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지음, 정지인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당방위를 고민하며


혐오사회-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2017-07-18.


  생각해보니까 2017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후딱 지났다. 극도의 긴장감이 떠나지 않았던 한해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이 되니 길었다보다는 역시 짧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지나갈 해에 대한 아쉬움이려니 싶다. 더구나 한해동안 맑고 밝은 긍정적인 단어보다 칙칙하고 어둡고 부정적인 단어 속에서 살아왔으니 해결치 못한 찝찝함이 가득하다.

  올 한해도 여전히 혐오의 프레임 속에서 살았다. 삶이 힘겨워서인지 가치가 실종되어서인지 타자에 대한 혐오는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혐오의 프레임은 대중에게서 퍼져나가기도 했겠지만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조장하고 이용했다는 점이다. 혐오와 증오의 감정이 확대되고 구조화되어 타인에 대한 멸시와 폭력을 당연시하고 나의 편을 가르는 이 과정을 너무도 좋아하기에 정치권은 이 혐오를 계속 이어갈 것이다.

  카롤린 엠케는 「혐오사회」에서 이 점을 이야기한다. 혐오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라 얘기한다.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고 훈련되고 양성된다.” 그렇기에 이것을 자발적이고 개인적이라 간주하는 한 이 감정을 양성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기본적으로 이 주장에 동감하기 때문인지 이 책은 책장이 쉽게 넘어갔다. 현학적이지 않아서 저자의 글을 현실과 대입해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도 있다. 저자 카롤린 엠케는 오랜 시간 동안 세계 분쟁지역을 취재한 저널리스트이고 성소수자라고 한다. 저자의 경험이 구조화된 혐오와 증오의 현상을 분석하는데 바탕이 되었기에 그 시선을 포착해내는 것이 달랐으리라 본다. 그렇기에 좀더 생생한 사례들과 그에 대한 명민한 생각들이 기술될 수 있었다고 본다.

  혐오에 대한 현상은 비슷비슷하고 분석도 비슷하다. 결국 같은 것을 겪으면서 이유를 알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 생각하게 된다. 해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해결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습관이란 늘 생각도 변화도 하기 싫은 법이니까. 올 한해도 반복된 혐오의 뉴스는 지역과 대상만을 달리해서 내년에도 이어질 것이다. 더구나 당장 크나큰 선거가 눈앞에 있으니 얼마나 이 치열하고 저열한 혐오의 언어들을 맞닥뜨리게 될지,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어떠한 혐오의 언어에는 휩쓸려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생겨난다.


증오는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폭력 또한 단순히 거기 있는 게 아니다. 준비되는 것이다. 증오와 폭력이 어느 방향으로 분출되는지, 누구를 표적으로 삼는지, 또 그러기 위해 먼저 어떤 장벽과 장해물을 제거하려 하는지, 이 모든 것은 우연하거나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된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혐오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확산되고 상대적으로 인종에 대한 혐오는 덜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사회 역시 다문화가정과 새터민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진행해왔다. 상대적으로 노출이 덜 되었을 뿐. 세계적인 인종차별과 혐오에서만큼은 한국은 비켜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만큼 순수혈통, 단일민족에 대해 자부심을 치켜세우는 민족이 또 있을까. 가시적으로 보게 될 혐오의 언어를 미리부터 걱정하고 있는 것도 참 미련스럽게 보이지만 혐오가 가지는 힘을 무시할 수 없기에 그렇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순수성’ ‘표준’에서 벗어난 것은 예외없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 개입되어서다. 한번 잘못된 이 인식을 돌리는 것은 어마어마한 폭력이 지나간 후에도 이뤄질까 말까하다. 지난 대선 토론에서도 성소수자 논쟁이 곧 무시할 수 없는 혐오확산으로 이어지는 현장을 봤다. 동성애자가 에이즈를 확산한다는 그 인식과 더불어 다른 사람이 싫어하니까 맹목적으로 혐오에 동조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누군가 지속적으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참으라고 한다. 그 폭력에 맞대응하면 쌍방폭력이 된다. 정당방위가 아니라 쌍방폭력이 되고 마는 현실 때문에 혐오와 증오에 관한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 구조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해결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는 것이 한순간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봤더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욕설에 욕설로서라도 맞대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일방적이 되고 만다. 특별한 일이 되지 않은 채 넘어가는 일상적인 일로 치부되고 만다. 맞대응해야 보는 사람도 흥미롭게 관전한다. 세상이 그렇다.


증오와 순수의 광신주의에 맞서려면 시민사회와 시민들이 나서서 배제와 포함의 기술들에, 어떤 사람은 보이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인식의 틀에, 개인을 집단을 대표하는 표본으로만 보는 시선의 체제들에 저항해야 한다. 모든 사소하고 저열한 형태의 멸시와 굴욕에 용기 있게 이의를 제기해야 할 뿐 아니라, 배제된 이들을 지원하고 연대할 수 있는 법률과 실천도 필요하다. 그밖에 다른 관점들과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인식시킬 수 있는 다른 서사들도 필요하다. 증오의 틀을 무너뜨려야만, “전에는 서로 다른 것들만 보였던 곳에서 비슷한 것들을 발견할” 때에만 공감이 생겨날 수 있다.


  「혐오사회」에 대한 이 맞대응 방식에 대해 저자는 모두가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제도적 차원에서 이 혐오와 증오의 구조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사회문제를 바라보고 그에 대한 대안을 얘기할 땐 항상 이렇게 끝이 난다. 인식과 구조의 변화. 그래서 어떻게라고 그 세세한 방법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더 큰 고민의 장으로 넘겨버린다. 책을 읽을 땐 그 현상에 대한 분석자체에 힘이 실리며 만족스러움을 느끼다가도 현실로 넘어오면 뭔가 아득하다. 실천과 변화를 너무나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하게도 된다. 어쨌든 문제인식을 명확히 하고 난 후에 대안을 찾아 나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혐오의 상황은 너무 깊고 넓으니까. 그럼에도 혐오와 증오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일련의 매커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혐오사회」를 읽는 내내 카타르시스는 최고조에 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