아니라 서로간의 친밀함과 연결이 유토피아였다는 말,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아르카디아의 대표인 핸디는 공동체의 리더로서의 역할과 자질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아름다운 아르카디아의 환경을 제외하고 애당초 아르카디아라는 공동체가 잘 유지되었나 싶고 핸디가 왜 아르카디아의 리더인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애써 갖추려던 아르카디아의 공동체적 질서가 이상적인 지도자에 의해 잘 운영되고 곧 쇠락이 이어졌더라면 아르카디아의 실패를 더 안타까워했을지 모르나 아르카디아를 세우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던 비트의 부모, 에이브와 해나의 노력에 비해 턱없이 아르카디아는 무너졌다. 유토피아는 결국 신기루인가 싶을 정도로.

  아르카디아 사람들의 친밀감과 연결이 잘 형성되고 공동체적 질서가 잘 유지된 이상향의 모습보다 아름답고 깨끗한 어느 휴양의 섬같은 이미지로만 작가가 아르카디아를 그려놓은 듯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신화를 읊조리는 듯한 작가의 문장에 힘입어 나홀로 그렇게 이미지를 형성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등장인물 역시도 인과가 명확치 않은 채로 흘러 서사는 묘사에 숨겨진다. 그럼에도 아르카디아를 읽고 나면 길도록 쓸쓸함과 비트와 비트의 아버지, 에이브에 대한 연민이 생긴다. 아, 그건 서사의 힘이겠다.

  마음속으로 그리는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으로 아르카디아를 그려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 수많은 이야기들은 ‘문명’이 가해지지 않은 모습의 유토피아를 그린다. ‘문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음인가. ‘인 아르카디아 에고(In Arcadia Ego)’. 죽음도 찾아가 머무는 곳. 유토피아. 비트의 생각처럼 유토피아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의 공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민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듦 

세실, 주희[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젊은작가상 9년. 그동안 보아오던 낯익은 이름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올해 수상작가의 단편 한두편을 읽었으니 이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대거 신입사원을 만난 듯한 기분과 함께 세월이, 이렇게도 흘렀구나 싶었다. 점점 깨닫게 된다. 내가 살아온 경험치가 소설속 현장을 이해하는데 모자라다는 걸. 생각을 더하게끔 하는 소설속 주요 ‘사건’을 직접 겪거나 지근거리에서 보거나 몇 명에게서 전해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직업이나 행동반경이 그리고 사고방식이 어느 정도 ‘상상’을 동원하게끔 하는 ‘현실’에 있다. 분명 현실인데 내가 경험한 현실과는 조금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 아, 세월, 나이, 이해, 그런 것들이 생각난다. 내가 살아온 그 틀에서 기본적인 이해를 하게 될 텐데, 이때의 나의 이해란 얼마나 보잘것없음일까, 아니 구시대적인 것일까. 이런 기분들로 인해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세실, 주희」속 대사를 빌려, 이번 작품집을 읽은 끝이 고작 나이듦을 느끼는 것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도 너처럼, 주희가 여행 내내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었다. J처럼 무람없이 외국 사람들과 어울려보고 싶었고, 그들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 끝이 고작 포르노 영상이 되리라고는 주희는 예상하지 못했다.


  박민정 작가의「세실, 주희」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은 동일한 경험을 통해서임을 새삼 실감했다. 감정이입과 이해의 깊이에 개입되는 동질감의 차이가 있음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조건이 아니라는 것도. J와 주희와 세실의 경험이 병렬적 구조로 구성된 이야기는 흥미로웠지만 폭력을 당한 느낌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주희에게서. 주희는 뉴올리언스 마르디 그라 축제에서 겪은 끔찍스러운 경험으로 인해 안내자이기도 했던 J에 대한 반감을 가진다. 타문화에 대한 동경과 J에 대한 선망이 어우러진 여행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당혹스러움 이상이었다. 하지만 주희는 그 상황을 복기하며 ‘모든 게 내 탓이오’ 쪽으로 무게 짓기도 했다. 포르노 영상의 피해자가 하게 되는 반성은 늘 안타깝고 화가 난다.

  주희가 깨달은 바는 단지 그것만은 아니고 주희가 겪은 일과 세실이 겪은 일은 커다란 차이가 있지만 소설에서 두 상황을 병렬선상에 놓고 있으므로 주희를 통한 세실의 경험은 또 다르게 다가온다. 어쩌면 주희가 J를 통해 통렬히 깨달은 것을 세실에게 전가하는 것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배려를 가장한 무심함, 상황을 인지하면서 행하는 가해를 알기에 느끼는 공포였을지도 모른다. 좀더 ‘친절’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주희가 당한 그 불편하고 부당한 경험이 확산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전쟁영웅의 후손으로서 세실이 참여하게 되는 위안부 집회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더 타당했으리라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강박 또한 있었을지 모른다.

  그랬어야 한다고,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주희에게 은연중에 질책하는 나를 보고 적잖이 당황스러웠다면 삶의 어떤 문제들에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한 다음, 그것으로 끝내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오지랖이 넓지도 않거니와 정의감이 투철하지도 않고 더하여 어느 정도 소심함마저 지녔다면 주희와 다를 리 없었을 거라는 깨달음, 굳건히 박혀 있는 집단의 이데올로기, 내가 아는 선에서의 이해, 그럼으로 인한 타인에 대한 몰이해, 그렇게 행하는 방관 내지 폭력. 내가 살아온 경험이 이미 굳어진 시각과 행동패턴의 나를 만들어 냈고 타인을 이해해보고자 경험타령을 해본다 한들, 그것의 온전한 이해는 나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거듭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