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체감하다


이브 - 신은 혼자서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윌리엄 폴 영, 세계사,2017-03-02.



 이 책은 나의 한계를 분명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책 표지는 동화같고 따스한 느낌이었다. 빨간 사과 표지도 눈에 띄었다. 이브. 어쩌면 가늠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윌리엄 폴 영이라는 작가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 작가의 책 『오두막』이 100쇄를 넘어갔다는 광고 문구, 수많은 나라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읽은 책의 작가의 신작으로 역시나 수없이 읽히고 있다는 문구에 그렇다면 너도 그 이유에 푹 빠져도 괜찮지 않겠니라는 생각에 보이는 걸 집어 들었는데….

  책을 덮을까 고민하는 순간 나의 편견은 확정이 되어 버렸다. 『오두막』의 내용까지도 가늠이 될, 수천만의 독자가 왜 생겼는지를 단박에 알아버린 기분이었다. 서류상으로 따지고 보면 무신론자지만 딱히 무신론자라고 하기에는 그때그때 필요한 신을 불러들이는 만큼 열정적인 신앙인이 아니다라고나 할까. 종교 서적을 못 읽어내진 않는데 성경도 자알 읽었고. 이 ‘소설’을 유독 경직된 감정으로만 느끼고 있는 것은 역시 기독교에 대한 편견인 걸까. 『오두막』까지도 초반 이후엔 팔짱을 끼고 읽었다는 점에서 이런 종류의 글이 내 사고와 감정을 분명 흥미있게 자극하고 있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판타지 같은 느낌으로 소설을 전개하고 있지만 소설은 익숙한 창세기의 내용을 작가가 재해석하여 들려주는 성경말씀 같았다. 뒤늦게 종교적인 생각을 빼고 보려 했지만 이미 물든 마음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신은 혼자서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부제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작가는 성경을 통해 고착화된 ‘이브’에 대한 새로운 전복,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한다고 하는데 딱히, 전복적인 새 이미지인지는 모르겠다. 또한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신체가 심하게 훼손되고 망가진, 또한 그만큼 정신 또한 망가진 소녀가 몸과 마음이 회복되어가는,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이라고 짤막하게 줄거리가 요약될 수 있겠다. 이 소녀가 온 몸이 부스러진 상태에서 치유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선택받았다’는 이유다. 왜 그녀만이 선택받아야 했는지는 모르겠다. 인류 태초의 증인이라는 역을 부여받았기에 그렇다는데,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면 사실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을 텐데도, 나의 무지와 편견이 ‘태초의 증인’이라는 이 역할에 대한 계속된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러니까 사실 단순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메시지를 정확히 아는 책에 대고 그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아가 그 메시지도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그렇게 이 책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인 대전제를 쉽게 수용하고 글을 읽으면 편하게 읽히고 감동의 감정을 가질지 모르겠다. 이미 실패한 나는 망신창이가 되어 모습을 드러낸 릴리의 모습일 지 모르겠다. 누군가 나를 태초의 증인으로 보호하고 보살피고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보여주면’ 내 심연에서부터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될까.   


   “이 빛을 완전히 직면하면서 동시에 어둠을 볼 수 있어?”

   “전혀요. 어둠이 전혀 없어요.”

   “정확해. 그럼 다른 질문. 어둠이나 그림자는 어떻게 생겨날까?”

   “뭔가에 가로막혀서?”

   “맞아. 가로막을 사람이나 물건이 전혀 없다면?”

   “바로 그거야.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어. 전혀! 빛이신 하나님은 창조된 전 우주를 포용하시지. 아담은 하나님에게 얼굴을 돌리면서 그림자를, 바로 자신의 그림자를 남겼어. 그리고 아담은 자신만의 지배영역을 만들었고 뱀과 피조물들을 자신의 그림자로 끌어당겼어.”

  

 하나님은 빛은 만들었지만 어둠은 만들지 않았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했다는 설명을 하는 대목이 있다. 이 책 전체에서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왔다.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하나님의 창조 얘기를 들은 적은 없다. 묘하게 설득되다가 여전히 논리적인 반박을 고민하는 나를 보면서 종교적 아니 정확히 기독교적일 수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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