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자존감
영초언니, 서명숙, 문학동네, 2017-05-18.
영초언니에 관한 이야기인줄 알았다. 실존 인물 천영초의 생애가 담겨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저자의 이야기가 서사의 중심이었고 비중이 높았다. 짧은 등장에도 천영초라는 인물이 저자의 생애를 오롯이 관통한 중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천영초라는 인물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들, 감정들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소설이라 생각한다면 가장 궁금한 사람이자 주요 인물이 천영초일 것이다. 천영초는 그런 캐릭일 듯했다. 실존인물들의 이름이 열거될 때마다 소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고 그 시대의 등장인물들의 현재의 모습이 각기 다르게 놓여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멀찍이 보는 사람이 이런데 당사자들은 오죽하랴.
제주도의 올레길을 만든 사람으로 먼저 알게 된 서명숙 이사장이 자신의 과거를 풀어놓는다. 그 과거속에 함께 있던 사람들을 풀어놓는다. 천영초라는 인물이 그때를 어떻게 살았고 지금 어떻게 살았는지는 단편적으로 드러나지만 현재의 모습이 맑음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느끼게 되는 비애가 크다. 한줄로 말한다면 제주도에서 태어나 자란 서명숙이 뭍으로 넘어와 대학생이 되어 박정희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행동한 이야기다. 소설이나 다큐에서 다루 보았던 그 시대 ‘운동권’이라 불리는 대학생의 모습들이 드러난다. 유신정권이라는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제 성질을 휘둘렀던 독재자가 그 시대를 얼마나 개판으로 만들었으며 여전히 치워놓지 않은 개판이 곳곳에 박제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서명숙 이사장을 비롯해 영초언니와 그가 함께 한 가라열의 활동은 독재에 맞선 운동에서도 남성의 주변부, 보조자로서 한정된 여성이 아니라 운동가로서의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천영초이다. 서명숙 이사장은 천영초는 ‘운동권의 전설’이라 불리는 사람이라 말한다. 하지만 머릿속에 운동권 여성이라 하면 각인되는 모습과는 다른 이미지를 천영초는 풍긴다. 외모상으로도 상당히 부드럽고 여리여리하며 빈곤한 모습이 아니다. 70년대, 80년대 폭압에 맞서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위해 삶을 살아가고 그것을 위해 활동한 천영초는 자신들을 따르는 후배들을 물심양면으로 챙기며 운동의 리더로서 거침없다. 당연한듯 빨갱이로 낙인찍히고 쫓기고 잡히고 고문당하고 수감된 이력의 소유자들.
그시대 운동권으로 민주화를 부르짖고 외쳤던 그들이 이룩한 자유와 민주의 시대는 잠깐 반짝인듯했으나 전혀 그러하지 못했다. 그들의 희생과 노력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이 현실이 얼마나 아프게 다가오는지 모른다. 익히 아는 대로 민주화 운동을 하던 그들의 현실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시민운동을 하거나 정치인이 되거나, 그 기억들을 안고서 버티지 못하여 스러져가거나.
어떤 이들은 그때의 민주화를 외치던 몸과 마음으로 다른 민주화를 말하고 있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는 멋들어짐과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보다 많은 이들이 천영초의 삶처럼 생활의 변화를 겪고 있으리라 보인다. 경제적인 궁핍과 정신적인 공황을 가득 안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사회변화를 위해 그들이 쫓던 이상이 현실에 적용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살이는 어떠했을까. 전력질주를 한 후 골인지점을 통과한 후 급격한 피로감이 생기듯 그들이 질주해온 운동의 결과가 바라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볼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할 그들의 역할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독재 시절의 운동권이었던 이들의 현실 적응이 전화가 핸드폰으로 바뀌는 변화보다도 더 적응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운동권의 전설로 수많은 후배들을 아우르며 제 신념을 온갖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지켜간 사람의 모습이, 사회변화를 외치던 목소리로 독재타도를 외치던 목소리로 다단계 상품의 탁월함을 말하는 목소리로 바뀌는 그 간극이 왜 이리 아득한지. 젊은 날을 지배했던 신념, 그것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운동하고 투쟁했지만 천영초는 한 인간의 삶으로는 ‘불행’이라고 불릴만큼의 일들과 맞닥뜨린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생활고, 이혼과 이민, 목숨을 잃을 교통사고, 그로 인한 시력상실과 뇌손상. 유독 천영초의 생애는 비애로 일관된 듯하다.
가장 행복했던 천영초의 시절은 투쟁하던 그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기억을 잃은 채 마른 몸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천영초의 모습을 생각하면 책의 저자 서명숙이 국정농단 최순실이 재판을 받으러 가며 “여기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닙니다”라 소리친 것에 분노를 느꼈다는 심정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그시절 가라열 멤버이자 꾸준히 사회변혁 운동을 해온 혜자 언니 또한 독재자의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되는 순간 비참한 심경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잃어 가며 독재에 항거했건만 그 독재정권을 추억하며 향수하는 것에 모욕과 조롱받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 심정 역시 너무도 절절하게 와 닿는다. 그 결과가 이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지를 겪고 있는 지금 더더욱. 나또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기분에 휩싸인다. 이 결과를 두고도 여전히 상식도 정의도 없이 행동하는 이들로 인해 속이 파닥파닥해진다. 터져 나오는 뉴스는 모두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싶은 것임에도 진저리쳐지는데, 그것은 박정희 시대를 겪고도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되는 현실이 또다시 반복될 듯한 두려움, 기대가 희망적이지 않게 느껴짐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태극기를 흔드는 1%가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평생 나에 대한 자존감을 갖고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는 저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답답해져, 행동을 취하는 일이 더뎌진다.
한명의 박정희와 한명의 박정희 딸이 만든 수많은 영초언니들의 삶이 지금 재판을 지켜보고 있을 터이다. 그들이 또다시 조롱과 모욕을 당하는 느낌이 들지 않기를.
나는 그날, 학내에 상주하며 학생들을 이간질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했던 경찰초소를 내 손으로 때려부순 날, 역사와 대중 앞에 스스로 떳떳해졌다. 이후 평생 나에 대한 자존감을 갖게 되었으므로, 이미 충분히, 평생 넘칠 만큼 보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나는 그 어떤 형태의 보상도, 인정도 더는 필요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나라 정부와 사법부는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나와 같은 이를 ‘죄인’으로 낙인찍은 선고와 판결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만 하며 그에 대해 정당한 조치를 하고 역사를 바로잡아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나의 유죄 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는 근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