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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단의 방문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평점 :
더 쓸쓸한 미래의, 시간
깡패단의 방문, 제니퍼 이건, 문학동네.
깡패단. 몇 장을 읽은 후 음악에 대한 열정을 품으며 떼지어 모여 다니던 베니의 학창시절 친구 무리를 지칭하는 건가 생각했다. 그리하여 록을 사랑하는 음악적 동지들이 겪는 세월의 이야기가 전개되리란 예상했고, 이들의 삶이 생각보다 깡패처럼 흘러가진 않았군 하고 생각하며, 장편인가 단편모음인가를 헷갈려하며 어쨌든 책장을 넘겨가던 때.
시간은 깡패야. 그렇잖아?
그 깡패가 널 해코지하는데 가만있을 거야?
뒤늦은 깨달음처럼 떠올려지는 문장들은 그건 미래의 목소리였다. 13장의 이야기는 몇몇 인물들의 삶을 시간의 순서없이 보여주었다. 시작점을 기준으로 삼자면 현재 음악 회사에서 일하는 베니와 사샤의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의 이야기다. 그들의 인생에서 만나는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동료들의 삶 또한 독립적으로 펼쳐져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지고 다양해진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생애에 어떤 식으로든 만나게 되는 인연과 인생이 된다.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 현재를 살고 있는 그들은 모르게, 그들 삶을 이미 엿본 ‘누군가’가 그들의 뒷전에서 미래 삶의 모습을 전한다. 지금 이 순간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며 생각에 잠긴, 미래를 생각하며 무엇을 도모할까 준비중인 그들 앞에 불쑥 불쑥 그 목소리가 나타날 때마다 애잔해진다.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일까. 과거의 온갖 기억들은 갑자기 떠올려져도 그것들이 깡패처럼 갑자기 등장하고 방문해도 잠시 움찔하거나 깊은 회한에 잠기게 될 뿐인데, 그런데 그들 주위로 배회하는 “너는 나중에 이렇게 될 것이다” “할 것이다” 라는 그 목소리는 너무도 슬프게 들린다. 미래를 알고 싶어 예지몽을 꾸려 하고 점성술을 의지하는 인생치고는 “미래의 예언“과도 같은 목소리에 대한 달갑지 않은 반응이 되어 버리는 걸까. 꿈꾸는 미래가 아니어서, 그렇게 되어버린 삶의 과정이 너무도 궁금해서, 미리 알아버린 삶에 대해 허망해서……. 그렇게 누군가의 삶에 대해 덤덤히 말하는 그 목소리에 감사하지 못함은 어쩔 수 없다.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기억만큼이나 갑자기 알게 되는 미래는, 그것이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 때문에 나타날 것임에도 막연함으로 아프게 다가온다.
생각해보면 과거만큼이나 미래도 ‘유실물’이다. 습관적으로 사샤가 훔치는, 그래서 타인에게는 결국 유실물이 되어 버리는 물건처럼. 소유했을 지도 모를, 그렇게 되어버릴 지도 모를 미래가 과거와 현재와 또 가까운 미래의 ‘행동’, ‘무엇’ 때문에 변할지 모르니까. 운명이란 그렇게 작은 한순간의 일로도 쉽게 우리의 생을 다르게 흐르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음에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듯 훅훅 몰아치는 결정된 미래의 목소리가 그래서 그렇게 심상치 않게 다가왔던가.
그녀와 코즈는 힘을 합쳐 이미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를 써나가는 관계였다. 그녀는 괜찮아질 것이다. 더는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녀를 이끌어주었던 음악과, 처음 뉴욕에 왔을 때 만난 친구들로 이루어진 인맥과, 커다란 신문지에 휘갈겨 써서 당시 살던 아파트 벽에 붙여놓았던 일련의 목표들을 다시금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다.
우연히 마주치고 필연적으로 관계맺는 인간들의 세상살이가 결국은 정해진 이야기를 향해 흘러간다는 건, 슬프고 재미없는 일이다. 그래서 ‘정해진’ 운명이나 사주팔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데, 은근히 가까이 가서 귀기울이게 된다. 미쳐버릴 만큼의 궁금함을 안고서.어떤 경우엔 만족하고 어떤 때는 주눅들어 그렇게 되어 버릴 인생이라면 지금은 마음대로 살겠다는 듯이 방황하며, 어떤 때 “그딴 거에 신경 안 써” 외면하기도 하며. 그래도 인생의 어느쯤 정도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야, 내 인생은 끝났어.” 그러다가 또 문득 그 목소리에, 그 결정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외칠지도 모른다. “아니야, 끝나지 않았어!” 아직 남은 시간에 대고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난 바뀌고 있어요 난 바뀌고 있어요 난 바뀌고 있어요 난 바뀌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구원, 변모―맙소사, 그녀가 얼마나 절실하게 원하는 것들인가?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 우리 모두 마찬가지 아닌가?
이토록 시간으로 인해 갖는 인생에 대한 만족감과 패배감은 항상 당겨진 고무줄과 같아 보인다. 회한하고 기대하는 인생으로서의 시간. 늘 극과 극의 서사를 달리게 만드는 그것. 이 깡패같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작가의 흥미로운 이야기 방식에 힘입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록음악과 매치된 시간의 이야기는 더욱 리듬감있게 시간을 인식하게 한다. 시간이 비트를 달고 달려오는 느낌이다가도 한없이 느릿느릿 물러나는 느낌이다. 또한 작가가 만들어낸 등장인물들의 인생도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며 흥미롭게 전개되고 마치 아주 먼 시간 뒤에 문득 친구들의 인생의 날들에 관해 들은 것처럼 즐거움, 기쁨, 슬픔, 안타까움, 회한 등이 몰려드는 느낌을 받는다. 되돌릴 수 없음을 알아도 늘 되돌리고픈 시간을 두고서, 늘 끝이야, 끝이야 하면서 끝이 아니기를 바라는 시간을 두고서 펼쳐지는 인생.
쉼표가 나오면 노래가 끝날 거라고 생각하게 돼. 그랬다가 사실은 노래가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알면 마음이 놓이지. 그렇다 한들 노래는 곧 진짜로 끝나버려. 모든 노래엔 절대적인 끝이 있어. 바로 그거야. 시간. 끝.이.라.는.게.정.말.존.재.한.다.는.것.