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라의 재
프랭크 매코트 지음, 김루시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슬픈 레모네이드


안젤라의 재, 프랭크 매코트, 문학동네, 2010..


  월식이 있었다. 옛 사람들은 재앙의 징조로 여기고 두려워했다. 달이 붉게 보이는 개기월식을 더욱 두려워했다. 달이 지구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인 줄 몰랐다. 갑자기 하늘에서 달이 사라졌다 생각했다. 과학이란 이런 맹목적이고 막연한 두려움을 ‘다소’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

  과학이 아무리 ‘그것은 이러이러하다’라고 해도 이미 싹틔운 믿음이나 두려움은 쉽게 바뀌지 않기도 했다. 이제 월식은 일부러 찾아보려는 핫한 아이템이거나 소망을 선사하는 ‘지니’, 불운을 암시하는 징크스 등 개인의 경험과 느낌이 결합한 상징이 되었다. 퓰리처상 수상작『안젤라의 재』속 미국으로 떠나는 작가와 가족들이 나누는 대화에서처럼 말이다.

 

오늘 이 시각에 월식이 있을 거라고 했어요.

우리는 모두 골목으로 나가 달이 둥그런 검을 그림자 뒤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다. 파 이모부가 말한다. 프랭키, 미국으로 떠나는 네게 아주 좋은 징조로구나.

애기 이모가 말한다. 아니에요. 이건 나쁜 징조라구요. 신문에서 읽었는데 월식은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거래요.

종말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종말이야. 이건 프랭키 매코트의 새 출발을 알리는 좋은 징조란 말이야. 이제 몇 년만 있으면 프랭키는 양키처럼 살이 통통하게 올라서 멋진 양복을 입고, 새하얀 이를 가진 예쁜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 돌아올 거야. 어디 두고 보라고.

 

  프랭크 매코트의 자전적 회고록 『안젤라의 재』는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내내 애잔함을 드리우는 이야기다. 마냥 청량하고 미학적 이미지로 꽉 찬 아일랜드가 오물처럼 지저분하고 검은, 회색빛으로 순식간에 덮이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그런 얘기 속 이 월식 장면은 참 아리게 다가왔다.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월식이 일어났다는 얘기에 월식을 바라보며 미래 소망의 징조를 갈구하던 이 가족들의 바람이 생각나는 것은.

 『안젤라의 재』를 줄거리로 요약하자면 1930년대~1950년대의 삶이란 전쟁과 대공황으로 인한 기근으로 온세계가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 그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부모세대들이 얘기하는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와 고스란히 닮아 있다. 아일랜드인 작가의 엄마 안젤라 시언은 미국에서 아일랜드계인이자 구IRA 말라키 매코트를 만나 결혼과 출산을 하고 다섯 아이를 낳는다. 그동안 가난은 지겹도록 붙어 있었고 말라키는 무능 더하기 술꾼의 면모를 발휘한다. 태어난지 몇 주 되지 않은 딸이 사망하자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가난과 굶주림으로 가족은 아일랜드로 귀향한다. 그곳의 삶 역시 나아질 것은 없다. 나아질 것 없다는 얘기는 가장 말라키의 태도 역시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일하기보다는 실업수당에 의존하고 그마저도 술로 탕진하는 말라키는 자신이 조국 아일랜드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고 다친 것만을 기억하고 부르짖는다.

  장남인 작가는 쌍둥이 동생과 또다른 동생의 연이은 죽음을 겪는다. 아이의 흔적을 보며 살아갈 수 없는 안젤라는 또다시 가족을 이끌고 이사를 가는데 그곳은 마을의 공동변소 옆이다. 매일을 역겨운 냄새와 생활하기에 질병마저 떠나지 않는 그곳에서 프랭크는 동생들과 성장해 간다. 아빠의 실업수당에 의지해 겨우 살아가지만 말라키는 결국 가족들에게 실업수당도 일을 해서 돈을 쥐어주지도 않은 채 사라져버리고 가족은 빈민구호를 받거나 구걸을 통해 생계를 겨우 이어간다. 그리고 프랭크는 열두살, 교육이 아니라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엄마와 어린 동생들을 보살핀다.

  작가는 가난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세세하게 묘사한다. 가난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보다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이 그 시절의 보편적인 그렇고 그런 ‘가난한 시절을 보낸 이야기’와 차별적인 것은 무얼까.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회고록이라는 데서 더욱 애잔한 감정을 느낀다는 점이 있다. 모든 이야기는 작가가 경험한 것이고 등장인물들은 실제 가족의 이름이자 실존인물이다. 이웃들 모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그 자체다. 그럼에도 묘하게 다른 느낌.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작가의 지난 얘기에 대한 현재형 서술에서 느껴지는 생생함과 슬픔의 절묘한 절제와 극대화,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의 삶을 엿보는 맛에 있다.

  아일랜드인은 8백년 동안의 시달림으로 영국에 대한 반감이 크고 차라리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으랴 생각한다. 깊게 박힌 민족주의 또한 가득하고 생각보다 불끈 불끈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기질이 있어 보인다. 카톨릭 사제들은 그들의 기본적인 존재이유를 잘 살리는 듯 보이지 않고, 가난한 이들 앞에선 벌컥벌컥 문을 닫아버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이 힘들고 가난한, 또한 지긋지긋한 삶을 작가는 잘 버티었고 질병으로 인한 몇 번의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희망의 땅이 된 미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때 그 삶속에서, 현재의 삶에서의 작가는 마냥 절망적이지 않은 시선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그저 어리다고만 한다면 ‘철없음’이란 꼬리표가 따라붙기 마련이다. 어려서라고 하기엔 독특한 아일랜드인의 유머코드가 있다. 작가는 그 시선들을 이 책속에 펼쳐놓아 힘들고 슬프고 애잔한 이 얘기를 거듭 이 유머의 끝으로 끌고 가 미소짓게 한다.

  책을 읽기 전에도 후에도 안젤라의 재가 의미하는 바가 뭘까 생각했다. 기독교에는 재를 이마에 바르고 죄를 고백하고 고난을 기억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 있다. 안젤라가 미국에서 말라키를 만나는 것에서 시작하니 작가의 어머니 안젤라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평균대를 균형잡듯 걸어가는 네명의 아이들 표지사진과 시작부터 벌써 많은 아이들을 낳은 안젤라를 보며 그리고 그 아이들을 잃고 미친듯 절규하는 안젤라를 보며 안젤라의 재가 ‘안젤라의 아이들’로 겹쳐졌다. 안젤라의 아이들. 그 시절이니까 더욱 더 그러했겠지만 이 땅에서 엄마의 역할이란 아이를 낳고 낳고 낳고 죽고 죽는 아이를 지켜보는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재의 수요일, 신앙심 깊은 안젤라는 어떤 죄를 고백할까.

  죽음의 문턱에서 레모네이드를 찾는 안젤라와 엄마에게 레모네이드를 먹이는 프랭크의 모습이 참 슬프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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