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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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공주를 모셨지

 

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문학동네, 2009.

 

   기차를 탔다. 배가 고파 잠시 정차한 역에서 급하게 핫도그를 샀다. 가진 건 만원 지폐라 어린 장사꾼이 돈을 거슬러 줄 때까지 기다린다. 기차가 떠날 시간은 다가오고 마음은 급해지는데 어린 소년 장사꾼의 행동은 굼뜨기만 한다. 기차가 출발하려 한다. 기차냐 잔돈이냐. 한발은 기차를 향해 한발은 소년을 향해 가는 몸은 결국 기차속으로 빨려가 소년과 작별하고 만다. 가면서 생각하겠지. 저 맹랑한 녀석, 두고보자! 저 맹랑한 녀석, 그래 잘 벌어서 잘 먹고 잘 살아라! 저 맹랑한 녀석, 저 녀석!

   그 맹랑한 녀석 디테는 호텔 수습 웨이터이다.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말라”는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모든 걸 봐야 하며 모든 걸 들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는다. 호텔이란 그런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지만 그들을 보면서도 보지 않은 척해야 한다. 디테는 집시들이 피를 튀기는 난동이 벌어져도 아무런 동요없는 호텔에서 그가 교육받은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아간다. 호텔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다. 온갖 기행들을 일삼는 이들이 있고 그 행동의 바탕이 돈이라는 것을. 돈의 힘! 핫도그를 팔아 등친 돈으로 드나들고 라이스키 창녀촌에 드나들며 거금을 뿌리며 돈의 위력을 알아간다. 물론 디테의 꿈도 자연스레 백만장자가 된다. 돈의 힘!

   디테는 호텔 파리에서 영국 왕을 모셨다는 스크르지바네크 지배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지배인은 겉모습만으로도 손님이 원하는 것과 손님에 대해 척 파악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그 이유를 물으면 지배인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영국왕을 모셨지.”

   디테에게도 이런 날이 왔다. 아비시니아 황제에게 봉사할 기회를 얻게 된다. 황제를 영접하는 호텔의 풍경은 상당히 재밌게 펼쳐진다. 신난 디테의 모습이 상황을 묘사하는 속에 가득하다. 이 맹랑한 소년 디테도 이제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셨지”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건가. 훈장까지 받았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거다 마침내 지배인처럼 호텔리어로 성장하게 되는 걸까. 다음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디테가 이끄는 대로.

   작가는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어 보이는 등장인물들을 화자로 내세워 유머와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블랙코미디를 펼친다. 이야기의 표면은 아, 참 재밌네 싶지만 곧 닥치는 슬픔의 감정은 끝이 없다. 그의 별명이 바로 ‘체코 소설의 슬픈 왕’아니던가. 그럼에도 표면적으로 밝게 이끄는 그의 이야기의 힘은 이 소설에서도 초반까지는 유지된다. 체코의 그 파란만장한 역사에서 체코를 떠난 적 없는 작가의 이 작품은 1971년도지만 출판 금지로 비밀리에 유통되다 1989년에서야 체코에서 공식 출판되었다 한다. 18년을 떠돌다 정식출판된 이 책은 출판을 저지하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 맹랑한 디테, 과연 성장하면서 어떤 일들을 겪기에!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디테는 들어간다. 아니 제 발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저 있었을 뿐인데 그런 상황을 맞았을 뿐이다. 디테는 자신의 생에서 불행과 행운이 함께 했다고 말한다. 디테가 독일인 리자를 만난 것은 사랑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지만 그것은 불행과 행운을 몰고 왔다. 어쩌면 그때부터 디테의 삶은 역사 속으로 깊이 관여된다.   

  더 이상 소년이 아닌 만큼 어릴 적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행동해서는 안될지 모르겠지만 디테는 여전히 그가 호텔 속에서 배우고 익힌 방식 그대로, 그저 그 틀에서 성장해 갔다. 독일인 리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데 따르는 일은 체코 민족주의 운동의 단원과는 배치되는 일들이 요구되지만 디테는 그런 것엔 깊은, 명민한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고 디테의 행동은 독일을 위한 삶이 된다. 나치가 벌인 혈통주의 체코인들에겐 외면당하고 호텔에서는 쫓겨나지만 독일이 체코를 합병하면서 디테는 다시 행운의 삶이 되었다가 폭격에 리자를 잃는, 머리가 잘린 아내의 시신을 보는 일을 겪지만 디테는 살아남는다. 리자가 남긴 희소 우표로 백만장자가 되고 호텔을 인수해 유명해진다. 이런 행운과 불운의 반복된 삶 속에 마침내 그가 원하던 백만장자가 되지만, 다른 이들이 디테를 백만장자의 부류에 넣기를 꺼린다. 공산정권이 들어서며 백만장자들의 재산을 압수하고 수용소로 보내기 위해 소환장을 발부한다. 디테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디테는 백만장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기꺼이 수용소로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수용소에서는 디테를 아는 척하는 백만장자도 호텔 사장들도, 아무도 없다.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을 잃고 수용소에서 나온 노년의 디테는 산 속으로 들어간다. 자연과 동물들과 함께 하며 지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자신과 대화한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 띄거나 칭찬을 받는 일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았다. 그런 모든 건 내게서 사라졌다. 거의 한 달 내내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원래의 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뼈 빠지게 일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종종 나는 도로를 정비하는 일을 내 인생의 길을 정비하는 것과 비교해보았다. 인생을 돌아보니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인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의 인생 전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한 편의 소설이며 내 인생이란 책의 열쇠는 나 자신만이 갖고 있는 것이었다. 내 인생의 유일한 증인은 바로 자신이었다. 비록 내 인생이라는 길의 처음과 끝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을지라도 곡괭이와 삽 대신 기억의 도움을 빌려 아주 먼 과거까지 돌아갈 수 있게 정비해놓고, 기억하고 싶은 곳으로 돌아가 회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국왕을 모셨던 최고급 호텔 파리의 지배인에게 배워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신 자그마한 체구의 디테가 회상하는 자신의 삶은 어디에 방점이 있을까. 백만장자의 꿈을 쫓아 전진하던 소년 디테, 독일인 아내를 만나 사랑하며 나치의 점령속에 살았던 청년의 디테, 공산정권에 의해 수용소에서 살아야 했던 중년의 디테. 체코의 파란만장한 현대사에 휩쓸려 살았던 디테의 삶에서 “영국왕을 모셨지”라는 말을 내뱉을 수 있던 때는 역시, 운명을 수용하는 노년의 삶에서 가장 잘 어울린다. 늘 작았던 자신을 더 커 보이게 애쓰지도 않으며 호텔을 갖고 싶어하던 욕망도 디테에게선 사라졌다. 그의 삶에서의 불행에 기뻐하며 운명을 수용하는 태도는, 그가 지나온 삶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배인의 “영국왕을 모셨지”가 약간 뻐김의 느낌이 가득하다면 노년의 디테의 “영국왕을 모셨지”는 자조가 가득하게 느껴진다. 자본주의와 나치즘과 공산주의 사회에서 디테가 느낀 삶의 태도와 방향은 전면 수정되었다. 앞으로 남은 생애, 마주할 자신과의 이야기에서 디테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갈까.

   시대에 휩쓸렸다는 말은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무책임해질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503, 박근혜 변호인단이 모두 사퇴한 날, “영국왕을 모셨지”를 말하는 지배인의 표정과 얼굴을 생각했다. 이들은 되돌아볼 어느 날 자신의 삶에 “공주를 모셨지”라며 어깨를 치켜올리며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을까. 시대의 흐름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 시대가 합의한 헌법질서를 파괴하고 합법적 절차에 의해 탄핵된 것에 대해 막무가내 땡깡으로 비호하며 제 욕망을 위해 상식과 정의를 무시하며 살고 있는 것에 대해 만족감을 느낄까. 어떤 행운을 기대하기에, 그와 같은 몰상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도 역사에 무책임해도 살아감에 양심의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의 “공주를 모셨지”가 너무나 오래도록 그들 권력과 욕망을 채워주었기에 여전히 “공주를 모셨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여전히 “공주를 모셨지”로 세상을 살고 있는 이들로 인해, 생의 마지막 날에도 그러고 있을 것 같다. 영원히 자신을 공주의 노예, 심부름꾼으로 자처하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디테의 회고가 참 다르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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